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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연속되는 위기(危機) [1] 모두가 물러간 후 숲이 우거진 사당 주위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고일두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품 속에서 한 뼘쯤 되는 죽통(竹筒) 을 꺼내들었다. 그는 죽통에 불을 붙인 후 허공으로 힘껏 던졌다. 슈우우우욱! 죽통은 노란 연기를 뿜어내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모염정은 허공에 길게 꼬리를 늘어트린 연기를 바라보며 입가에 묘 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유색연지탄(有色煙指彈)이 올랐으니 갈곤태가 구민선을 추적하겠 지.’ 그녀는 교태를 지으며 고일두에게 다가갔다. "동생, 잘 참았어." 그녀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실상 고일두는 이 사건을 조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의 눈에서 욕망의 빛이 번졌다.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조사를 하느니 연락용 신호탄도 터트렸 겠다... 어디 이 계집과 시간이나 때울까?’ 날이 밝은 지금 마인을 조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곡 환자들 또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야 금세 달라질 것은 없었다. 더구나 이런 사안들은 어떤 식으로 조사하건 결국 와호장의 위상만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그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방금 전 증거를 확보했다는 게 무슨 말이오?" 모염정은 입술을 비쭉대며 그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래서 남은 거야. 동생은 고맙다는 표시도 못해?" "거참." 그녀의 저돌적인 태도에 고일두는 입맛을 다셨다. 모염정은 풍만한 가슴을 문질러대며 콧소리로 물었다. "정말 마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실은 나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모염정은 내심 의혹을 지우지 못했다. '혹시 고헌부가 마공을 연성하기 위해 그동안 무림에 직접 나서지 않은 게 아닐까? 천적인 청풍을 완벽하게 죽이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 르지.’ 무공과 재력, 그리고 그간의 모든 행적을 고려할 때 와호장주 고헌 부가 마인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심증을 굳힌 그녀는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후 끈끈한 음성을 발 했다. "저 쪽으로 가. 동생에게 들려 줄 말이 있어." 그녀는 고일두의 허리를 껴안은 채 숲 속으로 이끌었다. 고일두는 못이기는 척 하며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군요." 그들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 아래 나란히 앉았다. 모염정이 다리를 쭉 뻗는 순간 산바람에 경장이 들춰지며 허리어림 까지 드러났다.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바람에 팽팽하고 뽀얀 허 벅지가 육감을 자극했다. '......!' 고일두는 하체가 불끈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염정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비등원주를 조심하는 게 좋아." "무슨......?" 고일두는 갑작스럽게 대화내용이 바뀌자 의아해 했다. 모염정은 그 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비음을 토해냈다. "으응, 냉영괴화를 기습한 것이나 제약소 사건 등은 모두 그 자가 꾸민 거야. 왜냐하면......." 그녀는 장구안에게 들은 사실 가운데서 자신이 포함된 사항만 빼고 는 모조리 알려 주었다. 고일두는 경악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수가......?’ 그의 얼굴에는 반신반의하는 빛이 역력했다. 모염정은 이때다 싶어 은근히 불을 질렀다. "여기보다는 그쪽을 조사하는 게 더 급할걸?" 한순간 고일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팽그르 르 굴렸다. '두 강적을 싸움 붙이면 마인의 정체가 자연히 드러날 테지?’ 고일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얘기는 누구에게 들었소?" "바보 같으니... 어차피 직접 확인하면 될 것 아냐?" 모염정은 뻔한 일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고일두는 지금 자 리를 뜰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자칫하면 약점을 잡히기 때문이었다. 모염정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해."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붉은 경장이 완전히 젖혀지며 터 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드러났다. 고일두는 슬며시 손을 뻗어 옷자락을 덮어 주는 척했다. 그 순간 모염정이 그의 목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포갰다. "으음......." 그녀의 혀가 능숙하게 춤을 추었다. 사내의 욕정을 자극하는 향기 로운 타액이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참고 참았던 뜨거운 열기 가 머리 끝까지 확 솟구치는 바람에 고일두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때 모염정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더니 빳빳 하게 일어선 그의 하체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녀는 다정한 연인처럼 달착지근한 비음을 흘렸다. "으응, 동생... 이런 시간을 얼마나 원했는지 알아?" 그녀의 피부는 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넘쳐흘렀다. 