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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2020년 7월 19일 / 신명기 6:4-5
■ 어느 부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하루는 창밖으로 한 남자가 보리밭을 밟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자세히 내려다보니 그는 다름 아닌 병원의 원장이었다. 그때 그녀의 놀라움은 실로 컸고 비로소 말이 적은 원장이 웅변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았다. 병원의 원장인 그가 정원사나 하는 보리밭을 밟고 있는 성실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극히 작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 원장은 바로 목사이자 철학자이며, 의사인 동시에 음악가이기도 한 ‘슈바이처’였다. 한 번은 누군가 슈바이처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는 ‘나는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최선의 삶을 살았다.
■ 그리스 신화 이야기이다. 키프로스 왕 피그말리온이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각상을 만들어놓고 사랑을 쏟아부었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사랑과 정성에 감동해 마침내 그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으로 환생시켜 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위해 지극한 정성으로 노력하면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 ‘비’라는 가수가 미국 뉴욕 무대에서 공연을 열어 화제가 되었는데, 그에게는 세 가지의 장점이 있다. ❶ 목표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 ❷ 특유의 겸손 ❸ 철저한 자기관리이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 그러므로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된다. 최선을 다하는 자는 목표를 성취한다. 이것이 피그말리온의 교훈이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벤자민 리텐버그(Benjamin Lichtenburg)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만 살아가는 것은 실상은 일종의 자살이다"
한 번 주어진 삶을 무의미하게 함부로 살아 버리는 것은 부끄러운 삶이요, 자신의 가능성을 개발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책임한 삶이다. 사람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자기의 삶을 최고로(maximum) 살아가는 사람과 최소로(minimum) 이럭저럭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심판대에서 삶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 곧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간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자’의 죄목으로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도둑질, 살인죄를 큰 죄로 생각하지만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다. 나아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재능 이하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여러 가지 핑계만을 대는 경우가 많다.
시모어 크레이(Seymore Cray)는 ‘한 번에 한 걸음 내딛는 것은 쉬워도 두 발로 한 번에 뛰는 것은 몇 발자국 밖에 더 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한 자만이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선은 최선의 적’이라고 말한다.
■ 옛날에 안토니라는 수도사는 하나님과 함께 일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막에서 지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오직 기0도만 했다. 어느 날 뜨거운 한 낮에 음성이 들려왔다. "안토니, 그대의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저쪽 한 도시에는 그대보다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다." 안토니는 자기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이겠습니까?" 그때 또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토니는 그 사람을 한 번 만나고 싶어 길고 먼 여행길에 나섰다. 사막을 지나서 어떤 도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존이라는 이름의 구두 고치는 사람을 만났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 덕행이 하늘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 사람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는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선한 것뿐이랍니다."
골 3:23-25 / 땅 위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같이 모든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십시오. 24) 여러분에게 보수를 주는 분은 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분깃을 나누어 주십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25)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주께서도 여러분에게 응분의 보상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께서는 꾀를 부리는 자들을 특별히 눈감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더 큰 능력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하다가 잘할 수 없다고 해서 착수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처음부터 ‘너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고,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처음부터 ‘너는 두 달란트를 더 남겨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역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처음부터 ‘너는 한 달란트를 더 남겨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성을 아시기에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지 목표를 설정해 놓고 ‘너는 이렇게까지 이익을 남겨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에 저들이 행한 일을 보시고 하신 말씀을 보자.
마 25:20-23 /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왔다. 21) 주인은 그가 일을 썩 잘해 낸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22) 다음에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보고하였다. `주인님이 주신 두 달란트를 제가 배로 남겼습니다. 23) 주인은 그에게도 `잘하였다. 너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이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더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하고 말하였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더 큰일인 각각 열 달란트와 네 달란트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실 것이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며 아예 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던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책망하신 말씀도 보자.
