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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권 3
부족(部族) 〈3〉
백제(百濟) 〈백제(伯濟)〉 2
☞ 백제 땅이 하습(下濕)하다 함에 ‘하습(下濕)’에 대한 기록들
⇒ 하습(下濕) 〈서경(書) 우공(禹貢)에 “들녘과 습지에서도 일을 이루어냈다.(原隰底績)” 하니 그 전(傳)에 하습(下濕)을 “습(隰)”이라 하였다.
시경(詩)에 “이미 종아리는 습기로 땡땡 부어올랐고 게다가 병으로 발이 퉁퉁 부어올랐다. (既微且尰)” 하니 전(傳)에 종아리에 병이 든 것이 ‘미(微)’이고 발이 붇는 것을 ‘종(尰)’이라 하였다. 전(箋)에는 ‘이 사람은 하습(下濕)의 땅에서 살다보니 미(微)와 종(尰)이라는 질병이 생겼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대완전(大宛傳) 주(注)에 ‘곤륜산(崑崙山) 이남부터 대부분은 평지이며 낮고 습하여(下濕) 땅이 비옥하고 좋아 대부분 벼(稻)를 심으면 한 해에 나락이 네 번 익는다.
후한서(後漢書) 성양왕지전(城陽王祉傳)에 성양공왕(城陽恭王) 지(祉)는 자(字)가 거백(巨伯)으로 광무(光武)의
족형(族兄) 용릉강후(舂陵康侯) 창(敞)의 아들이다. 창(敞)은 일찍이 할아버지 절후(節侯) 매(買)가 장사정왕(長沙定王) 아들을 영도(零道)의 용릉향(舂陵鄉)에 봉하여 용릉후(舂陵侯)로 삼았다. 매(買)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대후(戴侯) 웅거(熊渠)가 그를 이었다. 웅거(熊渠)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고후(考侯)가 이었다.
지(祉)는 용릉(舂陵)의 지세가 낮아 습하고(下濕) 산림에 독기가 있다는 이유로 글을 올려 감읍(減邑) 안으로 옮기기를 요구하였다. 원제(元帝)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년) 남양(南陽)의 백수향(白水鄉)으로 옮겨 봉하였다.
진서(晉書) 문제기(文帝紀)에 경진(景辰, 景元) 4년(263년) 여름에 제(帝)가 장차 촉(蜀)을 치려고 할 때 드디어 여론을 꾀하며 하는 말이 “남쪽 땅은 낮아 습하여(下濕) 반드시 역병(疾疫)이 생긴다.
지금 마땅히 먼저 촉(蜀)을 취해야 옳다.” 하였다. 3년 뒤에 파촉(巴蜀)이 지세의 흐름에 따라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였으니 이는 우(虞)를 멸하고 괵(虢)을 평정하였으며 한(韓)을 삼키고 위(魏)의 세력들을 아울렀다.
또 가충전(賈充傳)에 왕준(王濬)이 무창(武昌)을 이김에 충(充)이 사신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오(吳)를 아직 다 평정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막 여름철이라 강(江), 회(淮)는 땅이 낮아 습하여(下濕) 역병이 반드시 생겨난다. 마땅히 여러 군대에 조서를 내리고서 뒷날을 도모해야 한다.” 하였다.
위서(魏書) 백제국전(百濟國傳)에 “그 선조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고구려(髙句麗)까지 거리가 천여 리이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처해 있다.
그 백성들은 땅에 정착해 살며 땅은 대부분 낮아 습하여(下濕) 대체로 모두 산에서 살며 오곡이 있다.
그 옷차림과 먹거리는 고구려와 같다.” 하였다.
수서(隋書) 우문필전(宇文㢸傳)에 “마땅히 정예 기병을 뽑아 곧장 기련(祈連)의 서쪽으로 달려가야 하니, 적이 만약 군대를 철수하면 분명히 요천(蓼泉) 북쪽부터 할 것이니 이 땅은 험하고 좁으며 아울러 또한 낮아 습하니(下濕) 그 사람과 말이 건널 때 사흘이 걸려야 막 건너게 되니 고삐를 느긋하게 쥐고서 쫓아 토벌하더라도 미치지 못할까 염려를 왜 하겠습니까? 저들은 피로하고 우리는 널널하니 적들을 깨부수는 일은 분명합니다.” 하였다.