누르면 터질 것 같아서 고일두는 감히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문득 호기 심이 일었다. '정말 대단한 계집이야. 한데 어떻게 진기를 섭취할까? 한번 알아 볼까?' 그는 그녀가 색절이라고 불리는 신비를 알고 싶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과 정사를 나눈 상대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며 아 직까지 누구를 해친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정사를 나눈다 해 도 약점이 잡히거나 손해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모래성이 무너지듯 스르르 쓰러졌다. 모염정은 능숙하게 고일두의 옷을 벗겨냈다. "으흥, 자기가 이렇게 멋진 줄은 몰랐어." 그녀는 작은 손아귀에 잡힌 채로 불쑥 위로 솟구쳐 나온 양물을 내 려다보며 흥분에 찬 음성을 발했다. 고일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걸치나 마나한 모염정의 경장을 확 벗겨버렸다. 눈부신 햇살 아래 풍염한 여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엇!" 그는 어이없는 비명을 내며 벌렁 쓰러졌다. 모염정이 가슴팍을 밀 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아랫배에 걸터앉았다. 커다란 둔 부가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두 사람은 하나가 되고 말았다. "헉!" "하아......." 그녀가 펼치는 율동은 불꽃이었다. 한 번씩 오르내릴 때마다 모든 신경에 쾌감을 불어넣으며 사내를 무섭게 달궈놓고 있었다. 고일두는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모처럼 젊은이를 상대했음일까? 그녀도 열락 속으로 무섭게 몰입해갔다. 나긋나긋하게 마찰하듯 원을 그리는 듯한 둔부의 곡선운동은 실로 절묘한 것이었다. "흐으......." 고일두는 나른한 온천 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행위가 거듭될수록 몸 안의 노폐물이 빠져나가면서 마치 신선이라도 된 양 둥둥 허공에 떠다닌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갑자기 모염정이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 켜올렸다. 고일두가 누구인가? 이미 여자 경험이 많은 그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알고 재빨리 뒤로 돌아가 합일했다. "헉헉......."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탐했다. "정말이지... 누님... 훌륭하오......." 두 사람은 찰떡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어언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건만 숲 속에는 가쁜 숨소리만 흘러나 왔다. 고일두는 수없이 자세를 바꿔가며 강철 같은 몸으로 연신 여체를 공략하고 있었다. 모염정은 그만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하학! 대... 대단한 녀석... 벌써 십여 차례나 하고도 지칠 줄 모 르다니.......’ 한편 고일두는 희희낙락이었다. '후후, 네년은 모를걸? 내가 장구안의 방중술을 몽땅 습득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그도 방중술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완급(緩急 )과 강약(强弱)을 조절할 때마다 모염정은 숨이 넘어가는 신음을 발 하고 있었다. 모염정 역시 보통 여인인가? 그녀는 쾌락의 탄성을 발하면서도 거듭되는 행위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었다. '오냐, 네놈의 모든 것을... 으흥!’ 그들은 온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정사를 끝내지 않을 것 같았다. [2] "출발!" 유청풍 등이 승선하자 구민선의 선장이 힘차게 외쳤다. 쏴아아! 순식간에 배는 강심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구민선을 처음 타 본 유청풍과 고혜원 그리고 노방은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구민선이 아니라 전함(戰艦)이군." 배에는 어쩐지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백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구민선에는 흉흉한 안광을 발하는 무사 들이 도검을 번뜩이며 선실로 가는 낭하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 휴진(休診)하는 날이었는지 환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홍오간은 묘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곳은 안전하오. 삼백 명의 정예무사와 오십 명의 노련한 수부, 그리고 의료 활동을 돕는 인원도 이십 명이나 되오." 중인들은 자랑삼아 떠벌인 그 말이 압박처럼 느껴졌다. 험한 강물이 오륙 장 높이로 출렁거려 그런지 몰라도 더욱 그러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모두들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따라서 보호받는 안도감보다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엄희채는 별도로 마련된 선실에 눕혀졌다. 유등이 밝혀진 그곳에는 유청풍 일행과 홍오간, 그의 조수 격인 세 명의 의녀(醫女)가 자리를 함께 했다. 장검을 허리에 찬 의녀들은 홍오간과 보통 사이가 아닌 듯 가끔 야 릇한 눈짓을 주고받곤 했다. 지금 엄희채는 진찰대에 부착된 가죽띠로 묶여 있었다. 그렇게 고착시키는 이유는 요동이 심한 선실에서 환자를 보호하는 의미도 있지만 혈도가 풀리면 그녀가 미친 듯이 발작하기 때문이었다 . 홍오간은 그녀의 증세를 신중히 살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시종 어두웠다. '방시굉 그 늙은이가 해독법만 가르쳐 주었어도... 하긴 이 계집을 꼭 살려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의 목적은 오직 유청풍이 지닌 뇌운진기를 탈취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유청풍을 제외한 노방 등은 그가 심각한 안색을 띨 때마다 가 슴이 조마조마했다. 