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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봉황대에 부는 바람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여 봉기한 이래, 김천에서는 1894년 9월 25일부터 동학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조마면 신안 장암, 구성면 기동 공자동, 봉산면 봉계, 어모면 참나무골에서 거병한 동학군은 선산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지례 증산 방면으로 숨어들었고, 호남의 동학군들이 영동을 거쳐 김산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12월부터 대구에서 출병한 진압군들이 이 김산에 집결하여 호남에서 넘어온다는 동학군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당시 연화지 앞 들판 풍경을 김천 조마면 신암동에 거주하던 최봉길(최鳳吉,1853~1907)은 <세장년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94년 12월
본읍 김산군 봉계 조승지(曺承旨)[시영(始永)], 상주(尙州) 우산(愚山) 정승지(鄭承旨)[의묵(宜默)]가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통솔하여 바야흐로 의병을 창도하였다. 이 기별을 듣고 조소모(曹召募)가 본읍의 군정(軍丁)을 일으켜 요충지를 지키고 각 읍의 군대를 일으켰다. 대구 군사 3백인이 용금문(湧金門) 밖에 유진(留陣)하고, 성주 군사 1백 2십인이 천포(泉浦) 들판에서 유진하고, 선산(善山) 병졸과 개령(開寧) 군사 10명이 황간(黃澗) 창촌(倉村)에서 유진하고, 상주 군사 80명이 추풍방현(秋風防峴)에서 유진하여 칼과 창이 삼엄하니, 위세가 가을 서리와 같았다. 그리고 지공(支供)은 모두 스스로 마련하였다.
해가 바뀌어 1895년이 되었다. 그전 해의 청일전쟁 승리와 동학농민군 진압에 성공한 일본은 급기야 8월에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에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된다.
김천에서도 12월부터 여중룡(呂中龍)과 여영소(呂永韶)가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다음해 1월 16일 상주, 선산 등에서 들어온 의병들과 합세하여 창의한 김산의진(金山義陣)은 김천역으로 진을 옮겼다.
1896년 6월 새로운 김산 군수 윤헌섭(尹憲燮)이 부임한다. 윤헌섭이 혼란기의 김산에서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의 부재로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김산군지에 남아있는 부임 기록과, 봉황대에 남아있는 판상글과 직지사 산문 입구에 서있는 군수윤후염 영세불망비(郡守尹候琰永歲不忘碑)에 남아 있는 기록이 단편을 전한다.
1896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산군수 윤헌섭(尹憲燮)의 글판
김천향토사연구회에서 간행한 <김천 누정의 편액>에 실린 윤헌섭(尹憲燮)의 글과 박삼현(朴三鉉)의 봉황대중수기(鳳凰臺重修記)을 바탕으로 하여 저자가 다시 정리해 보았다.
먼저 윤헌섭(尹憲燮)의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郡是金陵 臺有鳳凰 臺之於郡 最是勝概. 若使此營 一至替零, 此郡風物 無復可觀, 此郡此臺 不忍荒廢. 來知兹土 經霜踰雪 春盡夏啓 未暇修葺. 將欲賦歸 乃求衆工 改其欄檻 重其丹雘 仍構短律 揭諸楣 茲供一喉
금릉군에 봉황대가 있으니, 대는 군에서 가장 좋은 경치이다. 만약 이 만든 것이 보잘 것 없게 되면, 이 고을의 풍물은 볼만한 것이 다시 없게 되기에, 이 고을에서 이 대가 황폐해 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이 땅에 지군으로 와서 가을이 지나고 눈을 밟았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도 수리할 겨를이 없었다. 장차 돌아갈 구실에 여러 장인을 구해서, 난함(欄檻)을 고치고 단확(丹雘,단청)을 거듭하였다. 이에 짧은 시를 지어 여러 처마에 걸어 한 곡조 올리노라.
鳳去千年來此遊(봉거천년래차유) 천 년 전에 봉황 가고 이곳에 와서 노닐며
朝陽門外永空謀(조양문외영공모) 조양문 밖에서 공연히 생각하니
勝槩如今渾似夢(승개여금혼사몽) 좋은 경치 지금도 꿈결 같고
騷人往跡已成邱(소인왕적이성구) 시인의 지난 자취 이미 언덕 이루었네.
