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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광군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법경헌
2. 마라난타(摩羅難陀)의 기착지가 된 조아머리(左牛頭)
▲ 도래지 조성 전 조아머리 당시 이곳의 모습은 폐촌에 가까웠습니다.
가. 좌우두(左牛頭)와 조아머리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에는 반드시 내력이 있습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 들어 선 [조아머리] 마을도 나름대로 마을의 내력을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을 우리고장 사람들은 행정지명인 [좌우두(左牛頭)]라는 마을이름 대신 그저 [조아머리]라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고장 사람들에게 [좌우두(左牛頭)]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하고 물으면 처음에는 대부분 어리둥절하다가 한참 후에야 “아! [조아머리]요...”하면서 가는 길을 알려 줍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를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름답고 민가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라 하였고 많은 시인 묵객들은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를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비견하여 수중와우(水中臥牛) 모양의 소동정(小洞庭)이라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26년 까지 일본사람들이 우리고장 여기저기에 대단위 간척공사를 벌려 여러 곳에 제방이 쌓이면서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가 소동정(小洞庭)의 아름다움을 잃게 되었고, 지금은 옛날 옛적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지명만 남아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가 수중와우(水中臥牛)형국의 소동정(小洞庭)이었다고 후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곳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뒤[대통재(待通峙)]는 소(牛)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라 하였고, 매년, 우리고장에서 가장 성대히 열리고 있는 법성포 단오제의 본무대인 [숲쟁이]가 소(牛) 허리라 하였습니다. 또한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들어선 이곳 [조아머리]는 소(牛)머리의 왼쪽 편이라 하여 [좌우두(左牛頭)]라 하였고 이곳 [조아머리] 앞 바다 건너 [구시미]는 소의 밥 구시 모습이라 하여 [구시미]라 부르고 있으며, 이곳 [조아머리]에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목넹기] 제방(木麥堰)건너 칠곡리의 [매물곶이]는 여물 솥에서 소여물을 삶고 있는 곳이라 하여 [매밀고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중와우(水中臥牛)형국의 소동정(小洞庭)과 연관된 마을 이름을 오늘날까지 후세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아머리]라는 마을이름은 [좌우두(左牛頭)]의 좌우(左牛)가 [조아]로, 두(頭)는 한자 뜻 그대로 [머리]로 바뀌어 이 두 말이 조합된 지명으로 전래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을의 내력(來歷) 덕에 이곳 [조아머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에서 유일하게 풍물놀이가 허용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다른 마을은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농악은 물론 집회를 모두 금지하였고, 전쟁 물자 조달에 허덕이며 쇠붙이라고 생긴 물건은 공출이란 미명아래 심지어 숟가락까지 모두 압수해 갔는데, 마을에 있는 농악 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이곳 [조아머리]의 풍물악기만은 손을 대지 못하였는데, 이유인즉, 이곳은 지형이 소의 왼쪽 머리 부분(左牛頭)에 해당되는 곳이기 때문에 소머리에서 핑경소리가 나듯 이 마을의 풍악(風樂)소리가 멈추면 법성포(法聖浦)가 망한다는 미신 같은 전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나. 