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慶尙道 金山郡 助馬南面 安棲洞(現 金陵郡 助馬面 新安洞)의 和順 崔氏家에서 5대에 걸쳐 써내려온 家乘日記의 일부이다. 필사본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崔鳳吉(1853∼1907)이 기록한 癸巳, 甲午, 乙未年條를 수록하였다. 처음에는 曆書 위에 썼기 때문에 기록한 분량이 많지 않았으나, 두 번째로 이어쓴 崔昌洛(1832∼1866)이 韓紙에 精寫해서 成冊한 후부터는 年錄에서 月錄으로 그 다음에는 日錄 형태까지 되어 事案에 따라서는 상세한 설명까지 붙여져 있다. 여기에 수록한 癸巳年條에는 東學의 大熾 사실을 적고, 甲午年條에는 경상도 북부지방인 金山 농민군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농민군 집강소의 활동 및 인근 각읍의 동정과 더불어, 9월 봉기 후의 금산 사정 등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乙未年條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실과 유림의 단발령 대응 등을 적었다. 경상도 북부지방에서 벌어진 金山 농민군의 활동과 향촌사회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영남일보 기록 동학교도 .
편보언(1866~1901)
편상목(1869~1937),
배재연(1861~1945),
권봉제(1845~1936),
강기선(1846~1894)
※세장년록 기록
죽전(竹田) 남정훈(南廷薰:?-1895)
진목(眞木) 편보언(片輔彦:?-1895) : 도집강(都執綱)
- 진목은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의 세거 무관으로 관직을 이어 온 양반 집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음
편백현(片白現) 죽정(竹汀)강주연(康柱然), : 접주(接主) ▷강석구(姜碩龜)의 현손
기동(耆洞) 김정문(金定文)[감호정(鑑湖亭) 고자(庫子)], : 접주(接主)
강평(江坪) 도사(都事) 강영(姜永) : 접주(接主) ▷구곡으로 도주
봉계(鳳溪) 조순재(曺舜在), 접주(接主)
공자동(孔子洞) 선달(先達) 장기원(張箕遠) : 접주(接主) ▷가족과함께 도주
신하(新下) 배군헌(裵君憲) :
장암(壯岩) 권학서(權學書) : 접주(接主)
※1894.12.25 동학의 우두머리 편보언(片保彦, 保는 輔의 오식)과 남정훈(南廷薰) 등 4∼5놈을 붙잡아 김천(金泉) 시장에서 총살하니,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전후 죽인 자가 거의 20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사내아이를 낳았다.[이름은 팔룡(八龍)이다.] 몇 세대 종가를 계승해 온 집안에 비로소 사내아이를 하나 얻게 되었다. 경사와 행복이 지극하지만 내 나이가 41세이니, 이는 소나무를 심어 그 재목으로 정자를 세워 보려는 자가 아닌가.
1893년 2월
2월[二月]
20일
쌀 1승(升)의 가격이 1냥(兩) 7전(錢)이다. 시장의 가격이 병자년(丙子年, 1876)보다 심하여 인심이 비로소 소란스러워졌다.
1893년 3월
3월[三月]
15일
나는 성주(星州) 무흘(武屹)에 가서 유계(儒契)에 들어갔다. 대문 가운데 적힌 향도유(鄕道儒)가 거의 70여 원(員)에 이르렀는데 의관이 의젓하여 완연히 한강선생(寒岡先生)의 유풍(遺風)을 보는 듯하였다.
16일
파좌(罷座, 폐회)한 후 6∼7명의 친구와 함께 수도암(修道庵)에 올라가 그대로 머물러 묵었다. 다음날 청암사(靑庵寺)에 도착하여 산수를 실컷 감상하니, 세상살이의 너더분한 일들이 사라지고 신선의 느낌이 갑자기 느껴졌다.
20일
고반동(考盤洞)에 들어가 동강선생(東岡先生)의 유계에 참여하였다. 우리 집안이 이 유계에 참여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선친이 일찍이 도청(都廳)의 직임을 맡았으나, 내가 모임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동학(東學)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양부터 지방 고을까지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왜적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삼아 1만여 명이 한 곳에 모였다고 한다. 이는 재앙의 근원이 아닌가.
1893년 4월
4월[四月]
16일
도처에 보리농사가 극히 흉년이었다. 봄보리를 많이 경작한 자는 조금 나았다. 시장 가격은 1승(升)에 1냥 5∼6전(錢)이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아 이앙하지 못한 곳이 많았다.
1893년 6월
6월[六月][6월 바람이 불어 재앙이 일어났다.]
초 3일
비로소 마른 땅에 큰 비가 내려 모종을 옮겨 심는 일이 몹시 바빴다. 이앙한 후 또 가뭄이 들었다. 6월 20일에 가서야 비로소 비가 내렸는데, 연이틀 동안 날씨가 개지 않았다. 23일 광풍(狂風)이 크게 일어났는데, 을축년 (乙丑年, 1865)의 바람보다 심하였다. 벼가 모두 말라 죽어 흰색이 사방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 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남지역 가운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피해를 당하지 않은 면화와 채포(菜圃)가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모든 농작물이 죽게 되어 흉년이 되었다. 쌀 1승의 가격이 2냥, 보리 1승의 가격이 1냥이다. 인심이 떠들썩하여 소문이 매우 두려웠다. 우리 집안의 지평(只坪) 18두락지 논이 그 피해를 전적으로 받아 먹을 만한 곡물이 한 톨도 없어 열 식구의 생계가 대책이 없어 막막하니 근심을 말할 수 없다.
6월[六月]
26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막내 숙부님이 부증(浮症)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우리 집안의 상(喪)이 어찌 하여 이처럼 참혹한가.
1893년 7월
7월[七月]
26일
막내 숙부님 장례식을 치르고 기산(箕山) 북쪽 기슭 문총(文塚) 아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1893년 8월
8월[八月]
20일
감시(監試)를 치르는 날이다. 경상우도의 시험장소는 초계(草溪)에 정해졌는데, 시관(試官)은 소론(少論) 조병승(趙秉承)이다. 과거 법규가 더욱 해이해져 조금도 공정한 도리가 없었다. 우리 고을에서 시험에 합격한 자는 7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고, 중제(仲弟) 자적(子笛)은 봄 사이에 상경하여 이어서 한성시(漢城試)를 보았는데, “1소(一所)의 시관은 이헌영(李憲永)이고, 2소(二所)의 시관은 조희일(趙希一)이었다. 1소는 매우 공정하였으나, 2소는 공정함이 전혀 없어 파방(破榜, 과거시험 무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믐날 경무대(景武臺)에서 응제시(應製試)를 설행하였는데, 임금께서 친림하여 시(詩)·부(賦)· 표(表) 세 시제(試題)를 출제하였다. 중제가 내 이름으로 표(表)를 올려 감시 초방(監試初榜)에 입격하였다”고 한다.
1893년 9월
9월[九月]
초 9일
저녁에 한양의 참방(參榜)이 중제가 집으로 보낸 편지와 함께 도착하였는데, 과연 들었던 내용 그대로였다. 매우 기쁘고 매우 기쁘다. 을유년 (乙酉年, 1885) 이후부터 과거 합격소식이 해마다 끊이질 않아 매우 기특한 일이다. 우리 집안이 부흥하는 운수가 되돌아오는 조짐인가. 매우 행복하고 행복하다.
20일
중제가 공도회(公都會)를 보려고 초택찰(抄擇札)과 복시찰(覆試札)을 꺼내 봉계(鳳溪)의 인편을 통해 보냈다. 그러나 감영에서 다른 날로 변경하여 행한다는 명령이 내렸는데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아 매우 답답하다.
1893년 10월
10월[十月]
초 3일
우리 집의 18두락지 논을 타작하니 거두어들인 섬(石) 수가 이전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 이른바 한답(旱畓)은 더욱 할 말이 없다. 그믐날 상주(尙州) 도회(都會)가 마침내 날짜를 잡았고, 본 고을 수령이 문과 상시(上試) [민배호씨(閔配鎬氏)]가 되었고, 고을 사람 중 참여한 자가 8인인데 중제가 서울에 있어 되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중제의 이름으로 가서 시험을 보아 또다시 합격하였다. 복시(覆試)를 치르는 날짜는 다음달 15일이다.
1893년 11월
11월[十一月]
초 9일
나는 기동(耆洞) 고숙(姑叔)[여석무씨(呂錫武氏)]와 함께 영저(營邸)에 가서 신달판(申達判) 어른[신학휴씨(申學休氏]을 뵈었다. 그리고 복시의 대강의 줄거리를 물으니 금년의 복시는 공정한 도리가 없을 듯 하다고 하였다.