마 25:24-30 / 이번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이익을 남기더라도 빼앗아 갈 것이므로 돈을 다만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26)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이 악하고 게으른 놈아! 네가 나를 그런 매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27) 너는 적어도 내 돈을 이자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 두어 내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28) 여봐라, 이자가 가진 돈을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아서 풍족하게 될 것이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30) 이 쓸모없는 인간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 헨리 8세가 마일즈 캐버델에게 성경의 영어 번역을 하도록 요청하였을 때, 캐버델은 자신의 한계와 성경번역에 필요한 히브리어 말과 그리스 말의 지식이 모자라는 점을 잘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 해석자가 원어에 관해서 얼마나 뛰어난 학문적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생각하고, 한편 나 자신이 그 방면에 얼마나 결함이 많고 얼마나 부족한지를 생각할 때, 나는 더욱 착수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으로 기울어져 버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맹세코 말하지만 이 일이 내 어깨에 지워지게 된 것은 내 노력이나 소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나라와 민족 사이에는 우리나라와 달라서 그 나라 말의 성경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에 대해 갑자기 부탁을 받았을 때, 내 생각대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최선과 성의를 다해 일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캐버델은 자신의 준비 부족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였기에 영어로 번역한 그 성경은 걸작이 된 것이다.
소중한 것은 일의 능률이 아니고, 그 일에 쏟고 있는 정신이다. 값비싼 선물을 받더라도 오히려 화가 나고 선물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모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작은 선물인 경우에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과 성의를 기울일 때 그것은 큰 것이 된다. 사랑과 정성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전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노아는 최악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최선의 삶을 살았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노아를 택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방주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최선을 다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함께 수고했던 식구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었다. 이런 삶은 노아뿐만이 아니다. 요셉과 아브라함도 마지막까지 최선의 삶을 살므로 예정하신 많은 복을 받고 누길 수가 있었다.
2. 무서운 징계와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마음을 다 쏟고 정신을 다 기울여 주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한 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새날을 주신다.
신 30:1-9 / 나는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앞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벌을 받아 세계 만민 가운데에 흩어지게 되면 여러분은 거기서 제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2)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여러분의 후손들과 함께 마음을 다 쏟고 정신을 다 기울여 주께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살아가면 3)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분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며 주께서 이미 여러분을 흩어 보내셨던 그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다시 데려다가 고국 땅에 모아 놓으실 것입니다. 4) 비록 여러분이 세상 끝에까지 흩어져 있어도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거기서도 데려다가 모아놓으실 것입니다. 5) 그러면 여러분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더 주셔서 여러분의 조상들보다 더 번창하게 하실 것입니다. 6) 주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여러분이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7) 그리고 이 모든 저주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미워하며 압제하는 원수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8) 그러나 여러분은 주께로 다시 돌아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며 살 것입니다. 9) 그때에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넘치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많은 자녀를 둘 것이고 여러분의 가축이 번성할 것이며 여러분의 농경지에서도 많은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셨던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복 주시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율법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과 규정을 모두 지키자. 설령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극심한 고난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다 쏟고 정성을 다 기울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따뜻하게 영접하여 주실 것이다.
예레미야의 경우를 보면 패망한 이스라엘에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알게 된다. 예레미야는 망국의 비애를 갖고 눈물로 살았다. 망해 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나라는 얼마 후에 무참히 멸망했고,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대민족이 70년 만에 돌아오리라고 약속하셨다(렘 29장). 비록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였지만, 그 기간이 70년으로 제한된다는 것은 절망 속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렘 25:11-13, 29:10).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놓고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선언했다(사 40:2).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가 강조한 70년은 새 시대를 향한 기다림의 희망이었다.
예레미야의 70년은 다니엘과 스가랴의 예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니엘은 말씀 속에서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깨우치고 난 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 결과로 다니엘은 가브리엘 천서를 통하여 ‘70이레 ’의 새로운 비밀까지 전달을 받았다(단 9:24).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에서 여호와의 천사는 70년 동안 폐허화된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언제까지 방치되어야 하는지를 여호와께 물었다(슥 1:12).
