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일기장 / 김점순
열대우림을 꿈꾸던
알로카시아를 뽑았다
새끼손가락 같은 묘목 하나가
고목으로 자라기까지
싱싱한 하루하루를 빨아먹으며
수없이 파닥였을 저 초록 날개들
부채처럼 퍼지던 널따란 잎사귀에
햇살은 돌돌 말려 미끄럼을 타고
아이들은 주문을 외우며
분무기의 좁은 구멍으로 꿈을 심었다
넓은 잎으로 집을 들어 올리고
흐린 마음을 정화해주던
우리들의 푸른 일기장
차갑고 따스한 기억들이 들어찬
비밀스러운 기록은 초록의
눈동자로 박혔다
퇴비를 버무린 흙 속에
찔러 넣은 스물다섯 해의 청춘
척박한 곳에서도 깊숙이 스몄다
실타래처럼 내 몸에 감겨들던
잔뿌리들 잔뼈가 굵어졌다
청청한 우림에 지을 푸른 설계도가
낯선 영토에 두 발을 디디고 선다
뿌리가 자란 아들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듯
인생 술집 / 김정순
그 골목에서 서성인다
한껏 얇아진 채 눌어붙은 이름
무성한 기억이 퇴적된 삐거덕거리는
천장 아래로
고양이 한 마리 체온을 더듬고
쪽문을 드나들던 풍문이 녹슨 못처럼 박혔다
금이 간 민화가 술을 흘리고
사내들의 땀 내음이 걸쭉한 동동주에 파전을 찢던 저녁
골목 사람들은
탄내 나던 세상을 연기처럼 뿜어댔다
골목을 끌고 들어선 습관의 무게를
버티고 선 느티나무와
반주를 기울이던 창백한 아버지의 무게는
얼마나 깊었을까요
녹물 같은 애환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패기는 신화였다
취기를 더듬던 사람들은 어디로 흘렀나
어둠을 헛기침하던 낡은 가로등도
정적을 두드리던 노랫가락도 골목을 빠져나가
경적 소리만 요란하다
잔을 기울이던 저녁이 사라지고
벌건 눈알에 질질 끌려오던 익숙한 밤도 사라지고
세월의 녹에도 층층이 쌓아놓은 기억
쐐기처럼 박힌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아버지의 틈을 메꾸고 섰다
바위 / 김정순
거무스름한 살갗에 굳은 표정
그는 옹고집이다
눌러앉은 무게, 뿌리 깊은 내공의
영원한 골동품이다
변신이 가능한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세월에 깎인 흔적만으로도
하나의 우상이 될 수도 있지
우직한 저 뼈대
그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얼마나 지조 있는 가문이었을까
전설이 된 이름들
모두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저벅저벅 걷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양반다리로 웅크리고 앉은 자리
욕창 같은 깊숙한 상처 이끼로 번져
구르고 굴러온 세월만큼
부처손의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다
건너야 할 생의 시간을 둥글게 모아
여전히 그 자리에서
큰 바위 얼굴을 그려간다
카페 게시글
문학지 5호
김정순 푸른 일기장 외2
시냇물
추천 0
조회 7
22.09.25 15:54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