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오례 / 길례 서례
신위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神位
五禮 / 吉禮序例 / 神位
◎ 신위(神位)
사직단은 대사(大社)를 제사하되 후토씨(后土氏)로써 배향(配享)하고, 대직(大稷)을 제사하되 후직씨(后稷氏)로써 배향한다. 【사(社)는 토신(土神)이요, 직(稷)은 곡신(穀神)이다.】 대사는 단(壇) 위의 남방(南方)에 동쪽 가까이 북쪽을 향하여 있는데, 후토씨는 대사 신위(神位)의 왼쪽에 북쪽 가까이 동향(東向)하여 있고, 대직은 단 위의 남방에 동쪽 가까이 북향하여 있는데, 후직씨는 대직 신위의 왼쪽에 북쪽 가까이 동향하여 있다. 자리[席]는 모두 왕골자리[莞席]로 한다.
종묘의 협사(祫祀) 제향은 영좌(靈座)를 지게문 밖[戶外]에 설치하되,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한다. 목조(穆祖)ㆍ도조(度祖)ㆍ태조(太祖)는 모두 남쪽을 향하게 하고, 익조(翼祖)와 환조(桓祖)는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한다. 매 영좌(靈座)마다 의석(扆席)과 포연회준(蒲筵繢純)을 설치하고 완석분준(莞席紛純)을 덧펴고, 오른쪽은 조궤(彫几)를 설치한다. 【분(紛)은 수(綬)와 같은 것인데, 문채가 있고 좁은 것이다.】
사시(四時)ㆍ세시(歲時)ㆍ삭망(朔望)과 기고(祈告)ㆍ보사(報祀)에는 모두 실내(室內)에서 남쪽을 향하게 하고, 매 실(室)마다 자리를 펴고 안석[几]을 설치한다. 칠사(七祀)는 봄에 사명(司命)과 호(戶)에 제사지내고, 여름에 조(竈)에 제사지내고, 가을에 문(門)과 여(厲)에 제사지내고, 겨울에 행(行)에 제사지내고, 계하(季夏)의 토왕일(土旺日)에는 별도로 중류에 제사지낸다. 협사의 제향과 납일(臘日)의 제향에는 두루 제사지내는데, 신위를 묘정(廟庭)의 서쪽에 동향(東向)하여 설치하고, 북쪽을 상(上)으로 하며, 자리[席]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속주(續註)에 “사명(司命)은 궁중(宮中)의 소신문(小神門)이요, 호는 출입(出入)을 주관한 것이요, 행은 도로의 행작(行作)을 주관한 것이요, 여(厲)는 공려(公厲)를 이름[謂]이니, 옛날 제후(諸侯)들의 무후(無後)한 사람이요, 조(竈)는 음식(飮食)의 일을 주관한 것이요, 중류는 당실(堂室)의 거처(居處)를 주관한 것이라.” 하였다.】
배향 공신(配享功臣)은 신위(神位)를 묘정의 동쪽에 설치하되, 세대(世代)마다 각각 한 줄로 하고, 서향(西向)하게 하고 북쪽을 상(上)으로 하며, 자리[席]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대리 행사(代理行事)를 하면, 다만 협사(祫祀)의 제향(祭享)과 동지(冬至)의 제향에만 제사하게 한다.】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풍운뢰우는 단(壇) 위 북방에 있게 하되 남쪽을 향하게 하며, 산천(山川)은 왼쪽에, 성황(城隍)은 오른쪽에 있게 하되,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영성단(齡星壇)은 신위(神位)를 단 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자리는 왕골자리로 한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영성(靈星)은 용좌각(龍左角)이 천전성(天田星)이 된 것이니, 곡식을 주관한다.”고 하였다.】
악ㆍ해ㆍ독(嶽海瀆)은 각각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며, 【다만 삼각산(三角山)과 백악(白嶽)만은 붙여 동쪽에 있게 하고, 서쪽을 향하게 한다.】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만약 절후가 가물어서 북교(北郊)에서 망기제(望祈祭)를 지낼 때에는 악ㆍ해ㆍ독과 여러 산천(山川)의 신위를 각각 그 방위(方位)에 설치하되 모두 안쪽을 향하게 하고,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동방(東方)은 동해(東海)와 여러 산천으로 하고, 남방(南方)은 지리산(智異山)ㆍ남해(南海)ㆍ웅진(熊津)ㆍ가야진(伽倻津)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중앙(中央)은 삼각산(三角山)ㆍ한강(漢江)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서방(西方)은 송악(松嶽)ㆍ서해(西海)ㆍ덕진(德津)ㆍ평양강(平壤江)ㆍ압록강(鴨綠江)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북방(北方)은 비백산(鼻白山)과 여러 산천으로 한다.】
