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맞아 광주에서 매미님을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던 중, 지난 밀라노 출장 중에 경험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피곤에 절어 있는 퇴근길, 이유없는 환희로움이 온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그 기운이 내 몸밖으로 뚫고 나올 지경이 되었고, 이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으나 막상 언어로는 변환이 되질 못하고 의성어나 의태어로만 그 상태가 외부로 번져나올 수 있었는데, 그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궁궁을을(弓弓乙乙)이었다는 것. 옛 어른들이 궁을이라는 소리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는 이 경험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흘려 보냈다는 것.
그럼에도 이번 경험을 통해 한가지 챙겨두었던 지점은, 인간이라는 몸과 사람이라는 정신을, 다시 말해 '우리'라는 공업(共業)을 모태삼아 발현되는 경험인 한, 한 개인에게 있어 아무리 유니크한 경험으로 일견 비춰질지라도(나는 '궁을'이라는 소리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은 '개인의 경험'의 탄생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경험'에 참여/접속하는 개념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는(궁궁을을은 민족종교의 맥락에서 이미 유구한 역사를 담지하고 있다), 일종의 몸철학적 관점에서 일련의 경험을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담박한 사실에의 복기. 그러니 그 무슨 경험이 오고가든, 별스럽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울타리>에서 늘 들어왔던 이야기의 반복. 그리고, 며칠 전 일본행 비행기에서 보게 된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감상도 더해져,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나고 매 순간 새로이 죽는 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신통이 또 어디있겠느냐는 잔잔한 찬탄.
매미님과의 이야기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시간이 쏜살과 같이 흘러, 아쉬운 마음 가득히 헤어져 눈 떠보니 다시 서울이다. 내일부터는 사무실에서 돈돈돈 하며 남을 괴롭히거나 남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 밀라노의 궁을가와 일본의 퍼펙트 데이즈는 어느새 저만치 쭈그러들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일상의 신비 운운하던 며칠 전이 수십년 전만 같다. 사무실살이를 떠올리니, 지난 일주일 동안 일하지도 않았건만 어느 새 몸살기운처럼 피로가 엄습한다.
그럼에도, 털리고 털리고 또 털려도, 어찌 되어지지 않을 무엇이 있음을 알기에, 엉거주춤 나는 다시 '생활'로 나선다.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와 같은 성불의 미소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 내 나름의 찡그린 얼굴로, 일상을 환대한다. 빼앗거나 빼앗기는 것과는 무관한 세상이 있음을 확연히 알고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이 찡그림마저도 나름의 숨구멍이 있다. 그러니 찡그려도 괜찮다. 맹꽁이처럼 눈감은 채 징징거려도 저 멀리서 이정표 역할을 해주듯 시원스레 응수해줄 도반이 있기에 이 징징거림에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니 징징거려도 괜찮다.
신비신통을 모른 체 하며 절룩걸음으로 일상을 관통하며, 이렇게 기나긴 여름이 간다.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으나, 모든 것이 또한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