조아머리 입향조(入鄕祖) 그럼 언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파평 윤(尹)문들의 문적의 근거로 “이곳 [조아머리]는 약 5백 여 년 전에 선대가 귀양 와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활여건이 좋아 계속 눌러 살게 된 곳”이라는 정도까지 밖에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편《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영광군의 “토성이 6이니 김(金),전(田),조(曺),송(宋),윤(尹),정(丁)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박(朴)【진원(珍源)에서 왔다.】이(李)【홍주(洪州)에서 왔다.】【모두 향리(鄕吏)이다.】”진량(陳良)의 성이 1이니, 송(宋)이다.”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 조에“【성씨】본군 김(金), 전(田),조(曺),송(宋),윤(尹),정(丁),국(鞠),이(李),서(徐),신(申),박(朴) 모두 래성(來姓)이다....진량(陳良) 윤(尹),송(宋),박(朴)....이다.”라 하였는데, 《영광군지(1992)》에는 파평 윤(尹)문(門)의 입향 조가 윤상민(尹相民)인데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법성포(法聖浦)의 옛 지명이 진량(陳良)인데, 이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하면 파평 윤(尹)문의 [조아머리] 입향(入鄕)조와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의 파평 윤(尹)문 입향(入鄕)조의 입향 시기는 같은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형의 특성 상 그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파평 윤(尹)문이 [조아머리]에 처음 입향(入鄕)한 성씨(姓氏)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라 생각됩니다. 다. 조아머리 주변 ① 소머리 모양의 대통재 ▲ 법성포구 초입에서 본 대통재 소머리로 여겼던 [대통재]는 옛날 시인들이 이곳의 절경을 동해(東海) 경포대의 일출과 견주어 읊을 정도로 빼어난 낙조를 자랑하던 곳으로, 법성포(法聖浦) 12경의 하나인 통치낙조(通峙落照)의 현장입니다. 또한 지명이 중국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150여 년 전 고산자(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철종 12년, 1861년)》에는 기다릴 대(待)자를 쓴 [대통재(待通峙)]로 표기되어 있고, 34년 뒤인 1896년에 규장각에서 발간한 《법성진진지(法聖鎭鎭誌)》에는 큰 대(大)자를 써 [대통재(大通峙)]로 기록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해설로는 기다릴 대(待)자나 큰 대(大)자나 모두 중국을 의미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 《대동여지도》의 [대통재(待通峙)]는 중국의 사신을 기다리는 고개라는 의미이고, 뒤,《법성진진지(法聖鎭鎭誌)》의 [대통재(大通峙)]는 중국의 사신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라는 뜻이랍니다. 특히 영광군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존자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이 법성포(法聖浦)[조아머리]라고 비정한 근거로 고증하고 있는 고문헌인《법성진진지(法聖鎭鎭誌)》의 고적 조에 등장하는 지명이 바로 이곳 [대통재]입니다. ② 소 허리인 숲쟁이 조선후기 풍수지리의 대가 중 한사람인 일지승이 “약 백년이 지나면 반듯이 큰 인물을 배출할 곳이다.“라 한 곳이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여서인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소 허리를 동강내 소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소 허리에 해당하는 이곳 [숲쟁이]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 놓아 우리고장 사람들이 수 십 년 동안 메우려 해도 메워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1970년 대, 인근 주민들이 기를 쓰고 동네 연탄재를 모두 이곳에 버려 겨우 메웠고, 지금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우리나라의 10대 명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연탄재로 혈(穴)을 메운 숲쟁이 [숲쟁이] 혈 자리에 대해서는 “풍수지리상 우리고장 법성포에서 큰 장군이 나올 곳이라 하여 조선왕조시절에 역모를 예방하기 위해 팠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래되고 있습니다. 4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전라남도 대표축제인 법성포 단오제가 매년 단오 날 이곳[숲쟁이]에서 열립니다. ③ 소 밥구시 모양의 구시미 [조아머리} 건너편 [구수리] 마을은 소 밥 구시 모양이라 하여 [구시미]라 불렀다는데, 일옹대(一翁待)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입니다.