명산 대천(名山大川)은 각각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며,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영제(榮祭)는 신위(神位)를 국문(國門)에 설치하되 모두 안쪽을 향하게 하고,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주례(周禮)》의 춘관(春官) 영문(禜門)의 정씨(鄭氏)의 주(註)에는 “일월(日月)ㆍ성신(星辰)의 신은 설상(雪霜)과 풍우(風雨)가 제때에 있지 않으니, 이에 영제를 지내고, 산천의 신은 수한(水旱)과 역려(疫厲)를 맡았으니, 이에 영제를 지낸다. 노(魯)나라 장공(莊公) 25년 가을에 큰물이 지니, 북을 치면서 생(牲)을 문에 썼다.”고 하였다.】
선농단(先農壇)은 제신농씨(帝神農氏)를 제향(祭享)하고, 후직씨(后稷氏)를 배향(配享)하는데, 신농씨는 단 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있고, 후직씨는 단 위의 동방에 서쪽을 향하여 있게 하고,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선잠단(先蠶壇)은 선잠(先蠶)의 서릉씨(西陵氏)를 제향하는데, 【진씨(陳氏)의 《예서주(禮書註)》에 “《사기(史記)》에 말하기를, ‘황제(黃帝)가 서릉씨에게 장가갔는데, 서릉씨가 처음으로 누에를 쳤다.’고 한다.” 하였다.】 신위(神位)를 단 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자리는 왕골자리로 한다.
우사단(雩祀壇)은 구망(句芒)ㆍ축융(祝融)ㆍ후토(后土)ㆍ욕수(蓐收)ㆍ현명(玄冥)ㆍ후직(后稷)을 제향하는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천자(天子)는 상제(上帝)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제후(諸侯)는 상공(上公)에게 기우제를 지내니, 월령의 상공은 구룡(句龍)과 후직과 같은 유이다.”고 하였으며,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소호씨(少皞氏)의 아들에 사숙(四叔)이 있으니, 중(重)과 해(該)와 수(脩)와 희(熙)이다. 중이 구망이 되고, 해가 욕수가 되고, 수와 희가 현명이 되었으며, 전욱씨(顓頊氏)의 아들 여(黎)가 축융(祝融)이 되고,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句龍)이 후토(后土)가 되니, 이 다섯 사람은 살아서는 상공(上公)이 되고, 죽어서는 귀신(貴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위를 단 위의 북방에 설치하되 모두 남쪽을 향하게 하고, 서쪽을 상으로 하며,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석전(釋奠)은
대성 지성 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한다.】
연국 복성공(兗國復聖公)ㆍ성국 종성공(郕國宗聖公)ㆍ기국 술성공(沂國述聖公)ㆍ추국 아성공(鄒國亞聖公)【정위(正位)의 동남쪽에 있어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만약 전(殿)이 협착하면 종성공과 아성공은 정위(正位)의 서남쪽에 있어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비공(費公) 【민손(閔損), 제1위(位).】 閔子騫
설공(薛公) 【염옹(冉雍), 제3위.】 仲弓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제5위.】 子貢
위공(衛公) 【중유(仲由), 제7위.】 季路
위공(魏公) 【복상(卜商), 제9위. 子夏
전내(殿內)의 동벽(東壁)에 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운공(鄆公) 【염경(冉耕), 제2위.】 冉伯牛
제공(齊公) 【재여(宰予), 제4위.】 宰我
서공(徐公) 【염구(冉求) 제6위.】 冉有
오공(吳公) 【언언(言偃) 제8위.】 子游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제10위. 子張
전내의 서벽(西壁)에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십철(十哲) : 뛰어난 열 사람. 여기서는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이들. 곧 공문 십철(孔門十哲)을 뜻하는 것으로,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따르면 공자가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자(字)는 자연(子淵)임). 민손(閔損 자는 자건(子騫)임)ㆍ염경(冉耕 자는 백우(伯牛)임)ㆍ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임)을, 언어(言語)로는 재여(宰予 자는 자아(子我)임)ㆍ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임)를, 정사(政事)로는 염구(冉求 자는 자유(子有)임)ㆍ복상(卜商 자는 자하(子夏)임)을 꼽았다. 그러나 조선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에는 안회가 사성(四聖 안회ㆍ증삼(曾參)ㆍ공급(孔伋)ㆍ맹가(孟軻)임)에 들고 십철의 마지막에 전손사(顓孫師 자는 자장(子張)임)가 들어 배향(配享)되었다. |