荷香露浥三更月(하향로읍삼경월) 연향은 삼경 달빛속 이슬에 젖고
草色煙籠十里洲(초색홍농십리주) 풀빛은 십리 모래섬 안개에 담겨있네.
借問池臺誰是主(차문지대수시주) 묻노니 지와 대의 주인이 누구이던가.
一山松桂不堪愁(일산송계불감수) 산속 송계(松桂)가 시름을 견디지 못하네.
건양(建陽)2년 丁酉(1896년) 4월 욕불일(浴佛日)에
지군(知郡) 윤헌섭(尹憲燮) 지음
윤헌섭(尹憲燮)은 본관이 파평으로 1756.6.25.부임하여 1759.1.15.까지 김산군수로 재직하면서 혁혁한 치적을 남겼던 윤염(尹琰,1709~1771)의 5대 孫이다.
한성사범학교교관을 거쳐 1896년 6월 김산군수에 임명되어 1898년 2월 16일 옥구군수로 전보되었다. 봉황대에 남아 있는 글판은 김산군수 재임시기인 정유년(1897) 부처님오신날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윤헌섭은 북청군수 및 고종의 시종관을 역임하며, 1899년에는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한다. 을사보호조약(1905년) 후인 1906년 정3품 비서감승으로 임명되었다.
대한자강회월보 제2호(1906년 8월 25일 발행)에 수록된 회원명부에도 이름이 보이며, 1913년 설립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관계자 명단에는 ‘서울 서부 거주. 고종의 시종. 동경을 시찰한 바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추측할 수 있다.
다음은 1897년 박삼현(朴三鉉) 지은 봉황대중수기(鳳凰臺重修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7년 박삼현(朴三鉉) 撰 봉황대중수기(鳳凰臺重修記)
박삼현(朴三鉉)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어 소개를 생략하고, 중수기 글을 정리하여 옮겨본다.
鳳凰臺重修記
作 1897년 박삼현(朴三鉉)
夫金陵之有鳳凰臺者 盖做中國江南之勝狀 而前人之述已備矣 更不贅言. 而余觀 夫金陵勝狀在鳳凰之臺 臺之勝狀 在其下之池. 池上臺 臺下池 池不可無臺 臺不可無池
대저 금릉에 있는 봉황대는 대개 중국 강남의 좋은 모습이 되어, 앞 사람들의 기록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 다시 덧붙일 말이 없다. 내가 볼 때 대체로 금릉의 아름다운 모습은 봉황대에 있고, 봉황대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아래 연못에 있다. 연못 위에 대(臺)가 있고, 대(樓) 아래는 연못이 있으니, 연못은 대(臺)없이 불가능 하고, 대(臺)는 연못 없이 불가능하다.
池之周迴 可八九百步 而水之淳滀洋洋 望之若江湖焉. 中有三峯定立而一左一右在治之前者 低而坦可羅胡床五六七. 下種玉井之蓮 而冷雪甘蜜之根株 已連羅葉 玉朶之的歷可愛 吾未知神龜太乙之其遁也否耶.
