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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19]
보이콧 없는 첫 국제 올림픽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제20차 올림픽은 테러로 얼룩진 ‘뮌헨 학살’(Munich massacre)로 기록돼 있다.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비밀리에 서독으로 침투, 이스라엘 선수촌에 난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팀 선수 5명, 심판 2명, 코칭 스태프 4명, 총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구금된 팔레스타인 포로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범인들은 모두 사살되고 체포되었지만, 서독 경찰의 진압 실패로 경찰 한 명과 이스라엘 인질 11명 전원이 사망했다.
제21차 올림픽은 1976년 캐나다 동부 몬트리올에서 열렸지만 인종 차별 문제가 발생하여 아프리카 26개국이 집단으로 보이콧했다. 1980년 제22차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열렸지만,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 집단 불참했고, 1984 LA에서 열린 제23차 올림픽은 1980년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의 집단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이 집단으로 보이콧했다. 드디어 제24회 올림픽이 열렸다. 북괴가 집요하고 야비하게 훼방을 놓고 사마란치 위원장이 이에 휘둘려 우왕좌왕했지만 전두환의 능숙한 상황 처리 능력으로 보이콧 없는 올림픽 역사를 열었다.
올림픽 준비
1982년 3월, 전두환은 사상 처음으로 체육부를 신설했다. 노태우를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올림픽 준비를 전담케 했다. 그동안 올림픽을 치룬 통상의 나라들은 선진국들이어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당해 도시의 예산과 능력으로 감당해왔다. 예를 들어본다. 캐나다는 영어권 도시들과 프랑스어권 도시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몬트리올이 소속된 퀘벡주는 프랑스어권에 속한다. 따라서 몬트리올은 이웃 도시들의 무관심 속에서 대회를 치르다 파산 직전에까지 내몰렸기 때문에 30년 동안 그 빚을 갚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선진국도 아니고, 올림픽을 치를 만한 기반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야 했다. 전두환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매 3개월마다 준비 상황을 보고받았다.
태릉 선수촌을 자주 찾아 선수들을 격려하고 관련자들과 체육 진흥 시책들을 의논하곤 했다. 전두환은 “체력 향상을 통한 국력 신장”이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다녔다.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은 자기가 중점을 두는 사안들에 대해 장기간 반복해서 구호처럼 말해야 한다. 한번 말하고 그 다음에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냥 어쩌다 해본 소리겠지’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두환은 스포츠과학연구소를 확대하고, 체육인 단체를 활성화시키고, 경기장 질서, 신인 선수 발굴, 대표팀의 전임코치 제도 등 주먹구구로 운영되던 체육계에 새로운 시스템을 심었다. 34개 경기장을 건설하고, 프레스센터, 통신-전자 시스템을 설치했다. 선수들과 기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를 지어 '훼밀리 아파트'라 명명했다. 올림픽 공원도 조성했다. 퇴임 하루 전날까지도 현장을 챙겼다. 88서울 올림픽은 곧 전두환이라는 등식을, 이 이상 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전두환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화장실과 음식점 객장의 청결, 주방의 청결이었다. 1980년대, 고덕, 목동, 개포, 상계 등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의 주택은 단독 주택이 대세였다. 모두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올림픽 전까지 수세식으로 바꾸고 수세식 화장실 이용 방법을 교육시키라고 했다. 올림픽 경기장 대부분을 한강변에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한강을 따라 도로를 8차선으로 확충하고 도로변의 경관을 가꾸었다. 1987년까지 지하철 4개 노선을 완공시켰다.
