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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성지와 무명 순교자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써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 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에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읍성) 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해미 성지는 무명 순교자분들의 천국이다.
지상교회에서는 비록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셨지만,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천국)에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전 세계에 28곳에 불과한 교황청 승인 국제성지로 선포된 배경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1418년에 병영(兵營)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입니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 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신자 중의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습니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으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 터인데 여기에서 많은 교우가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 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입니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민 베드로 첨지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서문 좌측의 수구로부터 성 밖으로 흘러나간 수로 위에 돌다리가 놓여 있다. 서문으로 끌려 나온 천주교 신자들은 그 위에서 병사 네 사람이 천주교 신자의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잡고 네 사람이 동시에 사람의 몸을 번쩍 들어 떨어트리는 자리개질을 하거나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방법 얼굴에 백지를 붙이고 물을 끼얹어 숨을 목쉬게 해서 죽이는 백지사형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처형을 시켰고 그들의 시체는 즐비하게 서문밖에 널려있었다(1935년 발행 해미 순교약사 8쪽)
포병 방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가 대여 보다가 한사람이 아직 덜 죽은 것을 보고 마구 때려죽여 버린다. 악독했던 포병 방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매 맞아 죽고 절손하여 외인들이 왈 천벌을 받았다 한다(1935년 발행 해미 순교 약사 9쪽 상단)
천주교 대전교구 방윤석(베르나르도) 신부의 고조부 방 영창(안토니오)순교자도 서문 밖 자리개돌에서 자리개질로 순교하였다. 당시 사형 도구로 사용되었던 자리개 돌은 1956년 6월14일에 서산 성당 신균식 신부의 지도로 서산경찰서장(이영환.요셉)과 (법원에근무하던(유익선.그레고리오), 해미 면장과(외교인), 당시 해미면 총무과에 근무하던 김동완. 마르코(후일 해미면장, 대곡리 공소 2대 회장 김인제. 안드레아 의 3남)의 실질적인 협조로 서산 성당(현 서산 동문 성당)으로 옮겨 성당 앞에 세워져 보존되었고 그 자리는 시멘트로 다리를 다시 만들어 주민이 불편하지 않게 하였다.
이 돌은 1986년 병인순교 120년을 기념하여 1986년 9월 11일에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보존하였다. 그 후 해미 도시계획도로 개설에 따라 2009년 1월 8일에 생매장순교성지 유해 참배실 앞에 터를 마련하고 새로이 단장하여 보존하고, 서문 밖 순교 성지에는 자리개 돌 모조품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지금도 돌다리는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2. 해미읍성 감옥 터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 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는데.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으며.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 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삿줄에 움푹 패도록 옛 임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 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 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 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 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 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죽여 버렸다.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 죽고 자손 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 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고전합니다.
그래서 감옥 터를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 그 터의 교회 적 성역화 사업이 불허되고 있다.
3. 해미지역 순교자
1)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 순교일: 1800년 1월 9일 (음력 1799년 12월 15일) .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인언민(1737~1800)은 덕산 주례(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공주로 이주해 살다가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와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해미 진영으로 다시 압송되어 해미 옥에서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고,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전혀 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라는 명령을 내렸다.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언민 마르티노에게 갖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
2) 복자 김진후 (비오):순교일: 1814년 12월 1일 (음력 1814년 10월 20일).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김진후(1739~1814)는 김대건(ST,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충남 면천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그의 집안은 맏아들 종현이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 모두가 이를 따르게 되었다.
김진후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으며, 1801년에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 배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이때부터는 굳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는 76세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굳은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수감자들을 감화시켰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 순교일: 1800년 1월 9일 (음력 1799년 12월 15일).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이보현(1733~1800)은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20세가 좀 넘어서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입교 이후 이보현은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매제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 정사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해미 영장 앞으로 이송되어 심한 매질을 당하여 2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
4. 해미 서문 밖 자리개 형 터
▲ 자리 개질 사형 장면
피의 제사장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하였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 비가 있다. 2009년 1월 8일에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해미 생매장 순교 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현재 모조품을 준비해 두었다.
▲ 원래 해미읍성 서문 밖에 있었던 자리 개돌 원본을 해미성 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5. 해미 성지 유해 참배실
발굴된 유해가 상홍리 공소 쪽에 모셔져 있다가 다시 본래의 장소인 생매장터로 모실 때 김종수 주교의 의견으로 진토된 유해는 순교 탑 앞에 모시고 아직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치아와 유골은 눈으로 직접 뵙고 참배할 수 있도록 투명한 아크릴로 진공 포장해서 따로 모셨다. 이 유해들을 왕릉의 형태를 본 따 떼를 입힌 봉분 형태로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다. 말하자면 묘지인 셈이다. 신자들이 들어가 유해 참배를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안쪽에 유해를 모신 유해 참배 실을 만들었는데, 그 공간 밖은 생매장 순교를 이해할 수 있는 약간의 그림 등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 (이는 전시관이 아닌 것이다.)