연못의 둘레는 8~9백 보(步)로 물이 모이면 넘실넘실 바라보면 강호(江湖)와 같았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삼봉(三峯)은 위치를 잡고서, 치소의 앞에서 하나는 좌측에, 하나는 우측에 있는데, 낮고 평탄하며 호상(胡淋) 5~7개를 펼쳐놓을 수 있었다. 연못 아래에는 옥정(玉井)의 연꽃을 심었는데, 찬 눈과 같고 단 꿀과 같은 뿌리 줄기가 이미 펼쳐진 잎사귀에 이어져, 옥줄기가 선명하여 사랑스러웠다. 신귀(神龜)와 태을(太乙)이 거기에 숨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옥정지련(玉井之蓮) : 산 위의 못에 핀 연꽃을 말한다. 한유의 시 〈고의(古意)〉에 “태화봉 꼭대기 옥정의 연은, 꽃 피면 직경이 열 길 잎은 배 같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는 표현이 보인다. 《韓昌黎集 卷3》 *냉설감밀(冷雪甘蜜) : 한유(韓愈)가 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 있다는 연꽃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연근(蓮根)을 표현한 구절 중에 “차기는 눈과 서리 같고 달기는 꿀과 같다 할까, 한 조각만 입에 넣어도 고질병이 낫는다네.[冷比雪霜甘比蜜 一片入口沈痾痊]”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3 古意》 *신귀(神龜)) :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령한 거북으로 마흔 다섯 점의 글씨인 낙서(洛書)가 새겨져 있었다고 함. 《서경(書經)》의 홍범 구주(洪範九疇)는 이 낙서에 의하여 만든 것이라 하며, 팔괘(八卦)의 법도 여기에서 나왔다 함. *태을(太乙) : 장량(張良)의 《적정경(赤霆經)》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미래를 점치는 술법의 일종이다. 기문(奇門), 육임(六壬)과 함께 삼식(三式)으로 꼽히며, 도가의 대표적인 술법이다. 《星湖僿說 卷1 天地門 太乙術》
三尺銀鱗 自以位江湖之大 而泳者遊者 喁喁而集者 洋洋而逝者 其倏倏之遊 殆不可數 吾未知濠上觀魚之樂其樂者 其誰也
3척의 은빛 물고기는 스스로 큰 호수를 차지하여, 헤엄치고 노닐고, 옹옹거리며 모이고, 양양하게 떠있고, 홀연히 노니는 것을 거의 헤아릴 수 없었다. 해자 위에서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을 즐기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옹옹(喁喁) : 고기가 입을 쳐들고 오물거리는 모양
晝則日光下徹 鏡影浮動於臺上, 夜則列星下布 河圖羅列於臺前. 形形色色 其氣其韻 擧凞凞然迴巧獻伎 以效池臺者也
낮이면 햇빛이 아래를 비추어 물에 비친 그림자가 누대 위에서 떠서 움직이고, 밤이면 뭇별들이 아래에 퍼져 하도(河圖)가 대 앞에서 나열하였다. 형형색색의 그 기(氣)와 운(韻)이 모두 밝은 빛으로 에워싸고 재주를 보여 주며 연못과 대(臺)에 공을 바쳤다.
*회교헌기(回巧獻伎) : 기교를 부려 에워싸고 재주를 보여 준다는 뜻으로, 주위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고무담서소구기(鈷鉧潭西小邱記)〉에 “그 안에서 바라다보면, 산이 높이 솟고 구름이 떠 있고 시내가 흐르고 새와 짐승들이 한가히 노닌다. 이들 모두가 즐겁고 기쁜 낯빛으로 기교를 부려 에워싸고 재주를 보여 주며 이 언덕 아래에 공을 바친다.〔由其中以望 則山之高 雲之浮 溪之流 鳥獸之遨遊 擧熙熙然回巧獻技 以效玆丘之下〕”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회교(回巧)는 산이 둘러싸고 구름과 시내가 휘감은 것을 말하고, 헌기(獻伎)는 각종 조수(鳥獸)들이 제각기 장기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外之高原林麓 長堤柳陰之縈紆間厠隱顯, 邇延野綠 遠混天碧 咸會於譙門之下. 林焉而臥則 物色之勝狀 目與之遊 水面之淸聲 具與之遊. 悠然而清虛者 神與之遊, 惻然而閑寂者 心與之遊 及其鎮波淵淵. 管絃秩和則有若驂鸞鳳者 奏簫笙於十洲三山之間. 耳然來者閑廢之而不能修毁理渝 則黃樓岳陽之勝狀 烏可流芳於後人之眼目哉.
바깥은 높은 언덕의 숲과 긴 제방의 버들 그늘의 구불구불한 사이로 숨기고 드러내니, 가까이 초록 들판이 이어지고, 멀리 푸른 하늘이 섞여 초문(譙門) 아래에 함께 모였다.
숲속에 누우면 물색(物色)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과 함께 놀고, 수면(水面)의 맑은 소리와 더불어 노닐었다. 여유롭고 청허(淸虛)한 것은 정신과 함께 놀고, 슬프고 한적한 것은 마음과 함께 노닐면서, 그 진(鎭)에 미치면 물결이 깊고 깊었다. 피리와 거문고를 차례로 연주하면, 마치 난새와 봉새를 타고 십주(十洲)와 삼산(三山) 사이에서 피리를 연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오는 세월에 막히고 폐하여 허물어지는 것을 수리하지 못한 이치가 스며들어, 악양의 황학루(黃鶴樓)의 좋은 곳이 어찌 아름다운 이름으로 후세 사람들의 안목에 전해지겠는가?
