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지상 사진전1: 한국교회 대표하는 목자로 성장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지상 사진전 I
한국교회 대표하는 목자로 성장
“신부가 되라.”
갓 10살이 된 소년 김수환에게 어머니의 권고는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씀에 대한 순명은 소년의 전 생애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의 삶으로 변화시켰다.
가톨릭신문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주기를 맞아 추모기간(2월 16일~3월 28일) 동안 김 추기경이 남긴 사랑의 삶을 사진으로 되짚어보는 지상사진전을 연재한다. 소신학교 시절에서부터 선종 직전까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가톨릭신문 소장 사진들도 다수 만나볼 수 있는 장이다.
청년 시절 김수환
독실한 순교자 집안의 막내아들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소신학교에 들어섰다. 수년이 지나도 사제가 아닌 장사꾼이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 무릎에 기대어 키워간 신앙심은 자신도 모르게 더욱 뿌리를 내려갔다.
일제 치하와 6·25 한국전쟁 등의 험난한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와 서울 동성상업학교, 일본 조치대학교,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신학대) 등을 거쳐왔다.
- [왼쪽 아래] 형 김동한 신부(뒷줄 왼쪽)와 함께 [오른쪽 아래] 젊은 시절 김수환 추기경(1946년)
사제 시절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
1951년 9월 15일 사제품을 받기 위해 제단에 엎드려 수없이 되뇌인 서품성구다. 30살, 사제가 되기까지 수없이 도망치고 싶어 했고 성소에 대한 회의도 느꼈다.
첫 소임지는 경북 안동본당(현 안동 목성동본당)이었다.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한 이 시간은 그에게 꿈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고,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가장 열심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으로 남았다. 특히 그는 시보사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인의 삶이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 모든 이의 ‘밥’이 되는 것임을 더욱 절감했다고 고백한다.
- [오른쪽 위] 1954년 안동성당 신자들과. [오른쪽 아래] 안동성당(현 안동 목성동성당) 세례식 후 신자들과 함께.
마산교구장이 되다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
갑작스런 교황대사님의 호출에 이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마산교구장직이 주어졌다. 1966년 5월 31일 본당 21개, 신자 수 3만여 명 남짓한 작은 교구의 교구장 생활이 시작됐다. 야훼의 부르심에 응답한 아브라함처럼 순명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본당에 사목방문을 나가 신자들과 만날 때가 가장 기뻤다. 그즈음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도 겸임하며 대사회적인 활동에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최초로 시국 담화문도 발표했다.
- [오른쪽 위]1966년 5월 31일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에서 열린 마산교구장 착좌식 모습. [오른쪽 아래] 마산교구장 착좌식에서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는 김 추기경.
[가톨릭신문, 2010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