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도북종중뿌리찾기
23세 도북 안동권씨 세거 입향조모 반남박씨 할머니를 찾아서
사도마루 ・ 2024. 3. 28. 15:31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북으로 들어와 450년 안동 권문 수천 명의 뿌리가 되신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처사공 할아버지의 비문에 나오는 朴氏籍潘南 贈刑判承男女男克義蔭直長孫男曰得衡曰銑曰鎔과 우리 안동권씨삼괴당세보에 나오는 潘南朴氏父贈刑判承男女라는 11자 그리고 저존각 앞의 명초기에 나오는 몇 글자밖에 없다. 할머니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연유로 도북으로 들어오셨을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유복자 자식을 키워 만석꾼 거부를 사돈으로 혼인을 시켰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필자는 오래전부터 입향조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러나 고구할 길이 없어 답답했다.
2019년 11월 14일. 2019년도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던 날 수험장 학교는 1, 2학년 학생들이 휴업을 하지만 수험장이 아닌 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시험감독으로 나가고 빈 공간에서 인성교육 차원의 선비교육을 실시했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는 오후에 시교육청에 들어가 4년간 맡아왔던 대구광역시교육청공직자윤리위원장으로서의 마무리 결재를 하고 바로 나왔다. 교육청 전체가 태풍의 중심처럼 고요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길로 차를 몰아 두류도서관으로 향했다. 두류도서관에 많은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도서관 족보자료실에는 각 종중에서 발간한 엄청난 종류의 족보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꽂혀 있었다. 반남박씨 족보를 찾았다. 반남박씨세보라 적힌 족보를 찾긴 찾았으나 너무도 막막했다. 수백 쪽짜리 족보가 15권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족보였는데 내가 가진 단서는 우리 보첩에 나오는 11자 속 증형판이라는 직함과 승남이라는 할아버지 휘자 그리고 임진란 전후에 오셨으니 할머니의 아버지는 1500년대 중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뿐인데 보첩 내용이 너무도 엄청난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찾기 틀렸다고 탈기하며 목록편처럼 보이는 세적편(世蹟篇)을 뽑아서 아무렇게나 그냥 펼쳐보았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5권에 해당하는 세적편 한 권이 1611쪽이니 전체로 보면 족히 만쪽은 넘을 방대한 자료 속에서 그냥 한번 펼친 페이지에 거짓말처럼 정말로 거짓말처럼 내가 찾아야 할 기록이 500년 세월을 넘어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났으니 등골이 써늘하고 정신이 아득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마치 날 끌어당기는 어떤 힘에 끌려서 들어온 것 같이 500년 세월을 넘어 이렇게 단번에 도북 입향조 할머니의 아버지를 만났으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화등(火燈)처럼 다가온 ‘朴承男 字叔胤中宗庚辰(1520)生 贈刑曹參判 14卷 3’이라는 글자들을 따라 차근차근 할머니의 세계를 찾아 들어갔다.
반남박씨는 본적이 금성(錦城)의 반남현(潘南縣)이었던 까닭에 반남박씨라 불리나 반남현은 후에 나주에 병합되었기에 나주박씨(羅州朴氏)로도 불린다. 입향조 할머니 반남박씨의 아버지는 중종 경진년(1520)에 태어나 선조 을유년(1585)에 향년 66세로 돌아가셨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암 조광조 선생을 위시한 사림들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己卯士禍) 이듬해에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에 돌아가셨다. 입향조 할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도북으로 1592년 임진란 발발 후 들어오셨거나 이듬해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들어오셨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거창 황산에 계셨을 때이고 극의 할아버지가 예닐곱 살 때이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남박씨 할머니의 아버지는 사후에 형조참판으로 추증된 것으로 보아 자손들이 크게 영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박씨세보에 의하면 묘는 혈계(血溪)에 있는 고조부 묘 동록(東麓) 경좌(庚坐)이며 증손 이혁(以爀)이 지은 비석이 있다. (할머니의 친정을 잘 몰랐을 때 적어 놓은 진술임)
박씨 할머니의 어머니, 음직장공의 외할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아버지는 민희증(閔希曾), 할아버지는 호군(護軍) 민계평(閔繼平)이셨고 어머니의 외할아버지는 생원인 김해송씨(金海宋氏) 희주(希周)이셨다. 반남박씨 할머니의 어머니는 중종 갑신년(1524)에 태어나 선조 계사년(1593)에 돌아가셨다. 반남박씨 할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도북으로 들어오셨을 그즈음으로 생각된다.