역림(易林)에 “물이 고인 데에는 낮아 습하다(下濕). 북녘 땅은 매우 차다.” 하였다.〉
御定駢字類編 (四庫全書本)/卷126
下濕〈書禹貢原隰底績傳丨丨曰隰 詩既微且尰傳骭痬為微腫足為尰箋此人居丨丨之地故生微尰之疾 史記大宛傳注自崑崙山以南多是平地而丨丨土肥良多種稻歳四熟 後漢書城陽王祉傳城陽恭王祉字巨伯光武族兄舂陵康侯敞之子也敞曽祖父節侯買以長沙定王子封于零道之舂陵鄉為舂陵侯買卒子戴侯熊渠嗣熊渠卒子考侯嗣祉以舂陵地勢丨丨山林毒氣上書求減邑内徙元帝初元四年徙封南陽之白水鄉 晉書文帝紀景辰四年夏帝將伐蜀乃謀衆曰南土丨丨必生疾疫今宜先取蜀三年之後因巴蜀順流之勢水陸並進此滅虞定虢吞韓并魏之勢也 又賈充傳王濬之尅武昌也充遣使表曰吳未可悉定方夏江淮丨丨疾疫必起宜召諸軍以為後圖 魏書百濟國傳其先出自夫餘其國北去髙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其民土著地多丨丨率皆山居有五榖其衣服飲食與髙句麗同 隋書宇文㢸傳宜選精騎直趨祈連之西賊若收軍必自蓼泉之北此地險隘兼復丨丨度其人馬三日方度緩轡追討何慮不及彼勞我逸破之必矣易林積水丨丨北陸苦寒〉
⇒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紀) 19
초(初)에 부여(夫餘)는 녹산(鹿山)에 살았는데 〈부여(夫餘)는 현토(玄菟) 북쪽 천여 리에 있으니 녹산(鹿山)은
대체로 바로 그 땅이다. 두우(杜佑)가 “부여국(夫餘國)에 도장(印)이 있는데 그 새김글에 「예왕지인(濊王之印」
이라 하였다.
나라에 옛성(故城)이 있으니 예성(濊城)이라 이름한다.
대체로 본디 예맥(濊貊)의 땅이다. 그 나라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토(玄菟)까지 천 리이다.
남쪽으로는 고려(高麗),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닿아있다.〉
백제에 침입을 받아 〈동이(東夷)에 삼한국(三韓國)이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이라 하고 둘은 ‘진한(辰韓)’이라 하며 셋은 ‘변한(弁韓)’이라 한다. 마한(馬韓)에 54국(國)이
있으니 백제는 그 하나이다. 백제는 뒤에 점차 강대해져 여러 작은 나라를 아울렀다.
그 나라는 본디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수서(隋書)에 “백제는 동명(東明)에서 나왔으니 그 후예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어 비로소 그 나라를 세웠고
점차 강성해져 초기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濟海), 이로 인해 ‘백제(百濟)’라 호칭하였다.” 하였다.
두우(杜佑)가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닿아있고 북쪽으로는 고려와 천여 리가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大海)를 한계를 두고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처해 있다.〉 부락이 쇠퇴하며 흩어져 서쪽으로 연(燕) 땅 가까이로 옮겼지만, 마련해 갖추지 못하였다.
연왕(燕王) 황(皝)이 세자 준(儁)을 보내 모용군(慕容軍)과 모용각(慕容恪), 모여근(慕輿根) 세 장군에 1만7천기병을 통솔하게 하고 부여(夫餘)를 습격하였다. 준(儁)이 중(中)을 차지하고 지휘하고 군대 일을 모두 모용각에게 맡기니 마침내 부여(夫餘)를 뽑아내고 그 왕 현(玄)과 부락 5만여 구(口)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황(皝)은 현(玄)을 진동장군(鎭軍將軍)으로 삼고 딸을 처로 맞이하였다.” 하였다.
資治通鑑卷第九十七 晉紀十九
初,夫餘居于鹿山,〈夫餘在玄菟北千餘里,鹿山蓋直其地。杜佑曰:夫餘國有印,文曰「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其國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爲百濟所侵,〈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隋書》曰:百濟出自東明,其後有仇台者,始立其國,漸以強盛,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杜佑曰:百濟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近,其靳翻。〉燕王皝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帥,讀曰率。〉儁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爲鎭軍將軍,妻以女。〉
☞ 소해(小海)
백제가 소해 남쪽에 처해 있다(處小海之南)는 기록에 따라 소해(小海)에 대한 자료들을 번역해 보았다.
