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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홍충도(洪忠道) 1800
청주(淸州)
쌍천서원(雙泉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신식(申湜)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며,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퇴계(退溪)의 문인이며 광해조 때 폐모 의논에 불참하였고, 《가례언해(家禮諺解)》를 저술하였다. 효도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신항서원(莘巷書院) 융경(隆慶) 경오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이색(李穡)ㆍ이이(李珥)ㆍ경연(慶延) 자는 징군(徵君)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유일(遺逸)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 박훈(朴薰) 기묘 명현 ㆍ김정(金淨) 기묘 명현 ㆍ한충(韓忠) 기묘 명현 ㆍ송인수(宋麟壽) 을사당적(乙巳黨籍)에 들었다. ㆍ송상현(宋象賢)ㆍ이득윤(李得胤) 호는 서계(西溪)이며, 괴산(槐山) 군수를 지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어필(御筆)로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화양동(華陽洞)에 또
만동묘(萬東廟)가 있는데 계미년에 세웠고, 명 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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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선생문집 부록 제1권 / 연보(年譜) / 계유년(1873, 고종10) 선생 41세
11월초하루는 병오 3일(무신)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말미에 5조의 대의(大義)로 앞서 상소에서 다하지 못한 생각을 모두 진달하였다.
○ 황묘(皇廟)의 창건은 숙종 갑신년(1704)에 있었는데, 해마다 정월 상순(上旬)에 명의 신종(神宗)ㆍ의종(毅宗) 두 황제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고, 또 ‘한 몸의 군신이라 제사를 같이 모시도다.[古廟杉松巢水鶴 歲時伏臘走村翁 武侯祠屋長隣近 一體君臣祭祀同]한 뜻으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의 진상(眞像)을 서재(書齋)에 봉안하여 제향하였다. 영조 병오년(1726)에 둔전(屯田 관아에 소속된 전지) 5결(結)을 떼어 주어 자성(粢盛 제사에 쓰는 쌀)을 공급하였고, 정조 정유년(1777)에 친필로 사액(賜額)하여 걸었으니, 그 신중히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금상(今上 고종을 말함) 을축년(1865)에 대제학(大提學) 박규수(朴珪壽)가 황묘를 훼철하는 윤음(綸音)을 찬진(撰進)하고 승지 김원성(金元性)이 즉시 가서 편액을 철폐하였다.
이때에 삼가(三嘉) 유생 권숙(權琡)은 명륜당(明倫堂)에 올라 관[冕]을 찢어 버리고 통곡하고서 돌아갔고, 청주 영장(淸州營將) 양주석(梁柱石)은 선화당(宣化堂)에 나아가 통곡하고 인수(印綬)를 던져 버리고 돌아갔다. 그 뒤에 호유(湖儒) 김건수(金健秀)ㆍ정해성(鄭海晟)과 유신(儒臣) 송내희(宋來煕) 공ㆍ임헌회(任憲晦) 공 및 화서(華西) 이 문경공(李文敬公 문경(文敬)은 이항로(李恒老)의 시호)이 모두 소로 만동묘를 복설(復設)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그 외에 수원(水原) 궐리사(闕里祠) 이하 사액(賜額)한 서원이건 아니건 모두 차례로 철폐하였다.
이때에 영남 유생 70여 인이 더위를 무릅쓰고 서울에 들어와서 기어코 대궐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대원군이 이 소문을 듣고 관리를 시켜 잡아다가 칼[枷]을 목에 씌우고 뒷짐지워서 한강 밖으로 쫓아내고, 모든 서원을 헐어 버린 곳에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장사를 지내게 하여 선비들의 소망을 끊어 버렸다.
이해(1865) 여름에 서인(西人)의 벌열(閥閱) 자제 이세우(李世愚)ㆍ신흥균(申興均)이 ‘대원군의 사업과 공덕이 사상보(師尙父)에 견줄 만하니 대로(大老)라 존칭하여 일국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소로 진달하였다. 이 뒤로부터 대원군을
‘대로 합하(大老閤下)’라 불렀는데, 대로사(大老祠)의 편액 명호와 같아서 그 미명을 독차지하지 못함이 있음을 혐오하여, 드디어 그 편액을 철폐하여 ‘강한(江漢)’ 2자로 바꾸었다.
