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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0일 하늘언어교회 강론
본문: 출애굽기20장 4절
4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제목: 형상화된 절대자, 유한화된 무한자
하느님은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엄명이란 엄격히 명령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우상을 타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왔습니다.
흔히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좁게 해석해버리기 쉽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보다 엄밀히 해석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형상까지 포괄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신상이 만들어지려면 그 이전에 이미 인간의 생각 속에 그 형상이 존재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 속에 없는 형상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우상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신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어떤 것이든 형상 없이는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형상을 의미로 풀어낸 체계가 바로 언어인데 이 언어에는 모든 종류의 형상이 총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성경의 글자들도 형상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하느님이 금하신 형상을 사용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은 형상과 언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상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뿌리깊은 우상성을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신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인간 내면의 형상인 우상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자기 한몸 건사하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대형 신상을 주조해 놓고 그것에게 절하고 섬기라고 선포한다면 이는 엄청난 재정과 인력이 낭비될 뿐 아니라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강요함에서 빚어지는 인권 유린과 인격 손상 등 이중 삼중의 심각한 사회악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만은 한사코 하지 말도록 엄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시적 신상이 아닌 인간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도 결코 가만히 잠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형상들의 신학적인 정의는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형상들은 모조리 우상의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명예, 고집, 종교, 확신 등 인간에게 우상의 독으로 작용하지 않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신심까지도 유한자의 산물이기에 하느님 자체가 아닙니다. 하느님 자체가 아닌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도 우상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지나치게 탐닉하면 종교 중독증이 됩니다. 사람들이 보통 알콜중독이 병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종교 중독증이 중독증인 것은 잘 모르고 믿음이 너무 좋은 것으로 자부해서 폐해가 훨씬 심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과 종교중독증은 열매가 전혀 다릅니다. 좋은 신앙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지만 종교중독증은 교회에 집착하고 성경을 탐하고 기도를 밥먹듯이 하지만 인성이 전혀 변함이 없고 시간이 갈수록 악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신앙이 좋다고 추켜세우기 때문에 자기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자만해서 구원에서 한없이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형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인간 스스로는 형상들로부터 벗어날 가망이 없다고 보는게 성경의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의로워도 유한하기 때문에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맥없이 쓰러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문제란 무한자가 아닌 유한자라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인간은 어떤 악한 본성을 타고나기도 하고 선한 성품을 타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품성을 타고나도 그가 무한할 수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유한함의 문제는 원죄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범하기 이전부터 유한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만 안 지었다면 훨씬 나았을거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우연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하기 쉬운 연약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창조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의도였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혹에 넘어갔기에 그런 설명의 모순이 드러나게 됩니다. 만일 인간을 창조 당시보다 훨씬 강하게 만드셨다면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타락하기 전에 가장 강하고 완벽에 가까운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존재가 타락하니까 그 타락의 독성은 그가 강했던 만큼 극도로 악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존재란 약하건 강하건 무한자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숱한 문제의 소지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유한자의 문제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무한자에 대한 인식마저 유한하게 왜곡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을 올바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삼고자 해도 무한자를 유한화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비유한다면 무한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는 유한자로 축소해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편 23편에는 하느님을 목자로 비유했는데 이 역시 무한자를 유한한 목동으로 축소하고 왜곡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흔히 비유법, 은유법, 수사법이라 하여 문학적 기교로 인정을 하고 굳이 왜곡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비유조차 왜곡과 유한화의 문제가 있다고 간파한 것은 저의 학위논문에서 다룬 주제 때문입니다. 학위논문을 쓰기 전에는 비유의 문제를 단순히 문학적인 기교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전개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무한을 유한으로 표현해버리면 사실상 무한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한과 무한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 때문입니다. 무한은 단순히 유한을 무한히 연장한 것이 아닙니다. 10에다가 0을 무수히 많이 붙여도 여전히 유한일뿐 무한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키가 아무리 커도 2미터 안팎입니다. 그런데 키를 무한히 늘려서 수백억의 키를 가진 괴물을 상상해도 무한은 아닙니다. 따라서 무한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는 아무도 남에게 무한에 대해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에 대한 모두가 똑같이 무경험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경험이 있고 공부한 사람은 그 분야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습니다. 수학을 잘 아는 사람은 수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수학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만일 수학에 문외한이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도리가 없습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시각장애인에게 빛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중도실명자라면 빛에 대해 경험자이므로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선천성 전맹이라면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도 완전하게 경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유한자는 무한을 경험하는 일이 원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한에 대해 똑같이 무경험자인 존재들끼리 그 무한에 대해 연구하고 강해하고 웅변하고 사색하고 상상하고 그 무엇을 한다 해도 똑같이 그 무한에는 한 치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고상한 이론과 신학 지식을 동원해도 무한을 설명하는 데는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허점투성이입니다. 결국 무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선천성 전맹인 셈입니다. 