*초문(譙門) : 문루(門樓) 아래 있는 문
知郡尹侯憲燮下車之明年春 命匠師畫工 使之修理. 其句欄之腐黑搖折者 蓋瓦之破□□□者 赤血之漫漶不鮮者 詩板之粧色虧濡者 一一濡之已 無侈前人 無廢後觀而奐焉. 向所謂勝狀 我侯一朝盡有之矣 豈不美哉. 美不自美因人而彰者 正是已.
군수 윤헌섭(尹憲燮)이 부임한 다음 해 봄, 목수와 화공을 명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장식한 난간이 까맣게 썩어 끊어진 것과, 기와가 깨져 □□□ 하는 것과, 붉은 글씨가 퇴색되어 선명하지 않은 것과, 시판의 장식이 이지러지고 젖은 것은 하나하나 젖는 것을 마치니, 앞 사람에 비해 사치하지 않고 후인이 볼 때 없어지지 않고 환해졌다. 소위 좋은 것을 우리 군수가 하루 아침에 모두 갖추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빛나는 것이니 바로 이러한 것이다.
*구란(句欄) : 동자기둥 사이에 가는 살로 짜서 장식한 난간 *만환(漫漶) : 원래 문체의 파손 또는 퇴색된 것을 칭하는 말
噫, 郡之有觀遊 或以為妨於政 余曰不然. 柳柳州曰, 夫氣煩則慮亂 視壅則志滯. 君子必有遊息之所高明之具 使之清寧平夷 恒若有餘然後 理達而事成. 昔者裨諶謀野 而後宓子彈琴而理亂慮 滯志無所容入 則夫觀遊者 豈非爲政之具耶
“아! 고을에 보고 노닐 곳이 있으면 혹여 정사에 방해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유주 자사였던 유종원(柳宗元)이 이르기를 “대저 기(氣)가 번잡하면 생각이 어지럽고, 보는 것이 옹색하면 뜻이 막힌다. 군자는 반드시 유람하고 휴식할 장소와 높고 밝은 시설을 갖추어, 맑게 안정되어 평이(平夷)하게 하도록 하여 항상 여유가 있는 것처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사리를 통달하고 행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다.”하였다.
옛날에 비심(裨諶)은 들판에서 계책을 얻었고, 후에 복자천(宓子賤)은 거문고를 타며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려, 막힌 뜻이 얼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데 보고 노니는 것이 어찌 정사의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비심(裨諶) :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대부로 모사(謀事)에 능했던 사람인데, 교외에서 생각하면 좋은 계책을 얻고 성내에서 생각하면 좋은 계책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 *복자천(宓子) : 복자천(宓子賤). 공자의 제자로 선보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마루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없이 거문고만 연주했는데도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呂氏春秋 察賢》
侯之因舊而得賜 豈不欲因俗而成化. 侯之革沔而取美 豈不欲除殘而佑仁. 侯之愛蓮之出乎淤 豈不欲使斯人為君子. 侯之觀魚之躍于淵 豈不欲使斯民得其所. 侯之顧臺名而思義 豈不欲廢貪而立廉. 侯之登臺上而望遠 豈不欲家撫而戶曉.
군수가 옛것을 따라 얻고자 한 것은 풍속을 따라 교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는가?
군수가 물 흐름을 고쳐 아름답게 한 것은 해로운 것을 제거하여 어진 것을 돕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수가 진흙에서 나온 연꽃을 사랑한 것은 사람들이 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군수가 연못에서 물고기 뛰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은,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어 살게 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군수가 누대의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은, 탐욕을 없애고 청렴을 세우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군수가 누대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는 것은, 백성을 위무하고 집집마다 깨우치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는가?
*가유호효(家喩戶曉) : 집집마다 알려주고, 호호마다 깨우치다.