15일
조반을 먹었다. 선화당(宣化堂) 문 밖에 가니 복시에 응시한 유생들이 많이 와서 기다렸다가 이름을 부르면 차례로 들어갔다. 이어서 시(詩)·부(賦) 각 3수씩 출제하였다.[시제(詩題)는 ‘거문고를 타고서 사마의를 물리침[彈琴却司馬懿]’,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天道)의 떳떳함이다’, ‘임금의 은덕을 널리 펼치고 백성과 더불어 즐기는 것은 자사(刺史)의 일’이다.] 나는 즉시 시권을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고숙 역시 시권에 글을 다 쓰고 시험장을 나왔다.
16일
비교방(比較榜, 급제자의 등급)이 나왔는데, 나와 고숙과 친구 조윤묵(曺允默)이 참방하여 비교(比較) 3인이 모두 당상(堂上)으로 올라갔다. 비교 유생 50원(員)이 모두 차례대로 열좌(列坐)하여 자리가 정해지자 시제를 걸었는데,[시제(詩題)는 ‘현량방정(賢良方正)하고 직언극간(直言極諫)한 선비를 등용함’이다.] 주필(走筆)로 써서 시권을 올리니, 그 순서가 바로 이천(二天)이었다. 조금 있다가 비교방이 나왔는데, 나는 낙방하고 고숙은 또 비교방에 참여하고 조윤묵은 원방(原榜, 과거급제)에 참여하였다.
1893년 12월
12월[十二月][포제는 읍이 마치 쓰러지는 큰 집과 같아 생각하니]
16일
읍에 들어가서 수령 민배호씨(閔配鎬氏)를 만났는데 수령이 축하하며 포상하였다.
20일
민후(閔侯, 민배호)가 홍장력(紅粧曆) 1건을 보냈다.
22일
서울에 있는 중제가 관원 편을 통해 중력(中曆) 3건을 보내왔다. 이 해 들어온 세찬(歲饌)이 더욱 많았다. 청어(靑魚) 15급(級), 대구어(大口魚) 10미(尾), 통대구어(統大口魚) 2미 아전 박만주(朴萬炷)가 달력 2건, 육촉(肉燭, 쇠기름으로 만든 초) 4병(柄), 청어 1지(枝)를 보내왔고 아전 백낙현(白樂賢)이 달력 1건을 보내왔다.
25일
지례(知禮) 사또 이재하씨(李宰夏氏)가 달력 1건을 보냈다.
1894년 1월
1894년[甲午 光緖二十年 當宁 三十一年]
1월[正月]
초 1일
아침에 희미한 구름이 동북쪽을 가리고 있었다가 일출할 적에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려 종일토록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초 7일
새벽부터 저물 때까지 바람이 뒤흔들었다.
15일
아침에 반쯤 해가 비치고 반쯤 어두웠다. 바람이 불었다.
15일
저녁에 구름이 하늘을 가려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막내 누이동생의 혼사를 성주(星州) 수촌(樹村) 여충겸씨(呂衷兼氏) 집안과 정하고 사주(四柱)를 받았다.
19일
수촌에 혼례날을 알리는 심부름꾼을 보냈다. 혼례식 날짜는 2월 초6일이다. 회채(會債, 회시를 치르느라 진 빚) 50냥을 중동(中洞) 이치선(李致先)에게 부쳤다.
1894년 2월
2월[二月]
초 6일
막내누이의 혼례를 좋게 치렀다. 신랑이 잘 생겨 매우 기쁜 마음이었지만, 어버이 없는 고로(孤露)의 감정이 배나 더하였다. 회시(會試) 일자는 이번달 20일에 있는데, 나는 막내누이 혼례로 바빠 10일에서야 회시를 치르려고 출발하였다.
16일
성안으로 들어가 명동(明洞) 천원일(千元一) 집에 가니 중제 자적(子笛)이 나의 도착을 몹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형제가 상봉하게 되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17일
중제와 함께 회동(會洞)에 가서 윤승지(尹丞旨)[상연(相衍)]를 뵙고, 또 종현(鍾峴)에 가서 서참판(徐參判)[상조(相祖)]를 뵙고, 매동(梅洞)에 가서 이참판(李參判)[헌영(憲永)]을 뵈었는데,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18일
홍현(紅峴)에 가서 민세마(閔洗馬)[영수(泳秀)]를 방문하고, 한동(漢洞)에 가서 심판관(沈判官)[건택(健澤)]을 뵙고, 감상현(監象峴)에 가서 도사(都事)[명하(命夏)]를 만나고 돌아왔다.
19일
반촌(泮村) 에 들어가서 머물 곳을 잡았다. 이날 시망(試望)이 나왔는데, 1소(一所)의 상시관은 김학진(金鶴鎭)이고, 2소(二所)의 상시관은 이헌영(李憲永)이다. 나와 이대감은 친분이 있기 때문에 곧장 이대감 집에 가니, 수레와 말들이 대문 앞에 분주하였고 금옥(金玉)이 마당에 가득하였다. 이는 모두 과거시험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감은 성품이 공평하여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20일
늦은 저녁 무렵 과거시험장이 있는 동네를 들어갔다. 사립문이 열리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난입하였는데, 유건(儒巾)을 쓴 사람은 거의 없고 심지어 떡과 술을 파는 장사꾼도 들어왔다. 과거시험장의 규정의 해이함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도 모르게 한심한 마음이 든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1시)가 가까워지자 2소(二所)에 시제가 내걸렸다. 2소의 시제(詩題)는 ‘문왕(文王)이 인재를 양성하는 효과가 마치 봄바람의 화기(和氣)가 있는 곳마다 빛을 발한 것과 같다’이고, 부제(賦題)는 ‘기취(旣醉)의 시가 화봉(華封) 사람의 축수와 같구나’이다. 1소(一所)의 시제는 ‘봉황새가 동방 군자의 나라에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하리라’이고, 부제(賦題)는 ‘주(周)나라가 융성하니 들에서 봉황새가 우네’이다. 나는 2소에 갔다. 형은 아우의 글을 지어 처음에는 시(詩)를 써서 시권(試券)을 올리고 또 부(賦)를 써서 다시 올렸다.
22일
종장(終場)이다. 또 의(疑)를 지어 제출하였다. 회시에 거듭 시권을 제출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과거의 규정을 멸시하는 소치이다. 갑술생(甲戌生) 과유(科儒)는 노론 소론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방(榜)의 끝에 붙이라는 분부가 있었고 춘방(春坊) 계방(桂坊)의 자식 사위 동생 조카와 시임 원임 및 대현의 사손(嗣孫, 종손)도 또한 모두 방의 끝에 붙여 백명을 더 합격시켜서 합격자가 모두 2백명이 되었다.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어야 하는 복시의 시권을 뽑아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나는 다시 과거에 떨어졌다. 과거시험의 운수가 어찌 이리도 전혀 없단 말인가. 세 차례 회시를 보았지만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해 자탄만 하니 다시 누구를 탓하겠는가.
1894년 3월
3월[三月]
초 1일
집으로 돌아가려고 출발하였다. 중제는 또 내려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사월(沙月)에 거주하는 김형(金兄) 낙여보(洛汝甫, 甫는 미칭)와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한양의 상황이 갈수록 근심스럽고 참혹하였다. 청국인, 왜국인, 프랑스인, 미국인이 차츰 더욱 와서 거주하여 전물(廛物)을 매매하니 물가가 배나 올랐다. 밥 한 상(床) 가격이 5∼6전(錢)에 이르고 술 한 사발에 4,5푼, 초(草) 1속(束)이 2푼으로, 물가가 이처럼 폭등하니 곤궁한 선비는 하루도 머무를 수 없다.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홍종오(洪鍾五, 五는 宇의 오기)라는 자가 역신(逆臣) 김옥균(金玉均)을 따라 왜국(倭國)에 들어가 몇 해 동안 지냈었다. 이 해 봄에 김옥균을 유인하여 상해관(上海關)에 가게 하여 참수(斬首)하였다. 의주부윤(義州府尹)이 조정에 아뢰어 보고하였다. 초2일 오시(午時)에 김옥균의 시신이 도성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초 2일
낙여형(洛汝兄)과 출발하여 드디어 조령(鳥嶺)을 향했는데 험준한 이 고개를 넘으니 촉도(蜀道) 진교(眞嶠) 남쪽 후문(喉門) 보다 심하다.