도북 안동권문의 실질적인 입향모이신 박씨할머니의 고조부 춘당(春塘) 박맹지(朴孟智) 선생부터 아버지까지의 가계를 반남박씨 세보를 근거로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박씨 할머니의 큰아버지는 휘자가 승원(承元)인데 부인이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아버지가 증영의정(贈領議政) 국형(國衡)이었으니 실로 대단한 집안이다. 그런 대단한 집안의 여인이 박씨할머니의 바로 큰어머니였으니 그런 집안과 통혼할 수 있었던 박씨 할머니의 집안 수준 역시 보통 집안일 수는 없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자유연애로 집안 관계없이 정이 들면 결혼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기에 철저히 격에 맞는 집안끼리 혼인이 이루어졌으므로 혼맥을 보면 그 집안의 격을 알 수가 있다. 큰어머니가 그런 집안 사람이라면 어머니나 아버지 역시 그런 정도의 격을 갖춘 집안이라고 보는 게 맞다.
반남박씨 할머니의 부모, 형제, 자식과 조카
| 부모 | 형제[올케]와 남편 | 자[며느리], 조카 |
부 승남(承男, 1520 ~ 1585) 증 형조참판(刑曹參判) 묘 혈계(血溪) 고조묘 동록(東麓) 증손 이혁(李爀) 찬(撰) 묘갈
어머니 증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1524~1593) 부 희증(希曾), 조 호군(護軍) 계평(繼平), 외조 김해 송희주(宋希周) 묘 산청 북면 고천 어은동촌동록 간좌 유표석 이거 산청 초곡 | 훈(薰, 1546~ 1617)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 | 문진, 문건, 여 양우평, 여 이중영, 문육 |
행(荇, 1547~1595)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배 풍천노씨(豐川盧氏) 부(父) 상(祥), 조(祖) 참봉 우영(友英)] | 문영-생초 와룡정의 주인 *朴文楧1570~1623潘南君秀龍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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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葳, 1553~1593) | 순명, 여 하경수, 여 정광한 |
| 여 권익(權瀷, 1559~1580) | 극의(克義, 1580~1648) [배 풍천노씨(豐川盧氏) 부 사충(士忠) 조 정(禎) 증조 참봉 우영(友英)] |
| 혜(蕙, 출계 承先) | 문룡, 문철 |
| 여 유몽룡 | 무후(無後) |
| 봉(1562~~1601) | 문빈, 문가 |
| 芬(1564~1625) | 여 문형진, 문탈 |
연구를 통해 알게 된 반남박씨 할머니의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박승남 공은 1992년 발간된 함양군지 성씨·인물 명현편에 나오는 11분의 조선조 명현 중의 한 분으로 일로당 양관, 금재 강한, 남계 표연말과 함께 구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춘당 박맹지 선생의 증손자였다. 그러니 반남박씨 할머니는 바로 춘당 선생의 고손녀이시다.
춘당 선생은 일찍이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454년(단종 2)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여러 차례 탁용하려 하였으나 관계를 떠나 함양(咸陽)에 은거하여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세조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1474년(성종 5) 평사(評事)가 되었다.
할머니의 집안 족보에서 찾은 또 하나의 소중한 발견은 바로 승남 할아버지의 고모부다. 승남(承男) 공의 조부(祖父) 박계간(朴桂幹) 공은 춘당 박맹지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큰딸(맏사위)이 바로 당대 함양의 가장 큰 학자요 교육자이셨던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 선생이었다. 당곡 선생이 바로 입향조 할머니 박씨부인의 고모할아버지요 아버지 승남공의 고모부였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함양에서 아마도 최고의 학자 집안이 바로 박씨할머니 집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곡 정희보 선생은 우리 함양의 대표적 선비로 그 끼친 영향이 지대하여 한문으로 된 당곡선생실기(唐谷先生實記)를 함양군문화원에서 군비와 도비를 들여 한글로 번역해 발간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 책을 구할 수 있어 박씨부인의 고모할아버지인 당곡 선생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었다. 함양이 자랑하는 조선조 중기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대부분 그 어른의 제자였다.