이른바 ‘귀신에게 출후(出後)하였다.’는 것은, 선보도유사(璿譜都有司) 이재만(李載晩)은 곧 고(故) 정언 이상중(李尙重)의 손자요,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의 후손이다. 이상중은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름은 구(球))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종신토록 폐기되었다. 이재만이 총민(聰敏)하고 사술(詐術)이 많아 이[蝨]처럼 빌붙어 아첨을 하니, 대원군이 혐의를 풀어 버리고 그를 임용하였다. 이재만이 일체 그의 뜻을 받들어 종친에게 돈을 강제 징수하여 5세로 요절한 용성대군(龍城大君 인조의 넷째 아들, 이름은 곤(滾))에게 출후하기를 자원하고, 무릇 1세나 3세로 요절한 대군ㆍ왕자 및 각파 가운데 이을 만한 소목(昭穆)이 없어서 후사가 끊어진 자는 모두 이미 귀신이 된 지 1, 2백 년 된 사람을 임의로 수효를 채우고, 심지어 부조(父祖) 이상 9, 10세를 모시고 출후한 자가 흔히 있었다.
이른바 ‘국적(國賊)’이란, 지난 철종조(哲宗朝)에 고(故) 판서 김수근(金洙根)이 연주(筵奏)하여 이현일(李玄逸)의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니 그때 사람들이,
“김수근은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불충하고 문곡(文谷 김수항. 김수근의 5대조) 선조에게 불효하다.”
하였다. 그 뒤 갑자년(1864, 고종1) 대사(大赦)에 한효순(韓孝純)ㆍ목내선(睦來善)도 아울러 탕척(蕩滌)을 받았다. 이때 영상 조두순(趙斗淳), 판부사 김흥근(金興根)ㆍ김좌근(金左根)이 계(啓)를 한 번 올리는 것으로 책임을 때웠다. 방외(方外)의 유생 홍재범(洪在範)ㆍ유진원(兪進源)ㆍ이운하(李雲夏) 등이 모두 이현일의 일로 상소하고 궐외에서 기다렸는데, 엄지(嚴旨)를 받아 원배(遠配)되었다가 곧 분간(分揀 죄의 유무를 분별하여 용서함)되었다. 이 뒤로부터는 대원군의 위세가 이루어져서 아무도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이른바 호전(胡錢)이란, 이보다 앞서 강노(姜㳣)가 한쪽(대원군을 지칭함)의 심부름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북경에 들어갈 적에 경보(輕寶) 수만을 싸가지고 가서 만상서(萬尙書)라는 자와 체결하여, 본국의 물화(物貨)로 소전(小錢)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이때 중국이 해마다 기근이 들어 곡식 1섬의 값이 4, 5천 냥이 나갔으므로 드디어 크게 기뻐하여 일체 소원대로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순치(順治 청 세조의 연호 1644~1661) 이후 수백 년 동안 쓰지 않던 전폐(錢幣)를 모두 찾아내어, 압록강 이서로부터 서울까지 운반이 잇달았다. 박규수(朴珪壽)의 사행(使行)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이 뒤로부터 공사의 상평창(常平倉)에 화물을 쌓아 놓고도 내지 않으니 물가가 뛰어올라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어 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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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C001] 연보(年譜) : 선생의 휘(諱)는 익현(益鉉), 자는 찬겸(贊謙), 성은 최씨(崔氏), 관향은 경주(慶州)이다.[주-D001] 주진(朱陳)의 정의 : 두 집안 사이에 서로 혼인을 맺는 일을 말한다.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만이 한 마을에 살아서 대대로 혼인한 고사.
[주-D002] 경종(景宗) 신임(辛壬) : 경종 원년인 신축년(1721)과 이듬해인 임인년(1722)을 말하는데, 이른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난 시기이다.
[주-D003] 향음례(鄕飮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예절.[주-D004] 정원에서 …… 패(牌) : 조선조에는 승지를 시켜 왕명으로 신하를 부르는데 ‘명(命)’ 자를 쓴 목패(木牌)에 부르는 신하의 이름을 써서 승정원의 하례를 시켜 보냈다.[주-D005] 각건(角巾) : 은자(隱者)가 착용하는 복장. 《진서(晉書)》 왕준열전(王濬列傳)에 “전장에서 돌아온 뒤에 사제(私第)에서 각건 차림을 하고 오(吳)를 평정한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였다.[주-D006] 권당(捲堂) :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불평이 있을 때 시위(示威)로 관을 비우고 나가 버리는 일.[주-D007] 급암(汲黯)은 …… 말 : 급암은 한(漢) 나라 경제(景帝)ㆍ무제(武帝) 때의 직신(直臣). 무제(武帝)가 문학하는 유자(儒者)를 불러 놓고 “내가 인의(仁義)의 정치를 하고자 한다.” 하니, 급암은 “폐하께서 속마음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 인의를 베풀고자 하시니 어떻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면전에서 무제의 속마음을 꼬집었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주-D008] 원납전(願納錢) :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자진 납부하게 한 돈. 액수의 차등에 따라 상민(常民)에게도 수령의 관직까지 주는 등 많은 폐단이 있었다.[주-D009] 기기(氣機) : 천리(天理)에 대한 상대적인 말로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 나온 인심(人心)과 기질성(氣質性)을 말한다.[주-D010] 친친(親親)의 열(列) : 친친은 친족을 친애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흥선대원군을 가리킨다.[주-D011] 구경(九經)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있는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9가지 대도(大道). 1. 자신을 닦는 것 2. 현인을 존중하는 것 3. 친족을 친애하는 것 4. 대신을 공경하는 것 5. 여러 신하를 이해하는 것 6. 서민을 사랑하는 것 7. 온갖 공장이를 오게 하는 것 8. 원방에서 온 사람을 돌보는 것 9. 제후(諸侯)들을 감복시키는 것.[주-D012] 지위를 …… 논한다 : 《논어》 태백(泰伯)에 있는 말로 공자가 이르기를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 하였다.