그렇다면 70년이라는 기간을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하늘만 바라보면서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십년 이십년 … .’하면서 손만 꼽아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새언약’에 대한 약속 즉 가장 좋은 것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렘 31:31-34 / [새 계약을 맺으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백성아, 너희는 똑똑히 듣고 알아라.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 전체를 상대로 새 계약을 체결하겠다. 32) 물론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도 계약을 체결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과 아주 다른 새 계약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해방시키던 날에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나는 그 계약을 충실하게 지켜 주었으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하고 징계하였다. 33)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 것과 다를 것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 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34)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가장 친한 사람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오면 나도 모든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용서하고 더 이상 인간의 악행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하는 말이다.’
3.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수님은 간절히 성령을 구하라고 하셨다.
로마의 압제 아래 고통을 당하기는 애굽에서나 바벨론에서와 매일반이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네들을 건져주실 것이라 믿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의 기도를 종합해 본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의 생각도 그들의 다르지 않았다.
행 1:6-7 /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에 사도들이 물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언제인가는 아버지께서 정해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것을 가르쳐 주시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눅 11:5-8 /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한 것을 더 많이 가르쳐 주시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여보게, 떡 세 덩이만 꾸어 주게.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먹으라고 내놓을 것이 없어 왔네' 하고 말하면 7) 그 친구는 침실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다 잠가 놓았고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네. 그러니 지금은 자네에게 어떻게 해줄 수 없네.' 8)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으라. 그가 친구라는 이유로는 일어나서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 간곡히 조르는 것 때문에 일어나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간청하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 후에 이어서 하신 말씀을 보라.
눅 11:9-13 /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다. 많은 분들이 ‘성령을 구하라’고 하니까 목회하는데 또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능력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하는 육신의 것이나 이 땅에 것에 초점을 두고 능력을 구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렇다.
겔 11:18-21 / 그들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와 모든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이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19)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변화된 새 마음을 주고, 또 새 정신을 불어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마음을 드러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겠다. 20) 그러면 그들이 내 지시에 따라 살고 내가 준 명령들을 존중하며 지켜 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1) 그러나 마음이 우상들에게만 쏠려 있고 우상들이 좋아하는 그 더러운 방식에 따라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대로 벌을 되돌려줄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탁에 앉아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였는지 모른다.”(눅 22:15)고 하시며,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고 하셨다.
▶ 왜 예수님까지 새언약을 논하시며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다음카페 천성성결교회 – 이윤형목사의 성령론>을 필히 참고로 하시기 바란다.
‘제46장 성령이 임하시면’에서 한 부분을 인용한다.
행 2:17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의 비를 부어 준 다음에, 너희 모두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다. 너희의 늙은이들은 여러 가지 꿈을 꿀 것이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온갖 환상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시대에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구약성경에 94회, 신약성경에 230회 총 324회에 걸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된다.
행 1: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
지금은 악한 영과 어둠의 영들이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배운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조그마한 시험에도 넘어지고,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는 그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두려워 떨면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있기도 했다. 바로 그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일꾼을 뽑을 때, 첫 조건은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 스가랴 4장 6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 24:49)고 말씀했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 5)고 하셨다. 마가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권능을 받았다.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을 때,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행 19:6 / 바울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2. 복음의 지경이 넓혀진다.
행 1:8 /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지경이 점점 넓혀졌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 동족인 유대와 이방인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 즉 전 세계로 복음의 지경이 넓혀진 것이다.
예수님은 온 천하를 무대로 삼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제한된 지역에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 곧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 즉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고, 민족의 담장을 허물고,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며 신분을 불문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마 28:18-20).
인간적인 편견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교회를 중심으로 나라와 민족, 전 세계로 복음 전하는 지경을 점점 넓혀가야 한다. 요한 웨슬레는 성령을 받았을 때 “온 세계가 나의 교구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3.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
갈 5:22-23 /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입술의 열매도 맺게 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도 다르다.”(잠 18:21)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되고(행 5:20), 화평의 말을 하여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며(잠 12:20), 은혜로운 말을 하게 되고(골 4:6), 축복의 말을 하게 됩니다(롬 12:14).