소해(小海)라는 표현이 나온 지역에는 크게 ① 발해와 산동 쪽 ② 중국 광동 남해 쪽 ③ 바이칼, 항애산 쪽이 있다. 소해(小海)는 큰 바다에 빗겨 있는 작은 바다를 가리키거나 산골 물이 모여서 이룬 깊고 제법 큰물을 가리키기도 하는 듯하다.
1. 바이칼, 음산산맥에 항애산, 서역(西域)
⇒ 가경중수일통지(嘉慶重修一統志)
등길사지(騰吉斯池) 〈아격납사령(阿格納斯嶺 : 지금 카자흐스탄 경내) 북쪽에 있으니 둘레가 수백 리(里)로 대개 소해(小海)이다. 아라사(俄羅斯)와 이웃해 붙어있다.〉
嘉慶重修一統志 (四部叢刊本)/卷五百二十九至五百三十一
騰吉斯池〈在阿格納斯嶺北周數百里蓋小海〉 〈也與俄羅斯鄰接〉
⇒ 흠정대청일통지(欽定大清一統志)
등길사지(騰吉斯池) 〈합살극(哈薩克, 카자흐스탄) 서북 경계에 있다. 물이 모이는 품이 넓고 질펀하여 끝이 없으니 대체로 소해(小海)이다. 아격납사령(阿格納斯嶺) 북쪽에 있으며 아라사국(俄羅斯國)과 이웃해 붙어있다. 못(池)의 남쪽 가에는 부락이 있으니 사이(沙爾)라 이름한다.〉
欽定大清一統志 (四庫全書本)/卷420
騰吉斯池〈在哈薩克西北界水所滙浩汗無涯盖小海也在阿格納斯嶺北與俄羅斯國鄰接池之南涯有部落名沙爾〉
⇒ 하원기략(河源紀畧)
나포뇨이(羅布淖爾 : 몽고어이니 겁나게 많은 물들이 모이는 호수를 말한다. 호수를 뜻한다. )는 동쪽이고 다시 남쪽에 색이등수(色爾騰水)가 있다.
색이등수(色爾騰水) 〈몽고어이니 물 이름이다. 물이 산속에서 나와 물이 괴어 소해(小海)를 이룬 것이다.〉에 몇몇 수원이 있으니안서주(安西州 : 지금 감숙성 과주현(瓜州縣) 경내) 남산의 갈라진 봉우리 산기슭에서 나온다. 그 중에 이름할만한 것이, 하나는 파합합이당(巴哈哈爾當)에서 나오고 하나는 화통(和通)의 영역에서 나오며 하나는 극도긍합랍합달(克都肯哈拉哈達) 〈몽고어이니 합랍(哈拉)은 검빛(黑色)이요 합달(哈達)은 산봉우리(山峯)이다.〉에서 나오니 모두 서북으로 수십 리(里)를 가면 산세(山勢)를 따라 엎드려 흘러오다 이곳에 다다른다. 둘레는 3백 리(里)요 극(極)은 39도(度), 서(西)로 22도(度)이다. 나포뇨이(羅布淖爾)와 거리가 동남 9백 리이며 색이등수(色爾騰水)의 서쪽에 갈순지(噶順池)가 있고 다시 서쪽 1백 리에 아집격색이등수(阿集格色爾騰水)〈몽고어이니 아집격(阿集格)은 작다(小)이요 소(小)색이등(色爾騰)은 해(海)이다.〉가 있는데 둘레가 160리이다. 다시 서쪽 2백 리에 찰한제로도육지(察罕齊老圖六池)〈몽고어이니 찰한(察罕)은 흰빛(白色)이요 제로(齊老)는 돌(石)이며 도(圖)는 있다(有)라는 뜻이다. 땅에 흰 돌(白石)이 많아서 그 못(池)에 이름 지었다.〉가 있다.