▲ 일옹대 전설이 깃든 구시미 마을 조선시대 이곳에는 법성포(法聖浦)가 조창(漕倉)과 법성진(法聖鎭)이라는 수군(水軍) 부대(鎭)가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법성진(法聖鎭)의 관문(關門)으로 포대(砲臺)와 군기창(軍器倉) 그리고 대동청(大同廳)이 있었다고 하며, 봄이면 칠산 바다의 많은 고기배가 이곳으로 몰려 조기 파시(波市)가 섰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마을은 풍치(風致)도 좋고 술안주도 풍성하여 선원들은 물론 육지의 풍류객들이 많이 찾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안주 좋은 [조아머리], 놀기 좋은 [목넹기], X좋은 [구시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색주가로 유명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정경이 빼어났었는데, 6.25전쟁 때 잦은 공비(共匪)의 출몰로 폐허가 되, X좋은 [구시미]라는 말은 옛말이 되버린지 오래라고 합니다. 일양대 또는 일행대 라고도 하는 이곳의 일옹대(一翁待)전설은 이곳 [구시미]가 호황이었던 시절에 이곳 [구시미]에 색주가를 크게 차려 큰돈을 모아, 좋은 일을 많이 한 일옹대(一翁待)라는 기생의 이야기 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기생이었다는 것 외에 이 여인의 출생지와 이곳 [구시미]까지 오게 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는데, 당시 이 여인은 돈이 많고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는 절대 몸을 허락하지 않은 기생으로 널리 알려져 뭇 사내들의 호기심을 사게 되었고 콧대 높은 기생이라고 널리 소문 난 기생이지만 특이하게도,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장가들지 않은 늙은 총각이나, 양반집 노복(奴僕)으로 장가들지 못한 늙은 사내 같은 노총각들만 골라 잠자리를 같이하고, 몸을 허락하는 기생으로 더 유명세를 타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었던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 여인은 이들에게 하룻밤 정만 준 것이 아니라 좋은 술로 극진히 대접하고 비록 하룻밤이지만 알뜰한 아내 노릇을 하였고, 다음 날 이들을 보낼 때는 반듯이 새 옷을 해 입히고, 상투를 올려 갓과 망건을 사서 씌워 신수 좋은 사내로 변신시켜 많은 돈을 주어 보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소망은 이렇듯 불쌍한 노총각 100사람과 연(緣)을 맺는 일과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선행하는 일이었는데, 99사람의 노총각과 하룻밤을 보내고 난 후에 이 여인은 이미 나이도 들고 몸도 늙어 도저히 나머지 한 사람을 채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한 사람의 늙은 사내를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기명(妓名)을 일옹대(一翁待)로 바꾸고 소원을 이뤄 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자살하고 이틀 뒤, 이 여인의 시신은 들 물에 밀려 [구시미] 앞 갯가로 떠밀려 왔는데, 선행을 많이 했던 한 점 혈육 없는 여인의 시신인지라 동네사람들이 시신을 거두고 마을사람들이 협동하여 장례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소문은 인근 마을로 삽시간에 퍼져 생전에 이 여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문상행렬이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호남의 명창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상여소리를 자청하여 장례를 치룰 정도로 성대히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옹대(一翁待)라는 여인이 죽고 난 뒤에 해괴한 일이 우리 영광군에서 일어났습니다. 충청도 어느 명문대가집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왼손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고 합니다. 미색도 곱고, 총명하고 명문대가의 외동딸이니 흠잡을 곳 없는 처자였는데, 왼손의 불구가 혼인에 큰 걸림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문대가의 후광이었던지 어느 가난한 집, 선비에게 출가를 하였고, 이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영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광군수로 부임한 이 선비가 영광에 도착하여 공관에서 첫 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자기 부인의 손을 보니 어려서부터 펴지지 않았다던 왼손의 손가락이 멀쩡하게 모두 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더 더욱 신기한 것은 펴진 왼손의 손바닥에 일옹대(一翁待)라는 석자가 손금으로 새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일옹대(一翁待)라는 기생이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군수 부인으로 환생하여 100번째 사내로 영광군수를 맞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일옹대(一翁待)의 100번째 사내가 된 영광군수는 영광군수 재임 중에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훗날 일인지하(一人之下)만인지상(萬人之上) 반열에 올라 큰 인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일옹대 묘로 추정되는 곳
더불어 이 마을에 이러한 전설이 이어 오면서 일옹대(一翁待) 무덤을 돌보면 복을 받는다하여 추석 명절만 되면 이 묘를 벌초하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하는데, 현존했던 일옹대(一翁待)의 묘가 지금은 골프장공사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구시미] 초입 도로변에는 최(崔)씨 성을 붙여 “최일옹대의묘”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마을 어촌계장의 이야기로는 수 년 전에 원불교에서 세웠다고 하는데 그 사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④ 조아머리 나루터 [조아머리]라는 마을을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들어선 곳으로 대부분 알고 있으나 지금 객주비만 외로이 서있는 [조아머리] 나루터 주위의 부락과 [백제불교 최초도래지]가 들어선 곳에 있었던 부락을 모두 아울러 [조아머리]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곳 나룻터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굴비특품사업단이 있는 검산 저수지에 있었던 후포(後浦)의 검산나루(檢山津)를 이용하여 법성포(法聖浦)와 [매물고지], [구시미] 그리고 [대치미]까지 나룻배로 왕래하였는데, 목맥언(木麥堰)이 생겨 검산 나룻길이 없어지고 홍농의 칠곡리는 육로(陸路)로, [구시미]와 [대치미]는 새로 생긴 이곳 [조아머리] 나루터를 이용하게 되었답니다. 즉, 지금부터 82년 전 인 1924년, 가와사끼(川崎武之助)라는 일본 사람이 간척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자갈게미]와 [매물고지(칠곡리)]사이의 바다 길을 막아 목맥언(木麥堰)이라는 제방을 쌓은 후에 생긴 나룻길이라서 다른 곳의 나루터와 달리 그 역사는 일천합니다.