히 13:15 / 예수의 보살핌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합시다. 그리하여 언제나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영국의 시 중에 “노여운 말 한 마디가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마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 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는 내용이 있다. 성령을 받으면 항상 친절한 말, 축복하는 말, 기쁨과 소망을 주고 위로하는 말을 해야 한다.
4.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사역에 힘이 생긴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능력을 받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 받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헌신하게 되고, 인간적인 힘이나, 빽이나, 노력으로도 꿈쩍하지 않던 일들이 척척 해결되는 것이다(슥 4:6).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고, 기도할 때 병이 물러가고, 어둠의 권세들이 다 달아나는 것이다(막 16:17-18). 그리고 마음의 평안이 가득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이 충만하고, 바쁘면서도 여유를 가지고, 힘이 들어도 쓰러지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5.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세계 선교를 힘쓰게 된다.
먼저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로 내가 지금 살고 있고 몸담고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다. ‘사마리아’처럼 내가 가기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땅 끝’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백성과 족속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마 24:14).
눅 4:18 / 주 여호와의 기운이 나를 휘감아 돌았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어 예언자로 세우시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일으켜 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너희가 이제 풀려 나간다! 모든 옥문들이 열리게 된다고 알려 주라고 나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셨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다 풀어 주시며 슬피 우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시대가 되었다고 널리 알리도록 주께서 나를 보내셨다.
6.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증인’인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다. ‘증인’의 헬라어는 ‘마르투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순교’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진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전도하고, 선교하면서 계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침체되고, 힘을 잃게 된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을 만나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명을 끊임없이 감당해야만 한다.
7.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게 된다.
이제까지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었거나 돈과 물질, 권세, 명예, 가족, 쾌락이었던 사람(딤후 3:1-7, 마 7:21-23, 마 10:37-38)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고전 12:3 /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그렇거든 이 점을 잘 살피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눅 11:13 /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구하고 그리하여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꿈을 삼아 늙어도 꿈꾸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고, 복음의 지경이 넓혀지며, 성령의 열매와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맺게 되고, 사역에 힘이 생기고, 세계 선교에 힘쓰며,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4. 오늘날 한국에 소속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나라가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북한의 멸망일까?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 지금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필수적인 있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연결해 보면 우리 모두가 영적부흥을 대비하여야 한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들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 28:18-20). / 믿고 침례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나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은 죄인으로 선고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표적이 따를 것인데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만지거나 독을 마시더라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 병이 나을 것이다(막 16:16-18). / 그리고 내게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48) 너희는 이 예언들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다. 이제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니 너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령이 오셔서 하늘의 능력을 채워 주실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눅 24:47-48). / 이 일이 있었던 장소는 감람산이었다.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나 안식일에 걸어도 괜찮을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들이 묵고 있던 2층 방으로 올라가서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붙으려면 우리 자신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여 우리 자신부터 철저히 준비하여야 한다. 나 자신부터가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나는 분들 특히 목사님들마다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한국에 일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자기 자신이 불쏘시개가 되어서 부흥의 불길을 붙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마음조차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불쏘시개 자체가 많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Fan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자신이 먼저 이를 위하여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지, ‘너희는 소금의 해택을 받고, 빛의 해택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에는 버림을 받게 될 것까지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 5:13 / 너희는 세상을 맛있게 만드는 소금이다. 그런데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너희는 아무데도 쓸모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즉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밤에 불을 밝혀 둔 언덕 위의 마을과 같다. 15) 등잔에 불을 밝히고 됫박으로 그 등잔을 덮어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면 누구나 그 등불을 등잔대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16)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 언제부터인가 뜻있는 분들의 입에 흥얼거리는 찬양이 있다. 바로 ‘부흥’이다.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젊은이들 입에서 먼저 불리던 이 노래가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염원이 되어 불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부흥 2000이란 노래까지 불려졌다.
