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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 난중잡록 자서(自序)
오랑캐의 난은 어느 시대에도 다 있었다. 주 선왕(周宣王) 때에는 험윤(玁狁 옛 종족으로 흉노의 옛 이름)이 심히 기승을 부렸고, 또 한 고조(漢高祖) 때에는 묵특[冒頓]이 횡행하였으니, 6월에 출병시킨 일이라든지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따위는 본래 부득이한 일들이었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아무런 대비도 없을 때에 일어나서 먼저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가 궤멸했고 또 장강(長江 낙동강을 말함)과도 같은 험새(險塞)를 잃어버려, 임금은 파천(播遷)하기에 이르렀고 종묘 사직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8도는 함락되고 만백성은 짓밟혀 우리 국가의 당당하게 빛나는 왕업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조국을 생각했고, 하늘의 뜻은 주(周) 나라에 돌아가듯 명 나라에 쏠려 관군이 패전하였지만 의병이 일어났고, 우리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명군(明軍)이 왔다. 그리하여 비로소 토벌을 벌인 끝에 왜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 내어 국토를 다시 회복하였고 파천했던 임금도 환도했으니, 명(明)의 출병이야말로 그 은혜가 막중하다. 그러나 천심(天心) 이 돌아서지 않으매 화근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적은 3면을 점거하고서 강화를 요구하여 온 것이었다. 황제의 도량이 관대하여 전쟁을 그만두고, 왕을 봉해 주기를 의논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휴식을 바랐다. 그리하여 멀리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후한 뇌물을 보내 준 옛 계략과 같은 것으로, 그 은덕 또한 높다 하겠다. 그런데 저 짐승과 같은 왜적들이 은덕을 저버리고 하늘을 깔보며 해[日]를 욕하여 관군을 도륙하고 침략을 자행하자, 황제의 위엄은 다시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고래[鯨]떼 같은 왜적의 무리가 사라지고서야 변경의 전진(戰塵)이 깨끗이 맑아지고 사방이 편안하여졌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이보다 더 클 데가 어디 있겠는가. 아! 국운이 막혀 재화와 난이 연달아 일어나 7년 동안이나 전쟁이 계속되었고, 황제의 군사가 세 차례나 출동하였다. 싸우고 수비하기에 편할 날이 없었고 이기고 패하고 할 적마다 기쁘고 비통하였던 일은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나서 이러한 난리를 만나고도 임금을 위해 죽지 못했으니, 신하되고 백성된 도리에 죄책을 면할 길이 없어 한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한갓 혼자서 눈물을 닦을 따름이다. 아! 비록 나랏일에 힘을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은 늘 왕실에 있어서,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曉諭)하는 교서(敎書)라든가 이첩(移牒)ㆍ공문ㆍ격서(檄書)에 이르기까지 본 일과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나 개인의 의견을 넣어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 이 글이 후일 지사(志士)들의 격절탄상(擊節歎賞)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충신 열사의 사적과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잊은 자의 죄상이 여기에 누락되지 않았다면 직책 밖의 외람된 일이라는 책망을 나는 달게 받겠다. 아! 한 가닥 천성이 매우 강개하여, 옳지 않은 줄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책망을 당할 것인데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 왜란이 싹튼 초기부터 비롯하여, 경술년(광해군 2년, 1610)에 겨우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까지 끝냈는데, 내가 정유년(선조 30년, 1597)에 피난하고 왜적을 토벌한 일을 그 다음에 다 엮어 넣어 나눠서 네 편으로 만들고 ‘난중잡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견문이 고루하여 사실과 어긋난 기사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그 가운데는 또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뜻도 많이 들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잠을 안 자고 심심풀이로 읽는 데 그칠 뿐이랴. 공자가 이르기를, “나를 알아 주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일 것이고, 나를 벌하는 것도 오직춘추를 통해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외람되나마 후세의 군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만력(萬曆)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가을 7월 16일.
한양인(漢陽人) 조경남(趙慶男) 씀.
