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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편년체에 대한 각주 외 2편
홍인숙
홈쇼핑 채널 돌리다, 덤벙
신혼살림에나 어울림직한 아이보리색 주물 냄비를 들인 건
아무래도 넓혀간 집 구색에 맞추려는 것이었다
이중 안전 뚜껑이 제값은 치러주리라 믿고 내놓은
잘 닦이지 않던 냄비 몇 개
싱크대 깊숙이 밀어둔 엄마의 그릇들
살림날 때 버린다던 결심도 함께 삭고 있다
오랜 묵독 끝에 정본을 세우자는 것인데
화들짝, 헌 바닥에다 소용을 달고 있다니
문득 거울 앞에 눈꼬리 처져 웃고 있는 여자
아버지의 술 취한 무용담을 받아 적느라
자주자주 하얗게 지새우던 날
시퍼런 새벽을 문틈으로 찔러 넣을 때면
밤새 비명과 함께 사라진 양은냄비가 돌아오곤 했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투둑 툭
구겨진 바닥을 펴는 아버지 웅크린 등 너머
덜그럭대는 연장통 속에 누렇게 뜬 아침 해가 부서졌다
바람의 미망을 필사하던 아버지는
끝끝내 엄마의 각주를 달고 북쪽 하늘로 돌아갔다
한때 녹슨 문을 밀치며
당신과는 다르게 살리라 돌아선 적 있다
새로운 독본을 쓰는 동안
몇 개의 본문처럼 아이들이 자라났다
쌓인 켜에 바람이 들자
일제히 와글거리는 낡은 그릇들
이윽한 시간 틈 사이 담아 제자리 앉혀두자
나도 누군가 한 생의 각주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달의 틈새
후드득 일몰이 지고 있다
어둠을 머금은 창문들이 희부연 불빛을 토해낸다
멀리 달이 떠올랐다
한사코 가려워지는 몸의 반란에 뒤척인 날이면
아랫배 그득 채워지던 허공의 울음
눈썹을 파르르 흔들고 지나갔다
가만히 손 내민다
피부를 뚫고 날개가 돋으려나 보다
가만가만 어둠이 몰려오자 환해지는 기억이 이토록 사무치니,
몇 번인가의 인공수정 끝에
생은
흑점 사이로 무례히 지나갔다
텅 빈 달에 입김을 서린 채
이젠 물을 들여다보지 않겠어
주사 바늘로 찌른 생의 이력을 다시는 쓰지 않겠어, 라고 써본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는 저녁엔 물고기를 굽고
음악을 틀고 발가락을 닦아 줄 거야
오래오래 어루만져 줄 거야, 라고도 썼다
문득 막막한 눈이 투명해지자
달의 틈새가 어긋나고 있었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저녁 무렵에
선인장
한 달째 전화선을 뽑아두고 지냈다는데, 뒤늦은 안부에 저간의 사정들이 이제야 봇물 터진 것인데, 화근은 더 오래된 과부댁 사촌 올케 화투장 뗄 때마다 은근슬쩍 한 장씩 붙여나간 말본새 탓이라는데, 늘그막에 영감이라니 쉬쉬 실룩이는 입시울마다 뚝뚝 떨어지는 말복 타령에 화채그릇 꽤나 비웠다는군, 인공관절 삐걱거리는 통증보다 더 못할 노릇은 수런수런 압점을 파고드는 눈치들이라고, 엄마, 인간은 파충류의 뇌에서 이야기를 만들며 진화해 왔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기억력도 향상한다잖아 쿡쿡, 어딜 가도 과묵하게 살라는 말 틀린 건 아니지만 참는다고 다 꽃이 되는 건 아니라대, 증세에 따라 안개도 되고 바람이 되기도 한다던데, 몸피를 줄이고야 훨훨 나는 새처럼 한 계절에 잉태하는 이야기는 천간에 날려 보내는 거래, 자식 셋 포르르 떠나간 낡은 삽짝 밀치면 아직도 가시 찔린 눈물 뚝뚝 떨어지는 빈방, 상채기 떨어져 나간 자리에 새살 돋듯 선인장 한 잎 봉긋이 차오르는 것 좀 봐, 저 더디온 접물(接物)이라니!
