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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경전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그 천인의 세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줌으로써 편안함을 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편안함(복지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주석서에는 운송수단이라는 것이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편리하고, 편하게 하는 것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이나 코끼리 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구들은 말이나 코끼리와 같은 탈것들을 받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비구에게 이런 것들을 바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우산이나 슬리퍼, 지팡이, 여행도구들, 그리고 사람과 짐승이 끌지 않는 탈것 등이 비구들이 받을 수 있는 운송수단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보시해도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운송수단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로를 정비하고, 계단이나 교각을 건설하고, 여행을 위한 승용차, 버스, 보트, 여객선, 비행기표 등을 마련하는 것 또한 운송수단, 즉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편리하고, 편안하게 하는 모든 것을 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운송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편안함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인의 네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줌으로써 시력을 줄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등불을 주는 것이 시력을 주는 것이다.”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고 깜깜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을 밝힐 등불이 주어지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등불을 주는 것이 시력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빛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촛불이나 횃불, 전등불 같은 불 밝힐 것들을 주는 것이야말로 시력을 선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천인의 다섯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이 모든 것을 주는 자입니까?”
우리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처할 곳을 주는 자는 이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니라.”
걸식을 한 두에는 몸이 지치고 피로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목을 축이고, 몸을 씻고, 쉴 수 있는 처소로 들어가면 안전함을 느끼게 될 뿐 아니라 상쾌해지고 기력을 되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처할 곳을 주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루빠띠띠 루빤(Rupatiti Rupan)’이란 말은 붓다고사의 □위수디마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몸이 열기와 냉기 같은 요소들로 인해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밖에 나가면 우리는 이런 요소들에 바로 노출됩니다. 우리의 모습은 뜨거운 햇빛이나 먼지바람 같은 날씨 때문에 지저분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실내로 돌아와서 씻고 좀 쉬면 금방 깨끗한 모습과 안색을 되찾게 됩니다. 이처럼 거처할 곳을 제공하는 것이 곧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밖을 돌아다녀야 하거나 많이 걸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모기, 뱀, 전갈, 지네나 다른 독충에게 물리는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큰 위험입니다. 만일 물리게 되면 말라리아를 비롯한 고통스런 질병에 걸릴 위험도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걸어 다닐 때 도로나 길가에 널린 가시 같은 것들로부터 항상 발을 보호해야 하는 문제도 겪게 됩니다. 건물이나 처소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런 갖가지 종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하게 공부도 할 수 있고, 어디에 살아야 될지 걱정할 필요 없이 배움이나 가르침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처할 곳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편안함과 안위의 선물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밖이 덥고 먼지로 가득할 때 여행을 하거나 어디를 가야 할 경우, 눈이 뻑뻑하고 찌르는 것처럼 불편한 느낌으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소에 들어와 안전한 곳에서 쉬고 나면 눈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시야도 깨끗해집니다. 그러므로 거처를 제공하는 것은 또한 시력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고요나 통찰의 명상을 건물이나 처소 안에서 안전하게 함으로써,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의 법을 꿰뚫고 깨달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거처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 보시자는 고요와 통찰의 명상을 수행할 수 있는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을 주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법을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법문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앙굿따라니까야□에 나오는 「웰라마경(Velama Sutta)」의 제9장을 인용하겠습니다.
한때에 거룩하신 분께서 사바티에 있는 아나따삔디까의 수도원인 제따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어느 날 아나따삔디까가 거룩하신 분을 뵈러 찾아왔다. 그가 도착해 거룩하신 분께 경의를 표하고 한쪽에 자리 잡고 앉자 거룩하신 분께서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재가자여, 그대의 집에서는 음식을 보시하는가?”
“녜, 부처님, 제 집에서는 음식을 나눠줍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부서진 쌀가루와 시큼한 죽으로 된 거친 음식입니다.”