[주-D001] 6월에 출병시킨 일 : 주 선왕(周宣王 B.C. 827~781) 때에 당시 유목민족이었던 험윤(玁狁)이 변경을 침노하자, 6월에 윤길보(尹吉甫)를 시켜 출병 토벌하게 했다. 《詩經》〈小雅 六月〉[주-D002] 후한 뇌물을 보내준 계략 : 한 고조(漢高祖) 때에 흉노(匈奴)의 군장(君長)인 묵특[冒頓]이 득세하여 변경을 침노했는데, 고조가 평성(平城)에서 묵특이 이끄는 40만 정병에게 포위당했다. 사세가 급박하게 되자, 묵특의 왕후 연씨(閼氏)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어 묵특의 포위를 풀게 했다. 묵특은 본음이 ‘묵독’이어야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종래 ‘묵특’이라고 읽어 왔으니, 여기서도 이에 따른다.[주-D003] 상주(相州)에 견줄 요충지의 군사 : 송(宋) 나라 흠종(欽宗) 때에, 금(金) 나라가 침입하여 중요한 고장 상주(相州)가 함락된 것을 인용하여 왜적의 침입을 말한 것이다.[주-D004] 장강(長江)과도 같은 험새(險塞) : 장강(長江)은 중국의 양자강인데, 남과 북이 싸울 때면 장강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임진강ㆍ대동강을 지키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주-D005] 민심은 한실(漢室)에 기울 듯 : 한(漢) 나라가 한때 왕망(王莽)에게 17년 동안이나 짓밟혔으나, 민심이 다시 한실(漢室)로 기울었으므로,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망을 멸할 수 있었다.[주-D006] 하늘의 뜻은 주(周) 나라에 돌아가듯 : 주(周)는 천자의 나라인 명(明) 나라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주-D007] 왕을 봉해주기를 의논함으로써 : 명 나라에서 일본과의 강화를 허락하여 수길(秀吉)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로 하였으나, 곧 결렬되었다.[주-D008] 이첩(移牒) : 예로부터 국가에 큰 난이 생기면, 임금이 직접 백성에게 알리는 것을 이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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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長江 낙동강을 말함)과도 같은 험새(險塞)->협주삭제
[주-D004] 장강(長江)과도 같은 험새(險塞) :
장강(長江)은 중국의 양자강인데, 남과 북이 싸울 때면 장강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임진강ㆍ대동강을 지키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협주와 각주가 내용이 다름. 又失長江之險。君父至於播越。내용상 한강이라고 주석다는 것이 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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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서(亂中雜錄序) / 난중잡록 서
《산서잡록(山西雜錄)》은 고 진사 선술(善述) 조경남(趙慶男) 공이 지은 것인데 산서는 그의 호다. 그의 선세는 한양(漢陽) 사람으로 판중추를 지낸 조혜(趙惠)의 후손이고, 호조 판서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사직(司直)을 지낸 조벽(趙璧)은 남원 양씨(梁氏)와 혼인하였고, 그래서 남원부 동녘에 있는 원천리(元川里)에서 살았는데, 융경(隆慶) 경오년(선조 3년, 1570)에 공을 낳았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겨우 말을 배울 수 있게 되자, 이미,
꽃은 난간 앞에서 웃고 / 花笑檻前
달은 하늘 복판에 다다랐다 / 月到天心
등의 싯구를 외었다. 사직은 그가 유달리 재주 있는 것을 기뻐하여 매우 귀여워했다. 을해년(선조 8년, 1575)에 사직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유모의 등에서 서러워하여 못 견디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일곱 살에 처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고는 했다. 기묘년(선조 12년 1579) 가을에 상사(上舍) 유인옥(柳仁沃)에게 가서 배우면서 비로소 글을 짓게 되었는데 써낸 말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상사가 대단히 칭찬해 주었다. 글을 읽는 여가에 나무를 휘어서 활을 만들고 싸리를 잘라서 화살을 만들어서 나갔다 물러났다 껑충껑충 뛰었다 하는 활쏘는 법이 퍽 좋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데 있어서도 운치가 극히 청초하여 어른들이 감탄하고 다들 선대의 유풍이 있다고 칭찬했다. 