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설날
나는 음력 설날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임신 막달의 무거운 몸이라 멀리 못 가고 집에서 윷놀이를 하고 놀았다고 했다. 저녁밥을 잘 먹고 밤늦게 낳은 아기가 나였다.
공교롭게 남편도 설날이 생일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몇 해의 차를 두고 태어나 생일이 같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잉꼬니, 원앙이니 갖다 부치며 의미를 부여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설날이 되면 평소에 받지 않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는 생일이라고 나에게 큰오빠만큼 많은 세뱃돈을 주었다. 차례 후에 먹는 떡국도 아버지가 드시는 그릇에 수북이 담아 주었다. 매년 오는 설날은 나만의 잔칫날이었다.
"살림 밑천인 우리 딸, 많이 먹어라."
나는 떡국을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내가 최고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부각시켜 준 그날만큼은 종일 우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혼하고 시댁에 가니 내 생일이란 건 원래 없었던 것 같았다. 대신 정초에 태어난 여자라고 재수 운운하는 소리를 해마다 들어야했다. 아버지는 여자인 내게 닥칠 일을 미리 아셨던 것일까, 설날 하루만이라도 평소에 없던 극진한 대우를 해 준 것이었다. 자식들에게 근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늦게 마나 깨닫게 되었다
설날은 더 이상 즐거운 명절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시댁에 가서 음식준비를 해야 했다. 일이 힘든 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딸로서는 맏이라 어머니의 일을 많이 거들며 자라서 기본적인 몇 가지 음식을 만들 줄 알았고 웬만하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었다.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에 들어야하는 시어머니의 모든 말은 대단한 소음이었다. 맡겨 놓으면 어련히 알아서 할 일도 일일이 간섭하여 스트레스를 유발시켰다.
차례를 지내러 오는 친척들의 상을 차려내고 치우는 일은 마치 황소 떼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손님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는 계속 이어졌다. 차례가 끝나면 시누이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차례 음식이외에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을 더 준비해야했다. 나 역시 어느 집의 시누이이기에 친정으로 가야 마땅한 이치이다. 본인들의 사정만 고집하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배려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당신도 예전에 당해 봐서 서러웠을 기억이 분명했다. 그것을 며느리에게 내림해야만 속이 풀리는 걸까. 시집살이라고는 겪어보지 못한 친정어머니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설날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게, 명절이 끝나면 이혼율도 높다잖아’
‘부부싸움이나 가족 간의 다툼이 더 많아 졌어.’
집안 동서들도 모이면 둘러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에는 집안들끼리 모여 안부도 나누고 즐기는 의미는 이해하지만 그 모든 뒷감당을 하는 여자들은 고역이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들도 서열에 따라 며느리의 대우가 달라지니 불만이 태산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집안 제사와 명절 차례를 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으로 살았다. 세계적으로 일어난 질병으로 친척간의 모임도 줄어들다가 이제는 아예 없어지는 추세가 되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히스테리가 심해 하루에도 하늘과 땅을 몇 번이나 뒤집어 엎어대어 주위의 자식들을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의 서슬은 노래진지 오래 됐고 왕래가 잦던 인척들은 전화로만 안부를 묻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던 세상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히스테리가 심해 하루에도 하늘과 땅을 몇 번이나 뒤집어 엎어대어 주위의 자식들을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의 서슬은 노래진지 오래 됐고 집안의 어른들은 벌써 십여 년 전에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거기에 찾아온 유행병이 사람들의 접촉을 끊게 해서 자연스럽게 명절 모임도 묘연해졌다.
나도 이제 서슬이 시퍼렇다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내가 겪은 말도 안되는 일을 대물림할 수는 없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행복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크기 때문에 새로 생긴 가족에게 대한 남다른 태도가 필요했다. 모든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내가 낳은 딸자식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 일이 있다는데 하물며 수십 년 간 다른 가정에서 자란 며느리에게 막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마음에 거친 말을 해대는 것은 가녀린 풀잎에 떨어지는 우박과도 같다. 상처투성이가 된 가슴에 남은 앙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며느리에게 되도록 싫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무조건 좋은 시어머니라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시부모의 일로 자식 부부의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애썼다.
나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며느리는 스스로 집안 대소사를 척척 해내었다. 한 번도 그 일을 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 며느리 역할을 해 보고 싶었는지 명절이면 혼자서 그 많은 음식재료를 사다가 차례음식을 만들었다. 그런 며느리의 진심어린 마음이 예뻤다. 며느리는 설날이 생일인 나와 남편에게 양력으로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서툰 솜씨로 미역국도 끓이고 정성어린 선물로 우리 내외를 기쁘게 했다.
설날이 생일이라고 특별대우를 받던 그 옛날 해맑던 소녀는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차례상 준비로 재래시장을 쏘다녀야 할 시간에 외국으로 가는 기내에서 영화 감상을 하고 이국의 강에서 가족들과 유람선을 즐겼다. 스파게티와 구운 꼬치를 놓고 맥주도 마셨다. 낯선 나라의 거리에서 쇼핑도 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영상으로 세배를 하고 계좌로 세뱃돈을 부쳐주는 시절의 변화가 뚜렷해졌다. 인천공항에는 설 연휴를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상님을 기리고 잊지 않으려는 미풍속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 먼저 행복한 명절이면 얼마나 좋을까, 꿈에나 그리던 일이 현실이 되는 과정이 피부로 느껴진다. 유교문화를 전해 준 나라에서도 없는 잘못된 관습을 없애는 시국이다. 우리의 설날만큼은 모두가 웃는 그런 날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갑내기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민우는 그의 엄마를 따라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어느 날이었다. 늦게까지 놀던 민우가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 바깥은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혼자가기 무섭다고 나보고 데려다 달라고 했다. 집에는 엄마도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았고 오빠들도 나가 있어서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겁이 많던 내가 민우의 손을 잡고 걸어 갔다.