11일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동학이 크게 번성하였다. 영남은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사람이 자칭 법헌선생(法憲先生, 憲은 軒의 오자)이라고 하고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충청도 보은(報恩) 장내를 점거하였고, 전라도는 전봉준(田鳳俊, 全琫準의 오기)이라는 자가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고 칭하고 또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전주 등지를 분할해 점거하니 인심이 동요되어 마치 물이 끓는 듯하였다. 대개 동학(東學)이라는 명칭이 과연 어떤 물건인가. 자칭 도인(道人)이라는 자가 수십 글자의 주문을 외워서 신통하게 되면 헤아릴 수 없는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이고 한 세상을 현혹시키니 무지한 자와 무뢰배들이 점점 빠져들었다. 동학교에 들어간 자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고 비록 피공(皮工)이나 무녀(巫女)와 같은 천민들이 사대부와 함께 들어가면 서로 공경하고 절하면서 ‘접장(接丈)’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그 상전에게도 그렇게 대하였다. 전적으로 무리를 모으는 것에 주로 힘썼다. 전날 감정이 상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지금 보복하였고 오랫동안 갚지 않은 빚을 받아내고 가까이 있는 남의 무덤을 파내었다. 그들이 제멋대로 호령을 발하였지만, 감사와 수령이 수수방관하며 금지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폐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명문가와 거족(巨族)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
20일
내신하(內新下)에 거주한 송낙현(宋洛玄)이라는 사람이 동학에 붙어 그 무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서 나를 협박하기를, “이 동네 가운데 복사답(伏沙畓) 4두락지를 몇해 전에 사서 경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4년 동안 한 번도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허복(虛卜)을 징수하니, 지금 단연코 그 논을 도로 물리고 그 결수를 받아내겠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돈을 주고 산 논을 도로 물리면서 결수(結數)를 받겠다는 말은 모두 억측이다”라고 하니, 그 무리들이 강제로 협박하며 구타하였다. 그 사이 수모를 당한 일이 끝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분노를 설욕할 길이 없었다. 송(宋)놈의 소행은 죽여도 아깝지 않다.
1894년 4월
4월[四月]
초 4일
임금께서 동학교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감영에서 매우 엄격히 신칙하여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니, 동학의 무리들이 조금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전해 들으니, 전라도 비류(匪類)는 더욱 많아져 온 도에 가득하여 관청을 불태우고 탐리(貪吏)를 죽이니, 그 기염이 매우 번창하였다. 게으르고 놀고먹는 백성들과 두건을 두른 불량배들이 다투듯이 동학에 들어갔다. 각 읍의 군기(軍器)를 탈취하고 수만 명이 떼를 지어 모이니, 전라감사[김문현씨(金文鉉氏)]가 군사를 출동시켜 접전하였다가 패배하고 돌아왔다.
13일
성주(星州) 묵방(墨坊)에서 강회(講會)하는 날이다. 사미(四未) 장선생(張先生)[함자는 복추(福樞)이고, 은일(隱逸)로 도사(都事)를 지냄]이 만년에 이 땅을 정하여 지팡이 짚고 거닐며 사셨다. 각 읍의 유생이 수계(修禊)하고 강학하는 뜻으로 통문을 발하여 일제히 모였기 때문에 나 역시 가서 참여하였다. 회원이 거의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아침 이후 송단(松坛) 위에서 개좌(開座)하였다. 먼저 향약(鄕約)을 행하였고, 오후 개강(開講)하였다. 나는 직일(直日, 숙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문답을 기록하였다. 월초에 대전(大殿, 고종)께서 동관(潼關) 구궐(舊闕)로 이어(移御)하셨다.
16일
전봉준이 동학교인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전라감영을 침범하자 전라감사가 도망쳤다. 그 무리들이 성중에 돌진하여 선화당(宣化堂)을 점거하고 사대문 안에 장막을 설치하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喜, 喜는 羲의 오기훈)가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곧장 전주에 당도하여 접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한양이 진동하였다. 또 청나라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는데 청나라 장수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의 성문 밖 4곳에 포(砲)를 매설하고 동학의 무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동학의 무리들이 밤에 문을 열고 일제히 나오자 청나라 군병이 사방에서 방포(放砲)하여 사상자가 무수히 발생하였다. 아침이 밝아오자 살펴보니, 죽은 자는 모두 영저(營邸)의 여자들이었다. 이는 한(漢)나라 진평(陳平)이 밤에 여자들을 성 밖으로 먼저 내보내 적을 속인 계책이 아니겠는가. 그 괴수 전봉준은 이 틈을 타고 도망갔다. 후에 전봉준이 또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여러 고을을 침략하였다.
1894년 5월
5월[五月]
14일
일본 장수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경성을 허물고 돌진하여 남산을 점거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일본 장수를 질책하기를, “귀국(貴國)이 무엇 때문에 흉기를 소지하고 타국에 들어와 소동을 일으킨단 말이오. 우리와 함께 전투를 벌입시다”라고 하였다. 일본 장수가 사과하며 간절히 강화(講和)를 구하였지만, 원대인(袁大人, 원세개)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개 원대인이 일본군사를 한번 치고자 한 것은 다른 연고가 아니라 동학난에 민혜당(閔惠堂)[영준(泳俊)]이 몰래 일본군사를 청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혜당을 싫어하여 일본군사에게 치고자 한 것이다.
18일
원대인이 일본군 병사와 접전하려는 의도로 처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문 밖에서 포진하니, 한양의 인심이 더욱 진동하여 남부여대하고 사람이 탄 가마와 재화를 실은 말(馬)로 인하여 사대문이 가득 찼다.
22일
큰 뱀이 전정(殿庭)에 나타나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이 때문에 임금께서 장차 경복궁으로 환어(還御)할 뜻이 있었다.
23일
각국 공사원(公事員)을 모아[청국,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미국] 대내(大內)에 연회를 마련하여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
24일
대전(大殿)께서 경복궁으로 환어하였다. 그날 밤 동관(潼關) 궐내에 수많은 군사의 고함소리와 병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대궐 아래 근접한 인가에서 놀라 일어나 둘러보니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라곤 들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이 서너 차례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들 병사는 일본군 병사로, 천여 명이 만리창(萬里倉)에 들어와 점거하였고, 또 수천 명이 아산(牙山) 태초도(太初島)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27일
청나라 사람으로 한양에 와서 거주한 자들이 가게를 철거하고 떠나갔다. 이날 밤에 일본병사가 밀봉한 편지를 가지고 가서 혜당(惠堂, 민영준) 집안에 보냈다. 혹자는 일본병사가 군량미 3만석을 요청하였다고 하였다. 혹자는 일본병사가 검을 가지고 혜당을 위협하여 혜당은 야반에 황급히 궐내로 들어가 새벽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고, 은밀히 사람을 뽑아 보내어 보화를 싸고 가족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온 집안이 비어 있었고, 단지 문을 지키는 졸개 2∼3인만 있었다고 한다. 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뭄이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아 한답(旱畓)에 이앙하지 않았다.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 왕봉조(汪鳳藻)가 일본 외무성에 조회(照會)한 글이 다음과 같다.
지난번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의 전보를 받아보니, 그 안에 광서 11년(光緖 11년, 1885년)에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맺은 조약 안에 ‘장래 조선에 변란이 생기면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보낸다. 그 전에 중국은 반드시 먼저 일본에게 공문을 보내 알리고, 사건이 평정되는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다시 머물러 방어하지 않는다’라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본 대신이 지금 조선에서 보낸 전보를 받아보니, ‘전라도에 속한 지역의 민습(民習)이 흉악하여 동학교가 무리를 모아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하였습니다. 또 북쪽으로 전주를 침범할 것 같습니다. 전에 훈련원 군사를 보내 섬멸하려고 하였는데 승리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시일이 오래 되어 세력이 커진다면 상국(上國)에서 우려하는 일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두 내란이 저희 나라에서 발발했을 때 모두 중국 군사의 도움에 의지하여 대신 소탕해 주었습니다. 이에 이러한 전례에 따라 간청하여 중국의 군대를 일으켜서 대신 흉악한 무리들의 변란을 철저히 평정하고 즉시 개선하시고, 감히 계속 머물러 주둔하기를 청하여 천자의 군대를 오래도록 수고롭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본 대신이 조회문에서 형세가 매우 다급함을 보고 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원조하는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屬邦)을 보호하는 옛 전례라고 여겨 이로써 즉시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명령하시기를 ‘직예제독(直隷提督) 섭지초(葉志超)는 정예병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조선의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로 달려가서 속히 재앙과 난리를 평정하여 속방의 경계를 다시 평안하게 하라. 조선에 머물러 있는 각국의 관리와 상인들도 모두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또 일을 끝낸 후에 이어서 하루 빨리 군대를 철수시키고 다시 머물러 있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속히 조약을 살펴보고, 전보로 귀 대신은 빨리 일본 외무성에도 조회해 주시기를 아울러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에 준하여 문서를 보냅니다.
일본이 보낸 조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회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외무대신의 공문을 받아보니, 그 내용 중 아력(我曆, 일본력) 본년 5월 초7일에 동경(東京)에 주재한 청국 흠차대신 왕봉조가 보낸 문서의 내용 중 ‘파병하고 원조하는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을 보호하는 구례(舊例)이다’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정부는 처음부터 조선의 자주독립국가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명치(明治) 9년 2월 26일에 정한 양국 수호조규(修好條規) 제1관(款)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조선국이 자주국이기에 일본국과 평등하다는 권리가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청국 흠차대신이 보낸 문서를 살펴보니, 마침내 서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 사안은 일본과 조선 두 나라가 교제상에 있어서 관계된 점이 매우 중대합니다. 과연 조선정부에서도 스스로 속방을 보호한다는 청국의 말을 인정하는지 여부를 신속히 명백하게 물어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문서를 받들고 청국의 흠차대신이 보낸 공문을 적어서 조회하오니 아울러 내일까지 즉시 이번달 29일 안에 회의를 거쳐 결정하시어 회답하심을 지극히 요청합니다.
