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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문학 46호 머리글
사물을 보는 법
- R. M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전 문수(문학평론가 본지주간)
릴케가 문학을 필생의 업으로 생각한 이유인즉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옳은 인생을 살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생 주변의 사물들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좋은 문학 창작 작품을 통해서 가장 잘 사물을 바를게 이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는 릴케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시를 창작하는 문인들에게는 좋은 지침이 될 것 같아서다. 릴케의 사물 보는 법과 시 창작의 실제 문제를 말테의 수기를 통해서 규지하고자 수기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역시 소설 작품이란 수기의 한계가 있기에 이에 대한 코멘트도 하고자 한다.
‘말테의 수기’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사물을 보는 법을 배우기로 하였으니 무엇이든 일을 시작해야만 될 것이라 생각이 든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까르빠지오(이태리 화가)에 대해서 논문을 썼지만 도대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결혼’아라는 희곡을 썼지만 그릇된 관념을 애매한 수법으로 증명해 보고자 했을 뿐이다.
아아, 시도 썼다고는 하지만 젊어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만 될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고 그래서 최후에 가서는 십행 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시피 감정이 아닌 것이다. (감정이라면 젊었을 때에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시는 경험인 것이다. 한 줄의 시를 위하여 많은 도회지, 온갖 인간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을 알아야 할 것이며 여러 가지 동물도 배워야 하고, 새들이 나는 법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조그만 꽃들이 아침이면 어떤 몸짓을 하면서 피어나는 가를 알아야만 될 것이다. 미지의 고장의 길들, 뜻하지 않았던 해우,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이별, 이런 것을 추억으로 되살려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기쁨을 갖다 주는데 이해를 못하는 탓으로 슬프게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에 대한 추억, 여러 가지 심각 하고도 중대한 변화를 가지고 이상스럽게 생겨나는 어떤 시절의 병들 , 조용하고 괴괴한 방에서 지낸 어떤 날, 바닷가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이곳저곳의 여러 바다들 , 별들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벅찼던 나그네로서의 밤들, 이런 것들을 시인은 추억으로 되살려 낼 줄 알야만 할 것이다.--아니, 그런 모든 것을 생각해 되살리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다.
하루하루가 같지 않고 다른 맛이 나는 사랑의 밤들을, 그리고 임산부의 부르짖는 소리. 가볍고 흰옷에 감겨 잠자며 산후에 조리를 하는 여인들, 시인은 이런 모든 것을 추억으로 써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임종도 당해 봐야 할 것이며, 열어젖힌 창이 바람에 달가당거리는 방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밤샘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억들을 갖는 것만으로도 역시 불충분하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는 커다란 이내심이 필요하다. 추억만 가지고는 아직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 추억이 우리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몸짓이 되며, 이름도 없는 것이 되어 그 이상 우리들 자신과도 구별할 수 없이 됨으로써 비로소 아주 우연한 순간에 한 편의 시의 최초의 말은 그런 추억의 한 가운데서, 추억의 그늘로부터 발생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시는 모두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것은 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하 생략> --“말테의 수기: 초두 일부 인용, 강두식 역”
릴케가 35세 때, 소설 형식의 이 말테의 수기를 썼다. 28세 주인공이 자기 시작에 대한 반성 형식으로 위의 시론을 전개 한 것이지만 작가 릴케의 나이가 35세이고 보면 28세의 주인공 이름을 빌어 릴케 자신의 시학관을 보여 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굳이 이 시론을 소개하는 이유는 좋은 시가 어느 순간의 단순한 감정과 억지 관념을 시어처럼 느끼는 언어 재주나 언어유희로 적당히 얼버무려서는 시의 윤리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새삼 반성해 보자는 뜻이다.