♪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 위해 이제 일어나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지금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부흥을 꿈꾸며, 부흥을 노래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한국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땅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노아 시대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악하고,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와 이 민족 안에 우상숭배와 거짓과 탐욕의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패역하고 황무한 이 땅을 새롭게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부흥’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돌을 던지지도, 누군가에 책임을 전가하지도 말아야한다. 우리 자신도 바로 그 속에서 함께 패역한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더 이상 비난이나 정죄가 아닌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한다. 우리 교회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한다.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며, 새로운 부흥을 위해 부르짖어야 한다.
▶ 예레미야가 원했던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만은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엘리야처럼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던 말씀을 보자.
왕상 18:21, 30-39 / 엘리야가 온 무리 앞에 서서 외쳤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이리저리 흔들릴 작정입니까? 만일 여호와가 참 신이라면 그분만을 섬겨야 할 것이요, … . 30) 이때에 엘리야가 그곳에 모인 백성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내게 가까이 오시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엘리야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는 우선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다. … 36) 저녁 제물을 바치는 시간이 되자 엘리야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주께 호소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제가 오늘 이 모든 일을 수행한 것인 줄 이제 모든 사람이 알게 하소서. 37) 주님,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이 백성이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올바로 길을 걷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그들이 오늘 체험하게 하소서.' 38) 바로 이때에 여호와께서 불을 내려보내셨다. 그 불길은 제물과 장작을 모조리 태우고, 제단의 돌과 각 주위의 흙과 도랑의 물마저 모두 태웠다. 39)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려 고백하였다.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이때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붙잡아라. 한 사람도 놓치지 말아라' 엘리야는 백성들이 사로 잡아온 예언자들을 산밑의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 거기서 죽이게 하였다. 거룩한 갈멜산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시냇가로 끌어다가 짐승처럼 잡아 죽이고, 시냇물로 그 피를 씻어 내게 한 것이다(왕상 18:40).
이 일로 인해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렸지만 아합은 죽지 않았다. 그의 아내였던 이세벨은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까지 하였다. 이에 광야로 도망을 쳤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상 19:15-18 /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 다메섹 광야에 머물러 있어라. 그곳의 은신처에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고, 16)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아벨므흘라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사밧의 아들인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로 삼아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여 살아 남은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그렇더라도 나는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거나 경배하지도 않고, 바알 신상에게 입 맞추지도 않은 사람 7천명을 남겨 두겠다.'
즉 영육간에 걸친 대를 잇는 작업을 하게 하셨다. 얼마 후에 열왕기상 21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을 만나 무서운 책망을 하였다. 이에 아합은 회개를 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보시고 용서까지 해 주셨다.
왕상 21:27-29 / [뉘우치는 아합] 엘리야가 말을 마치자 아합은 두려워서 옷을 찢었다. 그는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굵은 베옷을 걸쳤다. 그리고 잠을 잘 때에도 옷을 벗지 않고, 걸음도 천천히 걸으며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다. 28) 그러자 주께서 그를 불쌍히 보시고 엘리야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29) `아합이 마침 내 내 앞에 굴복한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가 나의 권능을 인정하고 굴복하였으니 내가 그의 생전에는 그의 집안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재앙을 내리겠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에 소속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최선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라가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북한의 멸망인가?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필수적인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영적부흥을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5. 잘못된 열심은 고치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최선을 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면 안 된다.