섭령마인공에 당한 증상은 오로지 독혈 방시굉만이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하나 홍오간은 그의 수제자이므로 일 말의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오늘 내로 완치되지 않을 경우 엄희채는 마공의 영향을 받아 이지를 상실한 채 밤에만 활동하는 괴물로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홍오간은 의녀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의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일 각이 지나지 않아 의녀는 종이에 싼 몇 가지 약을 가지고 돌아 왔다. 홍오간은 그 약을 건네 받아 엄희채에게 복용시켰다. 유청풍 등은 근심스런 눈빛으로 엄희채의 안색을 주시하고 있었다. "......."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떤 사람은 턱을 괸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 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언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엄희채는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 그것은 일그러진 채 펴질 줄 모르는 홍오간의 안색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엄희채를 치료하여 이름 값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 로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기의 흐름을 일단 멈추긴 했으나 제거할 방법은 없소." 중인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뭐라고요?" 홍오간은 중인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듯 강한 억양으로 말했다. "비사금환은 당분간 시궐(尸厥) 상태로 본선에 머물러야 하오." 시궐이란 스스로 움직이거나 판단할 수 없는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 를 뜻한다. 그렇다면 엄희채는 장기치료가 불가피해진 셈이다. 실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해졌다. 다시 홍오간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혈은 물론이고 필요시 골수도 이식해야 하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녀들은 대롱과 침, 얼음을 준비하는 가 하면 유리병을 세척하기 시작했다. 그 병은 비상용 혈액과 골수를 보관하는 용기였다. "......!" 중인들은 입 안이 바짝 마를 만큼 긴장하게 되었다. 수혈이란 말을 가끔 들었지만 피를 제공하거나 직접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더욱이 골수 이식은 난생처음 듣는 으스스한 소리였다.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홍오간은 엄희채의 변화를 살피는 척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뽑아 내면... 흐흐.......’ 그때 위강이 물었다. "아니, 홍형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있단 말이요?" 그는 당대최고의 의술을 지닌 홍오간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실망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억양을 높였다. 홍오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병이 아니지 않소? 이번 기회에 증상을 연구하여 좋은 약 을 개발해 내겠소이다." 누가 들어도 그 말은 너무나 막연하게 들렸다. 그러자 자금까지 침묵을 지켰던 노방이 쏘아댔다. "비열한 인간, 사매를 인질로 잡아 둘 속셈이냐?" "정 의심스러우면 데려가면 되지 않느냐?" 당대에서 제일 가는 의원은 그 말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그런 그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를 대체 누가 고친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은 허탈한 심정으로 그의 등만 바라보았다. 노방은 여전히 안면을 씰룩거렸다. 그는 동문이지만 아직 홍오간 만큼 높은 의술 수준을 갖추지 못했 던 것이다. 고혜원은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과연 홍오간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촉촉하게 땀이 배인 손바닥을 연신 비벼댔다. 흑림에서 치료받은 이후 그녀는 무엇보다 유청풍의 안위를 가장 염 려했다. 이제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존재였다. 유청풍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희채를 구한 후 빠져나가야 할 텐데......?" 사실 그는 복명환령단의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은 고일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이 구민 선 안에서 복명환령단을 만들 수 있는 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묵묵히 관망한 이유는 홍오간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피하면서 탈출할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고혜원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의 손을 잡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손이 왜 이렇게 차?" 그녀는 몹시 우려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청풍은 나직이 말했다. "한 방 맞았거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혜원은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뭐? 그걸 지금껏 참았단 말이야?" 그녀는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손을 놓았다. 