河源紀畧 (四庫全書本)/卷11
羅布淖爾東又南有色爾騰水 色爾騰水〈䝉古語水名水出山中瀦為小海也〉有數源出安西州南山支峯之麓其可名者一出巴哈哈爾當一出和通之境一出克都肯哈拉哈達〈䝉古語哈拉黑色哈達山峯也〉皆西北行數十里隨山勢伏流來趨之周圍三百里極三十九度西二十二度去羅布淖爾東南九百里色爾騰水之西有噶順池又西百里有阿集格色爾騰水〈𫎇古語阿集格小也小色爾騰海也〉周圍百六十里又西二百里有察罕齊老圖六池〈䝉古語察罕白色齊老石也圖有也地多白石以名其池焉〉
⇒ 흠정대청일통지(欽定大清一統志)
당서지리지(唐書地理志)를 살펴보면, 골리간(骨利幹), 도파(都播) 두 부락 북쪽에 소해(小海)가 있으니 얼음이 단단히 얼 무렵에 말을 타고 8일을 가면 해(海)를 건널 수 있다. 북쪽에는 큰 산이 많고 그 사람들은 몸꼴이 참으로 크고 풍속은 골리칸(骨利幹)과 닮았다. 낮은 길고 밤은 짧으니 이른바 소해(小海 : 바이칼호를 말하는 듯)라 함은 바로 이 물이다.
欽定大清一統志
按唐書地理志骨利幹都播二部落北有小海冰堅時馬行八日可渡海北多大山其民状貎甚偉風俗類骨利幹晝長而夕短所謂小海即此水也
⇒ 수도제강(水道提綱)
백합이호(伯哈爾湖 : 바이칼호인 듯) 역시 소해(小海)라 부른다. 남북 2백여 리 〈땅에서 북극을 본 각도(極出地)는 53도(度) 9분(分)에 54도 8분까지 이른다〉를 건너 동서쪽 9백 리(里)를 질러간다. 더러는 10리 〈서쪽 7도(度)에 10도(度) 5분(分)까지 이른다〉이다. 색릉격(色楞格)은 악이곤(鄂爾坤 : 阿魯渾河, Orkhon River, 몽고 항애산 북쪽 산기슭에서 발원) 뒤에 물이 맑아지지만 흐르는 물이 빨라지는데 너비가 4,50장(丈)으로 양쪽 강 언덕에 산이 많아 호수 정남(正南)으로 물이 흘러드니 〈서쪽은 8도(度) 5분(分)이고 극(極)은 54도(度)이다.〉
호수 사방에는 산들이 있다. 〈듣기에 한 큰물이 있으니 동북 모퉁이에서 흘러들어온다고 한다.〉
水道提綱
伯哈爾湖亦曰小海南北徑二百餘里〈極出地五十三度九分至五十四度八分〉東西徑九百里或十里〈自西七度至十度五分〉色楞格自合鄂爾坤後水清溜急廣四五十丈兩岸多山於湖之正南流入〈西八度五分極五十四度〉湖四面俱有山〈聞有一大水自東北角流入〉
⇒ 당서(唐書)
또한 아장(衙帳) 동북에서 선아하(仙娥河 : : 항가이 산맥에서 발원, 바이칼로 들어가는 Selenge River 色楞格河의 옛 이름)를 건너 2천 리면 실위(室韋)에 이른다. 골리칸(骨利幹)의 동쪽 실위(室韋)의 서쪽에 국부락(鞠部落)이 있는데 개부락(祴部落)이라고도 한다. 그 동쪽으로 15일 가면 유절국(俞折國)이 있고 실위부락(室韋部落)이라고도 한다. 다시 정북(正北)으로 15일을 가면 대한국(大漢國)이 있고 다시 북쪽에 골사국(骨師國)이 있다. 골리한(骨利幹), 도파(都播) 두 부락 북쪽에 소해(小海)가 있어 물이 땡땡 얼었을 때 말을 타고 가면 8일이면 건널 수 있다. 이 소해 북쪽에 큰 산이 많고 그 사람들 꼴이 매우 크며 풍속은 골리칸(骨利幹)과 닮았다. 낮이 길고 밤이 짧다.
唐書 (四庫全書本)/卷043下 又自衙帳東北渡仙娥河,二千里至室韋。骨利幹之東,室韋之西有鞠部落,亦曰祴部落。其東十五日行有俞折國,亦室韋部落。又正北十日行有大漢國,又北有骨師國。骨利幹、都播二部落北有小海,冰堅時馬行八日可度。海北多大山,其民狀貌甚偉,風俗類骨利幹,晝長而夕短。
2. 광동, 남해
⇒ 광동통지(廣東通志)
향산현(香山縣)
봉산(鳳山) : 소람산(小欖山)이라고도 이름한다. 성(城) 북쪽 70리(里) 소해(小海) 안에 있다.
