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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집(寒沙集) 강대수(姜大遂)생년1591년(선조 24)몰년1658년(효종 9)자학안(學顔), 면재(勉哉)호추간(秋磵), 한사정와(寒沙靜窩), 한사만은(寒沙晩隱)본관진주(晉州)초명대진(大進)특기사항장현광(張顯光), 정경세(鄭經世)의 문인. 이식(李植), 이춘원(李春元), 조경(趙絅) 등과 교유
寒沙先生文集卷之二 / 詩 / 過倻鄭破宅 幷序
余自癸亥以後。未曾索言倻鄭事者。同鄕先後進之間。尙有不出惡聲之意也。而况平日出入其門者。宜不當攻斥於大戮之餘也。然知其罪而不斥。固有知舊忠厚之義。如不知其罪而有一毫愛惜之意。不幾於汩喪其好惡之天乎。倻鄭獻議曰臣民有不共之義。其與都堂書曰讐不同天。臣子之大義也。其入閣而拜恩也。只謝大殿而不謝西宮。賴所親一二人紆餘誘掖之。日黑之後始拜西宮。其時耳目。莫不駭惋。實蕫養之罪人也。晉賈后廢皇太后楊氏。太學生董養登明倫堂嘆曰。國家建此堂。將何爲乎。揖諸生而去。 且其答門人文景虎書曰按通鑑外紀。褒姒被誅。在平王卽位之後云云。是可忍言乎。噫鄭在先王時。猥當遺逸之遇。職長風憲。位至三事。而殺先王之子。廢先王之妃。非徒無一言匡救。又從而慫慂之。至發㐫慘之言。何其負哉。第六曾煩之語。甚痛恨之也。此繫名義大閑。故畧誌之以示後。
可惜山人宅。林泉尙帶羞。
誰言虧一簣。本自乏重裘。
忍與金墉慘。曾煩璧帛求。
溪橋立馬久。秋日照寒流。
時有爲一簣功虧之語者。故第三句反之。
*인조반정으로 처형된 來庵 鄭仁弘의 집을 지나며 지은 〈過倻鄭破宅〉, 밀양 부사로 있을 때 읊은 〈次嶺南樓板上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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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圃先生文集(학포선생문집)鄭暄(1588 ~ 1647)學圃先生文集卷之一詩過仁弘故居 伊淵書院創建會議事入海印寺時過此
過仁弘故居
伊淵書院創建會議事入海印寺時過此
可惜仁弘宅 林泉尙帶羞
誰言虧一簣 本自乏重裘
忍與金墉慘 曾煩璧帛求
溪橋立馬久 秋日照寒流
余自癸亥以後未曾索言仁弘事者同鄕先後進之間尙有不出惡聲之意也然知其罪而不斥者 固有故舊忠厚之義如不知其罪而有一毫愛惜 之意不幾於汨喪其好惡之天理耶吾知其必無 是人也仁弘獻議曰臣民有不共之義其與都堂 書曰讎不同天臣子之大義也且其入閣而拜恩 也只謝大殿而不謝西宮賴所親一二人紆餘曲 譬日黑之後始拜於西宮其時耳目莫不吐舌 實董養之罪人也余故曰不知其罪而有愛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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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者必無是人也時仁穆王后閉處慶運宮目 之以西宮云仁弘在先王時猥當遺逸之遇 職都憲長而殺先王之子廢先王之妃非徒 無一言匡救又從而慫慂之何其負哉第六曾煩 之語甚痛恨之也此繫是非大閑故略誌之以詔 于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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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제45권 / 행장(行狀) / 현감 학포 정공 행장〔縣監學圃鄭公行狀〕
공의 휘는 훤(暄), 자는 언승(彥昇), 성은 정씨(鄭氏)이니, 영일(迎日)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이다. 고려 한림학사 습명(襲明)이 그 비조이다. 휘 몽주(夢周)에 이르러 관직은 시중(侍中)이고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 되었으며, 역성혁명 때 절개를 지키다 죽었기 때문에 우리 조선조에서 문충(文忠)으로 시호를 내렸다. 감찰(監察) 휘 보(保), 호 설곡(雪谷)은 단종(端宗) 때 권귀(權貴)한 자의 뜻에 거슬려 단성(丹城)으로 유배 갔다. 증 참의(參議) 윤관(允寬)과 증 참판(參判) 증(增)을 지나 절도사(節度使) 휘 세필(世弼), 호 임헌(林軒)에 이르렀다. 세필은 청렴결백함으로 이름이 났으며, 이분이 찰방(察訪) 휘 만령(萬齡)을 낳았다. 이분이 첨추 겸 오위장(僉樞兼五衛將) 휘 사서(思恕)를 낳았으니,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 할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바로 공의 황고(皇考 아버지)이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내금위(內禁衛) 관일(貫一)의 따님이니,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 정월 모일 합천(陜川) 종간(宗澗)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랐으며, 몸이 약해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같은 어미에게서 난 닭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들로 쫓아내게 하고 말하기를, “비록 날짐승이지만 어찌 차마 형제가 싸우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의 아이종이 바람에 휩쓸린 매를 잡아 왔는데, 거리에 횃대를 설치하여 매를 두고 그 주인을 기다리게 하였다. 