▲ 조아머리 나루 터 당시 이곳 나루터는 바닷물이 가득 들면 객주비가 있는 바위 밑까지 나룻배를 접안할 수 있어 배에 오르내림이 쉬웠지만 바닷물이 빠졌을 때는 배를 갯벌 등에 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발을 벗고 갯벌을 징검다리 삼아 나룻배에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는 나룻배를 타고 내리는 일이 아주 곤욕스러웠고 불편하였었습니다. 이곳 역시 근세에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1953년 초겨울, 625전쟁 뒤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거지도 흔했고, 도둑도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사립학교였던 현재의 법성중.고등학교의 재정형편도 아주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현재 법성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법성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겨울철 교실 난방용으로 구수산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이곳 나루 길을 건너다가 타고오던 발동선이 뒤집혀 11명의 학생들이 생명을 잃은 곳입니다. 당시 제 조부님이 학교법인 양영학원 재단 이사장이셨습니다. 6.25전쟁으로 모두가 피난길에 올랐는데도 홀로 남아 법성중.고등학교를 지키실 정도로 학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던 분인데, 이 사고로 충격을 받아 몸져누우셨다가 3년 후 영민하셨습니다. ⑤ 수문통과 비행기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25년 가와사끼(川崎)라는 일본사람이 간척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막은 방조제(木麥堰)에 설치한 갑문(閘門)을 우리고장 사람들은 [수문통]이라 부릅니다. 8.15 광복 후에는 수문이 낡아 교체하여야 하는데 당시 국내 기술로는 만들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목제수문을 달아 운용하기도 했던 갑문(閘門)인데, 이 갑문(閘門)이 설치됨에 따라 바닷길이 막히고 간척지가 조성되어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의 지도가 모두 바뀌게 됩니다.
1985년 촬영한 사진인데 일제강점기 모습 그대로라고 합니다.
▲ 지금의 목맥언(木麥堰) 수문통(閘門) 예전에는 8개의 수문이 있었고 갑문(閘門)이 붉은색으로 도장(Painting)되어 있었기 때문에 [붉은 다리]라고도 불렀고, 홍농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 갑문(閘門)의 제방 길로 가마미 해수욕장을 왕래하였습니다. 지금은 외관도 바뀌고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자동으로 제어되고 있으며 수문도 9개로 늘렸습니다. 이곳 [수문통]이 완성될 즈음, 정확히 1925년 6월 5일 오후 3시 이곳 방조제가 완공되기 전, 지금은 신기할 것도 없는 비행기가 이곳에 착륙한다는 소문에 우리고장 사람들은 물론, 인근 고창, 나주, 함평, 장성에서 까지 당시로서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던 비행기를 구경하기 위하여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왔었는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비행기가 오지 않아 모였던 군중들 중, 나룻배를 타고 칠곡리 방면으로 귀가하려던 주민들이 이곳 수문에 빨려들어 아녀자를 포함하여 30여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이 [수문통] 준공 당시 표지석(川崎 全南 農場 大正14年 竣工)이 남아 있었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에게 수소문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⑥ 조아머리와 물산객주 박경삼 [조아머리] 나루터에는 객주(客主)비 1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碑)의 소재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세운 비로 보입니다. 이 객주(客主)비의 내력은 대강 이러합니다.
