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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탁의 전반부(13-19장)
신탁의 전반부가 들려주는 다섯 개의 신탁은 다음과 같다.
① 바빌론에 관한 신탁(13,1-14,27 : 아시리아에 관한 짧은 신탁도 포함)
② 필리스티아에 관한 신탁(14,28-32)
③ 모압에 관한 신탁(15-16장)
④ 다마스쿠스에 관한 신탁과 에프라임, 에티오피아에 관한 예언(17-18장)
⑤ 이집트에 관한 신탁(19장)
여기에 등장하는 민족들이 보여주는 특징은 이러하다. 바빌론, 이와 함께 짧게 언급되는 아시리아(14,24-27)와 이집트(19,1-25)는 모두 고대 근동 지역의 강대국으로서 유다 왕국에 직접 영향을 끼친 민족들이다. 아울러 신탁의 대상이 되는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 동, 북, 남의 순서로 등장한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 서쪽(필리스티아), 동쪽(모압), 북쪽(다마스쿠스), 남쪽(에티오피아), 이러한 배열은, 신탁의 대상이 되는 민족이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으며, 정치•외교적으로 유다 왕국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주목할 점은 신탁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 짓는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20,1-6)가 신탁 전반부의 뒤쪽에 등장하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와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신탁의 전반부와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아울러 신탁은 심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신탁은 하느님 진노에 의한 멸망의 예고(13,5)에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약속(19,25)으로 마무리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처럼 신탁은 ‘심판의 예고’에서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넘어가는 역동적 움직임을 갖는다. 그러므로 신탁의 목적은 민족들을 향한 하느님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오는 구원을 알리는 데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3,1-14,27 바빌론에 관한 신탁
첫 신탁의 대상으로 바빌론이 언급된다. 신탁의 시작은 바빌론을 멸망시킬 하느님의 전사와 용사의 등장을 선포한다(13,2-5).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느님의 도구로 등장한다. 바빌론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소집하신 이 군사들은 누구일까? 신탁 본문은 그들이 메디아인 임을 밝힌다(13,17). 역사적으로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이 바빌론을 멸망시켰다(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향한 신탁에서 등장한 메디아인은 구약성경의 주요 본문에서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인들과 같은 민족으로 간주된다(에스 1,3.14.18-19 ; 10,2 ; 다니 8,20 참조). 이러한 관점이 이사야서에서도 발견되는데 하느님께서는 메디아인을 일으키는 모습처럼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를 일으키신다(41,2.25 ; 45,13 참조).
바빌론의 멸망은 세상의 모든 폭력적 권력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이어서 신탁이라는 표현 없이 아시리아의 멸망도 짧게 예고되면서914,24-27), 이 두 강대국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몰락했다는 사실이 신탁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즉,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도구였을 뿐이었는데도, 자신들이 신적 능력을 지녔다고 잘못 생각하였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를 심판하시는 이유이다.
▶ 바빌론 신탁의 의미
공시적 관점에서 바빌론은 아직 유다를 위협하지 않는다. 이사야서가 전해주는 연대기에 따르면 아하즈 임금의 통치 시기는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7장), 14,28은 아하즈 임금의 죽음을 보도한다. 아울러 제1이사야서의 마지막 장(39장)은 바빌론 사절단의 방문과 바빌론 유배를 예고한다. 그러므로 13-14장은, 바빌론이 아직 유다 왕국의 주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왜 민족들을 향한 신탁은, 1-39장에서 주적으로 등장하는 아시리아가 아닌 바빌론을 향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였을까? 바빌론에 관한 신탁에서 바빌론은 이미 적군이고 원수이며, 바빌론 임금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죽은 이들을 위해 부르는 애가가 그들을 향해 울려퍼지며 그들의 멸망이 예고된다. 특히, 아시리아가 보여준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들과 악한 폭군의 모습을 또한 바빌론의 특징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무튼 이사야서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빌론은 현재의 적이 아닌 미래의 적이다. 바빌론에 관한 신탁은 미래의 적을 현재의 적으로 등장시키고 현재의 적이 지닌 특징을 미래의 적에게 적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현재의 적인 아시리아(사르곤 2세)와 다가올 미래의 적 바빌론(네부카드네자르 : 14,3-4 참조)을 한눈에 보도록 돕는다. 이렇게 보면 왜 아시리아가 아닌, 바빌론에 관한 신탁이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이 이미 벌어진 이후에 기록된 예언을 사후(事後)예언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앞으로 다가올 일로 선포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바빌론에 관한 신탁은 전형적인 사후예언 형식으로 전개된다.