흑치(黑齒 일본)의 난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산속으로 피난하였는데, 지혜와 사려가 일반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다. 14세에 같이 공부하던 아이가 《소학(小學)》 책 읽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되는 도리가 모두 여기에 있구나.”라고 하고, 이로부터 분연히 학문을 하려는 뜻을 두었다. 일찍이 상가(喪家)에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생선과 고기를 놓아두고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공자께서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는 먹는 것도 오히려 배부르게 먹지 않았거늘, 하물며 생선과 고기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으며 자못 무략(武略)이 있었다. 아버지 첨추공(僉樞公)이 활쏘고 말타는 무예를 익히기를 권하자 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오직 옛글을 읽어 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막 약관(弱冠 20세)이 되자마자 곧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실지공부(實地工夫)에 뜻을 굳건히 세웠다. 사서(四書) 및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책을 즐기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도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그 요체라고 생각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뜻을 받들어 순종함이 한결같았으나, 어버이가 실수를 하면 또한 은미하게 간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잠자리를 살핌에 남이 대신하게 하지 않았다. 첨추공(僉樞公)이 일찍이 호남(湖南)에서 벼슬하였는데, 공이 따라가 모셨다. 하루는 밤에 문득 어머니 꿈을 꾸고 놀라 땀이 나자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의 병환이 한창 위독하였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니 끝내 소생할 수 있었다. 3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슬퍼하여 몸이 상함이 예제(禮制)보다 지나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장례 지내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슬프게 부르짖었는데 추위와 더위 때문에 혹 그만두지 않았다. 종들도 감화되어 또한 공을 따라 상례를 잘 치렀다.
공이 처음에는 야홍(倻弘)과 종유하였으나 인륜을 무너뜨리는 논의를 주장함에 이르러서는 절교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뒤에
어떤 일로 인해 정인홍의 집을 지나갔는데, 시를 지어 그 울분을 붙였다. 소서(小序)를 지어 말하기를, “그 죄를 알면서도 감히 공격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하늘의 이치를 상실한 것이리라.”라고 하니, 북인(北人)의 무리들이 다투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은 어버이를 모시고 가족을 데리고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정인홍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혐의하여 다시 단성(丹城)의 옛 마을로 이사하였다. 진주(晉州) 고산(孤山)에 별업(別業)을 두었는데, 그 남쪽에 정자를 지어 ‘임연(臨淵)’이라 하고 정자의 동쪽에 서재를 지어 ‘학포(學圃)’라 하고, 밝은 창 아래 책상에 서사(書史)를 좌우에 두었다.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여가에 물러나 고요히 앉아 성정(性情)을 기르며 우유자득(優遊自得)하였다. 당시의 명현들로 무민(无悶) 박인(朴絪),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운창(雲牕) 이시분(李時馩) 같은 이들이 모두 종유하여 도의로 사귀며 시(詩)로 수창(酬唱)하고 의리를 강평(講評)하면서 즐거움으로 삼았다.