<신작시>
먼 길 홀로 떠난 미인 외 2편
-시인보다 더 시적인 삶을 살다간 언숙 언니에게
홍인숙
거짓말처럼 병이 든 여자
아름다움에 매료된 운명 때문에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병증이 깊어졌는데
내가 시인인 것이 단 한 번 부러웠다는 고백
그녀는 홀로 좁다란 산길을 걷고 걷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남도의 청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파랑새를 본다 그리고 소록도 문둥병자의 울음을 본다 한하운 시인이 그렇게 갈망했던 자유로움, 죽어서 파랑새 되어 봄빛으로 물든 산 너머로 한없이, 끝없이 날아가고 싶었던 한하운 시인 손가락 마디마디 떨어져 가는 고통스러운 삶 이 생을 스스로 끊어내고 싶었을까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내게서 시작되는데 대학교 소록도 봉사 활동 시절 자그마한 성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나병 환자들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의 의미를 나도 알 것만 같은데, 이 생의 슬픔을 끝내고 아픔 없는 행복을 바랐을 그 절규가 들릴 것만 같은데, 오늘 처음으로 내 얘기를 그대에게 보내봅니다.”*
달그락 창문에 비바람 긋고 간다
번개처럼 사라진 뒷모습 따라가는데
긴 그림자 물큰 박힌 하늘에 다다르지 못한 노래 흩어지고
나는 젖은 무릎 붉은 신호등 걸린 십자로에서 오래오래 품고 있다가
닿을 수 없는 곳 가장 먼저 당도할 말들 깨알처럼 적어보다가
어느새 지워진 얼굴 높은 음역의 목소리
먼 경계 하얗게 일어나는 바람을 본다
마디마디 마른 뼈들 춤추는 골짜기
*2020년 3월 3일에 보내온 문자 전문. 언니는 7월 12일 안식에 들었다.
그날의 대담
매겨진 무거운 세금에서 벗어나려던 건 아니었나요? 부양할 홀어머니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 있던 건 혁명에의 의지였나요? 일순간 고깃배를 내버릴 만큼 새로운 세상을 확신했나요?
이곳 갈릴리 날마다 뱃전에 올라 쏘는 태양과 소금 바닷속 하루를 건지는 어부였소 텅 빈 그물 빠져나가는 물살뿐일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간절한 손길 또 다른 아침마다 광풍 부는 바다를 헤집었다오 저물녘 해진 그물 둘러메고 돌아오지만 매 순간 전복을 꿈꾸는 겉옷 한 벌 잃지 않고 살아왔소 서로를 닮은 얼굴만으로 견디어내던 우리에게 당도한 세금은 평등하지 못했소 빈 배에 매겨진 조세는 부당했다오 우린 모두 어디에 가닿든 활활 타오를 불길이었소 저마다 한 자루 파도의 칼날 가슴에 벼린 채 발밑의 어둠 지나기만 기다렸소 그날 배를 박찬 건 빛으로 옮겨 갔다는 말, 단 하나의 이름으로 나를 부른 이, 그건 벼락처럼 마주친 운명의 말이었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란 말 찢어질 듯한 풍랑 앞에 흔들리는 검은 바다 두려운 너울 속에서도 물 위를 걷는 사람 숭고한 혁명은 이미 시작된 것이라오 낡은 겉옷과 한 척의 배는 이미 아름다운 항구에 만선의 깃발 나부끼는 것이었소
만둣가게 소문
고려가요 옛노래 불러보는 악보
쌍화점에 쌍화 사러 간다더니 그 손목을 쥐더라나 어쩌라나
시시콜콜 뒷소문 들며 날며 화르르
입술 비죽거리다 후렴구에서 멈칫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호리라 이 말씀이 소문나면 쉬잇 쉿
천년이 지나도 쉬잇 쉿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알고리즘이 불러오는 로고스의 평화가 가득하길 바라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려 평화로운 세상이라’*
