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가톨릭 인물 10인(평화신문 선정) 평신도
평화신문 Home > 여론 사람들 > 일반기사…. 발행 〔558호〕
▲서상돈 1850 - 1913 , 아우구스티노) 대구교구 창설 주도·빈 민 구제사업 선구자
대구 대목 구(현 대구대교구)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서상돈은 당시 대구에서 손꼽히는 제일의 부호로서 대구교구 창설의 공로자였고 빈민구제사업의 선구자였다.
서상돈은 평생을 자선사업에 헌신하여 봄과 가을 대구, 경북 일원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수백 석의 식량을 희사하는 등 가난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자신이 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모조리 나누어 줬다.
교회 안에서는 대구 본당(현 계산동 본당)을 개척하는 로베르 신부를 도왔던 서상돈은 대구대목구 설정과 함께 드망즈 주교가 부임하자 대성당 앞의 집을 주교관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 화원 전부를 교구사업에 희사했다. 여기에 대구교구의 중추기 관인 주교관· 신학교·수녀원 ·고아원· 성모의 루르드 동굴 등이 들어섬으로써 교구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는 교회와 관련된 활동 외에도 애국계몽 운동과 함께 일제의 경제 착취에 맞서 1907년 1월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 , 토마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한국의 모세’
안중근 의사는 조국 독립과 동양(東洋)의 평화를 위해 온몸을 떤 진 해방자로서 ' 한국의 모세'로 불리며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해 ' 한국의 바오로 사도'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1908년 의병을 조직해 무력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1909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도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의거였다.
그는 저격 당일 하느님께 기도하고 거사가 성공한 후에도 성호를 그으며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았던 참 신앙인이었다.
18살 때인 1897년 세례를 받은 안 의사는 교리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아버지와 함께 빌렘 (Wilhelm, 洪錫九〕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이미 100년 전에 거리선교 활동을 벌였다. 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중 교육에도 몸을 던졌던 그는 뮈텔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설립을 건의 하기도 했고, 1906년 가산을 털어 평안도 진남포에 ' 삼흥학교 ' 와 ' 돈의학교 ' 를 세웠다.
▲장면(1899· 1966, 요한)
일제하 민족교육·해방 뒤 반독재 투쟁 앞장
질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시대의 양심적 지도자로 우뚝 섰던 운석(雲石) 장면 박사는 신실 한 신자이자 탁월한 외교관이었고 권모술수를 버리고 정도를 걷던 ' 신앙의 정치인 ' 이었다. 또 1930년대 동성 상업 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력 하면서 식민지하의 조선인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한 교육자였다.
독실한 신앙인의 삶에 충실했던 그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프란치스꼬 제3회에 입회하여 이 수도회의 영성에 따라 믿음과 법도(法度)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 8· 15 광복 후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형평(衡平)과 정의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아 청렴한 정치를 펼쳤다. 특히 정치인으로서 복음적 권고로 칭해지는 ' 청빈 ' 의 정신에 따라 부정과 부패를 배격하고 자유당 정권하에서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앞장섰다.
또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면서 정치 일선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지식인들을 전교 입교시켰다.
▲정지용(1902 –1950, 프란치스코)
문학·언론 통해 하느님의 정의 구현 노력
정지용은 ' 천주(天主) ' 의 사랑과 부활을 노래하는 가톨리시즘을 추구했던 시인으로서 한국 문단사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재학 중 가톨릭에 귀의한 정지용은 귀국 후 장면·박준호 등과 1933년 ' 가톨릭 청년'을 창간해 ' 임종 ' · ' 별 ' · ' 갈릴 레아 바다 ' · ' 승리자 김 안드레아' 등 신앙을 주제로 한 많은 종교시들을 발표했다. 이 와 함께 모교인 휘문고보에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명동본당 청년연합회 회 지 ' 별 ' 의 편집에 참여해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아물러 시인으로서 정지용은 독특한 동양적 모더니즘의 시들을 발표해 한국문단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광복 이후 이화여전 강단에서 강의하던 정지용은 1946년 ' 경향신문 ' 창간과 함께 초대 주간을 맡아 사설과 정치 단평란인 ' 여적 ' 등을 통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성을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순수 이념을 짓밟는 사회악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김흥섭 판사(1915 -1965, 바오로) 정치적 판결 거부한 ~법복 입은 성직자·
'사도법관(使徒法官) ' 이라 불리는 그는 현대 한국의법조사·종교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 '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 ' 에 대한 남다른 고뇌 속에 언제나 신앙과 양심에 따라 바른 재판을 하려 애썼고 항상 자신을 수도자처럼 채찍질하며 살아온 법학자인 동시에 사상가였다.
1953년 9월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신앙서 적을 사서 서대문 교도소의 사형수들에게 넣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판결한 사형수의 대부를 자청하면서 신앙의 길로 이끌어 법복(去服) 입은 성직자'로 불렸다.
대 법관 직무대리, 서울고등법원장 시절 관용차도 타지 않고 빛바랜 군복 바지와 양복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도시락을 든 차림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서 출·퇴근한 일화로 유명한 청백 리의 상징. 부정부패나 정치적 간섭에는 추상같았지만, 법관으로서 어떠한 특권도 거부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전교로 많은 법조인이 세례를 받았다.
성직 자
▲방 유룡 신부(1900- 1986)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및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창설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창설자. 한국인 수도자 양성과 함께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수도회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 경기도 개성 본당 주임 시 절인 1946년 4월 21일 윤병현, 홍은순 수녀를 첫 입회자로 맞아들여 최초의 완전한 방인 수녀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했다. 그 후 53년 10월 30일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를, 57년 3월 6일에는 재속수도회인 ' 한국 순교복지회 외부 회를 설립했다.