▲ 조아머리 객주(客主)비 지금부터 120여 년 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난 박경삼(朴敬三)이라는 사람이 어린나이에 법성포(法聖浦)에 와서 뱃사람이 되었는데, 직급이 가장 낮은 화장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기잡이배에서 화장이란 선원들의 취사와 허드렛일을 주로 하는 잡부를 일컫는 말입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탄 배가 홍농 가마미에 정박하게 되었답니다. 배가 포구에 정박하면 화장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배의 식수통에 먹을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이었답니다. 이날도 물지게를 지고 식수통을 채우려고 물을 길으러 가다가 해변으로 떠 밀려온 익사체(溺死體)를 발견하고 가서 보니 그냥 편히 잠든 미모의 처녀였었답니다. 그때 박경삼(朴敬三)의 나이 19살로 혈기왕성한 때라 그만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모래로 요를 깔고, 하늘을 이불삼아 음양지락(陰陽之樂)을 맛보았는데, 일을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비록 죽은 여자 일망정 자기로서는 최초의 여자인데 바닷가에 그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그 여인의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어 주고 왔었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이 여인이 박경삼(朴敬三)의 꿈에 나타나 “내일은 돌풍이 일 것이니 출항하지 말라”든가 “내일은 고기잡이를 어느 지점에서 하라”는 등의 선몽을 하여 이 여인의 선몽을 선주에게 하게 되었는데, 제일 말단의 하찮은 화장이 하는 이야기라 처음에는 개의치 않던 선주가 박경삼(朴敬三)의 이야기대로 조업을 하면 항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어 결국은 박경삼(朴敬三)이 하자는 대로 조업을 하여 이 선주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박경삼(朴敬三)의 선몽으로 부자가 된 선주는 어느 날 박경삼(朴敬三)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면서 앞으로 독립하여 배를 부리도록 하였는데, 선주가 된 박경삼(朴敬三) 역시 그 여인의 선몽 덕에 더 큰 부자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어는 날, 꿈에 다시 나타난 이 여인이 하직인사를 한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박경삼(朴敬三)도 그 뒤부터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물산객주가 되어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 후 박경삼(朴敬三)은 처녀고혼(處女孤魂)일지도 모르는 그 여인을 위령(慰靈)하고 칠산 바다를 드나드는 고기잡이배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이곳 [조아머리]에 세워져 있는 객주비와 똑같은 객주비를 [구시미]와 [항월(項月)]등대 아래 세웠는데 현재는 이 3기의 객주비중 이곳 [조아머리] 나루터 객주비만 남아 있고 [구시미]와 [항월] 등대아래 세웠다는 객주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⑦ 파시전과 조아머리 금년 법성포(法聖浦)단오제 때,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전경숙 교수님으로 부터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는데, 파시(波市)의 현장을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는《조선왕조실록》과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지리지》영광군 편 에는 「전략...토산(土産)은 ..중략.. 조기인데, 군의 서쪽 파시평에서 난다. 봄 여름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國用)에 이바지 한다. 후략.. (石首魚, 産郡西波市坪。春夏之交, 諸處漁船, 皆會于此, 網取之, 官收其稅, 以資國用。)」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파시(波市)관련 기록은 이 글이 최초의 기록이자 특정지역을 언급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영광군 편 산천 조에는 「 파시전(波市田)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 조기가 생산된다. 매년 봄에 온 나라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波市田在北二十里産石首魚每年春京外商舡 四集打捕販賣喧?如京市 其漢船皆有稅)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규모를 서울의 저자거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 이야기하는 군북(郡北) 20리(里)는 와탄포(瓦灘浦), 지금의 [지아닐] 일대가 됩니다. 이곳이 조선시대 유명했던 파시(波市)의 현장입니다.
