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직장은 스물 셋살이 아니고 마흔 세 살 때다.
결혼하고 아이 둘을 키울 동안에는 엄두도 안 났다.
작은애가 중학교 2학 년 되어서야 학교에 잘 적응하는 듯 하니, 내 할 일이 없는 듯 했다.
오히려 큰 애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과외를 시켰는데, 거실없는 식탁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그에 따른 유지비도 더 있어야겠다고 느껐다.
그때 남편은 공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시숙의 집은 먼저 큰 집을 사 주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삼 년 뒤에 사면서도 아파트 평수가 작았다.
왜냐하면 공장에 돈을 많이 빼면 공장이 어려워진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집 넓히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 돈 이천만 원으로 식품대리점을 차렸다.
3년 뒤 독립해서 매천동시장상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경험도 없었지만, 곧 적응했다.
나는 자수성가 (自手成家)한 김장수 딸이다.
결과적으로 돈을 좀 ~ 벌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큰 가게로 옮기려고
큰 길에 준비하는데 엄마가 돌연 몸이 아팠다.
그 동안 일 마치고 거의 매일 동인동 엄마에게 들렜지만,
더는 안되겠다.
한 달을 내가 사는 집에서 몸을 추스려 아들들이 데려갔는 데 한달 만에 다시 도졌다.
집으로 데려다 같이 살면서 가게를 접었다. 아깝다!!!
그 때 엄마 나이가 여든 넷이었다.
내 나이는 마흔 아홉이었다
"아버지 처럼 또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다."
아버지의 마누라 엄마가 우선이다.
번 돈으로 수성구에 집도 사고, 상가도 사고, 했지만 잃은 것도 많다.
서울에 대학 다니는 큰 딸의 관리가 안되고,
남편도 다른여자 밥 사주고, 커피 사 주다 나에게 적발됐다.
그래도 꺼떡 안 했는데 엄마가 아프니 못 버티고 접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푸념을 했다.
"큰 돈 벌 수 있었는데~"
만 6년 만에 접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딸 둘이 혼인하고 , 엄마가 집에 온 지 만 6년 만에 돌아갔다.
그때가 구순 에 생일이 지나 한 달 만이다.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 배운 경험은 삶이나 사회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나니 몸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병원에서는 당이 550이 나왔다.
과장의사는 다시 검사하자고 해서 다시 해도 550이 나왔다.
수치가 너무 높아서 감당이 안 되니 당뇨치료 해당과로 가라고 나를 그만 그 곳으로 보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그때 엄마가 아파서 가게를 그만두었으니 망정이지, 일을 계속했으면 골병 들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때 그만 둔 것은 건강에는 잘 됐다는 생각을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은그렇게 끝났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