북괴의 치졸한 방해 공작
88서울 올림픽 경기는 남북한 간의 체제 경쟁의 우열을 객관적으로 가르는 분수령이자 국력의 대차 대조표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게시판이다. 북한의 신(GOD)을 자처하는 김일성에게는 일대의 치욕이 아닐 수 없고, 북한 주민이 알면 안 되는 패배의 아이콘이었다. 1981년에는 필리핀에서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고, 1982년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살해하려 했고, 1983년에는 아웅산 테러를 자행했고, 1986년에는 금강산 댐을 지어서 서울을 수장시키려 했고, 1987년에는 김현희를 시켜 KAL858기를 공중 분해시켰다. 이처럼 1981년 독일의 남부 도시 바덴바덴에서 올림픽의 주최권을 따내는 순간부터 김일성은 눈이 뒤집혔다. 전두환을 살해하고 올림픽을 중단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물리적 테러를 자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 올림픽 위원장 사마란치를 흔들어 서울 올림픽 행사를 끝까지 훼방했다. 1984년 4월, 김일성은 서울 올림픽 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1984년에 열리는 LA올림픽과 1986년 서울에서 열리는 아세안 게임에 남과 북이 단일팀을 만들자며 판문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전두환은 '또 장난질을 치는구나' 생각하면서도 일단 만나보라고 지시했다. 1차 회담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우리 대표단은 “1978년 최은희-신상옥 부부를 납치한 사실, 아웅산 만행 범한 상황 하에서 체육인들이 북한 사람들을 마음 놓고 접촉하기 어려우니, 사과를 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북한 대표단은 “체육 문제에 정치 문제를 꺼내는 것은 심히 불쾌하다. 아웅산 사건은 남측이 날조한 사건이다. 발언을 취소하라”며 퇴장해 버렸다.
6월 2일,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남조선의 반공 책동이 감행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선수들의 신변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면서 LA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아울러 “반공 책동이 지속되는 한 북한은 모든 민족, 모든 나라와 함께 공동 노력할 것”이라는 말로 공산 국가들을 상대로 88올림픽 보이콧 선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1984년 7월 30일, 북한은 부총리 명의로 88올림픽을 공동 주최하자는 제의를 했다. 이에 전두환은 관계관에게 북한이 진정으로 88올림픽의 일부 종목을 할애 받고 싶으면 86아세안게임에 먼저 참여하는 성의부터 보이라는 요지로 홍보하라고 지시했다. 박근 주 제네바 대사는 사마란치를 만나 북괴 주장의 부당함을 설명해 주었다. 1985년 8월 26일, 사마란치는 올림픽 조직위원장겸 체육부 장관인 노태우, 박종규 IOC위원, 크마르 IOC 제2부위원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전두환에게 “올림픽을 반으로 쪼갤 수는 없다. 내가 북한을 잘 설득해보겠다. 그래서 안 들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단호한 입장을 전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사마란치는 오찬을 마치자 전두환을 따로 만나자 했다. “1987년 말에 대선이 있고, 1988년에는 한국의 지휘권이 바뀌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보도들이 있습니다. 선거를 1년만 연기할 수 없습니까?” 한동안의 문답 끝에 전두환은 사마란치를 안심시켰다. 사마란치가 이토록 예민한 것은 72년의 뮌헨이 학살 사건으로 얼룩졌고, 76년의 몬트리올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집단 보이콧으로 반쪽 났고, 80년 모스크바가 자유 진영 보이콧으로 반쪽 났고, 84년 LA는 공산 진영 보이콧으로 반쪽 났던 과거의 악몽 때문이었다.
사마란치와의 게임
역지사지로 사마란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전두환은 사마란치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1985년 10월 8일, 스위스 로잔에서 남북한과 IOC사이에 3자 회담이 열렸다. 우리 측은 88서울 올림픽 예선 경기의 여러 개 종목을 북한 지역에서 열리도록 배정하고, 개폐회식 때, 남과 북이 각기 자기네 깃발을 들고 한덩어리로 입장하자는 것까지 양보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88올림픽을 남북이 공동위원회를 조직하여 명칭을 “조선 평양-서울 올림픽 경기대회”로 정하지고 했다. 경기 종목도 서울과 평양에 50:50으로 배분하고, 개폐회식도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진행하고, TV방영권과 이익도 반반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억지를 부리면서 올림픽 개최에 차질을 주기 위한 방해 작전임이 분명해졌다.