이 조회에 답한 문서는 다음과 같았다.
조복(照覆)하는 일입니다. 아력 본월 25일 귀측에서 보낸 문서의 내용을 보니, 속방을 보호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를 받고 살펴보니, 병자수호조규 제1관(款) 안에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한 구절은 본국이 조약을 맺는 이래 두 나라의 교제하고 교섭하는 사안에 대해 편안히 자주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처리한 것입니다. 이후 조선이 중국에 구원병을 청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유 권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에는 추호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본국은 단지 조선과 일본이 정한 조약이 진실로 준수되는지 인지하려는 것입니다. 또 본국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는 본국의 자유로 행한다는 것은 중국이 평소부터 알고 있는 점입니다. 중국 왕대신(汪大臣)의 조회와 크게 다르다는 여부에 관한 사안은 모두 본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본국과 귀국이 교섭하는 방도는 단지 두 나라가 조규에 비추어 처리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문서를 갖추어 조복하오니 귀 공사께서는 번거롭지만 장차 살피시어 이를 귀국의 외무대신에게 전달하십시오.
1894년 6월
6월[六月]
초 1일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대인(袁大人)은 마산포(馬山浦)에서 전투를 벌이기를 청하고,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도성 내에서 전투를 벌이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또 원대인의 시(詩)를 외워 전하였다.
顧爾蒼生聽我辭 너희 창생들은 나의 말을 들어라 空然疑懼欲何之 쓸데없이 의구심만 가지고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深深道路非仙界 깊고 깊은 길은 신선세계가 아니요 處處名區亦世知 곳곳의 이름난 지역도 세상이 다 알고 있네 死病其何傷水土 어찌 하여 풍토병에 상하여 죽을 것이며 生方無奈有寒飢 살아갈 방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만 있으리 在軍日聽東南事 군영에 있으며 날마다 동남쪽 일을 들으니 渠自蒼黃作亂離 저들은 스스로 허둥지둥 난리를 일으키네 이 시를 사대문에 걸어서 민심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초 2일
어떤 사람이 각국 공사와 외교관이 회담할 적에 오토리 게이스케가 아뢴 5개 조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1조 중앙정부의 제도에서 지방제도에 이르기까지 적절히 고려하여 고치고, 인재를 빨리 선발할 것. 제2조 재정을 정리하고 부(富)의 원천을 개발해야 할 것. 제3조 법률을 정돈하고 재판법도 마땅히 잘 살펴 정해야 할 것. 제4조 군비와 경찰은 서둘러 마땅히 바르게 고쳐 국내의 변란을 진압하고, 아울러 국가의 안녕을 보전하고 유지해야 할 것. 제5조 학교의 각 업무는 헤아려 정해야 할 것.
이상의 각 조항은 바로 마땅히 행해야 할 강목(綱目)이다. 구체적인 조목의 경우 한결같이 귀 정부의 명을 받은 위판(委辦) 관원들의 선정을 기다린 뒤에 다시 공사(公使)를 통하여 즉시 서로 상의해야 할 바이다. 귀 정부는 먼저 국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기다려서 대군주폐하가 가장 깊이 신임하고 의지하는 대신 몇 명을 선발하여 위판 관원으로 삼아서 회동하여 타당하게 상의해서 잘 시행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초 5일
원대인이 사대문 밖으로 나가자 일본인이 우리나라에게 단발과 의복을 변경하게 하여 나라의 제도가 하나같이 일본을 따랐다. 조정의 신하들이 묘당[의정부]에서 회의하였지만, 모든 관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훈동대신(薰洞大臣, 조병세)이 힘껏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임금께서 유사를 보내 돈 2만금과 쌀 30석을 일본 군진에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는 그들의 입을 좋게 하여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대한 것이다.
초 6일
중국,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각국의 공사가 모여 담론한 초고(草藁)이다.
독판(督辦) : 일본공사는 빨리 인천 항구를 개방하시오. 인천항은 각국이 통상하는 재화가 모이는 곳이오. 이곳에 어제 청국이 파병하여 경계에 들어온 것은 인천항을 전투에서 면하려는 것이오. 청국이 각국의 공사와 영사를 회동하자고 청했습니다. 이를 준하여 기한을 정해 회담을 청한 것입니다. 독일 공사 : 먼저 오토리 공사의 말을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국 공사 : 그럼 먼저 듣겠소. 일본 공사 : 이미 자주 진술하였으니 더 이상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각 공사에게 물으면 필시 요청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독일 영사 : 일본 군함이 온 것과 청국이 파병한 것은 다릅니다. 원총리(袁總理) : 인천항은 각국의 함선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데 청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군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천항이 침범당하는 것을 면해야 하기에 속히 일본 공사에게 알렸습니다. 청국의 병사가 도착하더라도 인천항은 반드시 전투를 벌일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각국의 공사가 지나치게 우려하여 그런 것입니다. 영국 총영사 : 각국은 본래 파병할 일이 없습니다. 미국 공사 : 인천항 하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각국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가게를 개설한 곳은 모두 침범을 면해야 하는데, 오늘날 속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으니 모레를 기다려 다시 기한을 정하여 모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독일 영사 : 통상과 거주지는 모두 안전해야 한다는 논의는 매우 타당합니다. 원사(袁使, 원세개)가 논한 바도 이와 같으니 응당 돌아가 이를 정부에 전달해 보고하겠습니다. 영국 영사 : 통상을 위해 각각 옥양(沃陽, 온양의 오기인 듯)과 경성 지역이 전투를 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인천 제물포를 거쳐 옥양 땅에 이르도록 도로가 고르니 모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아서 병화를 면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일본 영사 : 인천항이 전투를 면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 공사가 이를 알기에 담판한 것입니다. 각국의 통상하는 사람들의 거류지와 가게가 모두 침범을 면해야 한다는 사안은 매우 크니 진실로 갑자기 의론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정부의 훈령을 받는 내일 이후에야 이리저리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한을 정해 상의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 공사 : 모든 통상과 관계되는 각 항구는 균일하게 전투를 면한 안전지대로 만들어야 편안합니다. 미국 공사 : 각국 사신(使臣)이 통상하는 각 항구에 전투를 면해야 하며, 인천 항구 하나는 제외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모름지기 각 정부의 훈령을 기다린 후에 의론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혹 다시 모여 상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프랑스 공사 : 이는 회의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만약 중국과 일본 두 나라가 조선 땅에서 전투를 벌인다면 프랑스 빈객은 거론할 수 없습니다만 조선 지방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만무하니 당연히 통상하는 각국이 침범을 면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독판 : 각국 공사 여러분께서 이미 다시 회의를 열도록 하였으니 초8일 오후 3점종(三點鍾)으로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각국 영사들 : 알았습니다.
7일
전해 들으니, “도성 내의 사대부의 부녀 중 난리를 피난하기 위해 가마를 타고 성문을 나가는 자를 모두 셀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일본인이 가마의 발을 들어 일일이 점검해 살펴보며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한심스럽지 않은가.
11일
전해 들으니, 일본군병 6천 5백 명, 말 4백 필이 인천 항구를 점거했다고 한다.
18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원대인이 약간의 사람과 말을 거느리고 남문(南門)을 나갔는데, 어디로 향하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21일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새벽 일본 장수가, 청나라 장수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병사 4천 8백 명을 거느리고 각기 총검을 소지하고 에워싸서 광화문 밖에 이르러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일시에 총을 쏘니 천지가 진동하고 광화문의 문추리가 깨지자 곧장 대전으로 들어가 삼중사중으로 포위하였다. 대궐 안의 조정 신료들와 군사들이 바람과 우박처럼 흩어져 한 사람도 시위(侍衛)하는 자가 없었다. 상감(上監)의 삼대(三代)만이 나뉘어 포위 속에 있었다. 일본군사들이 대궐 안에 땔나무를 쌓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또 대오를 나누어 사대문을 지키고 또 각 아문과 종로거리를 포진하고 또 도성 밖의 높은 봉우리에 진을 치니, 한양의 인민들이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통곡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심지어 아비는 자식을 잃고 처는 남편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민씨(閔氏) 여러 집안은 대부분 도망갔다. 일본병사들이 대전(大殿)을 위협하여 15조목의 요청을 따르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아, 5백년 동안 예의를 지켜온 나라가 하루 아침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민의 통곡은 응당 어떠하겠는가.
1894년 7월
7월[七月]
초 2일
중제 자적이 한양에 있으면서 몇 해 동안 난리를 겪었다가 비로소 돌아와 몹시 고대하던 차에 비할 데 없이 기뻤다.
