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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8 주님공현대축일후 토 – 133위 023° 김흥금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2,27.30).
133위 023° ‘하느님의 종’ 김흥금
이름 : 김흥금(金興金), 세례명 미상
출생 : 1765년, 홍주
순교 : 1815년 11월 18일 – 12월 26일, 옥사, 대구감영
‘명숙(明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흥금(金興金)은 충청도 홍주 태생으로,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장복(長福)과 작단(作丹) 남매를 기르며 홀아비로 살았다. 그는 1801년에 천주 교리를 배워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 너무 가난했으므로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북부의 연풍(延豊) 지역에 있는 교우들 곁으로 이주해 살 수밖에 없었다.
김흥금이 연풍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01년 신유박해가 그곳까지 미쳤다. 이때 연풍 교우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자, 김흥금은 자식들을 데리고 경상도 진보(眞寶, 현재 경북 청송과 영양으로 분리된 진보현) 땅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식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쳐 함께 신앙을 실천했으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즐겨 애긍시사를 하였고, 갖가지 자선을 베풀었다.[1]
김흥금 가족이 진보 땅에 살고 있을 때, 1815년 을해박해[1.1]가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에 불어닥쳤다. 이때 김흥금과 그의 자식들도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압송되었다.
김흥금과 자식들은 안동 관아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런 다음 교우들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2][2.1]
당시 조정에서는 경상 감사의 보고를 받고 다시 자세히 조사하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형을 선고하라.’고 지시하였다.[3] 이후 김흥금의 딸 작단은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4] 김흥금과 아들 장복은 끝까지 형벌을 이겨 내고 신앙을 지켰으니, 이들 부자가 세례를 받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조정에서 경상 감사에게 명하여 김흥금 부자의 사형 판결문을 받아 올리도록 한 것은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이었다. 이어 조정에서는 같은 해 12월 26일(음력 11월 26일) 대구 감영에 천주교 신자들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했는데,[4.1] 이때는 김흥금 부자가 이미 옥중에서 병사한 뒤였다. 그해 김흥금의 나이 50세였다.[5]
그에 앞서 경상 감사가 조정에 올린 김흥금 부자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천주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치지 않겠다고 진술하였습니다.”[6]
[註]__________
[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235; 『일성록』, 순조 을해년(1815년) 6월 18.19일; 『순조실록』, 순조 15년 6월 18일.
[1.1] 을해박해(乙亥迫害) ‘한국가톨릭대사전’ 9권, pp.6886-6887.
1815년(순조 15)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중의 하나.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같이 정치나 사회 윤리 등 복합적인 배경과 원인 아래에서 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법령화되어 있던 박해령과 이를 이용하여 탐욕을 취하려고 한 밀고자의 사용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 박해도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박해 기간도 아주 짧았으나 체포된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옥중 생활은 오히려 길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申亥迫亥)와 이후의 신유박해를 겪는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이주로 인해 교우촌(敎友村)이라는 비밀 신앙 공동체가 각처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상도 북부 지역은 일찍이 신앙의 발자취가 닿지 않던 곳이었던 탓에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2월 22일경 이 지역의 신자들이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서 모이는 기회를 틈타 전지수[1.2]라는 밀고자가 포졸들을 앞세우고 교우촌을 습격하였다. 을해박해의 발단은 이처럼 단순하였는데, 그는 본래 교우촌을 돌아다니면서 신자들의 애긍으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즉시 석방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으며, 그중 14명만이 신앙을 증거한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어 포졸들은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영양의 곧은장과 우현발(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여 안동 진영으로 압송하였는데, 그 가운데 훗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신자는 19명이었다. 다시 말해 청송·진보·영양 등지에서 체포된 71명 중에서 36명은 석방되거나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 사망하고, 2명은 병 때문에 경주와 안동의 옥에 남았으며, 33명만이 신앙을 증거하고 대구로 압송된 것이다.
당시 경상도 감사 이존수(李存秀)는 노론 인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경상도 천주교의 뿌리를 뽑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문초와 투옥을 반복해 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고, 신앙을 굳게 지키는 신자들에게는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병이나 형벌로 인해 옥사하는 신자들이 발생하였으며, 끝내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등지는 이들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신자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순교를 선택하였다. 이 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나 형벌로 인해 옥사한 것이 분명한 순교자는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과 사위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 김흥금(金興金)과 그의 아들 김장복(金長福), 안치룡(安致龍) 등 7명이다. 그리고 김화준(金若古排, 야고보)을 비롯하여 고성대(高聖大, 베드로)와 고성운(高聖雲, 요셉) 형제, 서석봉의 아내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성 김대건 신부님 종조부), 김시임(金時壬, 안나),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 복자 김광옥 子) 등 7명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대구 순교자들 대부분은 충청도 홍주·청양·덕산·면천·예산 등 일찍이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던 내포(內浦) 교회 출신들이었다. 다만, 김윤덕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노고산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다가 체포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을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교우촌 형성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인 김종한은 대구 옥중에서 보내 편지 3통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통해 대구의 신자들이 받았던 고통과 용덕, 그리고 순교 원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이 박해 때 강원도 원주에서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충청도 서산 출신인 김강이(金綱伊, 시몬)였다. 본래 그는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박해가 계속되자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진보 머루산 교우촌을 거쳐 강원도 울진에 가서 살다가 1815년에 체포되었다. 그런 다음 안동 진영에서 한 차례 문초를 받고 원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11월 5일에 옥사하였다.