금향후(金鄕侯) 【담대 멸명(澹臺滅明), 동랑(東廊)의 1위.】 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 동랑의 2위.】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동랑의 3위.】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동랑의 4위.】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동랑의 5위.】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彫開), 동랑의 6위.】 수양후(睢陽侯) 【사마경(司馬耕), 동랑의 7위.】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동랑의 8위.】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동랑의 9위.】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동랑의 10위.】 상채후(上蔡侯) 【조구동(曹邱東), 동랑의 11위.】 지강후(枝江侯) 【공손용(公孫龍), 동랑의 12위.】 풍익후(馮翊侯) 【채상(蔡商), 동랑의 13위.】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동랑의 14위.】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동랑의 15위.】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동랑의 16위.】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 동랑의 17위.】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동랑의 18위.】 제양후(濟陽侯) 【해용잠(奚容箴), 동랑의 19위.】 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 동랑의 20위.】 감양후(淦陽侯) 【구정강(句井彊), 동랑의 21위.】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동랑의 22위.】 즉묵후(卽墨侯) 【공조 구자(公祖句玆), 동랑의 23위.】 무성후(武城侯) 【현성(縣成), 동랑의 24위.】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동랑의 25위.】 완구후(宛丘侯) 【안지복(顔之僕), 동랑의 26위.】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동랑의 27위.】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동랑의 28위.】 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 동랑의 29위.】 운성후(鄆城侯) 【공충(孔忠), 동랑의 30위.】 서성후(徐城侯) 【공서잠(公西箴), 동랑의 31위.】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동랑의 32위.】 화정후(華亭侯) 【진천(秦川), 동랑의 33위.】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동랑의 34위.】 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 동랑의 35위.】 사수후(泗水侯) 【공이(孔鯉), 동랑의 36위.】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동랑의 37위.】 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동랑의 38위.】 내무백(萊蕪伯) 【고당생(高堂生), 동랑의 39위.】 낙수백(樂壽伯) 【모장(毛萇), 동랑의 40위.】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동랑의 41위.】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동랑의 42위.】 구씨백(緱氏伯) 【두자춘(杜子春), 동랑의 43위.】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동랑의 44위.】 형양백(滎陽伯) 【복건(服虔), 동랑의 45위.】 사공(司空) 【왕숙(王肅), 동랑의 46위.】 사도(司徒) 【두예(杜預), 동랑의 47위.】 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 동랑의 48위.】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동랑의 49위.】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 동랑의 50위.】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 동랑의 51위.】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동랑의 52위.】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동랑의 53위.