이달 상순 사이에 공주(公州)에 거주하는 송용주(宋鏞周)라는 자가 갑주(甲冑)를 찾는다고 일컬으며 와서 기동(耆洞)의 안산(案山) 마항현(馬項峴)의 암석을 캐내니 심히 괴이하다.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들었다. “일본병사들이 동래에서 수륙 양쪽으로 진격하여 인천, 칠곡, 상주, 선산, 대구, 문경 등지에 가득 찼다. 좋은 곳을 엿보아 관사를 지으니 달성(達城)과 낙동(洛東) 같은 곳에 그대로 머물렀다. 해평(海平) 진사 최극삼(崔極三)의 집도 일본군이 빼앗아 거주하였다” 라고 하였다. 대체로 일본인이 임진왜란 때 인명을 많이 살상하였는데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래서 금년에는 한 사람도 상해를 입지 않아 우선 인심을 어루만질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註 001해평(海平) 진사 최극삼(崔極三)의 집도 일본군이 빼앗아 거주하였다 :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벌인 뒤 일본군의 물품 공급을 위해 교통로의 요소(80리)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작은 단위(대개 40여명)의 군사를 주둔시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연락업무를 보기도 했다. 대구 근방인 달성에 병참소를 두었고 상주 부근에는 두 개의 일본군 병참소가 있었는데 낙동의 일본군 병참부(또는 소)는 지금의 상주시 낙동면 낙단교 옆 남쪽 제방 부근에 있었다. 또 당시 함창 태봉(지금이 상주시 함창면 태봉리)에도 일본 병참소가 있었고 선산 해평에도 두었다.
1894년 8월
8월[八月]
초 3일
의복을 변경하라는 관문(關文)을 여러 읍에 보내어 창의(氅衣)를 없애고 두루마기를 입고 실띠를 매는 것을 시제(時制)로 삼았다. 당시 동학이 더욱 성대해져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고장의 괴수는 바로 죽전(竹田) 남정훈(南廷薰), 진목(眞木) 편보언(片輔彦)·편백현(片白現)이라는 자들이다. 죽정(竹汀)강주연(康柱然),기동(耆洞) 김정문(金定文)[감호정(鑑湖亭) 고자(庫子)], 강평(江坪) 도사(都事) 강영(姜永), 봉계(鳳溪) 조순재(曺舜在), 공자동(孔子洞) 선달(先達) 장기원(張箕遠), 신하(新下) 배군헌(裵君憲), 장암(壯岩) 권학서(權學書)가 접주(接主)가 되었다.
포덕(布德)이라고 칭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여 말하기를, “동학도에 들어오면 난리를 피할 수 있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동학도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고 하였다. 아, 저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동학도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에 젖고 불이 타게 하는 것과 같았다. 아비가 제 자식을 금지할 수 없었고 형이 그 아우를 금지할 수 없었다. 손으로 죽장(竹杖)을 끌고 목에는 염주(念珠)를 메고, 무리를 이루고 떼를 지어 마을을 침략하고 돈과 곡식과 베와 비단을 탈취하였다.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상전을 구타하고, 하인이나 하천민이 사대부를 매질하며,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되갚고 예전의 은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 중에 받아내기 어려운 빚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내서 나누어 먹고, 파내기 어려운 무덤이 있으면 반드시 파내어 위엄을 보였다. 동학도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꼬투리를 잡아 지목하여 속자(俗子)로 도(道)를 훼손한다고 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곧장 악형(惡刑)을 행하여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자가 있었다. 그 악형을 견디지 못하여 속전(贖錢, 죄를 면해주는 돈)으로 몇 냥을 주면 이를 통해 풀어주었고, 가난한 자는 아무리 도를 훼손하였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고, 이름 없는 자는 비록 면박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부자(富者)나 이름 있는 자만이 그 피해를 당하였다. 봉계(鳳溪) 조승지(曺承旨)[시영(始永)] 정도사(鄭都事)[운채씨(雲采氏)], 기동(耆洞) 여도사(呂都事)[영필(永弼)], 여감역(呂監役)[위룡씨(渭龍氏)], 배헌(裵瀗) 등 여러 집안이 재산만 손상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 모욕을 당하니 그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여감역(呂監役) 어른은 또 선산에 변고를 당하여 윤자(胤子, 장자) 영소(永韶)가 구타를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피해를 당한 사람들 중 더욱 심한 경우이다. 그 외에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죽을 먹는 집안이라면 욕을 당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 우리 역시 신촌(新村)의 족인(族人)에게 욕을 당하고 30금(金)의 손해를 받아서 분한 마음이 끝이 없었다. 어찌하여 일종(一種)의 사학(邪學)이 이와 같이 극히 심하단 말인가. 한 고을이나 한 도(道) 뿐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가 모두 그러하다고 하니, 이 역시 시대의 운수에 관계된 것이다.
초 6일
새 사또 박(朴)[준빈씨(駿彬氏)]이 군에 부임하였다. 새 사또는 바로 영성군(靈城君) 6대손으로, 우리 집안과 세의(世誼)가 있다. 금년의 가뭄이 병술년(丙戌年, 1886)보다 백배나 심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한번 쟁기질할 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대파(代播)할 수도 없었고, 마실 우물도 모두 마를 지경이 되었다. 농사 상황이 이미 큰 가뭄으로 결판이 났다. 다른 해와 비교해보면 사람들이 모두 예비로 구황(救荒)을 대비하는 방도가 있었는데,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에 연유하여 비록 한 달치 양식이 없어도 모두 밥을 먹고 죽을 먹지 않았다. 작년 가을 막내 숙부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기산(箕山) 문총(文塚) 계단 아래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이번달 25일 무덤주인이 와서 협박하며 말하기를 “지금 즉시 파가도록 하시오. 파가지 않으면 내가 응당 도인을 거느리고 와서 파가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26일 즉시 기산 남쪽 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애통함을 어찌 말할 수 있으리오. 전해 들으니, “일본인이 점점 더 많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몇 천 명인 줄 모를 지경이다. 군량과 병기를 배로 운반하여 왔는데, 기후가 가물고 수심이 얕아 배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서 모래를 파서 배를 움직이게 하니,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경성에 있는 일본인이 청나라 군사를 방어하려는 뜻으로 평안도에 내려가다 임진강에서 유진(留陣)하여 서울에 있는 일본인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근자에 동학도가 점점 성대해져 이른바 편보언(片輔彦)이 ‘도집강(都執綱)’이라고 칭하고 김천 시장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동학도에 들어온 자는 그 성명을 기록하고 유사(有司)를 나누어 정하였는데, ‘접주(接主)’, ‘접사(接司)’, ‘대정(大正)’, ‘중정(中正)’, ‘서기(書記)’, ‘교수(敎授)’, ‘성찰(省察)’( )등의 명칭이 바로 이것이었다. 최법헌(崔法軒)의 인장(印章)을 명지(名紙) 위에 찍어서 주면서 ‘예지(禮紙)’라고 칭하였다. 동학도에 들어온 자는 모두 예지 한 폭이 있었다. 상놈의 경우 모두 성찰로 임명이 되었다. 성찰은 마치 관가의 차사(差使)와 같았다. 해당 접주는 날마다 포덕(布德)을 일삼았는데, 각기 포솔(包率)이 있었다. 충청포(忠淸包)에 들어간 자는 충청포(忠淸布)라고 칭하고, 상공포(尙公包)에 들어간 자는 상공포(尙公布)라고 칭하고, 선산포(善山包)에 들어간 자는 선산포(善山布)라고 칭하고, 영동포(永同包)에 들어간 자는 영동포(永同布)라고 칭하였다. 접주의 경우 안장을 갖춘 좋은 말을 타고 큰 깃발을 세우고 포명(包名)을 적었다. 포졸(包卒)의 경우 모두 총과 창을 지니고 뒤를 따라 다녔다. 나가건 들어오건 간에 총을 마구 쏘았다. 만약 저녁에 들어올 경우에는 큰 소리로 성찰을 불러 마을마다 햇불을 들게 하니, 그 불빛이 하늘과 이어져, 기염이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 설 지경이었다. 어느 곳을 따질 것 없이 사가(私家)의 노예들이 대부분 동학도에 들어가 그 상전인 자들이 값을 받지도 않고 하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망칙한 피해를 당하였기 때문에 우리 세 집안의 노비 역시 세상에 따라 방출하여 수하에 한 명도 없어서 근심스럽고 답답하였다. 성주(星州) 여러 아전들이 동학도 수십 명을 죽였는데, 훗날의 보복이 두려워 인근 고을 가까운 동민(洞民)들을 불러 모아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다. 동학도가 일제히 일어나 포솔(布率)이 각자 총과 창을 들고 사방에서 운집하여 거의 만여 명이 되었는데, 대마시(代馬市)에서 유진하였다. 아침 저녁의 음식과 물품을 부근의 촌에서 공급하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다. 성주목사 오석영(吳錫永)이 겁에 질려 밤중에 도망치고 아전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류가 갑자기 성주부 안으로 돌격해 쳐들어와 일시에 불을 지르니, 천호(千戶) 가까운 인가에서 삼일 동안 계속 화재가 났다. 화재 연기의 길이가 백여 리에 뻗쳐 있었다. 불에 타지 않은 곳은 오직 공해(公廨) 뿐이었다. 여러 아전들의 집에서 돈, 재물, 베, 비단, 보화, 의복 등을 도둑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땅에 묻어놓은 물건은 땅을 찔러 보아서 감추어 둔 것이 있으면 꺼내어서 조금도 남겨둔 것이 없다고 한다. 소문이 매우 위태롭고 두려웠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재하씨(李宰夏氏)가 비류(匪類)를 금지하고자 하여 몇 사람을 결박해서 형틀을 채우고 엄히 가두었다. 그 때문에 저 비류들이 사방에서 모여 곧장 지례 동헌(東軒)으로 쳐들어가, 본관(本官, 지례군수 이재하)을 둘러싸고 때려 거의 머리가 부서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변괴가 극도에 달하였다. 이후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더욱 두려워 금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안의·거창·함양 세 읍의 수령은 힘을 모아 엄히 단속하여 소란스럽게 떠드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번번이 죽였다. 이 때문에 세 고을은 동학도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시 가족을 거느리고 세 읍으로 피난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우리 고장 여감역(呂監役)[위룡씨(渭龍氏)], 배척숙(裵戚叔)[선영씨(善永氏)], 지례(知禮)의 이도사(李都事)[현삼(鉉參)], 이장(李丈)[현문씨(鉉汶氏)], 이감역(李監役)[성문씨(性聞氏)], 선산(善山)의 허방산(許舫山)[훈씨(薰氏)] 등 여러 집안이 한 밤중에 도망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죽정(竹汀) 강주연(康柱然)의 포솔 중 상놈 최판대(崔判大), 상놈 차돌이(車乭伊), 이치윤(李致允)이라는 자가 방자하기가 매우 심하였다. 최판대는 일찍이 광수(廣水) 여해수씨(呂海叟氏) 집안에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가 여씨 어른을 결박하고 황각(黃角) 주점에 끌고가서 마구 때려 죽였다. 이 때문에 그의 아들 정옥(廷玉) 형제가 최판대를 죽여 복수하였다. 당시 온갖 변괴가 일어났는데, 매원(梅院) 광리(廣李)의 노비 반란과 경주(慶州)의 양리(陽李) 족속의 반란은 모두 지극한 변괴이다.
