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1연부터 어리둥절하다면서, 시가(여송연), 아이스크림, 근육질 등 주석이 요구되는 대목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아닌 전문가가 알려주는 '사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시가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서 치러진 가난한 여성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최고의 시가 생산지인 키웨스트는 더운 지역으로 장례식 때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서 대접했다는 사실이다. 1연은 부엌에서 아이스크림 만드는 장면이며, 2연은 방안의 죽어있는 여성의 모습과 주변 사물들을 묘사한다. 저자는 두 구절에 주목한다. 먼저 1연의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라는 구절이다. 저자는 모든 보이는 것(seem)은 결국 있는 것(be)으로 남게 된다는 것. 한 생애를 통해 다양하게 존재했던 '보임'이 아주 단순하고 투명한 '있음'으로 축소되는 순간은 바로 장례식이며, 1차적으로는 장례식을 차질 없이 준비하라는 뜻이면서, 더 깊게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저 '피날레'의 준엄함을 잊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어 이 명령을 선언적으로 재확인하는 매력적인 구절이 나온다. 1연과 2연의 마지막 구절인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니까."이다. 모든 아름다운 ‘보임’은 결국 단순한 ‘있음’이 된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행사가 장례식이라면, 장례식에서 나눠 먹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그 진실의 절묘한 표상이 될 것이다. 앞서 아이스크림을 달콤한 삶의 미각적 표상으로 끌어올린 이 시는 이제 아이스크림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녹아 없어진다는 것임을 상기하라고 암묵적으로 요청한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녹는다.’ 만약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진실이라면, 우리를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는 바로 아이스크림의 황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 대한 다른 사람의 해석이다. (신원철 시인) 이 시에서는 상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이 슬픔이나 애도와는 거리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스티븐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죽음도 삶의 한 변화일 뿐인 것이다.아이스크림이 사람들의 혀를 즐겁게 하다가 녹아 없어지듯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변화에 있다. 빈둥대는 계집아이나 꽃다발을 바치는 머슴아이나 여송연을 마는 사람은 모두 죽은 여자에 상관없이 생의 한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2연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삶과 죽음을 희화하고 있다. 죽은 그녀가 아껴 보관해 두었던 공작 비둘기를 수놓은 침대보는 결국 시신의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되고 있다. 얼굴을 가리는 데 치중하다가 발이라도 삐져나오게 되면 싸늘하게 굳어서 침묵하고 있는 그녀를 오히려 잘 보이게 하는 것이 된다. 램프에 불을 붙이라는 말은 실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방편이다. 진실이란 아이스크림처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한 번 더 강변하여 “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미상) '아이스크림 황제' (the emperor of ice-cream)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이스크림은 삶의 쾌락을 상징한다. 동시에 빨리 먹지 않으면 녹는다. 일시적이고 쉽게 사라지는 덧없음을 상징한다. 일시적이고 쉽게 사라지는 관능적 기쁨은 아이스크림뿐만이 아니다. 성적 쾌감이 그렇고, 빨리 시드는 꽃이 그렇고, 우리의 삶 또한 그렇다. '황제' (emperor)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아이스크림 황제' (the emperor of ice-cream)는 형용모순(oxymoron)의 말이다. 황제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힘센 것인데 반해, 아이스크림은 부드러우며 금방 녹는, 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황제' 는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The emperor's new clothes)을 연상시킨다. 벌거벗은 모습이 '실제 모습' (be)인데, 자신이 좋은 옷을 입고 있다고 믿는 임금(emperor)의 '사실과 다른 모습' (seem)을 대비시킨 점과, 아이스크림을 닮은 신기루 같은 권력의 허상을 암시하는 점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이스크림은 행복한 삶과 같이 달콤하지만, 한편으론 죽음과 같이 차가우며, 인간의 삶이 유한하듯이 이내 녹아 없어진다. 우리는 죽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먹어야 하듯이,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보람있게 살 것을 이 시는 시사하고 있다. 삶과 죽음, 세상을 살아가는 지배적 원칙이 아이스크림에 구현되어 있다고 이 시는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이다.' 라고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소감> 예전보다는 시에 익숙해졌다고 착각을 했다. 그래서 '시'라고 별게 있겠어?, 어차피 나랑 같은 사람이 쓴 글인데 각자 알고 있는 만큼만 해석하면 되지 뭐하고 생각하다가 또 벽을 만났다.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이라니, 도대체 알 수 없다. 결국 이번에도 저자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내용을 읽고 나서야 이해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시를 읽은 직후, 나의 감상평이다. "이해할 수 없다. 전체적인 문맥과 아이스크림을 연관 짓기가 힘들다. 1연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인 것 같고, 2연은 죽음을 맞이한 어느 여성의 모습인 것 같은 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라니, 연결점을 찾기가 어렵다."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감상평이라기보다는 그저 느낀 것을 억지로 나열한 것 같다. 시는 소설과 달리 친절(가끔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지만) 하지 않은 것 같다. 시인의 감각적인 느낌에 따라 시가 만들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떤 시는 나에게 마음의 위안을 준다. 그런 마음에 드는 인생의 시를 내 몸 안에서 언제든지 꺼내 사용(암송 하거나 직접 쓰거나)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 해본다. 그럼 내안에 삶의 의미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무기를 하나 장착한 느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면서 여전히 시가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이런저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