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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성을 향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군대
제목:아덴 전도1 본문:행17:16-34
바울은 어려서 부터 아덴이라는 도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아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덴은 BC5세기 이래로 가장 중요한 도시국가였다. 심지어 그것이 로마제국에 합병되고 나서도, 그 도시는 당당히 지적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자유시가 되었다.
그 도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어받은 풍부한 철학적 전통과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그 도시가 세운 주목할 만한 업적을 자랑했다. 아덴은 로마제국의 지적중심지로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다.
베뢰아의 박해를 피해 도망한 곳이 바로 아덴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어떤 선교의 전략보다는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면서 아덴에 복음을 전하였다.
1. 거룩한 분노 -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였다.
바울의 아덴 관광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면서 아덴을 이리저리 돌아보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아덴, 어려서 동경했을 아덴에 와서 구경을 하였다. 아덴의 건물과 기념물들은 어느 도시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몇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아덴의 고대 성채인 아크로 폴리스 - 국가의 영광과 신들에 대한 숭배에 바쳐진 하나의 광대한 건축과 조각의 혼합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르테논신전이라는 웅장한 건물도 있습니다. 아니면 바울은 민주주의 유명한 당시의 정치가들과 철학자들의 토론을 듣기 위하여 집회광장에 갔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그 도시의 건축과 역사와 지혜에 대하여 매료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배웠던 헬라의 철학이나 사상이 그를 이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성에서 본 것은 도시의 아름다움도, 도시의 지혜를 본 것도 아니고 우상숭배였습니다. 그곳은 ‘우상으로 가득차 있다’ ‘우상들로 완전히 덮여 있다.’‘우상의 숲’이라고 불렸다. 크세노폰은 아덴을 하나의 거대한 제단, 하나의 거대한 재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느 풍지시인은 아덴에는 그 나라의 나머지 지역 전부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신들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수많은 신전들, 사당들, 신상들, 제단들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상의 번쩍이는 창끝은 64Km 떨어진 지역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외에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 상들, 주피터, 비너스, 머큐리, 바카스, 넵툰, 다이아나, 에스쿨레이피어스의 상들이 있었다. 온 헬라의 판테온(신전에 있는 신들)과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신상들은 너무나 아름다왔다. 그것들은 돌과 놋쇠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헬라의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조각가들에 의하여 우아하게 만들어 졌다.
여기에서 두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문화와 철학과 예술이 발달한 아테네에 우상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한다고 미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최고의 첨단과학이 발달했는데 우상과 미신이 판치고 있다고 합니다.
우상과 미신이라는 것은 결코 미개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모든 인류의 전유물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무식하게 표현을 하는 것뿐이고, 유식한 사람은 유식한 모양으로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두가지 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든지, 아니면 수 많은 잡신과 우상과 미신을 갖고 있든지 두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문화가 발달할 수록 우상을 정교하게 파고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우상과 미신이 판치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무당과 점쟁이들이 출연하여 미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우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삶의 방식을 따라 더 깊이 파고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바울은 아덴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우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철학과 인간의 이성의 눈으로 본다면 아덴의 아름다움은 볼만한 것입니다. 아니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듭난 후에 하나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의 아름다움과 지식의 풍성함이 보이지 않고, 우상만 보게 된 것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빨깧게 보입니다. 세상의 안경을 쓰고 바울이 아덴을 보았다면 그 아름다움에 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안경을 썻으니 그 성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고 우상만 보인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분노
바울은 아덴의 우상을 보고 “분했다”고 하였다. ‘자극하다’ ‘노하게 하다, 성나게 하다, 화를 돋구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신약에서 바울이 이말을 단 한번 쓰고 있는데 고린도 전서 13:5에 쓰이고 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바로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설교한 것을 아덴에서 실행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바울은 아덴이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노를 발하였다. 바울의 이런 모습을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다. 죄에 대한 분노, 우상에 대한 분노, 사탄에 대한 분노를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채찍을 들었던 것을 압니다. 바로 하나님을 위한 분노,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의 이런 분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후에 그들이 부올의 바알신과 관련하여 엄청난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를 범하였을 때, 그리고 북왕국이 사마리아에 예배하기 위하여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바울도 아덴의 우상숭배를 보고 노를 발한 것이다.