말테의 수기는 1910년에 쓰여 진 것이다. 21세기인 오늘의 인생과는 그 복잡성과 인생 고뇌의 심도면에서도 비교가 안 되는 사회의 시대이다. 어쩌면 그 시대는 지금보다는 단순한 감정과 관념만으로도 시로 통했을 지도 모를 것이나 지금의 우리 시대는 시학도 고도로 발전했고 삶의 고뇌의 복잡성으로 해서 다양한 양태의 장르가 분화하면서 독자들의 미적 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시인 저만의 아마추어적 취향으로는 독자의 조롱을 면치 못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시인도 최소한 사물을 보는 법을 알고서야 그래도 감히 시와 수필을 운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위의 수기 인용 글에서 우리는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 중요한 시론을 도출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경험과 체험의 차이를 지적 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겪는 사물의 양태들이다. 삶 자체가 모두 경험들이다. 그러나 매일, 삶의 실용성으로 해서 겪는 대부분의 생활지적 경험들은 동물성과도 같은 반복 사항들이라서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고도의 철학적 물음에 고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험들 중에는 내포적 성격이나 실제 인생의 삶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정신 작용을 하는 특별히 것들이 있다. 그래서 중대한 인생의 경험적 요소로서 무게를 갖는 것들은 단순한 경험과 구별된다. 이를 특별히 체험이라 이름하고 구별하는데 이 경험이 중대해서 다시 그 경험을 되새겨서 정신적으로 다시 경험해보는 것, 즉 재 경험 해보는 것을 문학에서는 굳이 체험라고 한다. 만일 체험을 다시 시로 쓰거나 수필로 쓸 때 한 번 더 그 체험을 겪으면서 쓴 글은 재체험한 그 자체이다. 따라서 한편의 글은 한마디로 말해서 작자의 재체험 형식과 내용인 것이다. 즉 재체험 된 것은 작자의 인생관이고 인생철학이고 사물의 새로운 인식 내용이 된다. 문학 작품은 바로 작가의 준엄한 인생 이해이고 비판이고 탐구고 창조이고 철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릴케는 정확히 알고 지적한 것이다.
그 다음은 어느 순간의 우연한 ‘최초의 말’이란 뜻에 깊이 귀 기울이어야 한다.
한편의 시는 사물을 보는 법을 익혀서 여러 재체험을 할 때 얻어지는 이 세상 최초의 말이어야 한다는 매우 무거운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와 수필은 인생에 대한 최초의 말이 돼야 한다. 비슷비슷한 발상과 서정, 말만 달이 표현한 것일 뿐 이미 기존 시와 인식 내용이 똑 같은 것을 자기 것인 냥 도취해서 우쭐대다 황당해지는 시는 이 세상 최초의 말이 아닌 것이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최초의 말을 하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리고 끝없이 탐구한다. 미술가나 조작가가 수 없이 부수고 수정하면서 대상적 사물이 비로소 최초의 발언을 시작할 때까지 작품과 싸운다. 도예가나 서예가는 한군데만의 험이 있어도 절대로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이런 장인 정신이 시심이고 최초의 발언이다. 그러자면 사물을 보는 법을 알아야 하는 데 당시 35세의 릴케는 그 방법을 설파하기 보다는 많은 경험 양상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제시하고 있다. 깨달아서 알아차리라는 암시가 숨어 있다.
말테의 수기 전편의 핵심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 즉 사물 보는 법을 말 하고자한 것이다. 매우 난해하지만 체험적 인생 철학서라 할 수도 있다.
다음 호에서 다시 ‘사물 보는 법’에 대한 문제를 저간의 문학론을 기초로 해서 필자 나름의 논구를 보이고 싶다.
책머리에
사물을 보는 법․2
─문예미학의 입장에서
전문수│본지 주간․창원대학교 명예교수
사물을 보는 법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모든 문화 전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눈 뜨고도 그 큰 코끼리를 다 더듬지 못 할 것이다. 다만 사물을 통해서 알고 싶은 것들의 성격을 큰 범주로 갈라 볼 수는 있을 터인 즉, 그 첫째는 개개의 사물을 그 낱개 하나만의 특성을 따지는 속성론적(본질적 속성 또는 특성) 입장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 존재들과의 관계적 연계 속에서 그 의미를 보는 즉, 존재구조를 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논의는 당연히 사물의 존재구조에 기반을 둔 문예 미학의 입장에 한정될 것이다.
사물의 존재를 속성론을 부정하고 존재 구조론에 입각하게 되면 엄밀히 따져 사물에는 존재구조가 본질이라고 정의된다. 낱개의 사물은 속성상 그 본질적 속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저 알아서 나쁘지 않는 지식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인간에게 사물의 의미는 인간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유기적 기능을 하는 가치야말로 가장 실제적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존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론적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항상 존재구조로만 열려 있게 된다. 사물의 의미는 실은 항상 비어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다만 개별 사물의 과학적 지식, 아무리 더 나아간다고 해도 실용적이고 관용적인 도구적 기존 관념 그 이상은 아니다. 물론 이 도구적 관념마저도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사물의 진가는 어떤 실존적 존재구조에 놓이느냐에 따라 순간마다 발생하고 다시 변하는 의식 구조에 따라 지워지고를 반복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아예 허공에 매달아 놓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사물의 존재를 가두어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늘 열려 있는 사물의 존재구조, 그 자체가 곧 본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타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구조를 다양하고 특수하게 갖게 된다. 아니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의해 무한으로 주어진다고 하겠다. 실존주의에서 흔히 이르는 말처럼 던져짐, 즉 세계 내에 계속 '던져짐'인 것이다. 가령 '나'라는 존재는 무한히 세계에 의해 변하는 존재구조 속에 던져진다. 아내와의 존재구조에 던져져서는 남편이 되고, 아들과의 존재구조에 던져져서는 아버지가 되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들이 되고 낯선 네거리에서는 아저씨가 되는 이것이 실제의 나의 존재이다. 그런가 하면 산속에 던져졌을 때, 빗속에 던져졌을 때, 강둑에 앉아 있을 때, 등등 무한히 나라는 존재는 어떤 실체를 소유하지 못하고 떠돈다. 모든 사물은 이처럼 어떤 의미 속으로 떠다닌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사물들이 살기 위해 스스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현재의 삶을 바르게 보거나, 수정하거나, 더 나아가거나, 더 높은 지혜를 얻거나 등등의 통찰을 얻게 한다. 시인 릴케가 좋은 문학은 사물 보는 법을 알게 하고 또한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한 그 이유와도 같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어떤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나'라는 본질적 특질은 본래 없고 굳이 나의 본질이 있다면 의미를 무한이 낳는 나의 특수한 존재구조들만이 본질이 되어 열려 있는 것이다.