임오년(선조15년, 1582)에 공의 나이 13세였는데, 세 해가 함께 솟고 쌍무지개가 세 해를 포개서 꿰뚫은 것을 보고는 세상이 대단히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당시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잡록의 저술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계미년(선조 16년 1583)에 양 부인이 세상을 떠나 공이 부모를 다 잃으니, 외할머니 허씨(許氏)가 다른 자녀가 없어 이때부터 할머니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 정해년(선조 20년, 1587)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찿아가 뵙고 도덕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임진년(선조 25년, 1592)에 왜적이 창궐해서 나랏일이 형편없이 되자, 공은 자기가 완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것을 믿는지라 의병의 격문이 오면 번번이 떨치고 일어나 먼저 나설 뜻을 가졌으나, 외할머니가 연로하고 의탁할 데가 없는 데다 또 이질을 앓는 일을 생각하여 딱 끊고 가버리기가 어려워 의분을 참고서 그만두었다. 행조(行朝 행궁(行宮)과 같은 뜻으로 임금이 파천해 있는 곳)로부터 스스로 죄책하는 교서가 내리기에 이르러서는 공이 그 교서를 보고 대성 통곡하며 말하기를, “신민(臣民)된 자가 이 교서를 보고도 통곡하지 않는다면 인정이 없는 자다.” 하고, 시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정유년(선조 30년, 1597) 봄에, 무용(武勇)으로 뽑혀서 군문찬획(軍文贊畫)이 되었으나 마침내는 외할머니의 사정 때문에 사퇴하고 돌아와 노인을 업고 지리산 속으로 피난했다. 매일같이 왜적을 만나서는 힘을 내어 쳐서 쫓으니 산을 뒤지던 왜적들은 감히 항거하지 못했고, 도적질하는 무리들도 두려워하여 감히 함부로 굴지 못했다. 공을 따라다니는 자들이 3백여 명이었는데 하나도 다치거나 없어지지 않았고, 산골짜기에 피해 와 있는 자들도 다 공의 덕으로 온전히 살게 되었다. 그리고는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여러 차례 특출한 공훈을 세웠다. 불우(佛隅)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 궁장(弓藏)에서 모조리 무찌른 싸움, 산골에서 한밤에 공격한 것, 하동(河東)에서 추격하여 적을 벤 것, 죽전(竹田)에서의 기묘한 계략, 숯굴[炭窖]에서의 급박한 추격, 산음(山陰)에서의 화공(火攻), 해현(蟹峴)에서 포위를 뚫은 것 등은 다 그의 전공 중에 뚜렷이 나타난 것들이다. 복수장(復讐將) 정이길(鄭以吉)이 원수(元帥)에게 보고하기를, “조경남은 일개 서생으로 의사들을 모아서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서하고 여러 차례 왜적을 섬멸하였으니, 나라를 위한 그의 정성에 대하여 마땅히 빨리 포상을 내리도록 장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하된 의리로서 임금을 위해 왜적을 토벌하여 자기의 분을 풀 따름이지, 적을 목 베어 바쳐 포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산과 들을 전전하여 싸워 전후로 왜적을 목 벤 것이 몇 백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나 종내 일자반급(一資半級)의 상도 없었으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한 것이 이러했다. 무술년(선조 31년, 1598)에 외할머니 허씨의 상을 당하여 복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본도(本道)의 병사(兵使) 이광악(李光岳)이 글을 보내 그를 막하로 부르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종군하게 되었다. 왜교(倭橋)의 전투에서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선봉이 되어 힘을 다해 왜적을 쏘았는데 쏜 화살 치고 명중하지 않은 게 없어 명장(明將) 이유(李兪)가 그를 무척 가상히 여겼다. 부총(副總) 이방춘(李芳春)이 승전이 더디어짐을 근심해서 시를 써서 이 장군에게 보내자 이 장군은 공을 시켜 그 시에 화작하게 하여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 아! 공은 이 싸움에서 나라의 수치를 씻어 자기의 소원을 이룩하기를 바랐으나 하늘은 순(順 역(逆)의 반대)을 돕지 않아 대군은 물러서고 왜적 역시 바다를 건너가버려 마침내 큰 뜻을 이룩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이광(李廣)의 기구한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경자년(선조 33년, 1600)에 사나운 호랑이가 호령(湖嶺)의 접경을 횡행하며 수백 명의 사람을 물어 죽여서 대낮에 큰 길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자, 이 때문에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은 체포되어 심문받기에 이르렀고 신임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또 그 호랑이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공이 계략을 내어 쇠뇌틀을 안 보이게 설치해 놓았더니, 호랑이가 과연 쇠뇌에 맞고 달아나서 집 남쪽 산숲으로 들어가 벼랑을 등에 지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 공은 팔뚝을 걷어부치고 곧장 앞으로 나가 활을 쏘아 관통시켜서 호랑이가 비틀거리다가 죽어 넘어지자, 곧 끌어다가 방어사에게 보내주었다. 