서쪽은 용안도(龍眼都)가 되고 다시 서쪽으로 황량도(黄梁都)가 되니 모두 펀펀하며 널널하여 사람이 살만하다.
廣東通志卷十
香山縣
鳳山 又名小欖山在城北七十里小海中西為龍眼
都再西為黄梁都皆平衍可居
*광동성 바다에 향산현(香山縣) 지도. 소람산(小欖山)도 보인다. 해안에서 ‘소해(小海)’라는 것이 어떠한지 볼 수
있다. (출처위쪽은 규장각, 아랫쪽은 위키미디어)
⇒ 해록쇄사(海録碎事)
주애군(珠崖郡) : 한(漢) 무제(武帝)가 여가(吕嘉)를 평정하고 남해(南海)에 길을 열어 주애군(珠崖郡)을 설치하였다. 애(崖)의 해안가 바다에서 진주(珠)가 나와서 이름을 붙였다. 땅이 사방 천 리에 펼쳐지고 서문(徐聞 : 광동성 뇌주 반도 남단)과 거리가 한 소해(一小海)가 떨어져 바라보면 주(珠)가 보인다. 봄가을로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룻날 하룻밤에 닿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길양군(吉陽軍 : 송과 원나라 때 海南島 남부 행정구역 이름)으로 되었다.
海録碎事 (四庫全書本)/卷04上 珠崖郡 漢武帝平吕嘉開南海置珠崖郡以崖岸邉海出珠因名土方千里去徐聞隔一小海(相望見珠)春秋便風帆一日一夕可至今為吉陽軍
* 광동성 지도 : 지도 가운데 쪽에 광주(廣州) 밑으로 향산현(香山縣)이 보인다. 왼쪽에 뇌주부(雷州府)와 서간현(徐間縣), 애주(崖州 : 珠崖郡을 당나라 때 崖州로 바꿨다)가 보이는데 서간현은 ‘徐聞’의 잘못 표기인 듯하다. ‘一小海’란 말은 뱃길로 왜국(倭國)을 갈 때, 그 설명에 나온다. 이 지도가 ‘一小海’라는 개념에 대한 참고가 될 것이다. (출처 규장각. 輿地圖 : 조선 시대 제작, 만든이 미상)
⇒ 흠정대청일통지(欽定大清一統志)
하통(夏統) 〈하통은 영흥인(永興人)이다. 어머니가 아파 낙양에 약 파는 장에 나아왔는데, 마침 3월 상기(上已 : 삼월 삼짓날)였다. 낙양 안에 왕공자(王公子) 이하들이 아울러 뜬다리(浮橋)에 이르고 사녀(士女)가 이어 모여드니 수레와 예복(車服)을 갖춘 사람들이 길을 환히 비추었다. 통(統)이 배 안에서 있으며 산 약재를 말리기만 하고 이 광경을 돌아보지 않았다. 태위(太尉) 가충(賈充)이 별나게 여기어 배에 다가가 그에게 말을 거는데 그 대답이 메아리처럼 빨랐다. 이 하통이 물고기 부리는 재주를 보여주었는데 매우 뛰어나 벼슬을 주려 하였지만, 곧장 머리를 구부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녀의 시(河女之章 : 회계 땅 효녀 조아(曹娥)를 기린 노래)와 소해창(小海唱 :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바다에 버려진 오자서(伍子胥)를 기린 노래)을 노래하게 되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격정적이며 기개가 있었다. 충(充)이 문무(文武) 의장대(鹵簿)로 그를 빛내고자 하였고 또한 기녀 여럿을 시켜 그가 탄 배를 세 겹 두르게 하였으나 통(統)은 그대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충(充)이 “이 오(吳) 땅 아이는 나무통 사람이요 돌 심장을 가진 이이다.” 하였다.〉
欽定大清一統志
夏統〈永興人以母病詣洛市藥會三月上已洛中王公子以下並至浮橋士女駢填車服燭路統在船中曝所市藥並不之顧賈充就船與語其應如響欲使之仕即俯而不答為歌河女之章及小海唱清激慷慨充欲耀以文武鹵簿又使妓女數輩繞其船三匝統危坐如故充曰此吳兒是木人石心也〉
⇒ 광동통지(廣東通志)