갑술년(1634, 인조12) 어머니 상을 당하여 단구(丹邱)의 선영 아래에 반장하였다. 거상(居喪)에 예를 지킴이 한결같이 이전 아버지 상과 같았다. 삼년상이 끝나자 산방(山房)을 두루 다니며 거주하다가 한참 지난 뒤에 고산(孤山)의 옛 서재로 돌아와 책을 읽고 양아(養痾)하며 노년을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 정축년(1637, 인조15)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함에 이르자 풍천(風泉)의 감회가 때때로 격동하여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 흘렸다. 청나라가 장차 명나라를 공격하려 우리 조선에 병사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였다. 비분강개한 말이 꿈속에서도 나올 지경이었다.
경진년(1640, 인조18) 조정에서 공의 행의(行誼)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에 제수하였다. 계미년(1643, 인조21) 영산 현감(靈山縣監)에 제수되자 공이 말하기를, “분수에 넘치는 은혜로운 명은 의리상 감히 사례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곧바로 달려가 사은숙배하고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출처(出處)를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병이 들어 벼슬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초개같이 미천한 나의 행적이 어찌 헛되이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 6월 모일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이 심해지자 부인(夫人)을 권면하여 부녀자의 규범을 잃지 말라 이르고, 자제들에게 추향(趨向)을 삼가서 문호를 지킬 것을 경계하였다. 처음에는 진주 서쪽의 오산(梧山)에 장례 지냈다가 단성(丹城) 소관동(小冠洞) 좌해(坐亥 남동 30도 방향) 언덕에 개장하였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동추(同樞) 홍원(弘遠)의 따님이니, 그윽하고 순하며 정조가 있고 맑아서 부도(婦道)를 매우 잘 지켰다. 아들 여섯, 딸 둘을 낳았으니, 아들은 무과 급제한 연경(延慶), 연서(延序), 족조(族祖) 대순(大淳)의 시양자(侍養子)가 된 계(枅), 연도(延度), 연하(延廈), 연년(延年)이며, 딸은 사인 최처후(崔處厚), 참의 강대수(姜大遂)에게 시집갔다. 여남(餘男 측실에게서 난 아들)은 연응(延膺), 연은(延殷)이다. 연경의 아들은 형리(亨履)이다. 연서의 아들은 원리(元履)이다. 계의 아들은 상리(祥履), 경리(景履)이다. 연도의 아들은 성리(星履)이다. 연하의 아들은 봉리(奉履), 양자로 나간 중리(中履)이다. 연년은 중리를 양자로 들였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중후(重厚)하고 충신(忠信)하였으며, 밖으로는 너그러웠으나 안으로는 굳세었다. 우뚝이 스스로 서서 오직 의리만 본 것은 포은(圃隱)의 의범(儀範)이 있었다. 뜻이 고상하고 행실이 깨끗하여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비분강개한 것은 설곡(雪谷)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그 밖의 기국(器局)이 우뚝하고 가지런하며, 회포가 높고 트인 것은 각각 병상공(兵相公)과 선영공(先令公 아버지)을 닮았으니, 이는 그 기맥(氣脈)이 유래한 바가 있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거기다 강론하고 학습한 공을 더하여 어렸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효의(孝義)의 행실이 집안에 축적되고 세상에 드러났다. 만약 때를 만나 등용되었다면, 그 업적이 반드시 우뚝이 빼어나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나 지위가 6품(六品)에 불과하고 목숨이 60세를 넘지 못하고 시골 마을에서 생을 마쳤다. 다만 몸만 온전히 해서 생을 마칠 수 있었을 뿐이니, 이것이 과연 하늘의 뜻인가. 공의 5세손 윤채(潤采)가 이운창(李雲牕)이 지은 묘지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행장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드디어 위와 같이 차례하여 쓴다.