14,28-32 필리스티아를 향한 신탁
두 번째 신탁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필리스티아로 간주된다. 다만 바빌론에 대한 신탁(13,1)과 달리 14,28은 “아하즈 임금이 죽던 해에 이러한 신탁이 내렸다”는 구절로 시작하여, 그 대상이 명확하게 필리스티아를 지칭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비록 이어지는 구절이 필리스티아에 닥칠 일을 예고하지만(14,29-31), 신탁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온이 언급(14,32)된다는 점 때문에도 신탁의 대상을 특정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신탁의 주된 내용이 필리스티아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필리스티아를 향한 신탁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신탁의 주된 내용을 차지하는 필리스티아는 이스라엘의 주변국 가운데 하나로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다. 필리스티아를 억압하던 이들이 부서졌음이 선포되지만, 그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14,29). 왜냐하면, 새롭고 강한 적들이 북쪽에서 밀려오기 때문이다(14,31). 여기서 필리스티아를 억압하던 이들이 누구인지 그 신원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그들이 유다 혹은, 아시리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세력이 또다시 필리스티아를 위협할 것이라는 예고가 더 중요하게 강조된다. 필리스티아에 관한 신탁에 이어서 시온에 관한 진술이 이어진다. 시온은 하느님께서 세우신 도성이며 그분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피신처이다(14,32).
필리스티아와 시온에 관한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외세의 위협에 맞서는 데 동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억압의 세력은 민족과 나라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맹은 위협에 대응하는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7장 ; 8,1-10 ; 10,10-23 ; 20장 참조). 둘째, 시온 신학이 동맹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시온은 가련한 이들에게 올바른 피신처가 된다. 시온의 가련한 이들은 이사야서의 시작부터 함께 등장한 남은 자들이며, 하느님을 신뢰하는 ‘우리’로 대표되는 공동체이다. 이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을 의지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태로운 순간에 동맹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피난처를 찾는다. 그들의 모습은 필리스티아인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시온에서 참된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준비한다(24,23 참조). 셋째, 하느님의 보호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억압받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므로 필리스티아의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억압하는 지상의 폭군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통치 방식이 드러나고, 동시에 13-23장이 선포하는 신탁의 주제인 억압받는 이들과 억압하는 폭군의 대립이 폭로된다.
14,28에 “아하즈 임금이 죽던 해”라는 연대기가 소개된다. 이는 정확한 연대기를 제시한다는 의미보다 14,28 이하의 본문이 히즈키야 통치 시대에 속한다는 정보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필리스티아와 시온의 가난한 이를 향한 신탁은 동맹과 봉기를 통하여 위협 세력에 저항하는 필리스티아와, 산헤립의 공격에도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모습을 지닌 시온의 백성 히즈키야(36-37장)를 대비해 보여준다.