서태위(徐太尉) 언약(彥若)이 광남(廣南)에 다다를 때, 소해(小海)를 건너다가 얕은 물 속에서 유리병 하나를 건졌는데 안에 1치(寸) 되는 거북이 있어 뺑뺑 돌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병 아가리가 너무 작아서 어떻게 해서 들어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병을 배 안에 두고, 한밤중이 되었는데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느끼고서 보니 뭇 거북이가 겹겹이 쌓여 배를 오르며 이 병을 감고 있었다. 서태위가 두려워 이 병을 던져버렸고 뒤에 배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를 “구보(龜寶)’라 이름한다.” 하였다. 〈유숭원(劉崇逺)의 금화자(金華子)에 나옴〉
廣東通志卷五十二
徐太尉彥若赴廣南渡小海于淺水中得一琉璃瓶中有一龜及寸旋轉不停而瓶口極細不知何自而入置之舟中夜半覺舟偏重視之則群龜層叠登舟遶瓶懼而棄之後問舶主曰此名龜寶也〈劉崇逺金華子〉
⇒ 방여승람(方輿勝覽)
○양정수(楊廷秀)가 지은 제남해동묘(題南海東廟) 시에 :
나부산(羅浮山)은 만석(萬石) 무게에 종(鐘)인가 羅浮山萬石鐘
한 다리는 남쪽으로 달리는 것이 목마른 용 같다. 一股南走如渇龍
천둥이 달리고 번개가 지나듯 붙잡지 못하고 雷奔電邁遮不住
단박에 바닷가 닿았으나 갈 곳이 없구나. 直抵海濵無去處
머리를 처박고 바닷물을 들이키다가 조각보 노을을 토해내다가 低頭飲海吐綘霞
머리를 들어 우러러 불신 축융(祝融)을 인다. 舉頭仰戴祝融家
진주를 두른 궁이며 옥을 찬 방이며 수정을 단 전당이며 珠宫玉室水精殿
빠짐없는 강물들이 하루 만에 관청에서 조회를 올린다. 萬水一日朝兩衙
푸른뫼가 사방을 둘러쳐 성곽 노릇을 하고 青山四圍作城郭
바다에 인 파도는 푸른뫼 발치에서 반쯤 걸쳤다. 海濤半浸青山脚
오신 손님들께 해를 씻긴 정자(浴日亭 : 지금 광주시 황포구(黄埔区)에 있음)만한 있을까 客来莫上浴日亭
정자에서 바다를 보고서야 군(君)은 소스라친다. 亭上見海君始驚
푸른뫼가 삐진 곳은 옥결(玉玦)의 틈새 같고 青山缺處如玉玦
밀물이 날아와 쌍궐(䨇闕)을 때린다. 潮頭飛来打䨇闕
한점 구름없는 맑은 하늘로 눈가루가 날리니 晴天無雲奔碎雪
세상 어디에도 이 기절할 아름다움은 없더라 天下都無此竒絶
큰바다는 다시 작은 바다 동쪽에 있어 大海更在小海東
서묘(西廟)는 웅장한 동묘만 못하다. 西廟不如東廟雄
남쪽에 와서 동묘에 이르지 않았다면 南来若不到東廟
서경(西京)은 건장궁(建章宫 : 한나라 장안성 안에 유적)을 보지 못함과 한가지. 西京未睹建章宫
바다신께서 드리운 내 어여쁜 말에 즐거워 海神喜我著綺語
보란 듯 마음 고쳐 잡숫고 안개비를 거두어 들인다. 為我改容収霧雨
하늘땅 높디 넓은 품은 조금 켕기는지 乾坤軒豁未能許
슬쩍 한곳으로 햇살을 새어 비춘다. 小試日光穿漏句
方輿勝覽卷三十四
○楊廷秀詩羅浮山如萬石鐘一股南走如渇龍雷奔電邁遮不住直抵海濵無去處低頭飲海吐綘霞舉頭仰戴祝融家珠宫玉室水精殿萬水一日朝兩衙青山四圍作城郭海濤半浸青山脚客来莫上浴日亭亭上見海君始驚青山缺處如玉玦潮頭飛来打䨇闕晴天無雲奔碎雪天下都無此竒絶大海更在小海東西廟不如東廟雄南来若不到東廟西京未睹建章宫海神喜我著綺語為我改容収霧雨乾坤軒豁未能許小試日光穿漏句〉
*광동성 전도. 뇌주부, 서문, 향산, 나부산(羅浮山)이 보인다. 역시 소해(小海)에 대한 개념을 볼 수 있으리라. (출처 위키미디어)
출처: https://hongjaedong.tistory.com/259 [장성:티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