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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입니다. 믿는 사람이 등산을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청년회에서도 소금강 갔었죠? 소금강에는 낭떠러지가 많습니다. 십자소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무섭습니다. 이 믿는 사람이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나뭇가지를 잡아서 구사일생 나무에 매달립니다. 한 손을 놓고 119에 전화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살려주세요! 그 위에 아무도 없어요!” 절규 반 기도 반 목청껏 외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거룩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살려주마. 그런데 조건이 있다. 날 믿고 그 두 손을 놔라!”입니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두 손 손 놨다가 뼈도 못 추리고 국물도 없이 떨어져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답니다. “그 위에 다른 분 없어요?” “하나님 말고 다른 분 없어요?”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두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롬6:15-23절에서는 종이란 용어가 9번 나옵니다. 학교 종 아니고 노예 사람 종입니다. 6장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종, 순종의 종, 의의 종”으로 표현합니다. 반대는 죄의 종입니다. 종들은 열매를 맺습니다. 죄의 종은 사망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3가지 종류 나눕니다. 첫째는 늙어 죽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으로 마지막 날 영원히 타는 지옥 불 못에 떨어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종, 의의 종, 순종의 종이 맺는 열매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영존하는 생명(Everlasting life)을 말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3가지 죽음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죽더라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얻었습니다.
오늘 제목이 믿는 자의 4가지 특성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행위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견해에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내가 결단해서 믿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알게 된 것이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즉흥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주었습니다. 창조주께서 특별히 주신 보통 믿음이 아니라면, 차이가 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도 다르고 다른 종교인들하고도 다른 차이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착함의 차이일까요? 도덕적, 윤리적으로 우리가 불신자보다 월등히 나은가요? 같이 탁구를 하는 어떤 분이 교회와 담쌓은 경험을 얘기해주었는데 이렇습니다. 수십 년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하고 축구를 했답니다. 본인이 극적인 골을 넣었답니다. 그런데 골을 넣은 걸 축하는 못 해줄망정 자기들끼리 자신에게 뭐라고 하더랍니다. 그분은 교인들의 이런 편협한 모습이 평생 상처가 되어 나는 교회는 안 간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이런 예를 보면 우리가 단순히 착하다는 기준으로 믿는 자 와 큰 차별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믿음이라면 불교, 힌두교, 토테미즘, 애니미즘을 등을 숭배하는 타 종교인과 무엇이 다른가요? 오늘은 그 차이에 관해서 소개 합니다.
오늘 본문 롬6:1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종, 의의 종, 순종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단어에서 첫 번째가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은 자기가 부인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특성 첫 번째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은 부부 사이에 “여보~ 자기” 할 때 그 자기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려는 욕구와 판단을 거절하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종이 자기를 부인해야 함을 예수님께서 비유한 장면이 눅17장7-10절에 무익한 종의 비유입니다. 종이 온종일 땡볕에서 일합니다. 중동지방은 얼마나 덥습니까? 그는 밭일하거나 또는 양 똥 치우느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물 마시고 쉬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배고프니까 저녁 밥 차려 달라 하고 그 밥 다 먹을 때까지 수종 들라고 합니다. 하라는 걸 다 했는데 칭찬은커녕 당연히 할 일을 했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바로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마16: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입니다. 본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위대한 사명을 지고 쫓으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원어 상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 부인과 같은 의미랍니다. 십자가를 지고 지속해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이랍니다. 정리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자여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 보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말씀이 떨어지면 자기 부인이 되는 자입니다. 우리 마음속 깊이 말씀 앞에서 이런 작은 움직임이 있는지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롬6:17절을 보십시오. 본문은 우리를 순종의 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의 종은 순종할 대상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종이 사사건건 주인에게 대들고, 말 안 들으면 쫓겨나거나 이웃집에 팔아버립니다. 실제 미국 노예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병이든 아프리카 추장의 아들이 시장에 나왔답니다. 그를 한 악덕 노예상이 사서 가려고 하는 순간에 다른 노예상이 나타나서 그를 값의 3배를 더 주고 되샀다고 합니다. 노예 처지에서는 이상합니다. “이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험악한 일을 시키려나?”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차에 실려 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욕도 했답니다. 그 주인은 이 모든 행패를 꾹 참고 자기 집까지 마차에 태워 갑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내가 너를 3배로 산 것은 네가 그 집에 팔려 가면 한 달도 못되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널 살리려고 3배의값을 주고 샀다. 그러니 이제 너의 길을 가라.” 하고 풀어줬답니다. 추장 아들이 나갔겠습니까? 그가 밖에 나가 봤자 검은 피부는 바꿀 수 없으니 금방 백인에게 잡혀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은 강건너 불 보듯 뻔합니다. 이 노예는 나가지 않고 평생 자발적으로 주인을 섬겼답니다.