“재가자여, 보시하는 음식이 거칠든 훌륭하든 상관없이, 주는 이가 생각도 관심도 없이 남을 시켜서 마치 내던지듯이, 업에 대해서나 미래에 돌아올 결과에 대한 이해도 없이 아무렇게나 준다면, 언젠가 그 보시가 열매를 맺었을 때, 그 보시자의 마음은 훌륭한 음식과 좋은 옷, 값진 탈 것을 즐길 줄 모르게 되며, 다섯 가지 감각의 즐거움도 모르게 된다. 그의 아들과 딸, 노예와 하인과 일꾼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며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도 못하게 될 것이다. 재가자여, 그 이유는 아무렇게나 행한 행위의 결과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왜 어떤 사람들이 훌륭한 음식과 좋은 옷에서도 아무런 기쁨을 즐길 줄 모르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왜 아들과 딸, 일하는 사람 등 다른 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지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업과 그 업의 결과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재가자여, 보시하는 음식이 거칠든 훌륭하든 상관없이, 존중하는 마음을 기울여 잘 생각한 끝에, 스스로의 손으로 내던지지 않고, 업에 대해서나 미래에 돌아올 결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보시한다면, 언젠가 그 보시가 열매를 맺을 때, 그 보시자의 마음은 훌륭한 음식과 좋은 옷, 값진 탈 것을 즐길 줄 알게 되며, 다섯 가지 감각의 즐거움도 알게 된다. 그의 아들과 딸, 노예와 하인과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듣고 귀를 기울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재가자여, 그 이유는 존중하며 마음을 기울여 행한 행위의 결과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하는 것이 가장 유익한지를 더욱 명확히 하시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웰라마라는 브라민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값진 선물들을 나눠주곤 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그의 선물이었다. 그는 팔만사천 개의 황금그 릇에 은을 가득 담아 보시했다. 그는 팔만사천 개의 은그릇에 황금을 가득 담아 보시했다. 그는 팔만사천 개의 동으로 만든 그릇에 보석을 가득 담아 보시했다. 그밖에도 많은 값진 것들이 포함되었다.
재가자여, 그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웰라마라는 브라민은 이야기 속의 어떤 사람이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바로 나였느니라. 내가 바로 그때 그 브라민 웰라마였느니라. 그 값진 선물을 주던 이가 바로 나였느니라.
그러나 재가자여, 그 선물들을 나눠줬을 때, 그 선물들을 받은 이들 중에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선물을 진실로 복되게 할 만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또한 브라민 웰라마는 그런 비싼 선물을 아무에게나 보시하는 것보다, 바른 견해를 가진 단 한사람의 수다원(Sotapanna)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그가 그런 비싼 선물을 보시하거나, 바른 견해를 가진 백 명의 수다원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하는 것보다, 단 한사람의 일래자(Sakadagami. 사다함)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그가 그런 비싼 선물을 보시하거나, 백 명의 일래자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하는 것 보다, 단 한 사람의 불환자(Anagami. 아나함)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그가 그런 비싼 선물을 보시하거나, 백 명의 불환자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의 아라한(Arahant)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그가 그런 비싼 선물을 보시하거나, 백 명의 아라한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의 벽지불(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혼자 깨달은 부처님. Paccekabuddha)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그가 그런 비싼 선물을 보시하거나, 백 명의 벽지불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의 따타가따(아라한이며 완전히 깨어있는 존재. Tathagata)에게 음식을 한 끼 대접했더라면 그 복은 훨씬 컸으리라.”
우리는 이제 ‘어떻게’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그리고 준다는 행위가 가져오는 결과들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제 법문을 마감하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결론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이 경의 끝머리에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담마를 가르쳐주는 존재야말로 ‘불멸’을 선사하는 자이다.”
이에 대해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담마를 설하는 사람, 주석서의 뜻을 풀어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 빨리경전을 가르치는 사람, 담마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제대로 답해주는 사람, 그리고 명상수행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닙바나로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불멸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견줄 데 없는 가르침을 남에게 가르치는 덕으로, 결국에는 그들 자신이 불멸의 닙바나를 얻게 될 것이다.’
□이띠유따까□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보시가 있다. 물질적으로 하는 것과 담마(법. Dhamma)로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보시 중 법보시가 월등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나눔이 있다. 물질적으로 하는 것과 담마로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보시 중 법을 나누는 것이 월등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도움이 있다. 물질적으로 하는 것과 담마로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보시 중 법으로서 돕는 것이 월등하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쌉바다낭 담마다낭 지나띠
쌉바다낭 담마리쏘 지나띠
쌉바라띵 담마라띠 지나띠
딴학카요 쌉바둑캉 지나띠”띠.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담마의 선물이야말로 모든 선물을 능가한다.
담마의 맛이야말로 모든 맛을 능가한다.
담마의 기쁨이야말로 모든 기쁨을 능가한다.
갈애로부터의 자유는 모든 고통을 정복한다.”
여러분 모두 그 훌륭한 선물을 줄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 훌륭한 맛을 즐길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 훌륭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고통을 정복 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불멸의 닙바나를 선사하는 사람들이기를 발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우 레와따 반떼 지음/ 레이님 번역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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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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