들며 날며 그 소리 채워졌으면,
수천 년이 지나도 쉬잇 쉿
작정한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겠지만
습관처럼 뉴스 창을 탐색하는 남루한 호기심
가장 수치스런 죽음은 나무에 매달린 주검이라는데
변명할 수 없는 붉은 피 쏟아진 사이버 법정
스스로의 수치를 허락하는 숲길의 나무에 옹이 하나 박혔다
나무의 조용한 지혜는 그 안에 초록, 오래오래 새겨두는 것이었다
*이사야 11장 6절
<에스프리>
‘주머니 속의 봄’에서 싹튼 시의 뿌리
홍인숙
무심코 글을 읽다 단어 하나가 불쑥 일어나 마음을 쿡, 찌를 때가 있다. 우연히 듣던 노래 한 구절에서 수많은 감정의 다발이 풀려 나올 때가 있다. 부유하는 생각의 끄트머리에 붙들려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다. 문득문득 알 수 없는 애잔한 감정이 밀려들 때 나는 끝없이 계속되는 먼지의 길을 헤쳐 간다. 타박타박 걷는 소녀가 보인다. 발밑에 작은 돌들, 풀잎들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잠시 한눈을 팔기도 한다. 멀리 버스가 보인다.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는 버스도 곧 지나갈 것이다. 계속 걷기로 한다. 꽃잎 흐드러진 늦여름이 꺾이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잎과 흙먼지에 나뒹구는 바람의 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아카시아잎을 똑똑 떼며 애인 점을 치는 여학생들 뽀얀 목덜미 뒤로 부끄러운 계절이 농익는다. 한 소녀는 안전한 교실로 돌아갔고, 한 소녀는 플라타너스 훌쩍 높다란 가지 끝에 마음을 달아 놓는다. 펄럭이는 치맛자락이 아스라하게 소실점으로 사라져간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어디에 꽃피고 있는 걸까. 영원히 그 자리에 맴돌 것 같던 소용돌이 하늘은 여전히 짙푸르다.
잠깐의 적막이 감도는 교실 풍경, 선생님은 재차 다른 답을 찾아 뒷짐을 지셨다. “소년은 왜 호주머니 속에도 봄이 왔다고 했을까?” 입술만 달싹거리며 차마 손을 들지 못하던 심약한 소녀는 다른 친구들이 말하지 못한 봄을 찾아주었다. 더는 추위에 손이 시리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봄이 주는 해방, 주인공처럼 그것은 내게도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즈음 전학 온 학교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더는 이방인으로 남지 않게 해준 ‘봄’의 해석이었다. 글의 무늬를 찾아 아름다움의 세상을 탐색할 수 있는 새로운 땅, 가난 따위는 잠시 이길 수 있는 몰입의 세계, 시의 싹은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문장의 틈새를 발견하는 즐거움, 새로운 해독의 자유로움, 내 마음의 슬픔을 대신 말해주는 비밀의 언어들, 그 내밀한 기쁨 속에 처음으로 함께 한 선배 시인은 바로 소월이었다. 어린이날 백일장 상품으로 받게 된 소월 시집, 겨우 열두어 살의 내게 알 수 없는 생의 슬픔을 각인시켜준 “진달래꽃”과 “초혼” 그리고 “개여울”의 노래, 하지만 그 아름다운 말들의 떨림에 대해 누구와도 언어의 교감을 나누지 못한 채 나의 소년기는 또 다른 갈증으로 목마르게 지나갔다. 그때 그 교실에서 잔망스러울 만큼 처연한 어조로 진달래꽃을 암송하던 어린 심연에는 무슨 원색의 슬픔이 도사리고 있었던 걸까?