15-16장 모압을 향한 신탁
이제 모압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언급 없이,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모압의 멸망에 대한 신탁이 전개된다. 모압은 유배 이전부터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민족이 아니다. 사울은 모압과 싸웠고(1사무 14,47), 다윗은 모압을 정복하였다(2사무 12,29). 북 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이 모압의 북쪽을 다스리기도 하였다(2열왕 3,4-5).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모압도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시리아(티그랏 필에세르 3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모압을 향한 신탁은 두 개의 애도(15,1ㄴ-9 ; 16,6-12)와 그 사이에 놓인 모압을 위한 격려문(16,1-5), 그리고 모압 신탁의 맺음말(16,13-14)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애도(15,1ㄴ-9)는 모압의 주요 성읍들을 나열하면서 모압 땅 전체가 파멸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압의 생존자들은 시온의 남은 자들과 달리 짐승 사자(獅子)를 맞이하게 된다(15,9). 모압의 성읍이 이미 무너지고 모든 것이 파괴된 이후에 또 다른 재앙이 다가와 철저하게 멸망할 것이 예고된다. 두 번째 애도(16,6-12)는 모압의 멸망을 황폐해지는 포도밭에 비유한다. 이사야는 모압의 파괴에 대해 애통해하며 통곡한다(16,9-12). 모압의 멸망 앞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압을 향한 심판 예고와 상반되게, 두 개의 애도 본문 사이에 딸 시온을 향한 모압의 호소가 들려오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을 통해 유다가 재건된다는 약속이 선포된다(16,1-5). 구원의 장소 시온(16,5)과 멸망하게 될 모압(16,3-4)이 대비되는 가운데 유다 왕국은 이상적인 인물이 통치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고된다.
세 번째 신탁 본문은 모압의 멸망과 황폐화의 예고로 그치지 않는다. 이사야는 모압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를 애도하며 눈물을 흘린다(16,9). 모압의 멸망을 막을 수 없겠지만, 모압의 딸들은 시온을 향해 다가오며 호소한다. 비록 그들은 멸망하게 될 터이지만, 유다를 향한 모압의 호소는 이사야가 전해주는 시온 신학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곧 이상적인 통치자가 다윗의 왕좌에서 공정과 정의를 바탕으로 통치할 것이며, 시온으로부터 하느님의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17-18장 다마스쿠스를 향한 신탁(에티오피아)
선행하는 신탁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쪽(필리스티아)과 동쪽(모압)을 향하였다. 네 번째 신탁의 대상인 다마스쿠스는 북쪽에 위치한다. 이 신탁은 북 왕국 이스라엘도 신탁의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17,3). 신탁(마싸)의 표기가 사용되지 않지만, 에티오피아도 함께 등장한다. 에티오피아는 다마스쿠스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반대되는 남쪽에 위치한다. 남쪽을 향한 신탁은 19장의 이집트를 향한 신탁에서도 지속된다.
다마스쿠스를 향한 신탁은 시리아-에프라임 전쟁(기원전 734-732년:17,1-3)을 연상시킨다.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동맹이 남유다를 위협하는 내용은 제1편(1-12장)의 주제와 연결된다(7,1-9 ; 9,11 ; 10,9). 그러므로 다마스쿠스를 향한 신탁은 에프라임의 멸망도 함께 예고한다(17,3). 다마스쿠스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동맹은 실패한 동맹이며, 그로 인해 그들은 아시리아에게 멸망할 것이다(17,1-6). 두 민족에 대한 심판 신탁 이후 남은 자들은 우상이 아닌 하느님을 옳게 섬기게 될 것이 예고된다(17,7-8). 여기서 우상과 하느님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언급된다. 곧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며, 우상은 인간 손가락으로 만든 목상일 뿐이다. 하느님과 우상에 대한 논쟁은 40-48장에서 더욱 심도 있게 전개된다(40,19 ; 41,6-7 ; 44,9-17).
이어서 전개되는 우상숭배와 멸망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벌어지는 일로 여겨진다. 하느님을 잊고 기억하지 않은 결과는 멸망이며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17,9-11). 뒤이어 침략자들의 멸망에 관한 예고가 이어진다(17,12-14). 침략자들이 지닌 힘과 전횡은 고함소리와 함성, 바다와 큰물이 반복되는 가운데 드러난다. 하지만 하느님이 등장하시자 그들은 쫓겨난다(17,12-13). “아침이 되기 전에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17,14)는 표현은 산헤립의 침략(37,36)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와 동시에 침략하는 이들의 비윤리적 행위-“약탈”과 “노략”-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들이 받을 몫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이다.