동랑(東廊)에 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선보후(單父侯) 【복불제(宓不齊), 서랑(西郞)의 1위.】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서랑의 2위.】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서랑의 3위.】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繇), 서랑의 4위.】 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서랑의 5위.】 수장후(壽長侯) 【공백요(公伯寮), 서랑의 6위.】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서랑의 7위.】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서랑의 8위.】 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 서랑의 9위.】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서랑의 10위.】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서랑의 11위.】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서랑의 12위.】 복양후(濮陽侯) 【칠조차(漆彫哆), 서랑의 13위.】 고원후(高苑侯) 【칠조도(漆彫徒), 서랑의 14위.】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서랑의 15위.】 당양후(當陽侯) 【임불제(任不齊), 서랑의 16위.】 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 서랑의 17위.】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서랑의 18위.】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서랑의 19위.】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서랑의 20위.】 기향후(祈鄕侯) 【한보묵(罕父墨), 서랑의 21위.】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서랑의 22위.】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서랑의 23위.】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서랑의 24위.】 구산후(胊山侯) 【정국(鄭國), 서랑의 25위.】 낙평후(樂平侯) 【원원(原元), 서랑의 26위.】 조성후(胙城侯) 【염결(廉潔), 서랑의 27위.】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서랑의 28위.】 고당후(高當侯) 【규손(邽巽), 서랑의 29위.】 임구후(臨胊侯) 【공서여여(公西輿如), 서랑의 30위.】 내황후(內黃侯) 【거백옥(蘧伯玉), 서랑의 31위.】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서랑의 32위.】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서랑의 33위.】 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 서랑의 34위.】 박창후(博昌侯) 【보숙승(步叔乘), 서랑의 35위.】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서랑의 36위.】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서랑의 37위.】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서랑의 38위.】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서랑의 39위.】 강도상(江都相) 【동중서(董仲舒), 서랑의 40위.】 곡부백(曲阜伯) 【공안국(孔安國), 서랑의 41위.】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서랑의 42위.】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서랑의 43위.】 고밀백(高密伯) 【정강성(鄭康成), 서랑의 44위.】 임성백(任成伯) 【하휴(何休), 서랑의 45위.】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서랑의 46위.】 신야백(新野伯) 【범영(范寗), 서랑의 47위.】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 서랑의 48위.】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서랑의 49위.】
미백(郿伯) 【장재(張載), 서랑의 50위.】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서랑의 51위.】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서랑의 52위.
서랑(西廊)에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서랑에 있는데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하고, 서쪽을 상으로 한다.】
단군(檀君)은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위서(魏書)》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제(堯帝)와 같은 시기이다.” 하였다.】 기자(箕子)는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고려 시조(高麗始祖)는 신위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현왕(顯王)ㆍ공민왕(恭愍王) 【동쪽에 있어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사한(司寒)ㆍ현명(玄冥)의 신은 빙실(氷室)에서 제향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소호(少皞)가 사숙(四叔)이 있으니, 그 둘째가 현명이 되었다.”고 하며, 두예(杜預)는, “현명(玄冥)이 관직이 되었으므로 역대(歷代)에서 이를 제사하여 사한(司寒)이라 한다.”고 하였다.】
마조(馬祖)ㆍ선목(先牧)ㆍ마사(馬社)ㆍ마보(馬步)는 각각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단(壇) 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있게 하고,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주례(周禮)》의 동악증의(東嶽證義)에 “마조(馬祖)는 천사 방성(天駟房星)이요, 선목(先牧)은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방목(放牧)함을 가르친 사람이요, 마사는 구중(廐中)의 토신이요, 마보(馬步)는 그 신이 재앙이 되어 말[馬]을 해치는 것이다.”고 하였다.】
【원전】 5 집 176 면
[주-D001] 의석(扆席) : 도끼 모양을 수놓은 병풍.[주-D002] 포연회준(蒲筵繢純) : 무늬로 선을 두른 부들자리.[주-D003] 완석분준(莞席紛純) : 수(綬)로 선을 두른 왕골자리.[주-D004] 국문(國門) : 도성문(都城門).[주-D005] 정씨(鄭氏) : 정현(鄭玄).[주-D006] 대성 지성 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 공자(孔子).[주-D007] 연국 복성공(兗國復聖公) : 안자(顔子).[주-D008] 성국 종성공(郕國宗聖公) : 증자(曾子).[주-D009] 기국 술성공(沂國述聖公) : 자사(子思).[주-D010] 추국 아성공(鄒國亞聖公) : 맹자(孟子).[주-D011] 현왕(顯王) : 현종(顯宗).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권오돈 이재호 (공역) |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