전체적으로 성전 동은 12사도를 기초 삼아 교회가 세워졌듯이 12 기둥에 새겨진 은인들의 힘으로 이 성전이 세워졌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교회를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시면서 지켜주고 계심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6. 생매장터. 진둠병
▼ 산 사람을 생매장한 진둠벙 (발굴 시 사람의 뼈가 서 있었다 한다)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 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처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다른 곳에선 굉장히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살아 있는 천주교인의 무리 들을 포개 넣고 그 위에 흙과 돌 따위를 쌓아서 죽이고 묻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운다. (방마리아 박요한, 문마리아 등이 1868년 무진년 5월 충청도 해미에서 생매장 당해 순교. 치명일기 716.718.719참조)
옛적에는 해미천이 해미 생매장 순교 성지(여숫골)를 중심으로 좌우로 흐르고 있었고 이곳은 마치 섬 형태를 지닌 곳으로 아름드리나무 오리나무 버드나무 등이 우거져서 "숲" 혹은 "숲정이"라 불리었다.
어떤 날 저녁때쯤 하여 사령들이 사람 수십 명을 길게 엮어서 끌고 조그마한 길로 바다를 향하여 가니 저게 웬일일까? 영장은 없고 형리들만 끌고 간다. 동리 사람들은 형역들이 무서워서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중 어떤 리씨 하나와 박승익이라는 17세 된 아이와 리주필이 따라가서 보니 들을 지나 바다 쪽으로 가다가 내를 건너니 이 내는 산에서 나오므로 비올 때는 물이 많고 세어서 무서운 내이다. 이 내를 건너면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에 구덩이를 몇 개 파고서 끌고 온 사람들을 묻어 죽이려는 것이다. 끌고 온 이가 성교하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업체서 세우고 지금이라도 성교를 안 는다고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욕들 하여라 지금이라도 놓아 주마 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공경스럽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죽으면 천당으로 간다고 함으로 목도 매여 죽이고 그대로 산채로 파묻기도 하였는데 이웃 동네에 사는 조산(여아) 이와 그 아이의 동무 몇이 그 광경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 금치 못하였다 하며 돗투성이 김 씨(여아)도 보았는데 묶어서 산 채로 묻어 죽이는 그 틈에는 처녀들도 많이 섞여 다 하며, 죽을 때 어떤 이는 아프다고 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어떤 이는 잠잠히 있었는데 사령들이 너도 예수 마리아를 불러라 하였다고 그 당시에 돌아다니는 풍설은 약을 먹어서 그와 같이 환장하였다. 다른 사람 때문에 저렇게 죽었다 성교하는 사람들은 착한데 왜 죽이는지 등 일반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송구한 전설이 많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1935년 경형 잡지 발행 해미 순교 약사 9쪽 하단~11쪽 상단에서 발췌)
박해의 모진 회오리바람이 멈추고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된 후에 신앙의 자유는 이 땅에 찾아왔다. 이곳 여숫골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었다. 1905년에는 조선에 크나큰 홍수가 있었는데 이를 병오 대홍수라 한다. 이때 해미도 예외는 아니어서 숲정이도 홍수로 인해 쓸려 갔다.