■ 소와 사자가 죽도록 사랑했다. 결국 둘은 결혼을 하여 살게 되었다.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하였다. 소는 날마다 최선을 다하여 맛있는 풀을 가져다 사자를 대접했다. 사자는 싫었지만 사랑하니까 참고 살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하여 날마다 자신이 잡은 짐승의 맛있는 살코기를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사랑하니까 참으며 살았다. 그러나 둘은 결국 참을성에 한계가 왔다. 둘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다. ‘왜 자꾸 싫은 풀을 주느냐’, ‘살코기를 주느냐고....’ 도저히 둘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소와 사자는 너무 크게 다툰 나머지 헤어지고 말았다. 둘이 헤어지면서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하였다’였다. 소는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고, 사자는 사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사야 1:13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고 성회로 모이는 것을 싫어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인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인간의 방식을 따른 예배는 받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다면 도저히 그분을 위한 예배는 드릴 수 없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아직도 소처럼 사자를 섬기고, 사자처럼 소를 섬기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섬겨도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헤어짐 즉 영적인 사망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결과는 미움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은 종교적인 행위에 최선을 다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순종하는 것의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말고, 그분 뜻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자가 되자.
이사야 1:10-20 말씀을 묵상하자.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앞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별하여 먼저 우리들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자. 이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우리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말고.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사도까지 되어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롬 12:1-2).
사 1:10-20 / [거짓 예배] 너희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아, 똑똑히 들어라. 너희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냐? 주님의 말씀을 똑똑히 들어라! 주께서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똑바로 들어라!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치는 짐승의 제물이 역겨워 죽을 지경이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내게로 가져오지 말아라. 너희가 바치는 살찐 숫양에 나는 질려 버렸다. 너희가 잡아서 바치는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 12-13) 범죄한 것은 뉘우치지도 않는데 누가 너희의 희생제물을 달갑게 받겠느냐? 너희가 내게 살라 바치는 향불도 내 코에는 악취일 뿐이다. 너희가 거룩하게 지키는 초하루와 안식일과 특정한 날에 모이는 금식 기도회가 아무리 경건한 모임인 체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다 사기 행각이 아니냐? 나는 그런 것들과 더 이상 상관도 하기 싫다. 14)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미워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기만 해도 견딜 수가 없다. 15) 이제부터는 너희가 하늘에 두 손을 펴고 기도하더라도 나는 쳐다보지도 않을 뿐더러 아예 듣지도 않겠다. 너희가 수도 없이 기도한다 해도 나는 귀를 막아 버릴 작정이다. 수도 없이 사람을 쳐죽이고도 그 손을 쳐들고 또 내게 기도드리다니! 16) 몸을 씻어라. 깨끗이 씻어라. 내 앞에서 못된 짓은 하지 말아라. 그래, 이제는 악한 짓을 그만두어라. 17) 이제는 바른 일을 배워 행하여라. 정의를 실천하여라. 압제당하는 자들을 풀어 주어라. 고아들의 슬픔과 과부들의 한을 풀어 주어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이 문제를 상의해 보자! 너희가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죄악을 씻어 주리라. 금방 떨어진 눈송이보다도 더 희게 하리라. 너희가 진홍같이 붉게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양털처럼 희게 씻어 주리라. 19) 너희가 내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너희가 내 말을 듣기만 하면, 너희는 땅이 내는 좋은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계속 내게 등을 돌리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오히려 너희가 원수들에게 잡아 먹히리라.’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 아래의 글은 <김형원 목사 / 하.나.의. 교회, <복음과 상황> 편집위원장 / 이 글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것임을 밝혀둔다.>
▶ 자기도취적 열심 /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그릇된 자기도취의 열심에 빠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만 내세운다고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대의명분을 걸고 떠들어 댄다고 해서 반드시 주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에 속한 우리들의 큰 문제는 자기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너무 활동적이다. 그래서 성찰을 하지 않는다.
* 우리는 열심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무엇에 열심을 내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다.