[주-D013] 호포(戶布) : 봄가을 두 철에 집집마다 부과시킨 호별세와 같은 것이니, 조선 고종 2년에 군포(軍布)의 제도를 고쳤다.
[주-D014] 고요(皐陶)가 …… 집행하는데 :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도응(桃應)이 “순 임금이 천자로 있고 고요가 사(士)가 되었는데, 고수(瞽瞍 순 임금의 아버지)가 살인하였으면 어떻게 하리까?” 하고 물으니, 맹자는 “집행할 따름이다.” 하였다. 이는, 순 임금이 아버지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정으로 공사를 해칠 수 없고, 고요가 법을 맡았다 하더라도 천자의 아버지를 형벌할 수 없으므로 이런 질문을 내어 성현의 용심을 살펴본 것이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아니다.
[주-D015] 한 몸의 …… 모시도다 : 두보(杜甫)의 영회고적시(詠懷古跡詩)의 미련(尾聯) 말구(末句)인데 촉주(蜀主) 유비(劉備)의 고묘(古廟) 옆에 그의 신하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같이 드림을 말한 것이다. 참고로 그 시의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을 적는다. “고묘(古廟 유비의 사당)의 삼송(杉松)에는 수학(水鶴)이 깃들었고, 삼복과 납일(臘日)에는 마을 노인 다니도다. 무후(武侯 제갈량의 봉호)의 사당이 길이 인근에 있으니 한 몸의 군신이라 제사를 같이 모시도다.[古廟杉松巢水鶴 歲時伏臘走村翁 武侯祠屋長隣近 一體君臣祭祀同]”
[주-D016] 사상보(師尙父)에 …… 대로(大老) : 사상보는 주(周)의 개국 공신인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별칭. 대로는 비상한 노인을 말하는데, 맹자가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을 천하의 대로라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D017] 소목(昭穆) :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천자(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세ㆍ4세ㆍ6세는 소(昭)라 하여 왼편에, 3세ㆍ5세ㆍ7세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편에 모시어 3소ㆍ3목의 7묘(廟)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ㆍ2목의 5묘(廟), 대부(大夫)는 1소ㆍ1목의 3묘(廟)가 된다.
[주-D018] 피발좌임(被髮左衽) : 머리를 풀어뜨리고 좌임(左袵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것)한다는 뜻으로 미개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키는 말.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공자가 말하기를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패왕 노릇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으니 백성이 지금까지 그 덕택을 받았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옷섶을 왼편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19] 서명(胥命) : 대명(待命)과 같은 말로 명을 기다리는 것.