1986년 1월 8일 제2차 로잔 회담이 열렸지만 양측 주장은 평행선이었다. 이후 전두환과 사마란치는 여러 차례 만났다. 사마란치는 공산권의 보이콧 가능성과 올림픽 개최 6개월 전에 치러지는 대선이 올림픽에 미칠 영향에 대해 걱정을 했고, 전두환은 논리를 전개하여 그의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그래도 북한은 2차례의 제안을 더 하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려고 장난질을 했다. 모든 카드가 소진되자 결국은 북한 올림픽위원장 김유순의 명의로 “서울 올림픽은 암담할 것이다”라는 공갈로 그동안의 수작이 훼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이로써 1985년 10월부터 1987년 10월 23일까지 2년 이상 끈질기게 이어오던 훼방 작전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김일성 계산과 전두환 계산
북한의 수작에 흔들리지 않은 데에는 전두환의 계산이 있었다. 북괴가 시비를 거는 데에는 1984년 LA올림픽 때처럼 공산권이 불참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서울 올림픽이 반쪽이 날 텐데 전두환이 이를 겁내지 않겠느냐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계산은 달랐다. 아무리 공산권이라 해도 연속해서 2회씩이나 올림픽을 보이콧하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공산 국가들은 체육의 강국들이기 때문에 기껏 큰돈 들여 길러놓은 선수들을 8년씩이나 썩힐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88년 1월 소련의 타스 통신은 소련의 참가를 발표했다. 이 발표로 대세는 결정됐다. 이로써 서울 올림픽은 그 이전의 4개의 얼룩졌던 불완전한 올림픽 역사를 극복하고 완전한 올림픽 역사를 열게 된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전두환이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실현한 후 7개월이 지난 1988년 9월에 개최되었다. 동서진영 모두가 다 참가했고, 아무런 사고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160개 나라에서 13,304명의 선수가 와서 마음껏 역량을 발휘했다. 올림픽 역사상 최다수의 선수가 참여했고, 최고로 많은 나라가 참가한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영광, 세계에는 자유
삼성경제 연구소에 의하면 올림픽이 우리 경제에 미친 효과는 26억 달러, 33만 명에 달하는 고용을 창출했다. TV를 시청한 연인원은 104억 명, 방영권 수입이 4억 달러(현 시세 6000억 원)였다. 올림픽이 진행됐던 16일 동안 서울을 찾은 관광객 수는 190만 명, 이들이 서울에 남기고 간 달러에 대한 계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형의 이익도 있었을 것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서울, 친절한 국민성이 심어준 한국의 위상(Identity)이 등업되었고, 수출품에 대한 간접적 광고 효과가 상당했을 것이다.
1995년에 설립된 WTO, 국가와 국가 사이에 무역 장벽을 헐고 세계인 각각의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인류의 염원을 반영한 아이콘이다. 하지만 이는 1988년 12월 7일, 고르바초프가 UN에서 한 연설에서 촉발됐다. 레이건의 스타워즈 전략에 손을 든 고르비는 UN에서 불과 253자의 아주 짧은 연설을 했다. 소련군을 유럽에서 일방적으로 철수시키겠다는 놀라운 선포였다. 미국과 서방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통이 큰 레이건과 통이 큰 고르비가 통 큰 세계를 연 것이다. 냉전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냉전의 벽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바로 이 시각, 지긋지긋했던 냉전의 벽이 철거된 것이다. 이 연쇄적 반응을 일어나게 한 발원지(Fountainhead)는 어디였을까?
88서울 올림픽과 냉전의 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미국과 서방이 보이콧했다. 냉전이 빚은 결과였다. 1984년의 LA올림픽, 소련과 공산권이 보이콧했다. 역시 냉전이었다. 그리고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양쪽에서 온 수만의 사람들, 그리고 TV 방송 공간에서 한 자리에 모인 양개 진영 사람들, 서울도우미들의 화사한 얼굴과 매너에 새로운 세계를 느꼈을 것이다. 1983년의 아웅산 폭파범 강민철은 친절한 간호사의 얼굴에 동화되어 비밀을 털어놨다. 1987년의 김현희는 따뜻한 여성 수사관의 정성에 입을 열었다. 88서울 올림픽에 자원했던 남녀 도우미들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매너가 참가국 160개국으로부터 온 선수들과 관람객들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TV를 시청한 사람들에게 끼친 심리적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음산한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밝고 행복한 삶의 질을 자극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 제2권 581쪽에서 이렇게 썼다.
“소련의 전 KGB요원 키리젠코는 6.25전쟁 전후의 모습만을 연상하던 소련 국민에게 발전된 서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국 국민들의 따뜻한 모습,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목격한 동유럽사회에서는 자유의 바람이 불면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서울 올림픽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와해와 나아가 동서냉전을 종식시킨 계기가 됨으로써 세계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88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물밑으로 이뤄진 한-중, 한-소간의 접촉과 교류는 그 후 자연스러운 수교로 이어졌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은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성취의 기념비적 쾌거였다.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서울 올림픽은 국제스포츠 행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예고한 타종(打鐘) 행사였고, 새 시대를 여는 전야제였다”
2022.8.15.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