나의 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문장과 씨름하며 내 안의 독을 퍼 올려 다시 부어버린 우물 속에서 왔다. 제 얼굴 들여다보려다 시커먼 허공에서 올라오는 깊은 메아리에 제풀에 놀라 달아나버린 긴 시간 동안 시는 우물에 갇혀 있었나 보다. 바람 부는 언덕으로,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새벽이슬에 젖은 철로 길에서 밤새 비를 맞으며 역사를 했다는 한 사람을 오래 생각했다. 올망졸망 교회당 좁은 방안에서 각자의 시를 찾아 서로를 치열하게 비평하던 제복의 그네들을 오래 품고 있었다. 보들레르와 발레리라는 낯선 서양 이름을 처음 일러주던 검은 눈망울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자리에 수줍게 끼어들어 몇 번의 합평회를 하던 늦은 저녁, 하늘에 총총 빛나던 잔별들 소박한 간식과 설레던 배웅, 그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다시 선명해진다. 그들과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길을 갔지만 지금도 오랜 유전처럼 내 피를 뜨겁게 돌게 하는 나의 처음 뿌려진 시의 조각들, 어떤 기억은 세상의 모든 진흙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진주 같은 존재로 가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시 쓰기가 아니라 소설 읽기였다. 소설 속의 세상은 피난처였다. 인간의 근원적인 모순과 고통, 살아내기 위한 악의 필연적 선택, 욕망의 분화구 같은 본능의 발산과 암울한 생의 구도 등등 적나라하게 인간을 해부하는 소설의 세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나의 삶처럼 때로는 암담하기도, 때로는 상상의 탈주를 꿈꾸게도 하는 해방구였다. 어떤 인생이든 종말을 판단하게 인도하는 소설의 결말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쓰린 감정을 동시에 던져주며 세상을 향한 분노를 이해하게 만드는 출구가 되어주곤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는 별똥처럼 꼬리를 물고 사라져갔다. 삶은 문학과는 멀어져만 갔고, 시를 좋아하던 한때의 감수성은 너무나 쉽게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거품처럼 스러져버렸다. 아주 오래도록 내 일기장을 채워준 건 독백의 파편이었을 뿐 제련되지 않은 언어는 자의식 과잉의 독설로 스스로 할퀴고 갈 뿐이었다. 나는 그때 울음으로 자라나는 손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나는 마음대로 떠났던 시를 찾았다. 슬픔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명랑하게 눈물을 닦아낼 만큼 나와 나를 마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는 반쯤 문을 열어주었다. 쏟아내고 싶은 말이 흘러넘쳤다. 밤새 눈을 맞추며, 누구와도 상관없이 살았던 수많은 갈림길과 진흙 길에 대해서, 담장 너머 손 뻗고 싶던 입술 타는 순간들에 대해, 선택적으로 선의 잣대를 옮겨버린 불온함에 대하여, 실패한 사랑과 그 집요한 기억의 행로에 대하여, 달빛 우물에 투신한 깊은 절망과 적막한 파문에 대하여, 밤새 시달린 악몽의 탈주에 대하여, 온몸 흠뻑 얽어진 육체의 미묘한 흐느낌에 대하여, 토악질 나도록 참았던 그리움에 대하여, 빈껍데기뿐인 말의 상찬에 대하여, 침묵으로 돌아앉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볍고도 가벼운 혀의 무게에 대하여, 내내 끌어다 놓고 싶었던 의자에 대하여, 닳아버린 신발에 대하여, 한 계절이 고스란히 피고 지던 창밖의 거리와 얼굴이 지워진 친구와의 약속에 대하여, 뒤돌아선 말의 쓸쓸함에 대하여, 무엇보다 부끄러움에 대하여, 그러나 날이 깨면 머리맡엔 하얗게 비어 있는 빈 종이만 스산했다.
그렇게 멀리 돌아 내게 찾아온 시는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였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에서 “세상 같은 것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던 백석의 쓸쓸한 내면 풍경에 내 아버지의 가난한 호기로움이 겹쳐 보였던 건 아버지와의 긴 애증의 시간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어미 잃은 새끼 거미가 안쓰러워 보드라운 종이에 받혀 제 어미 있는 곳까지 찾아가기를 바란 「수라」에서 시인의 마음을 읽으며 나의 시가 가고자 하는 지향을 헤아려 보았다. 울음이 배어 나오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으며 오랜 시간 혼자 우는 날이 많았다. 울음이 가시고서야 겨우 한줄 한줄 내디딜 수 있었던 글쓰기, 자기가 쓴 시를 읽으며 혼자 감동해 울게 된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그렇다고, 노모에게 시를 들려줄 때마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하고 싶은 얘기를 글로 다 쓴다니?” 함께 눈시울 붉힌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고 싶다. 독자와 함께 울 수 있는 시이고 싶다. 시인은 “곡비” 같은 존재라는 걸 아주 어린 날부터 숙명처럼 품고 왔나 보다. 울음 끝에 한시름 놓이는 깊은 애도의 글쓰기, ‘주머니 속에 찾아온 봄’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보내줄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홍인숙
1961년 부평 출생,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2013년 시와소금으로 등단. 2019년 시집 딸꾹, 참고서 발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과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