파시(波市)란 고기잡이가 한창인 때, 일시적으로 바다에서 어선(漁船)과 상선(商船)사이의 상거래를 일컫는 말인데, 이 파시(波市)가 열리면 인근 어촌경기도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이곳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는 조기 파시철인 3~4월에 형성되었는데, 파시(波市) 철이면 외지의 고깃배들이 수 백 척씩 몰려들어 요즈음 표현으로 지역경제가 대단한 호황을 이뤘고, 특히 수산물을 취급하는 도소매인 들과 어구 상, 그리고 서비스업 계통의 유흥업소와 숙박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는 조선 조 초기와 중기의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나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비추어 와탄포(瓦灘浦), 지금의 [지아닐] 일대에서 형성되었고, 1850년, 철종 시대, 묘량 출신 유학자 미천당(美泉堂) 김진보(金鎭輔) 님이 계춘유법포운(季春遊法浦韻)이란 시에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가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후기에는 이곳 [조아머리]와 [구시포] 그리고 [목넹기] 일대로 옮겨 형성되었던 같고, 1890년에 법성진(法聖鎭)의 조창(漕倉)이 폐지되었다는《법성진진지(法聖鎭鎭誌)》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왕조의 정치, 군사적 기능이 폐지되었던 이 시기에 군항(軍港)으로서 포구의 기능이 어항(漁港)으로 바뀌면서 조선 말기부터 이곳 [조아머리]와 [구시포] 그리고 [목넹기] 일대의 중심권역으로 법성포구가 파시평(波市坪)으로 명성을 유지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조선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와 조선중기의 기록인≪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의 [지아닐(瓦灘浦)] 파시(波市)가 지형의 변천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이곳 [조아머리]와 [구시미] 그리고 [목넹기]일대로 이동되었고,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곳 [조아머리]와 [구시미] 그리고 [목넹기]일대의 중심권역이 되어 호경기를 구가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우리고장 사람들이 부르는 뱃노래에서 “안마도 파시(波市)는 장바위요 위도 파시(波市)는 파장금이라”고 안마도와 위도 파시(波市)의 현장을 적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고장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의 지명이 적시되지 않은 이유는 이렇듯 이곳 [조아머리]와 [구시미] 그리고 [목넹기] 일대로 복합된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며. “돈 실러가세 돈 실러 가세 영광 법성포(法聖浦)로 돈 실러 가세”라는 민요는 파시(波市)로 풍요로웠던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했던 노래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법성향지≫에 수록되어 있는 미천당(美泉堂) 김진보(金鎭輔) 님의 관련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춘유법포운(季春遊法浦韻) 한쪽에 있는 큰 포구 명승지로 알려졌으니 (偏鎭雄癌壇勝區) 산세도 감아 돌고, 바다는 길게 둘렀구나! (護從山勢繞長洲) 높고 낮은 어 상선들은 뭍에 메여 있는데, (漁商船泊高低岸) 여러 고을 백성들은 세금 내려오는구나! (正稅民來遠近州) 저잣거리 가게에는 가히 없는 물건이 없고, (物物無非鸚鵡) 집들의 화려함은 악양루와 같도다! (家家遍是岳陽樓) 이 바다를 구경하고, 그저 물이라 할 수 없기에, (觀於此者難爲水) 나는 해마다 한차례씩 노닐다 간다네. (波市年年我一遊) 이 시는 의역된 글만 읽어 보면 법성포(法聖浦)을 예찬한 글로 보이지만, 원문(한문)을 읽어보며 유추하면 시의 첫 머리에 “편진(偏鎭”으로 시작되는 첫 단원은 1850년대, “법성진(法聖鎭)의 한 쪽” 바로 [조아머리]와 [구시미] 주변의 풍광을 묘사한 글이며, 마지막 단원인 “파시년년 아일유(波市年年我一遊)”라는 구절은 1850년 당시 법성포(法聖浦) 파시(波市)의 현장이 이곳 [조아머리] 일대와 법성 포구라는 의미의 글입니다. 또한 목포대학교 김준 교수가 초대 지도군수였던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을 인용하여 전라도 닷컴에 기고한 글 중 해당 단원을 아래와 같이 옮겼습니다. 『전략....초대 지도군수로 임명된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 5월13일자는 칠산 바다를 더욱 자세하게 적고 있다.
전라도 지도진이 군 치소로 승격되던 1896년 완도도 군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지도군은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 5개 군 117개 섬으로 이루어진 16개면이었다.