민우네 집에 다다르니 민우 엄마도 안 계시고 비어 있었다. 사방은 이미 까마귀가 내려앉은 것처럼 깜깜해졌다. 그나마 희미한 그믐달이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집에 가지?”
민우가 나를 다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눈곱만한 달빛을 의지해 우리들의 그림자에도 놀라며 걸었다. 가던 길에 나를 찾으러 나온 엄마를 만났다.'얘들이 밤새 이러고 다녔네.' 놀란 엄마가 민우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서야 우리들의 왕복놀이는 끝이났다.
엄마는 민우 엄마에게 아이들이 밤늦게 서로 데려다 주던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날의 일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너희들은 커서 결혼 해야겠다.’ 라고 놀려댔다. 나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민우와 만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먼발치에서 민우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5학년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여느 날처럼 수업을 마치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가 나를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네 남자 친구가 왔어. 너를 만나러 왔대.”
남자 친구라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민우가 왔구나!’ 친구들이 놀리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갔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남학생 교실과 여학생 교실과의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짓궂은 남학생들로부터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했던 것 같다. 민우도 멀리 떨어진 여학생 교실까지 오는 게 어려웠을 게 분명했다. 현관 앞에는 어린 티를 벗은 소년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울 엄마가 이사 간 너의 집을 알아 오래.”
민우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가방을 챙겨서 나온 나는 민우에게 집을 알려 주기 위해 걸어 갔다. 못 본 새에 머리가 굵어진 우리는 아무 말 없었다. 평소에는 금방이던 길이 이렇게 멀었는지 미처 몰랐다.
‘뭐라고 말이나 좀 하지, 샌님 같으니라고’
한 번씩 뒤돌아보면 민우는 머리를 숙이고 땅만 보며 따라 오고 있었다. 전화기도 휴대전화도 없어서 모든 것이 많이 불편했던 시절이었다.
매년 설날이 다가오면 민우는 동네를 다니며 복조리를 돌렸다. 우리 집에 돌린 복조리 값은 설날 아침에 아빠에게 세배를 하고 용돈을 두둑이 받아갔다. 오빠들과도 친해서 민우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 잊지도 않고 모두들 ‘민우가 널 보러 왔나보다’ 하고 놀렸다. 그래도 민우는 오빠들과 잘 놀았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대문 밖에 민우가 왔다. 부모님도 외출하고 오빠들도 나가서 없는 집에서 어쩔 몰라 하던 나는 다락방에 숨어서 없는 척 했다. 민우는 계속 ‘형!’을 불렀다. 한참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돌아갔다. 그 멀리서 걸어와 허탕치고 돌아가는 민우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했나 싶었다.
민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직장을 가지게 되었고, 나는 결혼해서 지방에 살게 되어 서로의 일에 몰두하느라 만날 겨를이 없었다. 가끔 들리는 소문으로 안부를 짐작하는 나날이 수십 년이었다. 언제인가 동창회에 나가면서 감감무소식이던 민우를 보게 되었다. 민우와 대부분 친구들은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중견의 위치에 있었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모본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얼굴로 민우가 나에게 뜬금없는 말을 했다.
“넌 어렸을 때 웬 힘이 그렇게 셌냐?, 너에게 맞은 데가 지금도 아프다!”
나름 조신하다고 여기고 있던 내가 민우를 사정없이 팼다니, 생각해보니 오빠들 틈에 끼여 자라면서 왈가닥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내 손이 그렇게 매웠다고 하는 민우의 눈빛에 원망이 서려있다. '다 큰 어른이 쪼잔하게 그런 걸 마음에 넣고 살았다니, 나에게 대한 기억토막이 고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주위에서 티격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동창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둘이 소꿉친구였냐, 어릴 때 추억이 많았겠구나’, 하는 소리들이 귓잔등으로 들렸다. 오래 잊었던 둘만의 트라우마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민우와 나는 뭐라 할 건덕지가 없었다. 옛일을 풀자면 누구에게나 요만한 사건 하나쯤은 있음직 하리라. 사방으로 흩어져 연락이 어려웠던 친구들의 모임이기에 우리들은 지나간 옛 그림자를 잡는 심정으로 소주잔을 부딪쳤다.
유년 시절에 유일한 소꿉친구였던 민우를 잊을 수가 없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우리 사이를 놀려대서 더 서먹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어릴 적의 소꿉 친구이다. 부모님들과의 인연으로 긴 세월동안 살아 왔기에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몇 소쿠리가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거의 다 잊혀진 조각 같은 기억들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소중하다.
머리통이 호박처럼 커졌어도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하는 일곱 살짜리 그 시절로 돌아가는 우리들이다. 살아가면서 가끔 생각날 때 씨익~ 웃으며 만날 수 있는 둘도 없는 짝꿍이기도 하다.
프로필
2023년 샘터 5월 어린이호 기고
2023년 전국주부수필 달서책사랑 입상
첫댓글 젊은 날의 추억들! 수필 소재로 가장 알맞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 설정했습니다.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