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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샘물~회남재~청학이골~청학선사~남부능선~삼성궁
▼ 아래 보라색은 옛길로 추정되는 곳이다
▼ 악양에서 회남재로 이어지는 옛길은 문밖골 우측에 있으며 아직 도로 지번이 살아있다
▼ 조선 지형도에 표시된 등촌리와 청학리, 불지(상불지),진주암,세동은 위치는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세동을 표시된 곳은 현재 삼성궁이 있는 곳으로 위에 카타카나로 가는골로 표기되어 있다
▼ 위성으로 본 청학선사 가람배치
▼ 류겸암일기(柳謙菴日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정감비록(鄭勘秘錄)』의 「청학동기(靑鶴洞記)」와 「조선비결전집」에 있다. 아래가 원본인데 글씨 간격으로 보아 끝쪽 두줄은 후대에 쓴 글씨가 겹쳐져 식별이 어렵게 되어 있다
▼ 포토샵을 이용해 겹쳐진 부분을 분리하였더니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도솔산인>선생님께 보냈더니 번역본이 왔고 내용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余 素有山水之癖 周覽四方山川至晋州西杜里 幾見靑鶴洞 而未果矣
나는 본래 산과 물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자연을 두루 살피다가 진주(晋州) 서두리(西杜里)에 이르러 몇 번 청학동을 보려 했으나 아직 가지 못했다.
一日老僧來訪 頗有識見 語佳山麗水而語及此洞 余曰 汝能得記否 僧詳知矣
어느 날 늙은 중이 찾아와 만나보니 자못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이 있고, 아름다운 산과 고운 물에 대해 말하다 청학동에 미쳤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비기(秘記)를 얻었는가?”스님이 대답하기를 “자세히 압니다.”
翌日 偕僧 發行十一到河東花開川上店留宿 又行得一巖穴留宿 午飯于橙山村齋 三日糧艸行露宿 第三日到石門 僅容一人而行 入石門 吟一句 啼鳥驚人巖下樹 桃花流水谷中天
다음 날 스님과 더불어 같이 길을 떠난 지 11일에 하동(河東) 화개천(花開川) 위의 주막에서 유숙(留宿)하고 다음 날 길을 떠나 하나의 바위굴을 얻어 유숙하고 등산촌재(橙山村齋)에서 점심을 먹고 3일 양초(糧草: 식량과 꼴)를 갖고 가다가 들에서 잠을 자고 3일째 되는 날 석문에 이르렀는데 겨우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었다. 석문에 새겨진 한 구절을 읊으니, 바위 아래 나무에서 새가 울어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골짜기 가운데 하늘에 복숭아꽃이 물에 흘러가더라.
步步漸進 抱回四十里 大開平坦 可作畓千餘石 而升種石出之地 可居數千戶 至于當穴 壬坐丙向 白雲山 三峯爲正案 因吟一句 萬樹桃花疎竹界 三秋楓葉澗松邊
걷고 걸어 조금씩 나아가니 40여 리를 돌아올 정도의 평탄한 들판이 크게 열렸다. 가히 천석(千石)지기의 논을 만들 수 있고 되(升)의 씨를 뿌리면 석(石)을 수확할 수 있는 땅이라. 가히 천여 채의 집이 살아갈 수 있겠다. 여기는 마땅히 임좌병향하며 백운산 세 봉우리가 바로 안산이 되어야 한다. 인하여 한 구절을 읊으니, 많은 꽉 들어찬 대나무 속에 복숭아 꽃이 있고 가을의 석 달 단풍잎은 소나무 가의 산골 물에 있도다.