1894년 9월
9월[九月]
24일
막내 누이동생 여실(呂室)이 우례(于禮)할 적에 내가 데리고 갔다. 이른바 상객(上客)과 교전비(轎前婢) 모두 도보로 [말을 타고 가면 도인(道人)들이 말을 탈취해 가므로 혼인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도보로 갔다.] 가니 수촌(樹村) 역시 비류가 많아서 누이 집안도 날마다 도망가서 피하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
25일
최법헌(崔法軒)이 군사를 일으키라는 내용으로 김천(金泉) 편집강(片執綱, 보언)에게 통지를 하자, 편집강이 각 곳의 해당 접주에게 사통(私通)을 보냈다. 본읍(本邑, 김산군)의 경우 강주연이 죽정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배군헌은 신하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김정문은 기동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강영은 하기동(下耆洞)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권학서는 장암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순재는 봉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을 횡행하여 곡식과 말을 빼앗고 창과 검을 거두어 기염이 더욱 높아졌다. 비록 1냥의 돈과 1자의 베라도 몽땅 빼앗아 갔다. 동학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목을 끌고 협박하여 따르게 하였다.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성찰(省察)을 큰 소리로 부르며 ‘빨리빨리 속자(俗子)를 그물질해서 와라. 힘이 있는 자는 장차 선두에 세우고 문장을 짓는 사람이 있으면 서기(書記)로 들어오게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속자는 산에 올라가서 도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며칠 동안 노숙하면서 성찰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하여 발을 땅에 딛지 못할 정도였다. 어찌 하겠는가. 김정문(金定文)이 먼저 선두로 기포하여 곧바로 선산부(善山府)에 다다랐다. 선산부의 아전들이 몰래 일본병사를 청하고서 성문에다가 총을 쏘니, 도인들이 내부에서 스스로 혼란에 빠지고 총에 맞아 죽은 자가 몇 백명인 지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성을 넘다가 떨어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는데, 김정문의 포솔 중 죽은 자는 15명이라고 한다. 이 기별이 들린 이후로 각 곳의 접주들이 머뭇거리며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작폐는 더욱 심하였다. 강영이 도소를 설치하여 그 수접(首接) 이주일(李柱一)[선산(善山) 파계인(巴溪人)]을 몰래 사주하여, 그 사위 진사 여제동(呂濟東)[도사(都事) 영필(永弼)의 조카이고 진사 영근(永根)의 아들]을 붙잡아서 형틀을 채우고 구타하고 협박하여 동학도에 들어가게 하였다. 제동의 숙부와 여러 사촌들이 뒤따라가서 그 문에 이르러 이어서 통곡하면서, “조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조카를 대신하여 나에게 죄를 주시오”라고 하니, 이주일이 말하기를, “400금을 빌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여영필은 자주 도인의 요구를 겪어서 집에 한 푼의 돈도 없다고 하였다. 강영은 거짓으로 조사하는 척하면서 옆으로 40금으로 마감하였다. 여영필이 말하기를, “소로 대신 보내겠소”라고 말하고, 손수 그 조카의 결박을 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농우(農牛)를 끌고 와서 보냈다고 한다. 마음의 변함이여. 강영이 이러한 일을 차마할 수 있단 말인가.
10월[十月]
초 2일
영백(嶺伯)[조병호씨(趙秉鎬氏)]이 영장(營將) 최모(崔某)를 보냈는데, 병정 2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 무리를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섬멸하고 협박에 의해 따르던 자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초 5일
대구 병정이 김천에 들어가니, 편보언이 도망가고 그 나머지 포솔은 새벽의 별처럼 흩어졌다. 영장이 접주와 죄가 있는 사람의 성명을 적어 벽에 걸어서 찾아내 붙잡았다고 한다.
초 6일
병정들이 기동 강영의 집에 들어가니 강영은 이미 구곡에 도망가김태화[강영의 아들 사돈으로 강영의 포솔이 되었다.] 집에 숨었다. 병정들이 그 집(강영집)에 간직한 물건을 몰수하고서 몰래 구곡으로 가서 김태화를 결박해 문초하였다. 김태화와 병정이 함께 장암(壯岩)에 가서 강영을 체포하여 김천 영장(營將)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쪽에는 강영을 엎드리게 하였고, 한쪽에는 김태화를 엎드리게 하였다. 영장이 죄를 열거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다른 사람의 재물과 곡식을 빼앗고 읍의 병장기를 빼앗아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꾀하니 어찌 된 일이냐!”라고 말하고는 큰 곤장으로 12대를 친 후에 강영을 총살하였다. 옆에 있던 김태화가 혼비백산하였다. 은밀히 조순재를 체포했으나 놓쳤지만 뒷날의 탈이 없었다. 이는 대개 종숙 승지영(承旨令)의 힘이었다. 아, 강영과 조순재는 명문가의 자제로 죄를 지어 화를 당하니 더욱 애석하다.
7일
병정이 공자동(孔子洞)에 들어가니 모든 마을 사람이 도피하고, 접주 장기원의 온 가족이 도망갔다. 그래서 그 집을 불태웠는데, 이웃집 7채가 계속 이어져 불에 탔다. 이는 뜻밖의 재앙이 아니겠는가.
8일
병정이 지례에 들어가 4명을 총살하였다고 한다. 일본인 20명이 동학도를 붙잡기 위해 또 김천에 들어갔다가 도인이 귀화했다는 기별을 듣고 물러났다. 이후에 도인의 명색이 자취를 감추고 적막히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인심이 통쾌하게 여겨 마치 구름을 걷고 맑은 하늘을 보는 듯하였다. 지례현감이 병정 100명을 만류하여 남겨두어 훗날의 걱정을 방비하였다.