그러니 무경험자인 설교자가 무경험자인 성도에게 열변을 토하는 것은 똑같은 전맹끼리 빛에 대해 잘 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칼빈이 하느님에 대해 설명하면 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찌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발끈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루터의 신학도, 칼바르트의 신학도 모든 사람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위대한 신학자들의 지식이 그러할진대 현대의 보통 신학자나 목사들의 설교는 얼마나 부족할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유한성이라는 형상에 갇혀 있습니다. 즉 형상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인간의 존재 자체가 이미 형상이란 말입니다. 이때의 형상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할때의 형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왜곡되고 일그러진 형상입니다. 결국 인간의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자기의 존재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상에다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상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인간에게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지식도 유한하고 지혜도 유한하고 믿음도 유한하고 신학도 유한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적절한 거리에서 관조해야지 완전한 진리인것처럼 확신하는 것은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무한자에 대한 칼빈의 해석입니다. 그 해석에는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심각한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 신학의 성경적인 부분은 잘 음미를 해볼 수 있지만 오직 그것만이 절대진리인 양 거기에 정착해버린다면 이는 하느님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더 숭배하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정은 칼빈뿐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됩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믿어서 큰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믿으라고 말한다면 하느님의 존재보다는 누군가의 체험에 의존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체험을 이유로 신앙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 반대 체험이 있다면 신앙을 버리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니체는 친가와 외가 모두가 목회자들이 득실거리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목사 흉내를 너무 기가막히게 연출해서 꼬마목사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경험한 기독교는 노예근성에 찌든 유치하고 비굴한 종교에 불과했고 결국 하느님은 죽었다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무한자에 대한 유한자의 모든 것 즉 지식, 경험, 신앙 등은 모두 유한한 형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무한자와 동등이 여겨서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주입하는 것은 심각한 부작용의 위험성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흔히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세속적인 복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과 많은 출석자와 많은 헌금을 요구하는 물량주의 등으로 지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철저히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근본주의적인 입장입니다. 물론 기복주의와 물량주의도 문제가 심각하지만 근본주의나 성서주의도 유한하다는 한계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질적으로는 물론 혼합주의보다는 성경 중심주의가 분명히 타당성이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심화하는 과정은 여전히 무한한 부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복주의를 배제하고 근본주의만 절대시하는 이분법보다는 기복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점을 받아들이고 근본주의의 좋은 면을 수용함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한을 향한 지향성을 반드시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한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우리는 모든 것 위에 무한자이신 하느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그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모든 것이 유한한 형상 안에 갇혀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엄명하셨지만 가장 강력한 형상은 바로 인간의 존재 자체입니다. 즉 우상성을 뿌리 뽑으려면 존재 자체를 없애야하므로 사실상 우상적인 형상은 뿌리 뽑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원죄를 짓기 이전부터 무한자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과 자기 자신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인식까지도 모두 하느님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유한을 유한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무한자를 무한자로 인정하고 높이고 그분만을 신뢰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무한자 자체보다 그분에 대한 주변적인 것들을 그분의 존재와 혼동해서 절대시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따라서 신학자의 신학이나 목사의 설교나 자기의 신비체험이나 깨달음 등 그 어떤 현상도 유한한 것임을 인지하고 그것들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함으로 건강하고 참된 진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강론을 마칩니다.
금주의 메시지
1. 우리 교회가 교단에 정식으로 등록했습니다. 원래는 초교단적, 초교파적인 사역을 하려고 했습니다. 교단이나 교파에 속하게 되면 그 단체의 입장에 동조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단에 소속되지 않고 활동하면 정체성을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디에 속한 교회인가를 묻고 무소속이라고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교단에 등록하고 활동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저의 신학이 기존 교단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소신 있게 활동하는 데 제약을 받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몇가지 특성들 예를 들어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신명을 하느님으로 사용하는 등의 문제는 성경이나 교리에 명시된 바가 없고 표준어 규정상 하자가 없으므로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외의 특성들은 이 교회를 이끄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남다른 장애와 어려움이 있어서 그들에게 맞는 맞춤형 특수 사역을 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상황화의 일환임을 밝힌다면 이 역시 문제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2. 지난주에 처형께서 맥추감사절 헌금을 내기 위해 뙤약볕을 무릅쓰고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 깊은 신심과 애틋한 사랑에 참으로 감동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걱정되어서 너무 더울 때는 무리하지 마시고 메시지를 보시고 댁에서 예배를 드려도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달리 참석하실 분이 안 계셔서 저희가 처형댁에 가서 예배와 애찬을 나누려고 합니다. 처형은 나물무침과 밥을 지어 놓고 기다리겠다고 하셨고 아내는 닭도리탕을 준비해 가서 오붓한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3. 날씨가 계속해서 더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장애가 없는 건강한 분들도 녹초가 되고 건강이 축나기 쉬운데 장애 등으로 약한 분들은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활발한 운동은 어렵더라도 가벼운 산책과 실내에서 왔다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단순한 운동이라도 꾸준히 하셔서 여름철 건강을 잘 관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첫댓글 먼저 하늘 언어 교회 교단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저의 처남들은 오래전부터 금형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데 금형틀이 완성되면 거래처 공장으로 보내지고 단시간에 완성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합니다. 사람의 욕심의 틀에는 하느님마저도 예외는 될 수 없나 봅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옳고 그름의 기준은 없고 무작정 밟고 눌러 채우기에 급급해합니다. 초대교회의 나누고 베풀며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에 힘쓰던 그때로...... 사도들의 겸손과 자기희생이 있어 만들어진 토대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자기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상석에 앉아 군림하려는 욕심이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했습니다. 빛과 소금은 지금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교회가 그토록 타락한 이유는 원래부터 타락해 있던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하느님을 가장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는 동시에 죄를 지독히 좋아하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방향은 늘 어렵고 나쁜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죠.
좋은 길을 만들려면 그만큼 분발해서 노력해야하기에 다들 쉽고 편한 내세 천국으로 안주하고 현재천국은 싸그리 잃어버려서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