[주-D001] 정청(庭請) : 세자(世子)나 의정(議政)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중대한 일을 계품하고서 하교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1618년(광해군10) 1월에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백관을 인솔하여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라고 청하기 위해 하였던 정청을 말한다.[주-D002] 흑치(黑齒)의 …… 많았다 : 《학포집》 권4 〈행록(行錄)〉에 “정유왜란(1597)에 아버지 참판공은 무예(武藝)로 전쟁에 나갔다. 선생은 나이 10세였는데, 홀로 어머니를 따라 가야산 아래로 전쟁을 피하였다. 피난을 도모한 계책이 자못 일반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음이 있었으니, 명나라 사람으로 관상을 보는 사람이 훌륭하게 여기며, ‘이 아이는 반드시 훗날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 항상 만나러 와서 음식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丁酉倭亂, 參判公以武藝從征. 先生年十歲, 獨從母夫人避兵于伽倻山下. 其所以圖避規畫, 頗出人意表. 有一漢人相者見而異之曰: 此必他日偉人也. 常常來見, 饋遺頗厚.]”라고 하였다.[주-D003] 공자께서 …… 않았거늘 : 《논어》 〈술이〉에 “공자께서는 상사(喪事)가 있는 자의 곁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배부르게 먹은 적이 없으셨다.[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04] 호남(湖南)에서 벼슬하였는데 : 〈연보〉에 따르면, 당시 정훤의 나이 20세 때이며, 아버지는 동복 재(同福宰)로 있었다.[주-D005] 하루는 …… 있었다 : 〈행록〉에 따르면, “당시 고향 집에는 어머니와 여섯 살 난 어린 아우가 있었는데, 아우가 설사병을 앓아 위독해지자 어머니가 너무 상심하여 병이 난 것이었다. 꿈을 꾼 뒤 고향 집으로 갔는데, 아우는 얼마 뒤 숨을 거두고 어머니도 슬픔으로 몸이 상하여 쓰러져 마비 증세까지 있었다. 밤낮으로 간호하고 의원을 맞이하여 약을 처방하는 등 정성을 다하니 8개월 만에 겨우 소생하였으며, 8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평상을 회복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06] 야홍(倻弘) :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옛 가야 지역인 합천(陜川) 야로 출신이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정인홍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菴)이다. 북인의 영수(領首)로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주-D007] 절교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 《학포집》 권4 〈행장〉에는 이 구절 뒤에 “가야산의 돌다리에 ‘맹세코 다시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리라.’라고 썼다.[書倻之石橋曰誓不復渡此橋]”라는 구절이 더 있다.[주-D008]
어떤 일 : 《학포집》 권4 〈행장〉에는 “이연서원(伊淵書院) 강회의 행차[伊淵院講會行]”로 되어 있으며, 시의 원주에는 “이연서원 창건에 대한 회의의 일로 해인사에 들어갈 때, 이곳을 지났다.[伊淵書院創建會議事, 入海印寺時, 過此.]”라고 되어 있다. 〈연보〉에도 이연서원 창건의 일 때문으로 되어 있다. 이연서원은 1587년(선조20) 경남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660년(현종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주-D009] 뒤에 …… 하니 : 이 시는 《학포집》 권1에 〈과인홍고거(過仁弘故居)〉로 실려 있으며, 그 소서에는 “그러나 그 죄를 알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친구로서 충후한 의리가 있기 때문이지만, 만약 그 죄를 알지 못하여 한 터럭이라도 애석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정당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하늘의 이치를 상실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然知其罪而不斥者, 固有知舊忠厚之義, 如不知其罪而有一毫愛惜之意, 不幾於汩喪其好惡之天理耶?]”라고 하였다.
鄭暄 | 1588 | 1647 | 迎日 | 彥昇 | 學圃 |
한편 이 시와 병서는 학포 정훤의 사위인 강대수(姜大遂, 1591~1658)의 《한사집(寒沙集)》 권2에 실린 〈과야정파택 병서(過倻鄭破宅 幷序)〉와 비교하면 글자의 출입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혹 강대수의 문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학포의 글이 잘못 실린 것인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주-D010] 박인(朴絪) : 1583~1640.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백화(伯和), 호는 무민당(无悶堂)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출신이다. 그는 산림처사로 학식과 덕이 높고 애국심도 깊어, 1637년(인조15) 삼전도의 국치(國恥) 이후 호를 임헌(任軒)에서 무민당으로 고쳤다. 저서로는 《무민당집》이 있다.[주-D011] 조임도(趙任道) : 1585~1664.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초자는 치원(致遠), 호는 간송당(澗松堂)ㆍ용화산인(龍華山人)이다.