방어사가 대단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왜란 때는 나라를 위해 왜적을 섬멸했고, 올해의 호랑이 재앙에는 사람들을 위해 해를 제거했으니 진실로 충의롭고 유공(有功)한 인물이다.” 하고는 그에게 푸짐한 상을 주었으나, 공이 그것을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호랑이 한 마리를 사살한 데 상이 다 뭡니까. 만약 상을 베풀고 싶으시다면 한 면(面)의 전결(田結)에 대한 가수(加數 농지에 부과한 과세)를 감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방어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방어사가 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못 되오.” 하고는 10석(石)을 감해 주고 그 상까지 내려주었다. 임인년(선조 53년, 1602)에 공의 나이가 서른셋이었는데, “인생 백 년의 3분의 1이 지나갔다.”라는 싯구가 있으니, 이것은 공명은 늦어지고 세월은 흘러감을 개탄한 것이다. 무신년(선조 41년, 1608)에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이 본부 판관이 되어 호곡(虎谷)으로 공을 찾아가 천사대(天使臺)에 앉아 있었는데 유 상사(柳上舍) 등 여러 사람이 다 모여 있었다. 술이 들어오기 전에 큰 노루가 장법산(長法山)에서 논으로 내려오니 학성군이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조형은 늙었다. 만약에 이 노루를 잡는다면 소 동파(蘇東坡)가 적벽(赤壁) 놀이에서 노어(鱸魚)를 얻은 것에 대신은 갈 건데.” 하니, 공이 곧 나장곤(羅將棍 죄인을 문초할 때 때리는 데 쓰는 몽둥이)을 집어들고 대에서 내려가 찾아서 쫓아갔는데 5, 60보도 안 가서 노루가 손아귀에 들어와 산 채로 대 위에 올려보냈다. 학성군은 대단히 기뻐하고 공이 노쇠하지 않은 것을 치하했다. 부사(府使) 성안의(成安義) 공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가 문장의 거벽(巨擘)인 줄만 알았지 짐승을 쫓아가서 잡을 만한 이런 용맹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제의 노루는 문만호(文萬戶)의 호랑이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년 1609)에 향시의 두장[鄕試兩場]에 합격됐으나 예부(禮部)에서 꺾었다. 정사년(광해군 9년 1617)에 또 세 장에 통과했다. 그때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이 나랏일을 맡고 있었는데 공은 정치가 어지럽고 윤리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과거 보는 일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 앉아서 자기 서재에 ‘주몽당(晝夢堂)’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오직 책만을 낙으로 삼고 살았다. 계해년(인조 1년, 1623)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사림(士林) 중에 깊이 숨고 나타나지 않던 자들이 다 갓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彈冠 벼슬하러 나오는 것] 나왔다. 공도 과거에 응시하여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진사시에 뽑혔다. 이때부터 그는 오막살이 속에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나설 생각을 끊었으며, 마침내는 방장산(方丈山) 서쪽 용추동(龍湫洞) 속에 별장을 짓고서 유유자적하게 지냈고, ‘산서병옹(山西病翁)’이라 자칭했다. 슬프다! 공은 영특한 자질로 충효 강개한 절개를 지니어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왜적에 분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렸으나, 다만 외할머니의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않아서 나라에 몸을 바치지를 못했지마는 그러면서도 충의심을 발휘하여 왜적을 죽였으니 그가 평소에 간직했던 뜻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충민(李忠愍)이 통제사(統制使)로 큰 공을 세우고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공은 시를 지어 애도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간의 호란(胡亂 1636~1637) 때는 노환이 이미 심해서 국난에 달려갈 희망이 끊어지매 한갓 충의와 의분이 간절했을 뿐이었다. 