* 우리는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다. 그래서 과정과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을 듣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주인의 명령을 다 듣기도 전에 달려나가 버리는 종과 같다. 주인이 종에게 말한다. “이 서찰을 산 너머 김 첨지에게 전해주고 오너라. 너무 급하게 가지 말고 가면서 논 일도 좀 도와주고, 나무하는 일도 좀 도와주고, 그리고 산세가 어떤지도 살펴보면서 다녀와라.” 그러나 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종은 서찰을 낚아채서 열심히 달려서 김 첨지에게 전해주고 헐레벌떡 달려온다. 종은 주인의 말의 앞부분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서찰만 빨리 전해주면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서찰이 전해지기에 좋은 시간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고, 또한 다음에 할 일을 위해서 종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어서 심부름 과정에 이런 저런 일들을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종은 자기 방식의 열심으로 주인의 세심한 명령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종은 주인의 뜻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계획도 틀어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경과 신학이 사라지고 있다. 깊이 있는 신학과 성경 연구를 등한시한다. David Wells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에서 심리학과 경영학만 판치고 있을 뿐 성경과 신학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순종적 성경 연구가 빠진 천박한 행동주의와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이 결여된 악바리 열심만 남는다.
* 경제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성경적 윤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매도하는 맘몬주의자의 열심.
* 단기적인 효과를 위해서 타종교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대규모의 선교단을 이끌고 선교지로 나가는 선교지상주의자의 열심.
* 번 돈으로 선교 사업을 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면서 그 과정에서 온갖 세속적인 방법을 앞장서서 동원하고 있는 ‘기독교 기업들’의 열심.
▶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귀를 막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열심을 앞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열정이 모든 것을 합리화해주는 비법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방향을 잘못 잡은 열정은 주님의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로마서(10:2-3)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말씀대로 하면 먼 길을 고생스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대로 따르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는 목표보다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는 훨씬 더 귀하기 때문이다.
내 열심이 막 솟아오를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과업이 눈앞에 있을 때, 더욱이 그 과업이 내 눈에는 하나님의 일처럼 분명하게 보일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 일에 눈이 팔려서 정작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의 성취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결 론
■ 지미 카터(J. Carter)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에 크게 영향을 준 책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Why not the best)라는 책으로서 카터 자신에 관한 내용이다. 거기에서 카터가 해군 장교로 있을 때 해군 제독이던 하이만 리카버씨에게 부임 인사를 하던 중 제독이 사관학교 재학시절 공부를 얼마나 잘했느냐고 물었다. 그 때 카터씨는 820명 중에 59등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더니 ‘귀관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고 칭찬대신 되묻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카터가 하는 말은 나는 그의 칭찬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부모를 제외하고는 내 인생에 가장 큰 감화를 준 분이라고 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고 칭찬대신 책망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습관이 그로 하여금 땅콩밭에서 대통령까지 되게 한 것이다.
우리들도 남들이 보통으로 해치우는 일을 조금만 더 성의를 기울이면 뛰어난 인물이 되고 성공자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기도 하고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 앞에는 축복을 받지 못하는 수가 많이 있다.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경구절 하나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구절이 아닌가?
이 말씀을 얼마나 중요시했던지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언제든지 강론해야 하며 손목에도 매고 미간에도 붙여 가르치고 대문에도 기록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영어로는 all of your heart, all of your soul, all of your power인데 이는 모든 힘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드릴 때, 기도할 때, 남을 구제할 때에도 힘과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도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될 텐데 정성 미달일 때가 많고, 기도도 조금만 더 간절히 했으면 응답이 있었을 텐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고로 기도의 응답이 없는 때가 많다.
예배 시간도 한 10분만 더 일찍 서두르면 늦지 않을 텐데 10분 때문에 늦는 사람은 언제나 늦는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조금 더 정성을 기울이는 습관을 키워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비록 11시에 들어왔지만 최선을 다 한 품꾼처럼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시면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할 때에 부자가 많이 넣는 것을 칭찬하지 않고 과부가 엽전 두 닢을 낸 것을 보고는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부자는 최선에 대한 정성이 없었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최대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렙다 과부의 밀가루 통에 왜 기적이 나타났는가? 보통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마지막의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종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왜 일어났을까? 어린 소년이 아침도 점심도 굶은 채 간직해 둔 것을 예수님께 정성을 다하여 바쳤기 때문에 그러한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 주라고 하는 말씀이나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기왕이면 의무감에 못 이겨서 억지로 하지 말고 조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라는 행동원리를 가르치신 말씀이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남에게 줄 때 내가 못써도 조금만 더 성의를 기울이면 피차에 흡족할 텐데 어떤 때는 마지못해서 처삼촌댁 벌초하듯이 되는대로 해치우고 나서 마음이 꺼림직하고 불안해하는 때가 많다. 의무감에 못 이겨서 하지 말고 의무를 넘어서 최선을 다할 때 이웃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다.