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덕산리 간송마을에서 살았다. 1611년(광해군3)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규탄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공조 좌랑이 되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이 있다.[주-D012] 이시분(李時馩) : 1588~1663.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여문(汝聞), 호는 운창(雲牕)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생비량면 어은(漁隱)에 살았다. 유림들이 1850년(철종1)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칠원면(漆原面)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기렸다. 저술로 《단구지(丹邱誌)》와 《운창집》이 있다.[주-D013] 양아(養痾) : 병을 조섭한다는 핑계를 대고서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고표(高彪)가 마융(馬融)을 방문하여 대의(大義)를 물으려고 하였으나, 마융이 병들어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고표가 옛날 선비를 만나려고 급급했던 주공(周公)과는 전혀 다르게 “공은 지금 병을 치료한다면서 선비를 오만하게 대한다.[公今養痾傲士]”라고 책망하고는 그대로 떠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高彪列傳》[주-D014] 풍천(風泉)의 감회 : 풍천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 왕실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현인이 개탄하며 옛 번성했을 때의 주 왕실을 생각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청나라에 항복한 감회를 말한다.[주-D015] 청나라가 …… 지경이었다 : 청나라가 장차 명나라를 공격하려 우리 조선에 5천의 병사를 요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애통함이 심하여 밤에 잠잘 때에도 발현되었으며, 존주양이의 작품을 꿈꾸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작품이 《학포집》 권2에 〈기몽(記夢)〉으로 수록되어 있다.[주-D016] 부인(夫人)을 …… 이르고 : 《학포집》 권4 〈행장〉에는 “여러 며느리들에게 들어와 문후하게 하고,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모쪼록 며느리들과 서로 면려하여 부녀자의 규범을 잃지 마시오. 또 상례 등의 절차를 삼가 지키는 것이 옳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측실이 있어 후사에 대해 묻자, 곧 말하기를, ‘너는 구구한 일로 나를 더럽히려 하느냐.’라고 하였다.[令諸婦人入候, 顧謂夫人曰: 須與子婦等相勉無失閫範. 又謹守喪禮等節可也. 有側室問後事, 則曰: 汝欲以區區溷我耶?]”라고 되어 있다.[주-D017] 자제들에게 …… 경계하였다 : 《학포집》 권4 〈행장〉에는 “여러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의롭지 않은 것으로 너희들을 가르친 적이 있느냐. 여러 아우들을 면려하고 인도하여 추향을 정하여 문호를 부지하도록 하라.’[呼諸子曰: 吾嘗以非義敎汝輩乎? 勉率諸弟輩定趨向以持門戶.]”라고 되어 있다.[주-D018] 동추(同樞) 홍원(弘遠)의 따님 : 《학포집》 권4 〈행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문홍원(文弘遠, 1569~1635)의 자는 여의(汝毅), 호는 모두헌(慕杜軒)이다.[주-D019] 대순(大淳) : 《학포집》 권4 〈행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주-D020] 시양자(侍養子) : 양사자(養嗣子) 할 목적이 아니면서 동성ㆍ이성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거두어 기르던 일. 수양(收養)은 자식이 없는 경우이나, 시양(侍養)은 자식이 있더라도 남의 귀한 자식을 대신 길러 주고 그 대가를 받았다.[주-D021] 설곡(雪谷) : 정보(鄭保)로,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이다. 사육신(死六臣)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연일(延日)로 유배된 뒤 단성(丹城)으로 이배(移配)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경기도 용인(龍仁)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배향되었다.[주-D022] 병상공(兵相公) : 병상은 병사(兵使) 즉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정훤의 증조부인 정세필(鄭世弼)을 말한다.[주-D023] 공의 5세손 윤채(潤采) : 《학포집》 권4 〈행장〉에는 “공의 5세손 후익 등이 집안의 젊은 사람 윤채를 보내[公之五世孫後益等遣門少潤采]”로 되어 있다.[주-D024] 이운창(李雲牕)이 지은 묘지명 : 이시분(李時馩)의 《운창집(雲牕集)》 권3에 〈학포 정공 묘지(學圃鄭公墓誌)〉로 실려 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김숭호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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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圃先生文集(학포선생문집)鄭暄(1588 ~ 1647)學圃先生文集卷之四祭文○告由文○祝文伊淵書院移安祝文 在陜川
伊淵書院移安祝文 在陜川 有儼祠宇惟靈所安變出不測伐樹有奸士類咸驚 父老共歎玆用儆懼謹具新板伏惟尊靈是憑是謐 方改舊廟姑安齋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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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圃先生文集卷之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