夫然則 豈獨山水池臺之觀歟 芙蕖遊魚之適興 日星照耀之光景 原野遠邇之隱顯而已哉. 惟恐吾侯之不觀遽於此臺也. 來者繼侯之理而視其細 知其大 無不如吾侯之志則 吾郡之福其可旣乎. 余起於吾侯眷士之風而方來留郡學 見其事而知其志 故撰其事而誌其志 以示後人焉. 崇禎 紀元後 五丁酉 夏四月 十九日 朴三鉉 記
대저 그렇다면 어찌 다만 산수와 지대의 볼거리뿐이겠는가? 연잎 속에 노니는 물고기의 흥취와, 해와 별이 비추는 광경과, 들판이 멀고 가까이서 숨기고 드러내는 것 뿐이겠는가. 오직 두려운 것은 우리 군수께서 이 대에 의지해서 보지 않는 것이다. 이어서 오는 군수의 다스림이 그 세세한 것을 보고 큰 것을 아는 것이 우리 군수의 뜻과 같다면 우리 고을의 복(福)이 끝난 것이라 하겠는가.
나는 우리 군수가 선비를 돌보는 풍조에 일어나, 다른 곳에서 와서 군학(郡學,향교)에 머물면서, 그 일을 보고서 그 뜻을 알았다. 그래서 그 일을 찬술하고 그 뜻을 기록하여 후인이 보도록 한다.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정유(1897년) 여름 4월 19일
박삼현(朴三鉉) 기록하다.
동학농민군 진압과 김산의진(金山義陣)의 세찬 바람이 김산을 한 차례 휩쓸고 간 뒤에 김천의 중심은 상업의 중심지인 김천면 소재지, 현재의 남산 모암동으로 급격히 옮겨간다. 특히, 1901년 경부선 철도 부설공사가 착공되면서 일본인 종사자들이 하신기(현 용두동)에 사무실을 차리면서 쏠림현상은 더욱 가속화 된다.
이 시기에 연화지와 봉황대를 방문한 문인들의 글을 통해 풍경을 그려보자.
1899년 산청 산음에 거주하던 유석정(劉錫正,1866~1908)이 봉황대에 남긴 글
경상대 고문헌도서관 >澗翠集(간취집)
1899년 산청 산음에 거주하던 유석정(劉錫正,1866~1908)이 김천을 여행하면서 직지사와 봉황대를 방문하여 남긴 작품이다.
유석정(劉錫正)의 자(字)는 순화(舜和). 호(號)는 간취(澗翠). 본관은 거창이다. 곽종석(郭鍾錫,1846~1919)의 문인으로 간취집(澗翠集)을 남겼다.
登鳳凰臺次板上韻
봉황대에 올라 판상운을 차운하다
作1899년 유석정(劉錫正,1866~1908)
塘畔小臺泛似船(당반소대범사선) 연못 속 작은 대는 배가 떠 있는 듯하고
滿簾水月鏡中天(만렴수월경중천) 주렴 가득 물속 달빛 거울 속 하늘 같네.
四邊花有蓮君子(사변화유연군자) 사방에 있는 꽃은 군자인 연꽃이고
一去詩無李謫仙(일거시무이적선) 한 번 가니 시가 없어 귀양 온 이백이네.
事簡官樓山鳥下(사간관루산조하) 일이 적어 관아에는 산새가 내려앉고
時平村落老狵眠(시평촌락노방면) 평상시 촌락에는 늙은 개만 졸고 있어
三山二水今何在(삼산이수금하재) 삼산 이수 지금은 어디에 있나
鰲背茫茫溯昔年(오배망망소석년) 아득한 자라 등만 지난날 거슬러 가네.
*적선(謫仙) : 인간 세계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 그의 글을 보고는 지어 준 별칭이다. *오배(鰲背) : 섬들이 솟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옛날 발해(渤海) 동쪽의 다섯 산이 파도에 떠밀리자 상제가 다섯 마리의 자라로 하여금 이를 떠받치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列子 湯問》
1900년경 경남 의령 부림면에 살았던 안익제(安益濟,1850~1909)가 남긴 글
경상대 고문헌도서관 >西岡遺稿(서강유고)
1900년경 경남 의령 부림면에 살았던 안익제(安益濟,1850~1909)도 김산 봉황대를 지나며 작품을 남긴다.