1935년 3월 말에 서산 본당의 고 베드로 범 신부님은 해미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증인들을 찾게 되고 이때 당시의 목격 증인 한범동, 리주필, 박승익씨 등의 목격담을 증거로 하여 해미천 건너 숲정이에서 유해발굴을 하게 되는데 여러 날에 걸쳐서 유해를 발굴하여 동년 4월 1일 대곡리 공소에서 유해를 모시고 밤샘 조 배 기도하고 다음날 4월 2일 가재성당(상홍리 공소:그 당시는 서산 본당이 현 상홍리 공소 자리에 있었음) 뒷산 백낙선씨 가족묘지에 이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무덤과 다름없는 상태로 무심히 20년을 지내 오면서 매년 순교자 첨례일에는 많은 교우가 이 묘지에 참배하고 1년 1차례 관내 각 공소 교우들도 여기서 모여 순교사기를 낭독하며 순교 조상들의 정신과 공적을 묵상하여 오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너무 초라함을 느끼게 되어 작년 신균식 본당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회장 회의에서 천묘 20주년을 기회로 무덤수축, 범 신부 묘비를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15만 환의 성금을 모으고 순교자 현양회의 원조를 청하여 한국 명물 남포 오석의 묘비와 15척 철근 콘크리트 위에 5척 백색 화강석 십자가로 된 순교 탑을 1955년 4월 2일에 건립하였다는 바 반공에 우뚝 솟은 이 순교 탑은 천주는 누구시고 사람의 영혼은 무엇인지 무언중 설교하고 있어 교우들의 신덕을 굳게 하고 (경형 잡지 1955년 7월 1일 발행 47권 1048호에서 발췌)
그 후 생매장 순교지는 외인의 경작지로 바뀌게 되고 해미 공소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매입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74년 초에 해미 고상 득(프란치스코)이 생매장 순교 성지 터 409평을 매입하여 서산 본당 이규남 신부께 봉헌하게 되어 이규남(요셉) 신부 주선으로 1975년 10월 24일에 높이 16m 철근 콘크리트 해미 순교 탑(회장 유현석 봉헌)을 황민성 베드로 주교 주례로 축성되었고, 그 후 현양 회장 이 진교(베드로)의 활동으로 계속해서 성지매입 작업을 하게 되고 성가 소비녀 수녀원에서는 순교 탑 주변의 땅 1,700여 평의 땅을 확보하면서 점차 성지가 가꾸어지기 시작하였다.
해미성당 초대신부인 윤종관(가브리엘) 신부가 1985년 4월 10에 부임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고 제3대 주임신부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신부는(2009년 3월 25일 보좌주교 성품) 1995년 8월 12일 경갑룡 요셉 교구장의 지시에 의해 해미 무명 순교자 상홍리 묘소를 파묘 하여 해미 순교탑 앞으로 천묘 하라는 주교의 명을 받들어 동년 9월 18일에 상홍리 묘소를 파묘하고 순교자 유해를 별도로 모시고 진토가 된 순교자의 유해는 두개의 백자 항아리에 담아 순교탑 앞 작은 묘소를 만들고 그 안에 모셨다.
(1995년 9월 20일 순교자 대축일 현양 대회 개최)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교자의 유해는 충남 대학교 김원석 교수팀에 의해 특수한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 안에 넣고 밀봉하여 1996년 7월 10일~9월 11일에 보존 처리하고, 순교자의 치아 242개가 수습되어 대전에 치과의사 김민형(요셉)의 봉사로 1996년 6월에 한 분씩의 치아가 구분되는데 이때 밝혀진 순교자의 치아는 2개 이상 치아를 가지신 분만도 18분이 되었고, 치아가 잘 판명이 안 된 것은 33개나 되었다.
18인의 치아를 연령으로 구분해 볼 때 20대가 8인, 30대가 7인, 40대가 2인, 50대가 1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분들의 유해는 보존 처리되어 해미 성당 기도방, 해미 성지의 천막 성당의 유해 참배실 옮겨 모시게 되고 2001년 2월 8일 교구 인사 발령에 따라 해미 성당과 해미 성지가 분리되고 안상길 사도 요한 신부가 성지 초대신부로 파견이 되면서 성전건립이 본격 추진되어 2001년 8월 6일에 천막 성당에서 총대리 신부 주례로 성전 기공식을 하고 2003년 6월 17일에 경갑룡 요셉 주교의 주례로 대성당에서 성전 축복식이 있었고, 성지 주임 제2대 백성수(시몬) 신부의 지도로 순교자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2009년 10월 17일 유흥식(라자로) 주교의 축복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경건하게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기념관 자리만 하더라도 1964년 봄에 해미 공소 신자였던 유인협 요한 씨의 증언에 의하면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된 장소라고 한다. 당시 유인협 요한 씨는(당시 나이 22세) 아버지(유순봉 베드로)와 성지 주변에 300평의 땅과 국유지 600평의 밭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밭에서 나오는 보리나 콩과 같은 작물보다는 벼를 경작하여 얻는 쌀이 훨씬 소득이 있었기에 밭을 논으로 만드는 개답을 하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종아리뼈 2개가 꼿꼿하게 서 있었고 숯덩이와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 구덩이의 흙은 가는 모래로 되어있었는데 모래가 약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흙에서는 그때까지도 사람의 시신이 부패하여 풍기는 냄새가 많이 나고 있었다. 아버지(유순봉 베드로)와 상의하여 현재 성지 교육관 부지(조산리 299-25) 주변에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돌무더기를 헤치고 그 안에 구덩이를 만들고 묻어 주었다. 라고 유인협 요한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생매장 순교 성지 어디에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계실지 모르는 순교지라 하겠다. 최근까지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에 불과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자리개질로 순교한 순교자는 1명 수많은 이가 생매장 또는 수장으로 순교하였으나 생매장으로 기록된 순교자는 불과 3명밖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해미 순교 성지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해미 현에 거주하면서도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도 찾을 수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 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려는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지역 외인들을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하는데 이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도(일본 강점기)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 지도로 순교자의 유해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터인 원위치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유해 참배실).