대구에서 참수된 순교자 7명의 시신은 이후 감사의 명에 따라 형장 인근에 묻혔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친척과 신자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그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80년대 이후 을해박해 때 옥사하거나 참수를 당한 14명 순교자들의 행적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그 현양 운동을 전개해 왔고, 이들 중에서 비교적 행적이 분명한 10명의 순교자를 다시 선정하여 시복 시성 운동을 추진해 오고 있다. 또 원주교구에서도 김강이의 순교 행적을 조사하여 시복 시성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
[1.2] 전지수 또는 전지순 : 신유박해(1801년) 때 서울과 충청도 교우들이 경상도 청송 노래산으로 피신하여 화전을 일구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1814년 여름 대홍수[1.3]에도 산골 모래실 교우촌은 큰 피해가 없었다. 이 무렵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구걸하돈 배교자 전지수가 모래실 교우촌에서 원하는 만큼 식량을 얻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교우들을 관가에 고발하였다.
[1.3] 순조실록 17권, 순조 14년 7월 28일(양력 1814년 9월 11일)
경상 감사 이존수가 영하와 상주 등의 32읍의 수재에 대해서 아뢰다
경상 감사 이존수가 아뢰기를, “이달 16, 17일(양력 1814년 8월 30, 31일)의 비로 영하(營下)와 상주(尙州) 등 32읍의 평지가 모두 물바다가 되고, 무너져 터지고 모래가 덮은 전답(田畓)과 물에 잠기고 쓰러진 각종 곡식은 셀 수도 없었습니다. 이 외의 다른 고을들도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본도의 수재는 늘 임자년이 가장 심하였다고 하는데, 이번의 수해는 임자년(1792년)[1.4]보다도 더하다고들 합니다.”하였다.
[1.4]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7월 14일(양력 1792년 8월 31일)
“영남 영천(永川) 등 50개 고을에 다시 홍수가 나 2천 9호가 떠내려가거나 묻혔고 51인이 깔려 죽거나 빠져 죽었다.”
[2] 『일성록』, 순조 을해년 6월 19일.
[2.1] 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 6월 18일(양력 1815년 7월 24일)
이존수가 사학이 다시 번지고 있으니 조사하길 청하다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가 아뢰기를, “신유년(1801년)의 소탕 뒤에는 의당 사당(邪黨)의 여얼(餘孼)이 다시 번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대령(大嶺) 이남은 우리 동방의 추로지향(鄒魯之鄕, 추로는 맹자의 출생지인 추鄒나라와 공자의 출생지인 노魯나라로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른다)으로 일찍이 사악한 종자가 흘러 들어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추악한 종류가 청송(靑松)·영양(英陽)·진보(眞寶)의 심산 벽촌에 숨어 들어와 저절로 서로 전하여 익히게 되어서 마을 전체가 그릇되어 버렸습니다. 청송의 죄인 최봉한(崔奉漢)은 정약종(丁若鍾)을 따라 배우고 주문모(周文謨)로부터 전해 받은 뒤에 사장(邪贓)을 수습하여 몰래 재를 넘어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는 유민(流民)을 유혹하여 모아 교주(敎主)가 되었었는데, 잡혀 와 감영(監營)의 옥에 갇혔다가 곧 죽었습니다. 그리고 죄인 안치룡(安致龍)·김약고배(金若古排)·고성대(高聖大)·고성운(高聖云)·서석봉(徐碩奉)·이선복(李善福)·김진성(金振聲)·김악지(金岳只)·신광채(申光采)·손두동(孫斗同), 여(女) 성열(性悅)·윤덕(允德)과, 영양의 죄인 김종한(金宗漢)·이희영(李希英)·김희성(金稀成)·김복수(金福守)·김광복(金光福)과, 진보의 죄인 김시우(金時佑)·최윤금(崔允金)·김광억(金光億)·김흥금(金興金)·김험동(金驗同), 김광억의 처 분금(分今) 및 그 아들 김종건(金種乾), 김흥금의 아들 김장복(金長福)·딸 김작단(金作丹), 김험동의 아들 김갑득(金甲得)·딸 김시임(金時任)과 김정임(金丁壬) 등은 서로 전하여 익히게 되어서 빠져들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묘당에서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율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니, 그를 윤허하였다.
[3] 『일성록』, 순조 을해년 7월 7일.
[4] 『일성록』, 순조 을해년 10월 18일.
[5] A. Daveluy, Op. cit., f. 236; 『일성록』, 순조 을해년 11월 26일, 병자년(1816년) 10월 21일.
[6] 『일성록』, 순조 을해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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