삼학사(三學士)가 심양(瀋陽)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개하여 시를 짓기를, “시시(柴市)에서 자신을 희생한 문 승상(文丞相)이요, 연경(燕京)에서 굶어 죽은 사 신천(謝信川)이다.” 하였으니, 그의 충의의 기개는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음을 또 알 수 있다. 13살에 태양의 변괴를 우러러 보고는 그 시대가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자기의 보고 들은 것에 따라 이러한 집성(集成)을 내놓았으니, 어린 나이에 앞일을 알았다는 것은 더욱 기발하다. 임오년(선조 15년, 1582)부터 시작하여 무인년(인조 16년, 1638)에 끝나는 57년간의 일을 가지고 큰 책 8질(帙)을 저서하여 ‘산서잡록(山西雜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정의 변고, 민생의 희비, 시운의 성쇠, 세도의 오융(汚隆)에 관한 것은 빠짐없이 실었고, 선악과 역순을 가리는 데 엄격했으며, 충신과 절사(節士)의 사적에 관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다뤄서 선한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악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였으니 이 책은 실로 쇠세의 한 귀감으로 세도에 관계되는 바가 크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남쪽 시골에 밀려 내려와서 불행하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는데도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써 문장은 세상에 알려지고, 지혜와 용맹은 당시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주와 운수가 서로 맞지 않아 뜻을 지닌 채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말 애석하다. 아! 공은 비록 생전에는 불우했으나 다만 이 한 책은 후세에 전해질 수 있으니 불후(不朽)의 작이라 해도 좋다.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지난 갑자년(인조 2년, 1624)에 공이 진사시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오자,
내 선친 판서공(判書公)이 당시 장령(掌令)으로 축하연에 초청되었었다. 그런데 이제 공의 손자 선(愃) 군이 그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책의 보람을 나타내는 글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금년에 81세로서 노환으로 들어 앉아있는 터라 글을 쓸 생각은 없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회를 누를 길 없어 감히 늙고 졸렬하다는 이유로 그의 생각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의 자서(自敍)를 가지고 거기에다 약간의 산정(刪定)을 가하고 중간에 선배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덧붙여 한 편의 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정치인들의 잘잘못과 사세의 완급에 대해서는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으레 알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시 늘어놓지 않는다.
숭정 기원 39년 병오년(현종 7년, 1666) 음력 9월 국화 피는 가을에 삭녕인(朔寧人) 최시옹(崔是翁)이 삼가 서문을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吾先子判書公。時以掌令。見邀於慶席。今公所抱秀才愃甫。袖其書來示余。求所以發輝者。余今年八十有一。衰病杜門。無意於翰墨。而念及疇曩。不勝感懷。不敢以老拙孤其意。乃取公自敍。略加删定。間附所傳聞於前輩者以爲一通。而至其當日人謀之臧否。事勢之緩急。觀此集者。自可以知之。今不復覼縷焉。
崇禎紀元三十九年丙午菊秋。朔寧崔是翁。謹序。
崔是翁 | 1646 | 1730 | 朔寧 | 漢臣 | 東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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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기원 39년 병오년(현종 7년, 1666)-> 숭정 기원 99년 병오년(영조 2년, 1726)
崔是翁 | 1646 | 1730 | 朔寧 | 漢臣 | 東岡 |
*余今年八十有一은 1646+81=1727-1=1726년(영조2년,숭정기원99년이됨) 숭정1년(1628) 1628+99=1727-1=1726
崇禎紀元三十九年丙午 1666-1646=21세로 余今年八十有一과 안맞음. 여기 三十九의 三은 九의 오자라고 봄이 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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