■ 미국에 어떤 강철회사 사장이 처음에는 수위로 입사하였는데, 수위로서의 직책 이외에도 열심히 봉사하여서 정식사원이 되었고 또 최선을 다하자 비서로 발탁되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손발처럼,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종내에는 그 회사의 사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가 사장직을 권유받았을 때 자기는 무식해서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을 하였다. 그러자 ‘최선을 다하는 성실성만 있으면 유능한 인재는 얼마든지 등용할 수 있으니 그런 정신으로만 일하면 문제없이 잘 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가정일에나 교회일에나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는 우리의 삶 속에서 좋은 청량제가 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그릇에 담아 놓는 일에 같은 음식이라도 그냥 철퍼덕 담아 놓은 것보다 같은 콩나물이나 시금치 무침이라도 옹곳 옹곳해서 매만져 세워놓으면 그것이 신선한 것 같고 먹어보면 맛있어 보인다.
무슨 일을 하던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다 쏟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마늘을 깔 때면 속껍질을 벗겨 내는 손길이 마치 마늘을 애무하는 것 같이하고, 방바닥에 엎드려 걸레질할 때면 방바닥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이하여야 한다. 까놓은 마늘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걸레질을 봐도 알 수 있다. 그조차 야무지지 못한 사람이 다른 일인들 야무지게 할 수 있을까? 경지에 오르는 것은 결코 거창한 일에 있지 않다. 아주 작은 일에 혼을 쏟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람마다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 권력을 잡는 것, 학위를 취득하는 것, 결혼 잘하는 것, 사업에 크게 성공하는 것 등이다. 보고 사는 세상이니 보이는 것에 관심이 큰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위 물량주위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데에도 있다.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느냐 하는 것 보다 그 사람의 인격이 더 소중하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격보다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촛불이 연소되어야 빛을 발하고, 소금도 녹아야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람있는 일과 의미있는 사업에 자기의 시간을 바치고 정성을 쏟고 생명을 불태우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생명을 불태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인생의 종말이 다가올 때 남긴 글에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이제는 한 방울도 더 부을 것이 없이 몽땅 쏟아 부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다하고, 전력을 다했다는 뜻이다. 나를 다한다는 것은 맡은 일을 위하여 나의 시간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노력을 바치는 것이다. 헌신과 성실로 산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인생을 바쳤는가?’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므로 성공적으로 산 사람은 몸 바쳐 일할 것을 찾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보람있고 알차게 영광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고의 목표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다.
젊은 날에 흘리는 땀과 눈물은 참으로 귀한 결과를 가져온다. 꿈과 비전이 분명하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젊은 사람이라면 시련을 뛰어넘고 더 나아가 역경을 뚫고 이겨내고야 만다. 어느 분야에서고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한 만큼 시련과 역경을 잘 이겨낸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자기 능력의 18%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기 능력을 최대한 개발해낸 사람은 스스로도 놀랄 만한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며 일을 성취한다. 이것은 바로 자신감과 도전정신과 열정의 결과이다.
미국 시인 휘티어는 이렇게 말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 후회 따위는 없다. 우리의 삶에 찾아드는 모든 기회를 맞아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렇다면 ‘당신의 삶의 목표와 사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으면 한다. ‘나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막 8:35),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 14:8)고 하였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하였다.
미국에는 '차선은 최선의 최악의 원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차선의 행운을 기다리지 말고 최선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같이하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고 있다면 비록 이름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신 6:5, 삼상 2:30, 마 22:37).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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