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니야~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지척동방 천리되야 바라보기 막연쿠나은하작교 쾅무너졌으니 건너갈 길이 막연쿠나
인적이 끈쳤으니 차라리 잊을까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야있고
잊으리라 맹세를 해도 그래도 못잊어 걱정이라 눈 감아서 보여진다면 소경이라도 되어질거나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만리창공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은 월색도 유정터라
님이라면 다 다정하며 이별이라고 다 슬프냐
이별마자 지은 맹서를 태산 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맹이 무너질줄 어느 가인이 알었을꺼냐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창부타령>
창부 타령의 '창부'는 원래 무당의 남편이자 악기를 연주하는 잽이를 가리켰는데 이 노래에서는 광대의 '혼'을 나타내는 '광대신'이라고 함
우리가 알고 있는 경기 뱃노래와 사뭇 다른 곡조입니다. 음을 가지고 논다. 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전태용의 본업은 무업이었습니다. 굿판에서 피리와 해금을 불었으니 그의 노래 역시 피리가락 해금가락이 녹아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본시 악기는 노래를 따라하는 것인데 이 경우는 조금 경우가 다를 수 있겠습니다.<하동생각>
전태용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려워 경기 보존회의 글을 가져 왔습니다.
<경기민요 보존회 글>
전태용 명인의 숨은 발자취를 찾기 위해 그와 교류했던 국악인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전태용 명인을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과연 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지 여기 그 취재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전숙희 명창이 말하는 아버지 전태용,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묵계월 이은주 명창이 말하는 전태용의 경기민속악, 전태용 명인과 절친하게 지냈던 김한국 김점석 명인의 증언 내용이 여기 실려있다. 한결같이 그의 뛰어난 예술성과 따뜻한 성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본 취재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쪼록 여기 정리된 증언 내용이 많은 분들에게 전태용 명인의 생애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내가 해금과 피리의 대가 전태용 명인을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23세 때였다. 그로부터 5,6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나는 그분이 민요를 그렇게 잘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그런데 어느날 지연화 씨가 굿판 뒤풀이 때 해금을 연주하고 있던 전태용 명인에게 소리 좀 해보라고 권했고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들었는데 처음 듣는 그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다. 그때 들은 민요는 바로 그분의 특기인 <창부타령>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그때까지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던 지연화, 이소향 씨의 <창부타령> 스타일의 원조가 바로 전태용 명인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그 뒤로 1960년대 후반부터 20여년 동안 나는 전태용 명인의 민요를 시간 나는대로 녹음을 했다. 그 소리에 애착을 가지고 녹음한 것은 우선 듣기에 너무 좋고 또 내가 공부삼아, 그리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한 것인데 이렇게 음반화까지 되니 기쁘고 보람있게 생각한다.전태용 명인의 창법은 서울에서 보편적으로 불리는 소리에 비해 엇박, 변조가 너무나도 색다른데 그런 소리를 ‘드렁제’, ‘인천제’라 한다. 전태용 명인의 형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형은 전태용 명인 보다 더 소리를 잘했다. 그 분들의 가족은 모두 민요를 다 그런 식으로 불렀고 그래서 전태용 명인도 자연스레 그런 창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전태용 명인은 호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에 꽁하거나 집착하는 법이 없고 뒷심이 없었다.(1998년 7월 4일 국악인 김점석 명인 증언)내가 전태용 명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내 나이 5,6세 때다. 당시 나는 잔다리(영종도)에서 그분의 등에 엎혀서 자랐다. 그렇게 우린 첫 만남부터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가족처럼 지냈다. 내가 그분과 음악 교류를 시작한 것은 15,16세 때이고 본격적으로 음악 일을 함께 다닌 것은 군복무를 마친 뒤부터다.그분과 나는 부자지간이나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했기 때문에 그분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 나는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과 같은 심정이고 세상 살아가면서 마음이 가장 잘 통했던 사람이 없는 이 공허한 마음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그분은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인천에서 서울만 오면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나와 오자환 씨에게 전화를 해서 밤새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함께 술을 마시곤 하였다. 술과 그분의 의리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는데 1980년대 일본에 순회 공연을 함께 갔을 때 일이다. 당시 공연단장이 춤 인간문화재 김숙자 씨였는데 일본 순회 도중에 소리를 좋아한다는 어떤 재일교포가 김숙자 씨한테 반해서 못살게 구는 바람에 김숙자 씨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보다 못한 전태용 명인이 김숙자 씨를 보호해 주고 그 교포를 저녁에 불러내 밤새도록 술을 함께 먹으면서 좋아한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어 그 교포의 정신을 쏙 빼놨다. 그 뒤 자초지종을 다 알게 된 김숙자 씨가 덕분에 혹 뗐다며 전태용 명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적이 있다.전태용 명인은 민요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고 해금과 피리로도 실력가였다. 그리고 우스게 재담을 잘하여 주위 사람을 늘 웃겼다. 그런 재담 하나에도 멋이 깃들어 있는 예술가였다. 굿판에서 그분은 주로 해금을, 나는 주로 피리를 연주했는데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연주도 절로 호흡이 잘 맞았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후반에 그분(해금)과 나(대금)는 이충선(피리), 정달영(가야금), 김득수(장고) 씨와 같이 단짝으로 공연, 방송 등에서 민요 반주 일을 많이 했다.(1998년 8월 11일 국악인 김한국 명인 증언)예전에는 부녀지간에 국악 한다는 게 창피했다. 불과 몇년 전만해도 사회 분위기가 그랬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국악 한다는 걸 숨기고 부끄러워 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생전에는 그냥 해금, 피리 악사로만 알았지 그 민요 창의 가치를 잘 몰랐다. 이런 소리도 있으니 한번 해봐라 하고 가르쳐 주시면 나는 무시하고 배우려들지 않았다. 그 일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후회스럽고 가슴이 아프다.그런데 어느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아버지의 <뱃노래>를 듣고서 ‘아, 저렇게 하는 소리도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뒤늦게 아버지의 녹음을 들으면서 방창을 해보는데 구비구비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하고 도저히 흉내내기가 어려운 신비로운 부분들이 많다. 내가 느끼기에는 피리 연주법과 그 성음을 따서 부르는 ‘피리 성음조’ 창법인 것으로 생각된다.아버지께서는 <창부타령>과 <노래가락>을 즐겨 부르셨는데 장단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소리를 하셨다. 그렇기에 무대에서 흔히 불리는 판에 박힌 경기민요에 비해 자연미가 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서 집 뒷동산의 감나무에 기대어 노래 부르길 즐겨 하셨다고 하는데 집안 어른들의 음악을 어깨 넘어로 듣고 그걸 흥얼거렸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민요의 경우엔 무속세계에서 자득하신 셈이며 해금과 피리의 경우 육촌형인 전상현 명인한테 배우셨다고 한다.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분이었고 누구와 다투시는 걸 보지 못했다. 노소동락 하셨고 정이 무척 많으셨다. 돈도 그날 벌면 그날 다 써버리셨다. 한이 너무 많으셨기에 그걸 그날그날 풀고 욕심없이 사셨다. 그리고 자기 색깔을 잊지 말고 자신의 성품대로 순색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본 음반의 발매를 계기로 앞으로 ‘전태용 CD 출반 기념회’와 ‘전태용제 경기민요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 음반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1998년 7월 9일 전태용 명인의 딸, 경기민요 전숙희 명창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