일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유청풍을 향했다. 그들은 어두운 안색 을 지은 채 내심 염려해 마지않았다. 홍오간도 흠칫 놀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 같았다. 유청풍은 홍오간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돌아섰다. "약을 좀 바르고 오겠소." 땀이 말라 소금기가 허옇게 배인 그의 전신은 상처가 매우 심했다. 비록 출혈은 멎었지만 창약을 바르지 않아 흙과 피가 덩어리로 말라 붙어 있었다. 사실 그는 치솟아 오르는 한기를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홍오간이 눈짓하자 의녀 한 명이 앞장섰다. "절 따라 오세요." 유청풍은 그녀와 함께 선실을 빠져나갔다. [3] 선실 복도에는 인상이 험악한 호선무사들이 좍 깔려 있었다. 유청풍이 의녀를 따라 간 곳은 세 번째 선실로 문에 약제실(藥劑室 )이란 조그만 편액이 부착되어 있었다. 약제실은 냄새부터 달랐다.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비단 장막이 쳐진 실내 좌우 및 전면에는 칸막이처럼 만들어진 조 그만 함들이 수백 개가 눈에 띄었다. 그 함마다 산삼(山蔘), 천마(天 麻), 백랍(白蠟), 두충(杜 ), 부자(附子) 등 온갖 약 이름이 써져 있었다. 약제실 가운데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약제대가 눈에 띄었다. 의녀는 함에서 몇 가지 약초를 꺼내더니 하얀 약사발에 넣고 빻았 다. 잠시 후 그녀는 누런 빛이 감도는 가루약 세 봉지를 건넸다. "여기 있어요." 그녀가 내민 약은 조금 전 엄희채가 복용한 것과 유사했다. 다만 유청풍의 증세가 심하지 않아 함량을 줄인 것 같았다. 유청풍은 약 한 봉지를 먹고 나서 옷을 벗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잠깐 비켜 주겠소?" 하지만 의녀는 철저히 감시하라는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쭉한 얼굴만큼이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환자가 임의로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발라주겠다는 듯 또 다른 약 절구를 집어들며 까 딱거렸다. 유청풍은 전부 탈의해야 한다는 뜻으로 상하를 가리켰다. "전신에 발라야 하오." 의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비로소 그의 아래위를 좍 흩어 보았다. 옷이 찢어진 사이로 전신에 피가 덕지덕지 엉킨 끔찍한 상처가 그대 로 드러나 있었다. 그 동안 엄희채에게만 신경을 썼던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이윽고 그녀는 마지못해 비켜 주는 양 쌀쌀맞게 대답 하고 나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죠." 그가 도망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정적이 찾아 든 실내에서 유청풍은 상처에 약을 바르며 탈출할 궁 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식을 잃은 엄희채를 데리고 감 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는 묘안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움을 벌여봐야 불리할 뿐이었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약함으로 다가갔다. 약함을 꺼내려던 그는 돌연 장막을 들추더니 눈을 크게 떴다. "화절 선배?" 어느새 잠입했는지 서하경이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서하경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흘러나왔다. "놀랍군." 무림에서 은신한 서하경을 선뜻 찾아낼 고수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발전한 유청풍의 무공 수준에 혀를 내둘렀다 . 그녀의 옥용에는 긴장이 감돌았으나 은은한 기품은 여전했다. 그녀는 은색 유지로 싼 호두알만한 환약 두 알을 건네주었다. "서둘러야 하네." 그녀는 밖의 동정과 엄희채의 증세에 무척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유청풍은 약을 싼 유지를 천천히 벗겨냈다. '역시 복명환령단이구나!’ 그윽한 향기가 감도는 황금색 환약은 유형마인강의 치료제인 복명 환령단이었다. 그는 그 약 한 알을 얼른 삼켰다. 상쾌한 기향이 인후에 번지는가 싶더니 곧 전신이 훈훈해졌다. 그는 선 채로 두 번의 운기행공을 마쳤다. 그러자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던 한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상쾌한 기분과 동시에 전신에는 더운 열기마저 맴돌았다. 그러한 현상은 유형마인강의 마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징후였다. 서하경은 따사로운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십 년 전 독혈 선배가 준 비상용일세." 당시 독혈 방시굉은 복명환령단 여섯 알을 제조하여 노방과 엄희채 , 그리고 서하경에게 각각 두 알씩 나눠주었다. 그 후 곧바로 마인에게 납치된 것이었다. 유청풍은 치솟는 울분을 누른 채 그간의 일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그 분을 뵈었습니다. 은하자비소에서......." "아! 그런 일을 당하다니......." 서하경은 흘러간 감회가 떠오르는 듯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얼마 동안 그녀의 옥용에는 표현 못할 비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유청풍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선배, 무슨 단서를 얻었습니까?" 그녀는 무거운 어조로 나직이 말했다. "바랭이 안에서 귀면탈과 흑색 피풍을 보았네." 순간 유청풍은 고혜원을 치료했던 일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으음, 그렇다면 당시 흑림에 나타났던 자가 홍오간이었군요. 머지 않아 다른 세력과의 연계관계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계관계란 홍오간이 어떤 약을 누구에게 공급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 사슬관계가 검혈 단궐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하경은 신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나중에 혜원이와 함께 정일파로 올 수 있겠는가?" 