믿는 자의 두 번째 특성은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이 만사형통일 때는 당연히 아멘 이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난과 고통으로 인도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 내 부르짖음에 침묵으로 응답하실 때 이 주권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처음에는 반발심을 갖더라도 결국에는 그 주권을 선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도 내 입맛대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남성들은 특히 캡틴 신드롬이란 게 있습니다. 캡틴 신드롬 학술 용어 아닙니다. 제가 잊어버리지 말라고 지어낸 용어입니다. 학생들 학교에서 답지에 썼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캡틴 신드롬은 내가 선장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내가 대장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낫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용미사두입니다. 한국 국회 의원 수가 299명이랍니다. 그런데 모두 다 하나같이 최종 목표는 대통령이랍니다. 대통령은 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모두 있습니다. 예수님 측근 열두 제자들도 캡틴 신드롬 있었습니다. 11명 모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형님은 수제자 감이 아니야! 수제자는 나여야 하지. 베드로 해엥님은 너무 가벼워. 사람이 자고로 듬직해야지 항상 호들갑이 심해!” 이런 마음으로 제자들은 누가 큰지 항상 경쟁합니다. 이런 제자들도 나중에는 달라집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초대교회 역사를 잘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자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 없애달라고 3번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계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만해 지지 않도록 주신 가시로 여깁니다. 믿는 자의 특성 2번째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7장1-4절까지는 믿는 자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결혼제도에 비유합니다. 바울은 결혼한 적이없고 평생 주와 복음을 위해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에 대해 비유를 할 수 있었죠? 본문을 페미니즘, 여권신장운동, 여성 인권 탄압금지에 인용하라고 비유한 거는 아니겠죠?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염두 해 두고 비유를 합니다. 원래 부부관계는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가운데에 있었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코뼈로 만들었으면 머리 꼭대기에 앉았을 것이고 발가락뼈로 만들었으면 항상 밟혔을 것입니다. 이런 동등한 관계가 창3장16을 보면 죄를 짓게 되면서 깨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관계로 변합니다. 동등한 관계에서 다스림의 관계, 지배관계, 권력 아래의 관계로 떨어집니다. 본문의 믿는 자가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율법의 지배, 영향력, 권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비유합니다.
두 번째는 법적인 관계에서 벗어났음을 강조합니다. 결혼도 계약관계입니다. 혼인 서약을 하고 성혼 선언을 하면 이의 있냐고 묻습니다. 남편이 살아있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려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함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폭력과 폭압의 율법 남편에게서 벗어난 자임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유대 사회의 결혼제도는 남성에게 유리합니다. 여성은 이혼 청구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혼 사유를 찾아보니 황당한 사유도 있었습니다. 결혼한 랍비가 부인보다 더 이쁜 여인을 만나면 이혼해도 된다 이런 조항도 있었습니다. 믿는자는 남편이 죽음으로 부당한 관계에서 벗어난 것처럼 율법의 부당함에서도 벗어났습니다.
본문 5절에서 13절까지는 율법과 죄의 독특한 관계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율법 자체는 선하다고 합니다.(롬7:12) 율법 없으면 당시 사회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짐승의 세계와 같이 됩니다. 짐승은 힘이 곧 정의입니다. 짐승들에게 살인죄, 간음죄는 없습니다. 율법의 선한 기능 때문에 율법 폐기론,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은 이단 사상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제도와 같은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덕법, 시민법 등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율법이 죄를 늘어나게 만든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은 죄를 보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울을 보기 전에 죄인 줄 몰랐는데 거울을 보니까 죄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죄의 종류도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믿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해집니다. 신앙 초기에는 내 죄가 바위로 보이다가 조금 지나면 자갈로 보입니다. 좀 더 지나면 모래로 보이다가 더 지나면 먼지처럼 보입니다.