안익재의 자(字)는 의겸(義謙). 호(號)는 서강(西岡)이며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경남 의령군 부림면 솔뫼마을 출신이다.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삼해임시정붕의 운영자금을 조달했던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의 족형으로, 유년기 안희제에게 한학을 전수하였던 인물이다.
문집으로 서강유고(西岡遺稿)를 남겼다.
過金山登鳳凰臺 西行時錄
作1900년경 의령거주 안익제(安益濟,1850~1909)
招招小葉舟(초초소엽주) 조각배 손짓으로 불러
遂上鳳凰樓(수상봉황루) 마침내 봉황루에 오르니
簾外三山落(렴외삼산낙) 주렴 너머 삼산에 해가 지는데
檻前二水浮(함전이수부) 난간 앞에 두 물줄기 둥둥 떠 움직이네.
江山歸客路(강산귀객로) 강산엔 돌아가는 나그네 길 위에 서 있는데
琴笛使君遊(금적사군유) 금적(琴笛)소리 그대를 노닐게 하네
惜昔靑年樂(석석청년락) 애석하여라. 지난날 젊은 시절
都付酒一甌(도부주일구) 한 사발 술잔에 모두 따르네.
1904년 추정 관찰사 장승원(張承遠,1853~1917)의 글판
▲1904년 추정 관찰사 장승원(張承遠,1853~1917)의 글판
다음 시기의 글판은 경상도 관찰사 장승원의 기명이 있는 글판이다. 장승원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시기는 1904년부터 1905년이니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장승원(張承遠,1853~1917)의 자(字)는 공유(公裕)이고, 호(號)는 운정(雲庭)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생부 장석구(張錫龜)와 모친 김해허씨(金海許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4세에 백부 장석룡(張錫龍)의 양자가 되었다.
1885년(고종 22)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고, 1904년(광무 8) 경상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슬하에 장길상(張吉相), 장직상(張稷相), 장택상(張澤相)을 두었으며 문집으로 <운정유집(雲庭遺集)>을 남겼다. 김천과 인연이 있어 묘소는 김천시립박물관 뒤편에 있다.
봉황대에 남아 있는 글판은 아래와 같으며, 동일한 글이 <운정유집(雲庭遺集)>에도 남아있다.
차금릉봉황대운(次金陵鳳凰臺韻)
경상도 관찰사 장승원(張承遠,1853~1917)
雨打楊花落滿船(우타양화락만선) 버들꽃 비에 맞아 배 가득이 떨어지고
鳳凰飛去水連天(봉황비거수연천) 봉황은 날아가 물만 하늘에 이어지네.
盤龍地古思王濬(반룡지고사왕준) 반룡 땅 오래되어 왕준을 생각하니
椎鶴樓空臥謫仙(추학루공와적선) 학을 때려 빈 루에 적선만 누워있네.
雲擁五波烟樹暗(운옹오파연수암) 구름 덮힌 오파산엔 안개 속 나무 어둑하고
月明三島露珠圓(월명삼도로주원) 달 밝은 세 섬에는 이슬방울 맺혀있네.
舊時佳麗無人問(구시가려무인문) 아름답던 옛 시절 물어볼 사람 없어
春盡江南又一年(춘진강남우일년) 봄이 끝난 강남은 또 일년 지나가네.
*왕준(王濬) : 서진(西晉)의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이 수군을 이끌고 오(吳)나라를 정벌하여 금릉(金陵)을 함락시킨 고사가 있다. 《晉書 卷42 王濬傳》 *오파산(五波山) : 김산군 군 동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연화지의 봉황대는 중수와 붕괴 다시 중수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김산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였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연화지와 봉황대를 방문하는 이들이 남긴 글중에 ‘판상운을 차운한 시’들이 지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 시절까지는 시판들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후대의 관리 소홀로 시판들은 온데 간데 없고 몇 개의 글판만 남아있고, 그 틈새로 정체불명의 시판들이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까닭없이 걸려있다.
다행히 1838년 이전의 판상운들이 김산읍지에 남아 있어, 시판의 진위를 구분하기는 용이하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가.
현재의 권력으로 과거를 고칠 수 있다는 오만에서 생긴 것일까.
봉황대에에 대한 몰이해에서 생긴 것일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은 아쉬움이지만,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은 왜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