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
정경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백수 되었다고 혼자 빈둥거릴 수 없는 노릇이다. 여러 개 작은 단체에 속해서 한 달에 몇 차례 밥 먹으며 수다 떨고 있다. 가끔은 의미 없는 일에 시간 허비하는 것 같아 공허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내 손으로 운전해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간다. 틈만 나면 자연 벗 삼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낮에는 아직도 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라디오에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가을노래가 많이도 흘러나온다.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모임에 참석하러 가고 있다. 이번에는 농장하는 친구가 밥 한 번 내겠다고 하였다. 나이 들어 허겁지겁 사는 모양이 싫어 좀 일찍 출발하였더니 너무 이르다. 널찍한 공터에 주차하고 작은 개울 따라 이어진 둑길로 들어섰다. 둑길 양쪽으로 들깻잎이 무성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엄마가 단풍 든 깻잎 소금물에 삭히던 때가 이때쯤인가?’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깻잎 따던 할머니가 말을 걸어온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다. 깊게 패인 주름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이동할 때마다 엉덩이에 매단 앉은뱅이 의자가 좌우로 씰룩거린다. 얼굴처럼 세월의 흐름을 짐작케 하는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장갑 끼고 손 아끼려는 젊은 세대와 달리 그냥 맨손이다.
해질녘 들길 걷는 내가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그 곳 지나서 갈 수 있는 시골동네 이름을 다 대면서 어디 사는 새댁인지 묻는다. 할머니는 예순이 넘은 나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둑길 걷기를 포기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할머니 곁에 붙어 섰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길 따라 신기한 듯 내 시선이 따라가고 있다.
“옛날에는 깻잎 참 많이도 먹었는데…. 이 맛있는 걸 젊은이들이 잘 안 먹으니 조금만 해야지.” 할머니는 자식들 키우며 많은 양의 음식 해 대던 시절이 그리운 모양이다. 누렇게 된 잎을 따야 되는데 너무 이른 것 아니냐 했더니 녹색 잎이 더 맛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도 많이 따 가고 있으니 새댁도 좀 따라고 하였다. 잘 되었다. 나도 올해는 삭힌 깻잎으로 김치를 담아보아야지. 시원찮은 솜씨에 맛이나 낼는지 모르겠다.
한 손에 가방 들고 느리게 움직이는 내 모습이 어설퍼 보인 것 같다. 할머니가 잎 따는 시범을 보인다. “가방은 내려놓고 한 손으로 가지를 잡고 한 손으로 이렇게, 이렇게 실로 묶어야 하니 꼭지는 길게 하고.” 평생 농사짓던 이의 손놀림을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농부 딸인데 이 정도 못할까? 그러나 마음뿐이다. 사십 년 넘게 직장 다니느라 다른 일은 해 보지 못했다며 변명하였다. 변명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디선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굽은 허리 탓에 가슴이 땅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진작에 두 분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깻잎 따면 심심하지 않을 것을. 얼마나 뚝 떨어져 있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두 손 가득 움켜쥔 깻잎을 바구니에 담고 있다.
크고 좋은 것만 골랐다며 의기양양해 하는데 할머니는 못마땅하다. 너무 억센 것이라며 영감님을 타박한다. 세월의 흔적인가? 타박하는데도 정이 묻어난다. 조약돌 가득한 바닷가에 밀려가는 파도소리처럼 모나지 않은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시원해지는가 싶더니 금방 땅거미가 지고 있다. 깻잎 따던 노부부는 굽은 허리에 엉덩이 흔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아름답던 석양빛이 순식간에 사라진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억센 손을 열심히 움직이던 부부와 닮은듯하여 가슴이 저려온다. 낮선 가을들판에서 말 걸어준 할머니 덕분에 깻잎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아직은 더 놀고 싶은데, 아이들이 돌아간 빈 놀이터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난다. 평생 농사짓느라 부드러운 손은 본 적이 없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면 손가락 마디마다 하얀 반창고를 붙였다. 어린 내가 약국 심부름 하는 것은 반창고 사러 가는 일 밖에 없었다.
쫙 편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창고 돌려 붙이고, 거친 손바닥 비비며 신기해하였다. 아버지는 ‘반지를 이렇게 많이 끼었으니 내가 부자’라며 웃었다.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이 삶의 무게인 것을…. 웃는 아버지 따라 마냥 웃기만 할 뿐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농장 가는 길은 좁은 농로를 지나야 한다. 조금만 잘못하면 자동차가 남의 논으로 굴러 떨어질까 손에 땀이 밴다. 길 쪽으로 넘어진 마른 풀과 잔 나뭇가지들이 자동차에 닿을 때마다 경고음이 울린다. 트럭도 다니는 길이니 걱정 말라고 하였지만 내 운전 솜씨를 믿을 수 없어 더 불안하다. 여러 대 자동차가 속속 도착하였다. 도시의 잘 닦여진 길에 익숙한 친구들이 한숨 쉬며 돌아갈 걱정부터 한다. 내가 운전에 서툰 것은 아니었다.
농장주 친구는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한 그릇 사 먹으면 될 텐데 힘들게 준비했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들었으니 유기농 찾는 도시 여인네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평소 음식 만드는 봉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거리낌이 없다. 바쁜 생활 중에도 솜씨를 발휘해 준 친구가 고맙다.
오늘 하루, 여유 있게 일찍 집에서 나오기를 잘 하였다. 가을 들판 감상하는 것도 좋았고,깻잎 따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내 부모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친구라는 울타리가 있고, 따뜻하게 말 걸어오는 이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20241022)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