같은 시기 돌산 군과 완도군이 설군 되어, 비로소 서 남해 다도해지역에 행정력을 배치한 것이다. 1월22일 임명되어 5월15일 현지에 부임했으니 당시의 뱃길을 짐작하고 남는다. 오횡묵이 부임한 여정은 강화-갑곶-손돌항-인천-팔미도-덕적도-마량진- 옥구-고군산-칠산해-지도로 이어진다.
“법성의 서쪽 바다에는 배 댈 곳이 없고, 이곳 칠산이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위도에서부터 나주까지 경계가 되고 이곳을 통칭 칠산 바다라고 한다. 서쪽 바다는 망망대해로서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들이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파는데 오고 가는 거래액은 가히 수십만 량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조기인데 팔도에서 같이 먹을 수 있다. 지금도 역시 갈치를 잡으려고 바다에 그물을 설치하였고 배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오횡묵은 칠산 바다를 건너면서 본 법성포의 모습을 <사방으로 산들이 둘러싸인 곳에 별세계처럼 민가 천여 호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모여 있었다. 항구의 전면에는 배 젓는 노가 모아 세워져 있는데 마치 갈대와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의 조기잡이 파시가 얼마나 성시를 이루었는가 짐작케 한다.』 ⑧ 무묘(武廟) [자갈게미] 삼거리 도래지 안내 표지 탑 맞은 편 언덕에 일본식 가옥이 한 채 있습니다. 이 가옥은 지금부터 80여 년 전, 일제강점기에 가와사끼(川崎)라는 사람이 쌓은 목넹기제방(木麥堰)의 수문을 관리하던 관리인의 숙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가옥에서 [대통재] 방향으로 조금 오르면 지금도 옛날 기왓장이 나오는 밭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는 아주 큰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산불이 나 고사하였고, 고사한 당산나무를 흉물스럽고 꺼림칙하다고 일본사람들이 베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당산나무가 있었다는 밭 주위가 일명 “관왕묘(關王廟)라고도 불리는 관우(關羽)장군을 모시는 무묘(武廟)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목넹기 제방과 수문통을 관리하던 관리인의 숙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 자갈게미 3거리 예전에는 삼거리가 아니었는데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진입도로가 생겨 삼거리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28개 군현에서 법성진(法聖鎭)에 수납된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다랑가지를 출항하여 서울로 항해 할 때나 법성진(法聖鎭)의 병선이 출진할 때, 산신과 해신에게 항해와 인명의 무사안전을 기원했던 사당이 바로 이곳 무묘(武廟)입니다.
⑨ 상목 이곳 [조아머리]는 활배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활모양의 커다란 그물을 물 흐림이 빠른 곳에 바쳐 주로 어린고기(치어)를 잡는 고깃배를 우리고장 사람들은 활배라고 부릅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에서 보면 아래 사진의 표시 지점에 해로 위험표시등이 있습니다. 이곳이 우리고장에서 물 흐름이 가장 빠른 곳으로 우리고장 사람들은 이곳을 상목이라 합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곳은 물 흐림이 빨라 고기를 많이 잡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만 그물을 바치려고 해서 예전에는 서로 다툼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추첨을 하여 고기잡이 구역을 정하게 되었고, 제일 좋은 이곳을 [상목], 제일 나쁜 구역을 [하목], 기타 구역을 [중목]이라 구획하여 활배로 고기를 잡았다고 합니다. 우리고장 사람들은 이곳을 도다이 라고 도 하는데 이는 등대(燈臺)라는 일본말입니다. ⑩ 모래찜바탕
예전에는 [자갈게미] 3거리(수문통 제방 입구)에서 [백제불교최초도래지]로 들어오는 차도가 [모래찜 바탕]이라 부르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모래찜바탕]은 일조량이 많고, 작은 자갈과 약간 검은 모래가 섞여있는 모래사장으로 여름철이면 모래찜을 하기 위하여 우리고장 사람들은 물론 우리고장 주변에 살았던 부녀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으로 당시에는 유명한 모래찜 터였는데, 815광복 이후에는 모래판이 좁아지고, 가마미해수욕장이 개장되어 그 명성을 잃은 곳입니다. [백재불교최초도래지]를 조성하면서 지금은 모두 도로로 변해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