有一石井 而石面大書 高麗樂云居士 李靑蓮 居二十年 不通人世 居三十年 雷破石門 可容駟馬 居四十年 名公居卿 賢士英才輩出之地 最爲南州名勝 地高霜晩 凶年不入 兵火不至 盧李鄭柳張姜 最蕃而六姓俱發之地 洞中多有靑鶴 故云靑鶴洞 故有是名 而或云鶴板 一云磧野矣(누락부분)
돌우물 하나가 있는데 돌 위에 큰 글씨로 “고려 낙운거사 이청련(高麗樂云居士李靑蓮)“ 이라 쓰여 있네. 20년을 살면 인간 세상과 통하지 않고 30년에 이르면 우레가 돌문을 깨뜨려 네 마리의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이 생기며 40년을 살면 이름난 정승과 판서(높은 벼슬)와 어진 선비와 영걸한 재목이 무리로 나오는 곳으로 남쪽 지방에선 가장 좋은 명승지이다. 땅은 높으나 서리가 늦게 내리며 흉년이 들지 않고 병화가 이르지 않는다. 노(盧), 이(李), 정(鄭), 류(柳), 장(張), 강(姜)씨들이 가장 번성하고 여섯 성씨가 갖추어 발복(發福)하는 땅이다. 골(洞) 가운데 푸른 두루미가 많이 있어 청학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혹은 학판(鶴板: 두루미 판), 적야(磧野: 돌무더기 들)라고도 했다.(누락부분)
李靑蓮靑鶴洞訣
地理各姓論朴柳姜鄭趙崔權閔金宋許愼沈黃河表梁南尹洪徐張禹吳盧成林孟千都蘇薛房大昌之地 此中李柳河姜鄭先發也 朝鮮史記中有曰 智異山南麓有靑鶴燕巢形 朝鮮名基也 或云磧野 或云鶴野 或云沙蔘洞 洞後有石角三峰 其下有光岩 谷水西山山東流 洞口有石門 其內有石泉 上壽百四五十 中壽百二三十 下壽九十矣 壬坐丙向 白雲山三峰爲正案 南海水當前 居千餘戶則作畓千餘石地 地高霜晩 升種石出 無限大地也 天運正當 時運自開 自然指路之人出之 嶺南尊士二十餘人會設則 十年內成村百餘戶 二十餘年雷破石門駟馬出入 四十餘年內卿相名賢達士出 文千武萬之地 此洞各姓亦皆興旺之地也
高麗處士李靑蓮記
이청련청학동계
지리산 주위의 각 성씨들을 논하면 박(朴) 유(柳) 강(姜) 정(鄭) 조(趙) 최(崔) 권(權) 민(閔) 김(金) 송(宋) 허(許) 신(愼) 심(沈) 황(黃) 하(河) 표(表) 양(梁) 남(南) 윤(尹) 홍(洪) 서(徐) 장(張) 우(禹) 오(吳) 노(盧) 성(成) 임(林) 맹(孟) 천(千) 도(都) 소(蘇) 설(薛) 방(房)이 크게 창성하는 땅이다. 이 중에서 이(李) 유(柳) 하(河) 강(姜) 정(鄭)이 먼저 발현하였다. 조선사기(朝鮮史記)이르기를 ‘지리산 남쪽 기슭에 청학동이 있는데 제비의 둥지 모양으로 조선의 이름난 터이다. 혹은 적야(磧野)라하고 혹은 학야(鶴野)라고도 하며 또는 사삼동(沙蔘洞)이라고도 한다. 청학동 뒤에는 돌이 뿔처럼 솟은 세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물은 서쪽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 청학동 입구에는 돌문이 있고 그 안쪽에는 돌 샘이 있다.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은 백 사오십세이고 중간 수명은 백이삼십세이며 가장 낮은 수명이 구십세이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백운산 세 봉우리가 정남 쪽의 안산(案山)이다. 남해의 물이 앞에 임하였다. 일천여호(戶)가 살수 있으므로 일천여석(石)의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땅이 높으나 서리는 늦게 내리므로 한 되의 곡식을 심으면 한 석(石)의 수확을 하니 무한히 큰 땅인 것이다. 천운(天運)이 바로 당면하고 시운(時運)이 스스로 열리면 자연히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영남의 뛰어난 선비 이십여 명이 모여서 마을을 세우니 10년 안에 마을을 이루어서 100여호(戶)가 될 것이다. 20여년이 지나면 석문이 우레에 깨어지고 큰 수레 마차(駟馬)가 출입하게 될 것이다. 40년 안에 공경(公卿)과 장상(將相), 명사(名士) 현인(賢人) 달사(達士)가 배출될 것이다. 문관이 일천이요 무관이 일만인 땅이로다. 이 골은 각 성씨가 모두 흥성하는 땅이다.
고려처사 이청연이 씀.
<지리구구에서 세석을 청학동으로 주장하는 근거>
<유운룡>이 열거한 곳이 바로 세석이다.
<청련거사>가 청련을 기르며 살았던 돌샘이 [청학연못]을 가리킨 것 같다 .
<유운룡>은 지리산을 다녀온 연대 표시를 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활동시기로 봐서 대개 1570년경으로 추정이 된다.