당곡 정희보 선생은 본래 남해 출신이었으나 17세부터 처가가 있는 함양 당곡으로 이거하여 35세까지 학문수련과 인격도야에 매진하고 35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당곡은 지금의 수동면 효리 가성이라고 하니 우리 박씨 할머니의 친정도 효리 가성이요 거창에서 도북으로 이거한 이유도 바로 친정 동네 가까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곡 선생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구체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고 삶 자체가 초야에 묻혀 공부하고 실천궁행하며 제자들을 기르고 사회를 교화하는 참 선비적 삶을 살면서 청빈하고 검약하게 살다 가셨기 때문에 널리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통해 당곡 선생의 삶을 재구성해 보면 선생께서는 1488년에 태어나 1547년 60세 때 돌아가셨다.
남해에서 태어나 17세 때 처가 동네로 들어오셨다고 했으니 효리 가성마을로 들어오신 때가 바로 갑자사화로 일두 정여창 선생이 부관참시를 당한 1504년이다. 일두 선생의 산소가 있는 곳이 직선 거리로 1Km도 안되는 지척이라 받은 충격도 컸을 것이다. 생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라는 4대 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것도 선비로 살아오시면서, 공부하는 것을 폄하하고 회피하던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스스로 수신하고 실천궁행하면서 제자들을 길러 쇠미해진 도학을, 끊어질 뻔한 함양의 도학맥을 이어줌으로써 오늘날 함양인들이 좌안동 우함양의 자존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 9세 | 10세 | 11세 | 12세 |
孟智
| 槐幹 | 4자 2녀 | |
桂幹
| 紝
| 承元 |
| 承男 |
| 承先 |
| 承孝 |
| 女 姜奎 |
| 女 朴賢佑 |
| 女 朴億齡 |
| 純 | 承林 |
| 紏 | (무후) |
| 女 鄭希輔 | 4남 2녀 |
| 女 鄭洪 | 2남 1녀 |
| 女 宋浩孫 | (무후) |
| 春幹 | 3자2녀 | |
박씨 할머니의 큰아버지 승원(承元) 공은 남계서원 부보록에 보면 통큰 기부를 하신 어른으로 천령 삼걸의 한 사람인 청련 이후백의 자형이었다. 청련 이후백은 1520년 생으로 승남(承男) 할아버지와 동갑이셨다. 승원 공의 묘소는 본래 우명리와 원평리 인근 산에 있었으나 공단이 조성되면서 유림면 대궁리 사안산으로 이장하여 부인 연안이씨와 함께 누워있다.
개암 강익의 아들 강위명의 부인 반남박씨는 우리 반남박씨 할머니와 4촌 자매였다. 강위명의 장인은 승남(承男) 할아버지의 동생 승효(承孝)였다. 승효의 아들이며 우리 박씨 할머니의 사촌인 박손[초두머리 아래 選]은 삼괴당 할아버지의 외손자인 옥계 노진의 제자로 남계서원 유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항일 의병활동을 적극 전개하고 마지막에는 순국했다.
우리 박씨 할머니의 고모부는 개암 강익의 4촌 강규(姜奎)이다. 그러므로 강규의 아들 딸은 박씨 할머니의 고종 4촌인데 고종사촌 여동생인 강규의 따님은 삼괴당 할아버지의 외손자 남계 임희무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강규의 아들 강위로(姜渭老)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적극 전개하여 고대일록에 수시로 등장한다. 이런 집안 내력을 본다면 임진란 때 우리 처사공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직장공 할아버지가 나이가 조금만 더 먹었더라면 임진란 때 필시 항적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23세 도북 안동권씨 세거 입향조모 반남박씨 할머니를 찾아서|작성자 사도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