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박해 乙亥迫害
1815년(순조 15)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중의 하나, 1810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와 같이 정치나 사회 윤리 등 복합적인 배경과 원인 아래에서 일어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법령화되어있던 박해령과 이를 이용하여 탐욕을 취하려고 한 밀고자의 사욕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 박해도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박해 기간도 아주 짧았으나 체포된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옥중 생활은 오히려 길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와 이후의 신유박해를 겪는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인해 교우촌(敎友村)이라는 비밀 신앙 공동체가 각처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상도 북부 지역은 일찍이 신앙의 발자취가 닿지 않던 곳이었던 탓에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2월 22일경 이 지역의 신자들이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모이는 기회를 틈타 전지수라는 밀고자가 포졸들을 앞세우고 교우촌을 습격하였다.
을해박해의 발단은 이처럼 단순하였는데. 그는 본래 교우촌을 돌아다니면서 신자들의 애긍으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습격을 받은 곳은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즉시 석방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으며, 그중 14명만이 신앙을 증거한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어 포졸들은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 영양의 곧은 정과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여 안동 진영으로 압송하였는데. 그 가운데 훗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신자는 19명이었다.
다시 말해 청송 • 진보 • 영양 등지에서 체포된 71명 중에서 36명은 석방되거나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 사망하고, 2명은 병 때문에 경주와 안동의 옥에 남았으며, 33명만이 신앙을 증거하고 대구로 압송된 것이다.
당시의 경상 감사 이존수(〒存秀)는 노론 인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경상도 천주교의 뿌리를 뽑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문초와 투옥을 반복해 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고, 신앙을 굳게 지키는 신자들에게는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리면서 병이나 형별로 인해 옥사하는 신자들이 발생하였으며. 끝내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등지는 이들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순교를 선택하였다. 이 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나 형벌로 인해 옥사한 것이 분명한 순교자는 서석봉(徐碩奉,안드레아) 사위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 김시우(余時佑,알렉시오). 김홍금<金奠金)과 아들 김장복(金長福),안치룡(安致龍) 등 7명이다. 그리고 김화준(야고보)을 비롯하여 고성대(高聖大. 베드로)와 고성운(髙聖云, 요셉) 형제. 서석봉의 아내 구성열(具性悅,바르바라),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이시임(〒時壬, 안나). 김희성(金稀成. 프란체스코〉등 7명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1일) 대구 형 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대구 순교자들 대부분은 충청도 홍주, 청양, 덕산, 면천, 예산 등 일찍이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던 내포
(內浦) 교회 출신들이었다. 다만, 김윤덕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뒤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체포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을 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교우촌 형성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은 대구 옥중에서 보낸 서한 3통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통해 대구의 신자들이 받았던 고통과 용덕, 그리고 순교원인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이 박해 때 강원도 원주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충청도 서산 출신인 김강이(金綱伊, 시몬)였다. 본래 그는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박해가 계속되자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진보 머루산 교우촌을 거쳐 경북 울진에 가서 살다가 1815년에 체포되었다.
그런 다음 안동 진영에서 한차례 문초를 받고 원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가 하고 11월 5일에 옥사하였다. 대구에서 참수된 순교자 7명의 시신은 이후 감사의 명에 따라 형장 인근에 묻혔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친척과 신자들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는데, 지금은 그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80년대 이후 을 해박해 때 옥사하거나 참수를 당한 14명 순교자의 행적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그 현양 운동을 전개해 왔고, 이들 중에서 비교적 행적이 분명한 10명의 순교자를 다시 선정하여 시복 시성 운동을 추진해 오고 있다. 또 원주교구에서도 김강이의 순교 행적을 조사하여 시복 시성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 ( 대구대교구)
자료: 가톨릭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