18,1부터 에티오피아에 관한 말씀이 시작된다. 에티오피아는 히브리어로 쿠쉬(כושׁ)라고 표기되는데 본래 이 단어는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를 의미하며, 기원전 8세기 누비아 왕조의 통치 하에 있던 이집트를 지칭한다고 본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에 관한 말씀은 남쪽이라는 지리적 방향성과 이집트와 직접 연관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19장으로 이어지는 이집트를 향한 신탁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본문은 에티오피아를 향한 아시리아의 공격을 예고한다(18,3-6). 지금 13-23장에서 전개되는 신탁은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 전개되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티오피아가 받을 침략 역시 하느님의 주도권을 전제한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도 아시리아의 뛰어난 군사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말씀은 시온산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다. 필리스티아(14,32)와 모압(16,1-5)을 향한 신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에티오피아를 향한 신탁도 시온산을 향하며 그곳으로 주님께 드릴 선물을 보내게 된다(18,7). 여기서 다시 이사야 예언서의 중심지인 시온이 언급되고, 그 시온을 향해 오는 민족들에 대한 전망이 강조된다(2,1-5 ; 12,4-5 참조).
19,1-25 이집트를 향한 신탁
이집트를 향한 신탁은 운문(19,1-5)과 산문(19,16-25)의 두 형식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이집트의 멸망을 선포하는 심판을, 후반부는 이집트 구원의 예고를 다룬다. 운문의 첫 단락(19,1-4)은 전쟁 상황을 묘사한다. 여기서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는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 다만 본문이 전쟁과 관련된 이집트의 상황으로부터 유추하면 다음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 누비아 왕조에 의한 이집트 내전 상황(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위협(기원전 7세기)과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6세기). 이어서 이집트 멸망의 과정은 나일강의 오염과 그 결과에 따른 경제 상황의 악화로 확장된다(19,5-10). 외적 위협에 이어 이집트 내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 중심에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서 있다(19,11-15). 초안과 멤피스의 제후들, 파라오의 고문들과 현인들은 모두 어리석기 때문에 이집트는 멸망에 가까워진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혼란의 영을 보내셨기 때문에 가능해진다(19,14). 이로써 지상 통치자가 하느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음이 다시 언급된다.
산문 형식으로 구성된 구원 예고는 “그날에”를 다섯 번 언급하면서 구원의 전망을 제시한다(16,18.19-22.23.24-25절). 그날에 이집트와 유다의 충돌은 끝날 것이며(19,16-17), 이집트 땅에서 주님께 충성하는 성읍들이 생겨날 것이다(19,18). 이것은 실제 역사성을 지녔다고 보기보다 이집트에 생겨난 유다인들의 디아스포라를 지칭한다고 본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 일부 유다인들이 이집트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예레 42-44장 참조). 그날에 이집트에 제단이 마련되고 주님을 위한 기념 기둥이 세워지면서 제의의 중심지가 설 것이 예고된다(19,19-22).[주석 : 이와 관련하여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한 오니아스 대사제가 파라오로부터 기원전 160년 레온토폴리스에 유다인들의 성전을 건축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그러므로 19,19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 바라보고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후대의 사본들(칠십인역, 쿰란 문헌)이 성전의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19,19-25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서 쓰였다기보다 야훼 하느님의 전 세계적인 주권 선포라는 신학적 주제 안에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이집트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보호를 체험하며, 그분을 향할 것이다. 구원의 그림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함께 하느님께 예물을 드릴 것이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룬다(19,23). 이처럼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처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사야가 전망하는 미래의 모습으로, 이 주제는 제7편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56,1.8 ; 66,18-23). 그의 전망은 이집트가 하느님 백성이 되고, 아시리아는 하느님 손의 작품이 되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선언과 함께 마무리된다(19,24-25). 심판에서 구원으로 전개되는 이집트를 향한 신탁은, 불의하고 교만한 민족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후에 하느님을 알고 옳게 섬긴다면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품어주신다는 희망을 선포한다(2,1-5 ; 56,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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