<유운룡>이 보았다는 각자는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이며
연못의 바위에 새겨진 [鶴洞壬(학동임)]을 소개한 <송병선> 역시 이 각자를 보았다고 하고,
1851년에 지리산을 다녀온 진주선비 <하달홍>은
[촛대봉 능선 [청학연못] 부근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위의 각자를 보았다.]고 그의 저서 [월촌집]에 기록해 놓았다.
이후로 일제 강점기인 1934년의 지리산 자료에서도 위의 각자를 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청학연못] 주위에 새겨진 파자 형태의 각자가 <이청련>이 도참설을 기록한 문구인지
아니면 역시 고려 시대에 세석을 청학동으로 알고 왔다가 청학동은 찾지 못하고
칠언절구 시 한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섰다는 널리 알려진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의 각자인지는
탁본 등 다방면의 탐구가 이루어지면 밝혀질 듯 하다.
한편 <이인로>는 그의 [청학동기]에서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비좁고 꼬부라졌는지
엎드려가다가 기어가길 수 십리하면 광활한 지경이 나오는데,
사방이 비옥하여 곡식을 가꾸어 먹기에 족한데다 난세 때 이곳에 피난와 살았던 흔적이 완연하다.]고 했다.
<이인로>가 열거한 곳도 역시 세석으로 추정되며, 연못 주변에는 집터와 경작지의 흔적이 역력하다.
지리산에 청학동을 찾으러 왔다가 청학동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시로 읊어서
아래와 같이 바위에 새겨 놓고 돌아 섰다 한다.
頭流山逈暮雲低 萬壑千巖似會稽
杖策欲尋靑鶴洞 隔林空聽白猿啼
樓臺縹 ㅁ三山近 苔蘚依희四字題
試問仙源何處是 落花流水使人迷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구름 낮게 깔려 천만 봉우리와 골짝이 회계산을 닮았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숲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 메인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세석의 [청학연못]이 지닌 역사도 지리산 청학동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 묵계초교 앞에서 지탐 팀과 합류해서 삼성궁에 픽업용 차량을 올려 놓고 회남마을 죽림정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08:42)
▼ 곡점에서 부터 온 산이 대나무 숲이다. 군데군데 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모두 지리산 참죽이고 강도 면에선 으뜸이라고 한다.
▼ 회남이골에서 옛길을 따라 오른다. 묵은 길이지만 흔적은 뚜렷하다
▼ 다만 산죽이 웃자란게 탈이다ㅠㅠ
▼ 길을 버리고 계곡으로
▼ 고로쇠 줄은 깔렸지만 건계곡이 번갈아 진행되면서 거칠다
▼ 합수부에서 회남재로 이어진 왼쪽으로 진입한다(09:03)
▼ 막판에 길이 거칠다
▼ 윗쪽에 회남재 안내판이 보인다
▼ 포장길을 내면서 토사가 흘러내려 계곡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ㅠㅠ
▼ 미스트롯의 힘이 이곳까지...
회남재를 거론할 때 맨 먼저 나오는 얘기가 남명 조식의 일화다. 지리산 자락의 살만한 곳을 찾아온 남명이 이 고개에 올랐다가 악양 들판을 내려다보니 골이 협소하고 물이 섬진강으로 곧장 빠지므로 길지가 아니라 하여 돌아선 데서 회남재(回南峙)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동군청이 발간한 마을이름의 유래에 관한 책자를 들춰보면 남명이 고개를 오르면서 얼마나 힘들었든지 걸음을 한번 떼놓을 때마다 세번식 숨을 쉬었다 하여 이 고개를 '삼아령(三阿嶺)' 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어쨌거나 회남재가 남명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그러면 남명은 이 언저리의 길지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길지의 대명사로 통하는 청학동이 바로 고개 넘어 묵계리 골짜기에 있는 데다 등촌리의 서쪽 골짜기 또한 청학이골로 불리는 곳인데 말이다. 그 당시 지리산을 무려 열여섯 번이나 올랐다는 남명은 청학동 지형과 비슷하다는 불일폭포와 세석평젼 역시 보지 못했던 것일까. 결국 고개를 내려간 선생이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낸 곳이 시천면 덕산이었으니.