25일
초관(哨官) 장교혁(張敎爀)이 병정 2백 명을 거느리고 또 김천에 들어가 도인(道人)을 찾아내 체포하고 죄가 있는 자는 총살하고, 죄가 없는 자는 풀어주었다. 황간의 도인이 다시 고개를 넘어오자 개령과 김천 두 고을의 수령이 집집마다 장정을 뽑아 각기 총과 창을 들게 하고 머리에 흰 두건을 씌우고 김천 시장에서 점고하여 불우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원근 지역의 부잣집 중 도인의 피해를 입지 않는 집이 없었는데, 본읍 김산군 봉계(鳳溪)에 사는 정도사(鄭都事)[운채씨(雲采氏)]만이 초연히 홀로 화를 면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인심을 많이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전에 자신 소유의 논 6석(石) 3두락지를 내어 종중에 납부하여 의장(義庄)으로 삼았으니, 이는 범문정공(范文正公)이후 처음 있는 일이니 누가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는가. 마항현(馬項峴)에 석당(石黨)들이 유회(儒會)라고 칭하고 도소(都所)를 기동(耆洞)에 설치하고 각 읍과 동네에 통문을 보냈다. 그 글의 대강의 내용은 죄의 유무를 막론하고 천지가 생명을 좋아하는 덕에 귀의하여 모두 더불어 새롭게 되고 일제히 모여서 토론을 하여 옛날처럼 편안히 지내자고 말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두머리 송용주의 소행이다. 이것은 동학도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는 틈을 타서 그들의 무리들에게 붙고자 하는 계책일 뿐이다. 비류가 조금씩 잠잠해져 인심이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석당에 붙는 자가 많았다. 이는 여기서 벗어나 저기에 들어간 자가 아니겠는가. 대개 돌을 깨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겉으로는 신물(神物)을 구하고자 의탁한 것이고, 안으로는 무리를 모으려고 한 것이다. 철을 사서 칼을 주조하고 대나무를 베어 활을 만들었다. 혹자는 남학(南學)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북학(北學)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을 모르니 걱정이 적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흉흉하게 여겼다. 숙제(叔弟) 자관(子管)과 종제(從弟) 자성(子聲)이 새로 잡은 터가 조용하기 때문에 다시 단란히 모였다. 이 동리(洞里)는 종형님[자생씨(子笙氏)]이 성주(星州) 평촌(坪村)에 옮겨온 곳이다. 이는 외진 곳을 취하여 생리(生利)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난세에 떨어져 사는 것은 더욱 난감한 일이다.
1894년 11월
11월[十一月]
경군(京軍)이 내려와 보은(報恩) 장내(壯內) 동학 도소(都所)를 불로 태웠다. 이른바 법헌(法軒)이라는 자는 밤중에 도망치고, 그 나머지는 마침내 황간과 영동 등지에 모여서 인가를 노략질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황간 수석리(水石里) 이판서(李判書)[용직씨(容直氏)] 댁은 여러 차례 협박을 겪어 손해가 거의 만금 정도였고, 심지어는 집안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영동 을곡리(乙谷里)의 강사마(姜司馬) 두흠씨(斗欽氏) 역시 그 피해를 전적으로 받았고, 진사 아들이 구타를 당하여 이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27일
새 달력을 얻어왔는데 광서(光緖) 연호를 쓰지 않고 ‘대조선(大朝鮮) 개국(開國) 504년’으로 적었다. 이는 우리나라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핍박에 의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를 배신한 혐의를 면할 수가 없다.
12월[十二月]
12월
대구 포교(砲校)가 기동(耆洞) 마항현(馬項峴)에 들어가 돌을 캐는 곳의 초막(草幕)을 불태우고 신상제(愼喪制)[송용주(宋鏞周)와 함께 주사(主事)가 된 자이다.] 등 5∼6인을 붙잡아서 갔다.[송용주가 마침 그 곳에 있지 않아 놓쳤다.] 그 나머지 무리는 도망쳐 사람들이 모두 근심을 덜었다. 김기범(金琦範, 琦는 箕의 오자)이란 자가 개남왕(開南王)이라며 참칭(僭稱)하고 남원부(南原府)를 분할하여 점거하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부류이니, 어찌 깊이 근심할 것이겠는가. 전해 들으니, “전라 감영에는 방백(方伯, 관찰사)이 없고 25개의 고을에는 수령이 없다고 한다. 전봉준이 7만 5천인을 거느리고 전라감영을 점거하고 여러 군을 침략하여 전체 전라도 땅이 마치 무인지경이 되었다. 한양에 거주하는 이 아무개는 동학 무리를 격파하기를 자원하여 3만명을 통솔하여 곧바로 전라감영에 이르러 빙 둘러서 포위하여 크게 격파하니, 저 무리들이 모두 몰살을 당하였고 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거창과 안의 병력은 서쪽을 넘어 진격하고 함양과 운봉의 병력들은 북쪽을 넘어 진격하자, 동학무리들이 어디로 갈 데가 없어 영동(永同) 땅을 넘어 장차 괘방령(掛榜嶺)으로 향한다”고 한다. 본읍 김산군 봉계 조승지(曺承旨)[시영(始永)], 상주(尙州) 우산(愚山) 정승지(鄭承旨)[의묵(宜默)]가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통솔하여 바야흐로 의병을 창도하였다. 이 기별을 듣고 조소모(曹召募)가 본읍의 군정(軍丁)을 일으켜 요충지를 지키고 각 읍의 군대를 일으켰다. 대구 군사 3백인이 용금문(湧金門) 밖에 유진(留陣)하고, 성주 군사 1백 2십인이 천포(泉浦) 들판에서 유진하고, 선산(善山) 병졸과 개령(開寧) 군사 10명이 황간(黃澗) 창촌(倉村)에서 유진하고, 상주 군사 80명이 추풍방현(秋風防峴)에서 유진하여 칼과 창이 삼엄하니, 위세가 가을서리와 같았다. 그리고 지공(支供)은 모두 스스로 마련하였다. 상주(尙州) 유격장 김주노(金疇老)가 500명을 거느리고 영동(永同) 용산시(龍山市)에 들어가 동학도와 접전하였는데, 비류들이 양쪽에서 공격하였다. 김주노는 밤에 도망치고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주 소모영(召募營)이 이 기별을 듣고 또 정포(精砲) 수백 명과 일본인 50명을 보내, 밤을 틈타 용산시에 들어갔다. 저들이 촌가에 흩어져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장 보은(報恩) 북실촌(北實村)에 도착하여 온 마을을 포위하고 동시에 일제히 총을 쏘니, 죽은 비류와 속자(俗子)가 태반이었다. 이 밤에 비류 중 도망간 자 역시 많았다. 이 사건 이후 동학의 화란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서 본읍 소모영의 병력을 혁파하여 집으로 각각 보내고 본읍의 병정 3백 명만을 머물게 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22일
조소모령(曹召募令)께서 연주(蓮柱)의 향원(鄕員) 모임에 참석하였다.
25일
동학의 우두머리 편보언(片保彦, 保는 輔의 오식)과 남정훈(南廷薰) 등 4∼5놈을 붙잡아 김천(金泉) 시장에서 총살하니,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전후 죽인 자가 거의 20명에 이른다고 한다. 담당자를 정할 적에 중제(仲弟) 자적(子笛)도 일기관(日記官)으로 참여하여 요호(饒戶)를 뽑아서 군량미를 대비하였다.
27일
큰 눈이 내렸다.
28일
읍리(邑吏) 박만주(朴萬炷)가 새해 달력 1건, 황육(黃肉) 3근, 당목(唐木) 2척(尺)을 보내왔고, 호장(戶長) 백란태(白鸞台)가 새해 달력 1건을 보내왔다. 이 해의 세의(歲儀)가 전에 비해 반이나 감소되어, 들어온 것이라곤 단지 청어(靑魚) 7지(枝), 북어(北魚) 2부(孚), 대구어(大口魚) 3미(尾) 뿐이었다. 이 역시 난리가 지난 후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1895년[乙未 光緖二十一年 當宁 三十二年]
1월[正月]
초 1일 계유
새벽에 누런 구름 한 떨기가 남쪽으로 떠 있었다. 해가 나왔지만 얕은 구름이 하늘을 가렸기 때문에 종일토록 햇빛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람이 없어 좋았다.
초 4일
눈이 내렸다.
초 6일
얕은 구름이 있었다.
초 7일
얕은 구름이 있었다.식후에 조금 있다가 광풍이 불고 또 눈이 내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크게 일어나 그치지 않았다. 인일(人日, 정월 7일)의 날씨가 이와 같아 평소와 전혀 다르니 두렵다.
14일
땅이 흔들렸다.
15일
날씨가 반쯤 흐려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밤에 땅이 진동하였다.
20일
하늘이 진동하였다.
21일
눈이 내렸다.
23일
눈이 내렸다.
26일
광풍이 불고 눈이 내렸다.
27일
대한.
29일
대설.1 개월 중 맑은 날이 거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24일
각 읍(邑)의 소모영(召募營)을 철거하라는 기별을 들었다. 중제(仲弟) 자적(子笛)이 봉계(鳳溪)에 갔다. 조승지 령(曺丞旨令)이 소모영을 철거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병정 2만 명은 본읍에 붙였다고 한다.
