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대개 열 명중 여덟아홉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형편이 좋은 한두 명은 백고무신이나 ‘와신또’ 라고 불리던 검정색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모자며 교복이며 신발이 정해져 운동화를 신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들은 검정고무신 세대이다. 신발은 발에 신는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때론 무슨 보물인양 신주단지 모시듯 벗어서 들거나 책보자기에 싸서 매고 다니기도 했다.
신발을 들고 다니고 싸매고 다닌 이유가 신발이 비싸고 귀하여 닳는 것이 아깝기도 했지만 잃어버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 신발은 발뒤꿈치가 벗겨져 쓰리고 아파서 들고 다니기도 했다. 발이 크는 것에 대비하여 발 보다 더 큰 신발을 사는 데에도 들고 다니는 원인이 있었다. 양말 신는 것이 생활화 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맨발과 검정고무신에 얽힌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검정고무신은 우리들에게는 맞춤용 신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을 위해 태어난 안성맞춤이요 전천후 신발이었다. 이러한 검정 고무신이 참으로 불편할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운동화에 비해 젖을 걱정은 없었으나 닳고 낡은 신발은 미끄러워서 걸음을 옮기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들풀을 뜯어 구겨넣어서 신거나 볏짚을 넣어 신기도 했다.
검정고무신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달리기 순서 때였다. 하얀 횟가루가 뿌려진 출발선의 신발 모습은 다양하였다. 맨 발이 가장 많았고 운동화를 신은 발은 드물었으며 그 가운데 검정고무신 신은 발도 보였다. 내가 유일하게 등수에 들었던 5학년 가을운동회는 검정고무신 때문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앞서 달리던 친구가 검정고무신이 벗겨져 넘어 지면서 이등으로 달리던 친구도 넘어지게 했다. 목이 쉴 듯이 아들을 응원하던 어머니 가슴에 기쁨의 노트를 안겨 주었다.
또 다른 기억은 6학년이 되면서 중학교 진학을 허락받은 친구들은 보충 수업비를 200원정도 내고 하루에 몇 시간씩 과외 수업을 받았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일찍 수업이 끝났으나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장을 배회하거나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어슬렁거리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녔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소외된 설움을 달래는 나 혼자만의 방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위춤을 신나게 쳐대는 엿장수 아저씨 수레 뒤에서 오르막에는 밀어주기도 하며 동행을 했다. 어린 마음에 이렇게 하면 부스러진 엿이라도 얻어먹을 심산이었다. 고개를 넘고 넘어도 공짜 엿 줄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엿이 너무나 먹고 싶어 하여서는 아니 될 결단을 하고 말았다.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주고 엿을 바꿨다. 무심한 엿장수 아저씨는
“그렇게 해서 괜찮겠냐?” 는 한마디 말 이후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 다른 사람보다 많이 주었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맛있는 엿을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신던 신발이 없어진데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음은 물론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온갖 궁리를 다했다.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물음으로 꾸지람이 시작되었다. 소를 굶겨 거름더미 말뚝에 종일토록 매 달아 놓은 일에 대한 것과 합쳐져 저녁도 먹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당시는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지와 전쟁으로 인한 구걸하는 상이군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특히 비를 피하기 좋은 신작로 콘크리트 다리 밑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다리 밑은 어린아이 간을 꺼내어 자기의 문둥병을 고치려고 한다는 괴 소문의 근원지가 되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등하교 하는 일이 많았다.
거지가 따라와서 달아나기 바빠 신발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다음 말은 더 들어보지도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어둠살이 내리고 모두들 저녁식사가 끝이 난 시간에 어머니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가 간신히 저녁밥을 먹었다.
그 일이 있은 후 5일장이 네 번이 지나가도록 형이 신던 낡고 큰 헌 신발에 짚을 구겨넣어 신고 학교를 다녔다.
가을 운동회에서 검정고무신은 달리기 전용 신발이 아니었다. 어느 학년 달리기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고학년 각반 달리기는 주로 점심식사 후에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모든 시선이 운동장으로 쏠렸다. 출발선에 대기하던 선수가 출발 총소리에 놀랐음인지 지나치게 긴장하고 용을 썼음인지 검정고무신이 출발선 뒤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다급해진 선수가 검정고무신을 다시 신더니 방향 감각이 상실되었음인지 운동장 트랙을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구경꾼들이 박장대소하며 한바탕 웃음소동이 벌어졌다.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는 사흘이 멀다하지 않고 물에 빠지거나 흙탕이 된 운동화를 밤늦게라도 세탁하여서 소죽 끓이는 가마솥 전에다 말렸다. 바쁜 등굣길에 신발이 없다고 허둥대던 나에게 따뜻한 온기가 남은 운동화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운동화 보다 질기며 씻어 신기가 편하다는 이유로 중학생이 되어도 집에서 신는 신발은 반드시 검정고무신을 샀다. 사실 겨울철 발이 시린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에게 맞는 신발 이었다. 이번 추석 산소를 찾을 때는 검정 고무신이 있으면 신고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