아쉽게도 회남재와 남명 선생의 연광성은 이것이 전부였다. 재 아래 덕기마을에 사는 유복례씨에 따르면 회남재는 오히려 묵계사람들이 화개장을 보기 위해 주로 넘어 다니던 길이다. 아들이 등촌리 이장인 유씨는 묵계 사람들이 쌀을 지고 넘어와 하동장에서 생선 등과 바꿨다는 얘기며, 사내애를 업고 하동장을 다니던 전씨 할머니는 워낙 심장이 강해 호랑이가 따라 오는데도 끄떡하지 않고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둥, 또 재 아래에는 옛 주막터가 지금도 있다는 등 옛 얘기를 마치 엊그제 일처럼 들려준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서 평생을 살아온 유씨에게 하동장보다도 강심장의 전씨 댁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각인된 기억은 6.25전쟁인 듯 싶었다. 뭐라 묻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빨치산 얘기는 아예 일손까지 멈추고 한동안 봇물 터지듯 쉼 없이 이어졌으니까.
"빨갱이들이 내려와 양식 좀 주면 (집을)태우지 않겠다고 해서 쌀 두 가마를 소잔등에 걸쳐 보냈는데 고개를 올라가다가 가마니가 풀려 쌀이 모두 빠져나갔데요. 쌀이 내리 쏟아지는 틈을 타 소를 몰고 가던 시아버지는 중기마을을 돌아 정신없이 도망을 칠 수 있었는데 결국 면의원이 나온 집이라고 다섯 채나 되던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지요. 그래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지고 땅이 있으니까 안 죽고 지금껏 살아왔지요."
유씨의 기억이 알려주듯 회남재는 지리산에 숨어살던 빨치산들에게는 식량이나 물자를 구하기 위해 이용하던 주요 통로였으니 주민들에게는 차마 쳐다보기 싫은 끔찍하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곳이었을 법하다.
곡식 농사가 잘 되고 기후가 따뜻해 살기 좋은 이 고개 언저리는 실제로 빨치산에게는 지리산으로 드는 기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또 빨치산이 드나드는 곳인 만큼 자연 토벌대가 묵계와 악양을 넘너들며 수색 작전을 펴거나 매복 근무를 자주 벌였으니 6.25때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출처:월간<사람과산> 2001년 5월호>
▼ 회남재
▼ 회남재에서 내려다 본 악양벌판
▼ 성제봉에서 고소산성으로 이어진 능선인데 중간에 신선봉에 구름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 임도를 따라 청학선사가 있는 청학이골로 향한다. 지금은 그아래 골짜기로 이름을 옮겨 놓았다 (09:38)
▼ 임도 급커브 지점에서 청학이골로 바로 내려선다
▼ 폭신폭신한 부엽토를 밟으며
▼ 큰 삼나무가 세그루 있는 곳으로 떨어져 계곡으로 진입한다(10:02)
▼ 말발도리
▼ 안가요?
▼ 계곡치기로~
▼ 청학선사
▼ 하단
▼ 하단,중단,상단으로 가람이 배치된것 같다
▼ 상단
▼ 금낭화
▼ 현호색
▼ 개별꽃??
▼ 청학선사 이후로 길이 반질 반질해서 따르다가 계곡으로 들어섰더니 야철이 보인다
▼ 윗쪽 독가는 보수 공사중이다(10:45)
▼ 길옆에 넓은 터(10:52)
▼ 너럭바위까지는 길이 뚜렸했고 여기서 점심을 먹고 간다(10:55)
▼ 1시간 일찍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비닐 쉘터가 있어서 별 문제없이 느긋한 오찬을 즐기고 다시 출발~(11:55)
▼ 거친 좌측 골을 타고 올라가는데 누군가 세워놓은 듯한 바위를 발견했다
▼ 큰바위가 있길래 그냥 지나치기 만무하지~
▼ 어라~ 석문이 보인다. 자세히 살폈지만 글귀는 없다
▼ 습기와 비로 옷을 입었다 벗었다...ㅋ~~
▼ 능선에 올랐지만 안개로 조망은 꽝이다(12:44)
▼ 조망이 없기에 시루봉 갈림길에서 산죽을 피해 가는골로 내려선다
▼ 숯 집하장으로 보인다
▼ 건너편으로 삼성궁이 보인다
▼ 또 다른 금줄을 넘어서
▼ 꽃중에 제일 야하다고 하는 복숭아꽃~ 예쁘기만 한데~^^
첫댓글 대군을 이끌고 다녀오셨네...
수고많았습니다 ^^ 😀
옛길을 따라 회남재와
청학선서가 있는 청학리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능선에 올랐을때 짖은 안개가 끼어 단축으로
산행을 마무리 했습니다.
산에는 두릅도 조금씩 올라오던데 이번주도 비소식이 있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