[주-D020] 수사율(收司律) : 수사(收司)는 서로 규찰(糾察)하여 고발하게 하는 것으로 전국(戰國) 진(秦) 나라 공손앙(公孫鞅)이 제정한 법. 10집이 1보(保)가 되어, 1집이 죄가 있으면 9집이 연대로 고발하고, 만약 고발하지 않으면 10집이 연좌된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여기서는 연좌법을 씀을 말한다.[주-D021] 삼목 낭두(三木囊頭) : 죄인이 형구(刑具)를 착용한 모양을 말한다. 삼목(三木)은 죄인의 목ㆍ손ㆍ발에 채우는 3개의 형틀, 낭두(囊頭)는 자루로 머리를 뒤집어 씌우는 것.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范滂》
[주-D022] 발배 초기(發配草記) : 귀양 보내는 일을 간단히 적어서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주-D023] 이윤(伊尹)ㆍ부열(傅說) : 이윤은 탕(湯)을 보좌하여 하(夏)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킨 은(殷)의 개국 명재상이며, 부열은 은(殷) 고종(高宗)을 도와 중흥 대업을 이룩한 명재상.[주-D024] 관용방(關龍逄)ㆍ비간(比干) : 관용방은 하(夏)의 직신(直臣)으로 걸왕(桀王)의 음주를 간하다 죽음을 당하였고, 비간은 은(殷)의 직신이자 주(紂)의 삼촌으로, 주왕(紂王)의 음란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주-D025] 갑자 오유(甲子五儒) : 고종 원년 갑자(1864)에, 숙종 때 소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탈관직되었던 목내선(睦來善) 등의 복작(復爵)의 명을 환수할 것과 역시 소위 갑술옥사로 삭탈관직되었다가 복관 사시(復官賜諡)된 이현일(李玄逸)의 관작을 추탈(追奪)할 것 등의 일을 소청(疏請)하였다가 찬배(竄配)당하였던 소두(疏頭)의 다섯 유생, 즉 홍재범(洪在範)ㆍ신용(申榕)ㆍ유진원(兪進源)ㆍ윤헌구(尹憲求)ㆍ이운하(李雲夏)이다. 《高宗實錄 1年 7月》[주-D026]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劔) : 상방(尙方)은 한(漢) 나라 때 어도(御刀) 등을 만드는 관명. 관부(官府)에서 만든 명검(名劍)인데, 예리하여 말을 벨 수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 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이 칼을 얻어 영신(佞臣 장우(張禹)를 말함) 1인을 베어 다른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영신이나 간신을 베는 뜻에 사용된다. 《漢書 卷67 朱雲傳》[주-D027] 구 내공(寇萊公)의 …… 구절 : 구 내공은 송(宋) 태종(太宗)ㆍ진종(眞宗) 때의 재상 구준(寇準). 내공(萊公)은 봉호(封號). 본시는 구 내공이 영남(嶺南)으로 사신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구인데, 당시 사람들이 경구(警句)라 하였다. 그가 만년에 정위(丁謂)의 모함으로 해강(海康)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경내에 이르러 뇌주(雷州)의 관리에게, 바닷길의 원근에 대해 물으니 ‘10리쯤 된다.’고 하였다. 그의 귀양살이의 조짐이 이 전송시를 쓸 때에 시작된 것이라 한다. 《宋詩紀事 卷4 寇準》[주-D028] 재차 …… 소장 : 계유년(1873) 11월 3일에 올린 ‘호조 참판의 직을 사양하면서 소회를 진달한 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말하는데, 주로 흥선대원군의 집정과 정책을 비난 배척한 것이다.[주-D029] 안기영(安驥泳)ㆍ허원식(許元軾)ㆍ이건표(李建杓) …… 무리들 :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지척한 최익현(崔益鉉)의 소에 대해 반박소(反駁疏)를 올린 사람들이다. 본 연보 계유년 16일(신묘) 조에 자세히 보인다.[주-D030] 난간을 …… 구해 내고 : 한(漢)의 주운(朱雲)이 어전에서 성제(成帝)가 존중하는 승상이며 사부인 장우(張禹)의 목을 베기를 간하다가 성제의 노여움을 사서, 그를 죽이려고 어사가 끌어내리니, 주운은 전의 난간을 붙잡고 놓지 않아서 그 난간이 부러졌다. 좌장군(左將軍) 신경기(辛慶忌)가 전하(殿下)에서 머리를 바닥에 짓찧어 피를 흘리면서 극력 간하여 주운의 죽음을 구해 내었다. 《漢書 卷67 朱雲傳》[주-D031] 복합(伏閤)한 …… 하례하였으니 : 당(唐) 나라 직신 양성(陽城)이, 합문(閤門)에서 상소하여 정승 배연령(裴延齡)의 간녕(姦佞)과 무함받은 명신 육지(陸贄) 등의 무죄를 논하다가 덕종(德宗)의 노여움을 사서 죽게 되었는데, 동궁(東宮)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금오장군(金吾將軍) 장만복(張萬福)이, 간관(諫官)들이 합문에 엎드려 간한다는 말을 듣고 연영문(延迎門)에 달려가서 “조정에 직신이 있으니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라고 큰소리로 하례하고는 양성 등에게 가서 “여러 간의대부(諫議大夫)들이 이같이 일을 간언하니 천하가 어찌 태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舊唐書 卷192 隱逸列傳 陽城》 여기서는 상소한 사람 자신이 무신이므로 무신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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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侯祠屋長隣近
杜甫 《咏怀古迹五首·其四》
蜀主窥吴幸三峡,崩年亦在永安宫。(窥 一作:征)
翠华想像空山里,玉殿虚无野寺中。
古庙杉松巢水鹤,岁时伏腊走村翁。
武侯祠屋常邻近,一体君臣祭祀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