고 유해 발굴지 인근인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 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순교자 중 최근까지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신 순교자는 교회 측 기록 67명 관측기록 65명과 무명 순교자로 기록된 47명으로 되어있으나 그밖에 이름 모를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모두가 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 중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 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 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 양회를 발족하였고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으며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124위 중 해미 순교자 세 분 즉,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가 시복되었고 그다음 날 17일에는 이곳 성지를 방문하시어 시복 기념비를 제막, 축복하시었고 곳곳을 순례하셨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 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7. 해미 서문 밖 순교지
서문 좌측의 수구로부터 성 밖으로 흘러나간 수로 위에 돌다리가 놓여 있다. 서문으로 끌려 나온 천주교 신자들은 그 위에서 병사 네 사람이 천주교 신자의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잡고 네 사람이 동시에 사람의 몸을 번쩍 들어 떨어트리는 자리개질을 하거나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방법 얼굴에 백지를 붙이고 물을 끼얹어 숨을 목쉬게 해서 죽이는 백지사형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처형을 시켰고 그들의 시체는 즐비하게 서문밖에 널려있었다(1935년 발행 해미 순교약사 8쪽)
포병 방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가 대여 보다가 한사람이 아직 덜 죽은 것을 보고 마구 때려죽여 버린다. 악독했던 포병 방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매 맞아 죽고 절손하여 외인들이 왈 천벌을 받았다 한다(1935년 발행 해미 순교 약사 9쪽 상단)
천주교 대전교구 방윤석(베르나르도) 신부의 고조부 방 영창(안토니오)순교자도 서문 밖 자리개돌에서 자리개질로 순교하였다. 당시 사형 도구로 사용되었던 자리개 돌은 1956년 6월14일에 서산 성당 신균식 신부의 지도로 서산경찰서장(이영환.요셉)과 (법원에근무하던(유익선.그레고리오), 해미 면장과(외교인), 당시 해미면 총무과에 근무하던 김동완. 마르코(후일 해미면장, 대곡리 공소 2대 회장 김인제. 안드레아 의 3남)의 실질적인 협조로 서산 성당(현 서산 동문 성당)으로 옮겨 성당 앞에 세워져 보존되었고 그 자리는 시멘트로 다리를 다시 만들어 주민이 불편하지 않게 하였다.
이 돌은 1986년 병인순교 120년을 기념하여 1986년 9월 11일에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보존하였다. 그 후 해미 도시계획도로 개설에 따라 2009년 1월 8일에 생매장순교성지 유해 참배실 앞에 터를 마련하고 새로이 단장하여 보존하고, 서문 밖 순교 성지에는 자리개 돌 모조품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지금도 돌다리는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8. 여숫골
생매장 순교지(여숫골)
산 채로 묻어 죽여(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 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 졌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나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며,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써 생 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라는 간구 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해미 한티고개 정상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해미 압송로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티 고개는 교우들이 무리 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다.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갯마루 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갯마루 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
막으로 뒤돌아보던 곳(내려다 보이는곳이 순교자들의 고향 마을)
가야산(678m)은 덕산면과 해미면의 접경을 이루는 곳이다. 이 산 안쪽에는 유명한 흥선대원군 집안의 무덤들이 있는데, 1866년의 병인박해가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갈 무렵인 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덕산 굴 총 사건으로 오히려 박해가 가중되었다.
한편 그 도로의 왼쪽으로는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는 덕숭산(495m) 자락에 와 닿고 있다. 그러니까 가야산과 덕숭산이 맞닿는 골짜기, 덕산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가 바로 한티 고개이다. 이곳 한티 고개는 1790년부터 1880까지 내포 지방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핍박 속에서도 해미로 끌려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이다. 해미 진영에서 관장하던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상이었지만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한티 고개를 끌려 넘어가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되었다.
덕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덕산 읍내에서 해미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계고장 2층 건물이 보이는 입구를 막 지나면 오른쪽 입구에 「한티 고개 - 순교자 압송로, 2km」 푯말이 보인다. 푯말 옆에는 남원 양씨 효행 비가 길가에 보인다.
이곳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승용차 2~3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보이고 민가의 마당을 관통해서 올라가게 된다. 고갯길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은 고개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10. 해미 성지 근처 사적지, 덕산 남연군 묘[南延君墓]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풍수지리설을 믿은 대원군 이하응이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 있던 옛 가야사를 불 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道文)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 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기 위하여 이 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크게 노한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을 가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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