2월[二月]
15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었다. 주상께서 산형(山形)과 소나무(松楸)를 적간註 001001 산형(山形)과 소나무(松楸)를 적간묘소를 만들기 위해 산을 훼손하고 주위 소나무를 베는 비리를 막는 일을 말한다.닫기하고 침범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모두 일본이 권세를 부려서 그 지휘를 따랐기 때문이다. 역신(逆臣) 박영효(朴泳孝)와 서광범(徐光範) 등이 방자히 나라에 나오고, 조정의 대소사가 그들에 의해 제멋대로 행해졌다고 본다. 이와 같은 행태가 그치지 않는다면 세상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겠는가. 이 당시 벼슬살이하는 자들은 모두 개화인으로[김홍집(金弘集)·박정양(朴定陽)·어윤중(魚允中)·엄세영(嚴世永)·조희일(趙煕一)·김가진(金嘉鎭)] 그 선조들이 국가와 운명을 함께 했던 뜻을 유념하지 않고 구차한 계책에 편안하려고 하니, 5백년 동안 선비를 배양하는 성은(聖恩)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통곡하고 통곡한다. 안동에 거주하는 유교리(柳校理)가 상소하여 홀로 배척하는 말이 극도로 심하였다. 온 세상이 위축되어 있을 때에 자신의 한 목숨을 애석히 여기지 않고 홀로 이러한 행동을 하였으니, 참으로 옛날 노중련(魯仲連)이 동해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한 뜻이다. 어찌 장하지 않은가. 어찌 유쾌하지 않은가.
17일
각 곳의 선산(先山) 소나무(松楸)를 팔기 시작하였다.
28일
수촌(樹村) 여실(呂室)이 왔다.
1895년 4월
4월[四月]
20일
그 사이 도처에 보리를 수확하였는데 보리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어 인심이 안정되었다.
5월[五月]
초 9일
비로소 모를 수답(水畓)에 옮기고 20일 이후 이앙하였다. 비가 한답(旱畓)에 흡족히 내려 모두 일시에 모종을 옮겨 심었다.
25일
중제 자적이 상경하였다.
8월[八月]
13일
자적의 편지를 받아보니, 한양에 괴질이 크게 번져 사망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21일
밤에 왜병 수백 명이 중궁전에 돌입하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니, 이같은 변괴는 만고에도 없었던 일이다. 통곡한들 무슨 말을 하리오. 의복의 제도를 변경하여 경성에서는 단지 검은 두루마기(黑周衣)만 입게 하고, 먼 고장의 사민(士民)들은 혹 흰 두루마기(素周衣)를 입거나 작은 창의(氅衣)를 입었다. 조정의 집정(執政)은 이른바 10명의 대신이 사사로이 서로 제멋대로 행하여 팔도를 나누어 23부(府)로 삼고 각 부마다 관찰사를 두고 ‘감사(監司)’라는 명칭은 영원히 혁파하였다. 지금 이후로부터 대청(大淸)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대조선군주폐하(大朝鮮君主陛下) ’라고 칭하고, 또 ‘짐(朕)’이라고 했으며, 또 ‘조(詔)’라고 하였다. 아, 슬프다. 우리 성상께서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 이러한 것이 아니고 왜인들의 핍박에 의해 바로 호령(號令)을 발동하여 시행한 것이다. 한결같이 일본인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9월[九月]
29일
자적의 편지를 받아보니, 경성에서 나와 남양(南陽) 대부도(大阜島) 분천(汾川) 노영평(盧永平)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비록 약을 복용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수양하는 계획을 한다고 하지만, 이처럼 험난한 세상에 집을 떠나 멀리 떠돌아다니니 심히 온당하지는 않다.
10월[十月]
초 6일
내촌(內村) 배보현(裵補絃)이 그 어버이의 산소를 대방(大坊) 등지에 마련해 장례식을 치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최일제(崔一齊)가 대방에 들어가니, 배씨와 최씨 두 집안의 경계 지역에 묘지를 팠던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 최씨 집안의 산소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수표(手標)를 받아서 왔다.
초 7일
신임 사또 이후(李侯)[범창씨(範昌氏)]가 군(郡)에 부임하였다.
16일
장차 선고(先考)의 산소에 석역(石役)을 경영하려고 도암촌(道岩村)에서 돌을 구하였고, 정석수(鄭石手)의 도움을 받아 공역을 시작하였다.
18일
내가 장정들을 거느리고 석소(石所)에 가서 돌을 캐내니, 큰 석면(石面)이 있어 상석(床石)과 비석감을 모두 찾아낼 수 있어 매우 다행이다. 내가 아우와 서로 돌아가며 공역을 살펴보고 묘시(卯時, 오전 5∼7시) 때 갔다가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되돌아왔는데, 수고로워도 피곤한줄 몰랐다.
26일
대강 돌을 다듬어서 본동 재실(齋室)로 운반하였다. 일꾼 장정이 모두 63명이었다.
11월[十一月]
초 4일
석공 2명이 와서 다시 돌을 다루었다.
15일
성상께서 단발하고 한양의 신민들도 모두 단발하였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위협으로 한 소행이 아닌 것이 없었다. 5백년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로 변화하였다. 통곡하고 통곡한다.
28일
단발하라는 명령을 열읍(列邑)에 전령(傳令)으로 보내어 일시에 단발하게 하였는데, 민심이 마치 솥 안에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몰아쉬는 듯하였다. 이 기별을 듣고 비석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시일이 급박하여 석공을 재촉하였지만, 공역을 마칠 수가 없다. 비문(碑文)은 장사미(張四未) 어른이 지었다. 비석이 좁고 글자가 많아, 석공으로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형 자성씨(子笙氏)가 솜씨 있는 장인처럼 비석을 능숙하게 새길 수가 있어서, 5∼6일 만에 비석을 새기는 일을 끝마쳤다.
12월[十二月]
초 9일
원동(院洞)에 있는 선비(先妣) 산소에 상석(床石)을 먼저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11일 선고(先考)의 산소에서 재계하였다. 석물(石物)을 모두 세워 묘도(墓道, 산소가는 길)가 찬란하였다.
12일
고향 마을에 돌아오자 손님과 벗들이 전례(奠禮, 죽은 사람의 영전에 올리는 예물)를 행하니, 슬픈 감정이 일어나면서 경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경비는 도합 1백 7십 7냥 3전(錢)이다. [석수공전(石手工錢) 합 70냥, 정군세(釘軍貰) 9냥, 마석(磨石) 값 8냥, 나머지는 모두 술과 음식값 빚이었다.] 안동부(安東府) 관찰사 김석중(金錫重)이 먼저 스스로 단발을 하고 노령(奴令)에게 머리카락을 자르게 하니, 노령들이 일제히 나가서 일본병사 몇 명을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또한 온 고장 아무개 아무개 집에서 통문을 돌려 서로 모여 드디어 의병을 창설하고 각 고을에 통문으로 알렸다. 대장(大將) 권세연(權世淵), 부장(副將) 곽종석(郭鍾錫), 총병(摠兵) 유신영(柳臣榮), 내방장(內防將) 유응수(柳應守), 외방장(外防將) 김우진(金佑鎭), 모사(謀事) 김□□, 종사관(從事官) 유(柳)□□이라고 한다. 진주 관찰사 이(李)□□은 맹세코 단발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장정을 불러 모아 일본병사 70명을 찾아내서 죽였다고 한다. 홍주(洪州) 관찰사 역시 단발을 하지 않으려고 소속 22개 읍에 은밀히 통지하여 드디어 일본병사를 쫓아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원들은 의리를 지킴이 당당하도다. 아, 저 김석중이 어찌 귀가 없지 않으리오. 본도 관찰사 이중하(李重夏)가 먼저 단발하고 열읍(列邑) 관원에게도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하였는데, 관원이 서로 관망하며 먼저 단발하려고 하지 않았다. 본읍 수령 이범창(李範昌)은 바로 관찰사의 재종질(再從姪)이다. 관찰사와 더불어 모의하여 열읍 보다 먼저 온 고을의 백성을 단발하고자 하였는데,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안의(安義)에 거주하는 노응규(盧應奎)가 임상제(林喪制)와 강승(姜僧) 5∼6인이 함께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정병(精兵) 70인을 얻어 곧장 진주 감영에 이르러 한밤중을 틈타 성을 함락시키고 관아에 주둔하였다. 원근에서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이 하루에 거의 백여 명씩이나 모여들었기에, 장차 대구감영을 함락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구 관찰사 이중하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고령(高靈) 등지로 진격하여 방어하였다.
11월[十一月]
의병장 노응규가 이끄는 의병의 위세가 크게 떨쳐서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기운이 솟구쳤다. 당시 팔도에 의병이 간간이 일어나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안동의 우리 의병의 명성과 위엄 역시 장대하여 진주 의병들과 세력을 합해 상경(上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경기도는 단발하지 않은 신민(臣民)들이 없었지만, 외읍의 경우 단발하지 않은 것은 다행히 우리 의병의 힘을 의지한 것이다.
경상좌도의 의소(義所)에서 각 읍에 통문을 보내 동시에 메아리처럼 호응하게 하였지만, 결국 어떻게 될 줄 몰라 단지 관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