본문7,8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탐하지 말라,”란 조항이 있습니다. 이 조항이 우리에게 탐심을 더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하면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옛날에 어머니가 조청을 담아서 선반에 올려놓곤 합니다. 고추장 담을 때 필요했었습니다. 어머니가 올려놓고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거 먹으면 절대 안 되란 말을 했기 때문에 기어코 먹게 되는 이치입니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면 기어코 하는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어코 따먹습니다. 이 이치는 먹지 말라고 말씀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 내가 왕이 되어 내가 인생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어기면서 그 율법을 정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면 오기가 생겨서 더합니다. 율법을 깨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은 죄를 더 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롬7:6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그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본문은 옛사람이 아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은 성령님을 통한 새 생명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율법 조문에 매이는 사람은 옛사람을 말합니다. 신동엽이라는 분이 쓴시 “껍데기는 가라!”란 시가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하고 시작하는 시입니다. 율법의 알맹이는 도외시하고 율법의 껍데기 형식만 지키지 말라가 본문의 권면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오래 하다 보면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 생깁니다. 이 묵은 것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공로가 쌓이고, 신앙 경력이 쌓이고, 신앙의 마일리지가 늘어나면 그 마일리지가 남을 판단합니다.이런 사람 옆에 가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판단과 정죄 받을 것 같아 위축됩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는 공중에 12대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인공지능 시스템이 도입되었습니다. 공 안에도 센서가 있고 12대의 카메라가 선수들의 관절을 29개로 나누어 추적하면서 오프사이드 반칙을 잡아냅니다. 공을 차는 순간에 공격수가 상대 수비수보다 팔 한쪽 빨리 들어가도 단 20초 만에 잡아낸다고 합니다. 이런 시스템이 공정성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선수들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AI 앞에 서는 축구 선수와 남을 잘 판단하는 사람 앞에 선 우리와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하여 비교해 보았습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야, 이 사람은 이래서 문제야 지적하면서 본인도 신앙의 기쁨을 잃어가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율법 조문의 묵은 것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믿는 자의 3번째 특성은 롬 7장 4절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에게 간다는 것은 “시집간다, 결혼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요3:29. 계21:9. 21:2) 본문은 예수님의 신부가 된 목적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그 열매 중 가장 큰 열매가 구원의 열매입니다. 영생의 열매입니다. 이 구원의 열매를 얻은 기쁨을 가장 잘 표현한 분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전서1장8-9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본문에서 믿는 자의 3번째 특징은 구원 그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영원, 영생을 소유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구원 이외에 플러스알파가 없어도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은 기본이고 그 외에 많은 알파 즉 수많은 복들이 있어야 기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믿음의 사람은 영원을 소유한 기쁨이 너무 커서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3:17-18)라고 구원의 기쁨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끝으로 믿는 사람의 4번째 특징은 롬7:14-25절까지 말씀입니다. 믿는 자의 이중상태를 소개합니다. 바울만의 독특한 시각입니다. 이 시각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을 매우 편안하게 합니다. 24절은 바울의 탄식이 나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본문의 곤고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말합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회심한 이후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갈등하는 이유가 17, 20절에 죄가 내 속에 거하기 때문이고, 18절과 21에는 육신에 악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22.23, 25절은 내 육신 속의 죄의 법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속 사람과 겉 사람과의 갈등, 옛 자아와 새 자아와의 갈등,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갈등,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과 갈등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 고백합니다.
이런 곤고한 상태를 예수님도 말합니다. 마태복음5: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마태복음 5장3-10절은 아주 이상한 복, 아주 낯선 복이 나옵니다. 팔복을 해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여 애통해하면 그 결과로 위로를 받게 된다고 해석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애통한 상태에 놓이게 된 자 또는 애통한 상태로 이끌린 자가 복이 있는 자인데 그 복이 위로받는 상태로 놓이게 한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팔복을 운동하자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 가난 합시다. 애통합시다. 박해받읍시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면 상당히 어색합니다. 애통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는 상태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가 바로 애통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라는 복이 따라서 오는데 그 위로는 누가 줍니까?
오늘 본문7장25절과 8장1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를 주십니다. 오늘 롬6:19 하반 절을 보면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 또 성경에는 수많은 요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와 수요집회를 빠지지 않는다면 일 년에 총 108번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10년 신앙 생활하면 1,080가지의 권면을 받습니다. 다 실천했다면 우리는 벌써 거룩해져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안 됩니다. 어느새 죄의 본성이 튀어 나옵니다. 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잘 안되는 나를 이상하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하는 나가 정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해서 그런가 의심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갈등만 하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늘 누구에게로 가야합니까?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로 피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안 계셨으면 어떡할 뻔했을까? 예수님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나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는 자입니다.”하고 고백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이유가 본문 롬8: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어떤 싸이클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정죄가 없고 예수 밖에 있을 땐 정죄가 있고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자는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정죄는 이미 2000년 전에 끝났습니다. 본문 7장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란 문장은 문맥의 흐름으로는 들어가 있을 자리가 전혀 아닌데 들어가 있는 문구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 인한 감사를 주체할 수 없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탄식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믿는 자의 4가지 특성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자기 부인하는 자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세 번째는 구원만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네 번째는 갈등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갈등만 하면 안 되고 자기가 어디에 있음을 확인 해야 합니까? 예수님 안입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갈등하고 좌절하지만 결국 그래서 '' 나는 예수님이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없었으면 큰일 날뻔한 자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필자의 로마서 이외 원고는 블러그 "빛고운구슬" [성경탐구 및 강의원고]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