사 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인신 하나님은 우리의 독점적인 충성을 받기를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충성을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에 바친다면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로 인한 그분의 ‘질투’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엘리야는 온 나라 전체에서 배교가 행해지고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왕상 19:10)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인하여 매우 괴로워하였다.
바울의 분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발한 분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의 당연한 모습이다.
여러분 이런 거룩한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쓸데없는 분노를 잘합니다. 자녀 때문에 노하고, 남편때문에 노하고, 농사 때문에 노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말 노해야 할것에 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분한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귀가 역사 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가슴을 쳐 본적이 있습니까? 아덴이라는 곳에는 2만 5천개내지 3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상을 보면서 갖는 영적 분노, 죄를 보면서 갖는 영적 분노, 바울에게는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왜 이 땅에 죄가 없어지지 않는가? 그것은 죄를 보면서, 사탄의 역사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당하게 과학의 한 현상으로, 문화의 한 현상으로 그것을 해석하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이용합니다.
마귀가 그곳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노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을 노해야 합니다.
찬송을 하고 기쁨이 없는 것을 노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노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전파 -만나는 사람 마다 변론하니
우상숭배를 보고 바울의 두번째 반응은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바울은 그 성의 상황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저자에서 복음전파를 쉬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첫번째 대상인 회당 뿐만 아니라 길거리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증거하는 적극적인 열심을 보였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열십입니다. 뜨거운 열심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에비구레오는 에피쿠로스학파이고 스도이고는 스토아학파를 말합니다. 에비구레오는 쾌락이 인생의 주된 목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삶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자연신교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스도이고학파는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과 개개인의 자급자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범신론과 도덕주의를 주장하여 자신을 제어하고 고통을 참아나가는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대표적인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여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였고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말쟁이라고 했을까? 사실 철학자들이 말쟁이인데 그런 말을 들은 것은 바로 그가 전란 복음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전할 때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말했겠지요. 그들의 신관과 역사관에는 맞지 않습니다. 또 몸의 부활을 말했는데 그들에게 그런 철학은 없었어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세계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격렬히 논쟁을 한 것입니다.
복음과 철학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와도 전혀 다릅니다. 많은 철학과 종교가 기독교와 비슷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도 구원이 있고, 우리에게도 구원이 있다”“같이 선하게 살자는 것 아니냐?”“사랑을 말하지 않는냐?”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와 철학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어찌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겟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은 인간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철학과 다릅니다. 그것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알 수 없습니다. 구원은 철학이나 종교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릅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불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설교
아래오바고는 ‘화성의 언덕’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의 법정 또는 평의회로서 종교 도덕상의 문제와 바울과 같은 방문자들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의 재판자리에 선 것은 그 도시 지도자들 앞에서 그가 전하려는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듣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이 도시에서 전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덴 사람의 특징 두가지
① 행동을 하지 않는다.(21)
새로운 것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찾지 못하였기에 계속하여 다른 것을 찾는데만 혈안이 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든지 듣기만 하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듣기를 원하였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않았다.
아덴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의 모습과 흡사.
목회자들에게 항상 새로운 설교를 요구한다. 그러나 새로운 설교에 열매와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믿음에 역사와 열매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설교는 스타일 변경, (약간, 혹은 파격적인)
새로운 해석을 가미
좋은 예화를 쓴다.
그러나 설교의 내용은 변함이 없다. 구원, 헌신, 충성, 생명, 회개, 죄
결국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행함이 문제인 것이다.
② 종교성이 많다
종교성과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아덴 사람은 종교성이 많았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성이 많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종교성은 있는데 신앙인 없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적인 열심이 곧 신앙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