사물은 존재구조가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은, 소위 모든 문화적 의미나 가치가 역시 이 존재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가 계속 다시 쓰여지는 원리도 바로 이런 존재구조 원리에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현대 철학에서도 현존재, 세계 내 존재 등의 존재구조만을 본질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는 인간에게 한층 더 복잡한 존재구조를 요구하고 그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이성적 정의들이,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내가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익명의 구조 속으로 밀려버린다. 믿고 오래 의지할 가치를 미처 깨달을 여가도 없이 허물어지고 오직 실존만이 순간순간의 진실이 되는 것이 현대이다.
그래서 한편의 문학 작품은 시대를 사는 사물의 실존적 존재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불안한 실존적 새로운 존재구조는 늘 낯설다. 사물에 대한 기존관념을 계속 바꿔 놓는 불안한 창조 작업을 한다. 문학 창작은 끝없는 사물의 존재구조를 수정하는 작업이 되는 셈이다. 만일 어떤 사물의 기존 존재구조를 새롭게 바꾸어 놓지 못할 작품이면, 아예 그 사물을 제재로 한 미학적 해석 작업은 중지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린다. 결국 문학 작품은 어떤 사물의 새로운 본질을, 변화하는 시대 의식에 맞게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의 미학은 이렇게 불안과 낯섦의 기쁜 고통이다. 이런 맛보기가 마약이 되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수필가가 되고 문학 평론가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존재구조 역시 따지면 역시 매우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무쌍한 세계의 존재구조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가령, 자연 질서의 변화와 더불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변수에서 찾아야 하고, 또 인간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스스로 개별적 삶의 가치를 어떻게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그 변화 구조를 찾아야 한다. 문학 작품은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하는 주어진 세계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고, 가능한 개연성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창조해 보여 주어야만 하기에 매우 그 복잡성과 다양성은 무한하다.
그래서 이미 이 세기는 실존을 넘어선 그 어떤 단계를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실존이라는 것은 그 뿌리가 기존에 대한 대척적 입장에서의 사고의 틀이기 때문이다. 실은 기존과 실존은 손등과 손바닥 같은 양면적 아이러니이다. 세기말 적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체 틀이 이 실존이었다면, 그러므로 해서 이 실존의식은 무한 경쟁의 무한 도전에 대한 고뇌가 되었다면 반드시 지양하는 다음 단계고 온다는 예견이다. 어떤 기존 관념이 억압과 권력으로 강제한다면, 그 해방 틀 역시 감당하지 못하는 불안한 자유로 해서 또 다시 한 단계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가치의 다양화, 고급 가치와 저급가치의 차별 해체 등 이제 세계보다 개별적 자아의식의 해방을 통해서 산업사회의 부정적 극치를 넘어서고자 하는 철학적 저의가 있다는 것이다. 금세기에 와서 융합과학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변증법적 지양의 길트기가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제 한 문인이 문학 창작을 개별 취향으로 즐기는 낭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새로운 미학적 큰 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간 잠시 새 질서의 어름에서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혼동이 있을 수 있었지만, 문학작품이 새롭게 사물을 보는 법을 제시하는 고뇌 현대적 문예미학은 훨씬 그 깊이가 커졌다고 본다. 기존 가치가 믿을 만하다거나 그래도 비빌 사상적 언덕은 있다는 등의 여유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문인들은 온 몸을 던져 사물 보는 법을 작품에 제시해야 한다. 치열한 문학 정신을 더 높이 요구하게 된 것이다.
<작은문학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