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법사
원광은 철저한 신라 화랑의 후예로 541년 태어났다. 이화랑과 숙명궁주가 원광의 부모이다. 원광은 어릴때부터 제자백가의 학설을 독파하고,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원광은 화랑의 계보를 잇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다 중국 유학길에 올라 결국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잊고 마음의 안식처를 갈망해 피폐한 신라인들의 정신을 어루만지고 신라인들을 불교를 통해 구원하려 했다.
원광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양쪽의 경전을 모두 공부하고 귀국했다. 원광은 철저한 화랑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위화랑은 화랑을 창시하고 초대 풍월주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제4대 풍월주를 지냈고 동생 보리도 12대 풍월주에 올랐다.
진평왕의 건의로 신라로 돌아온 원광은 왕명에 따라 걸사표를 지어 중국의 출병을 요청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풀과 물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걸사표를 지어올렸다.
원광법사의 학문과 강론 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비교적 길게 소개하고 있다.
원광은 성품이 텅 비고 허정한 것을 좋아했으며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져 수레를 타고 대궐 안까지 들어가니 당시 덕망과 인의를 갖춘 훌륭한 분이 많았지만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일 만하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 연간에 세상을 뜨니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했다고 했으나 그 장소가 분명하지 못하다. 아마도 황룡사가 잘못 전해진 듯하니 이는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로 한 예와 같다.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불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고 설혹 있다 하더라고 크게 떨치지 못했다. 원광 이후에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중국 유학의 길을 원광이 연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에게 청년들의 삶의 지표가 될 세속오계를 전해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귀산이라고 하는 현명한 분은 사량부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과 친구가 됐다. 두 사람이 서로 “우리가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진 분을 찾아가서 도를 물어보자”고 말했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그의 처소에 나아가 “속된 사람들이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좋은 말씀 해주시면 평생의 지표로 삼겠습니다”고 간청했다.
이에 원광이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가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친구를 사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해야 하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며 세속오계를 일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고 다짐했다. 그 후 두 사람 모두 싸움터에서 특출한 공을 세웠다.
또 건복 30년(613) 계유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와서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서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원광은 신라에서 제자백가, 사서삼경 등을 두루 공부하고, 더 깊은 공부를 위해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나라에서 황제의 허락으로 불교에 귀의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등을 깊이 공부해 중국에서도 크게 우러러보는 신분이 된 것이다.
이때 진평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건의해 원광을 신라로 돌아오게 했다. 신라로 귀국한 원광은 불법강좌를 통해 진평왕의 병을 낳게 하는 등으로 주목을 받으며 황룡사에서 백고강좌를 열어 백성들의 마음을 평안으로 인도했다.
원광은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 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혔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하여 마음에 꼭 들어했다. 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 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했다. 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었으며 잡혀서 죽을 수 있는 위기를 맞았다 .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
신라 본국에서 원광의 뛰어난 활약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하였다. 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추앙했다. 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진평왕이 병이 들어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할 때 어의를 비롯해 전국의 유명한 의원들이 찾아왔지만 치료를 못하고, 병세는 갈수록 깊어갔다. 이때 원광을 불러 치료하게 했다.
원광법사가 왕의 침대 앞에 조용하게 앉아 법문을 읽기 시작했다. 원광이 법문을 외는 날이 사흘을 넘기지 않았는데 진평왕은 평소보다 더 왕성한 기력을 회복하고 거뜬히 낳았다. 원광이 법문을 욀 때 가끔 그의 주변이 불이 붙은 듯이 환하게 빛나면서 달콤한 향기가 방 전체에 가득하게 퍼졌다.
진평왕은 그 이후 더욱 원광을 의존했으며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한 후 결정했다.
진평왕 말년에 원광은 황룡사에서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앉은 체 열반에 들었다.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표정조차 변함이 없어 입적하고도 열흘 동안 감히 옷깃도 건들지 못했다.
첫댓글 유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다시 불교를 깊이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는 반열에 오르신............
여러 설이 있지만
황룡사에서 99세의 나이로 입적하며 성불했다는 설을 믿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