방 신부는 수도회 창설 초기부터 수많은 수도 용어(修道用語)를 창안하여 동양문화를 바탕으로 한 영적 가르침을 펼침으로써 동양인의 심성에 이미 주어진 하느님의 모상성을 찾고 그 문화 안에 그리스도교 영성을 뿌리내리게 했다. 또 미사통상문을 비롯한 모든 전례문을 번역하여 직접 작곡한 후 이를 미사 중에 발표함으로써 전례 의 토착화에 기 여 했다.
신앙의 토착화는 영성이 토착화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볼 때 방 신부는 한국의 교회사와 영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을 토착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윤형중 신부(1903-1979)
언론 등 통해 겨레 복음화· 인권 수호에 힘써
윤형중 신부는 한평생 언론·출판, 교리강좌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 쓰고 가르치며 겨 례의 복음화와 민족의 구원에 몸 바쳤던 정의와 진리의 ' 증거자 ' 였다.
대쪽처럼 곧은 심성과 칼날처럼 예리한 필봉을 지닌 윤 신부는 자유당 정권 말기 ' 경향신문'을 반독재 투쟁의 보루로 삼아 인권과 자유 수호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유신정권 하에서는 '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이끌며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불태웠다.
또 한국 교회의 정신적 대변인이자 가톨릭 사상의 선구자였던 그의 교리강좌는 해박한 지식과 촌철살인(寸鐵殺ㅅ)의 표현으로 진리에 목마른 지식인들을 매료시켜 다양한 지식인 이 천주교에 입교하거나 개종하는 붐을 일으키게 했다.
아울러 윤 신부는 일제하에서 순교자 현 양회를 처음 결성한 데 이어 박해시대의 유물을 수집하고 경합잡지에 순교자 현양을 독려하는 글을 여러 차례 싣는 등 신앙선 조들의 순교 정신 고취에 앞장섰고 새남터 ·절 두산 성지의 기초를 닦았던 순교자 현양 사업의 선구자였다.
▲ 윤을수 신부(1907-1971)
고아. 나 환우를 위해 평생 바친 “민중의 벗”
'한국의 ‘유학 사론 ' 이란 논문으로 한국인 사제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신부. 그러나 윤 신부는 무엇보다 전쟁고아와 나 환우를 돌보며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던 헐 은 민중의 벗으로 기억되고 있다.
윤 신부는 1953년 한국 까리따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 인보회(隣保會)'를 설립함으로써 평생을 사회사업에 투신했다. 고아원과 결핵 요양원을 설립해 전쟁고아 수천여 명을 돌보았고, 일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며 사회사업과 전교 활동을 위한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껴 58년 6월 5일 안보 성체수녀회를 창설 하기도 했다.
1960년 성 라자로 마을 원장으로 부임한 후 해외 원조를 받아 성 라자로 병원과 요양원, 정착촌 등을 세우며 나 환우를 돌보고 낙도 의료봉사 등 은퇴할 때까지 의욕적으로 사회사업을 벌였다.
이 밖에 우리나라 신앙인들의 영성 생활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 준주성범 ' 을 번역하기도 했다.
▲선종완 신부(1915 -1976)
선종 하루 전날까지 성서 번역 작업에 몰두
신 학교 시 절부터 라틴어와 희랍어, 히브리어 등 9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경성 천주공교 신학교, 성신 대학. 가톨릭대 신학대학교 교수로 후배 사제를 양성하며 대부분의 사제생활을 성서 연구와 교육에 몰두했다.
성서 학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6·25 전쟁으로 신학교가 부산으로 옮겨 갔을 때부터 1963년까지 방대한 구약성서를 우리 말로 번역 ·출판했다. 또 68년부터 8년 동안 신 구약성서 공동번역의 가톨릭 측 전문위원 겸 번역위원으로 성서 번역사업에 힘을 쏟아 76년 7월 11일 간암으로 선종하기 하루 전날 병상에서 원고 교정을 모두 마치는 열 정을 보였다. 아울러 가난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해 수녀가 될 수 없었던 여성 지원자들을 모아 1960년 3월 25일 경기도 부천에서 '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함으로써 수녀회 지원자들의 학력의 벽을 허물었다.
▲지학순 주교(1921 -1993)
유신 독재 ·부정 부패에 맞선“정의 의사도”
'민주화의 새벽을 연 목자 ' 지학순 주교는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인권과 양심의 횃불을 지핀 정의의 사도였을 뿐만 아니 노동자·농민 ·도시 빈 민·장애인 ·이재민들을 온몸으로 사랑했던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벗이었다.
지 주교는 71년 10월 원주 원 동성 당에서 열린 ' 부정 ·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 미사'과 거리 행진을 주도하고, 유신 헌법을 비판하다 ' 민청학련 '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정의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력을 고발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특히 74년 7월 23일 독재 권력에 맞서 '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로 하여금 징의 구현과 인권회 복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지 주교는 사목 자로서 평생을 원주시 쌍 다리 굴의 걸인들을 돌보고 윤락여성들에게 새 삶을 찾아주며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고통받는 광산노동자들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등 소외된 현장의 한복판을 찾아가 ' 작은 예수 ' 들을 한명이라도 더 사랑으로 감싸안으려 고 노력 했다 .
【서 영 호 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