잔잔한 그녀의 음성은 제자 고혜원을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부탁과 아울러 뭔가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유청풍은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문득 그는 엄격했던 동방노야를 떠올리며 심정을 피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동방노야는 천락무예단에서 그에게 천지광락세를 가르쳐준 정일파 의 전대 천사였다. 유청풍은 정해단에 예속된 정일파의 문호를 정리함으로써 은혜를 갚을 작정이었다. 그런 그의 의중을 눈치챈 서하경은 엷은 미소를 띄웠다. "마인이 등장한 이상 그 일을 할 사람은 자네뿐일세." "예." "마침 다른 환자도 없고 날이 어두우니 불을 지르겠네." 그녀는 출입방법을 잘 아는지 뒤에 보이는 작은 문을 통해 연기처 럼 사라졌다. 유청풍은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의녀가 빠끔히 머리를 디밀었다. "다 됐죠?" [4] 비등원의 호위함은 쾌속선이었다. 게다가 주야간 쉬지 않고 운항한 관계로 등조민과 혁련달은 여느 때보다 몇 배나 빨리 개봉 어귀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배는 물살이 가장 험하다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수장된 괴룡탄( 怪龍灘)을 거쳐 좁디좁은 어느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본원까지는 불과 오 리 정도입니다." 등조민은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잠시 후 그들이 내린 지점은 비등원에서 운영하는 비밀 선착장이었 다. 밖은 먹물을 뿌린 듯 캄캄했다. 등조민과 혁련달은 비등원을 향해 야조처럼 신형을 날렸다. 혁련달을 접객실에 남겨둔 채 등조민은 부친 등인탁의 방으로 갔다 . "공절이 왔습니다." "큰 일을 해냈구나." 등인탁의 얼굴이 환해졌다. 등조민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주의하십시오. 그는 몰혼산에서 청풍과 겨뤄 패했기 때문에 온 것 입니다." 그는 기회주의자인 혁련달을 노골적으로 불신했다. 등인탁은 대략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만나 보마. 너도 오다가 들었겠지만 마인이 출현하여 변수가 많을 것 같다. 무엇보다 구민선을 주시하거라." 그는 신경조직처럼 깔린 지부를 통해 보고를 받아 벌써 마인의 등 장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유청풍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해진 것이었 다. 등조민도 그런 뜻을 알고 대답했다. "예." 등조민은 대답을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사실 그도 유청풍의 안위를 궁금히 여기던 참이었다. "어서 오시구려." 비등원주 등인탁은 접빈실로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음성을 발했다. 힐끗, 그의 눈초리가 재빨리 탁자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단된 혁련달의 흉측스런 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혁련달은 수치 스러움과 원독이 겹쳐 변명을 늘어놓았다. "등원주, 도와주시오. 청풍을 처치할 호기였는데 그만 장구안 그 놈이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금궤가 노출되고 다리가 잘린 그는 고헌부가 겁이 난 나머지 협상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비등원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식객 같은 인상을 피하고자 그런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었다 . 등인탁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아, 그리 되었구려." 이때 혁련달도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우가 너무 좋으면 종말도 빠른 법. 비밀을 한번에 다 털어놓으 면 안되겠지?’ 그는 슬며시 운을 띄워 보았다. "난공사(難工事) 같구려. 기관술이 필요하다면......." 그는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나 보려고 은근히 뜸을 들였다. 눈치 빠른 등인탁은 아예 상전 같은 어투를 구사하여 눌러 버렸다. "아마 시일이 오래 걸릴 터인데......." 거만하게 말꼬리를 늘어트리는 모양새가 약세에 놓인 자를 몰아 붙 일 태세였다. 이는 혁련달을 오절의 반열에 든 강자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지닌 한낱 장인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런 점은 차 한잔 내오지 않는 쌀쌀한 접대에서 느껴졌다. 혁련달은 속이 쓰렸지만 체면상 희미하게 미소를 띄웠다. "제가 살루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총책임자였소." 그는 경력을 과시하면서 구미가 당길 만한 비밀을 슬며시 털어놓았 다. 또한 한편으로는 중책을 맡을 만큼 능력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었 다. 등인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척척 맞아떨어지는군. 새로운 검법이 거의 완성 되어가는 터에... ....’ 그는 느릿한 어조로 작업 내용을 알려 주었다. "다름이 아니고 마검각의 검대를 지하로 옮길 계획이오." 그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지시를 수행하여 목숨을 부지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혁련달은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 '교활한 놈! 세상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이겠다는 건가?' 그도 남을 기만하면서 살아왔건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를 혐 오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살아 남기 위해 한없이 굴종해야만 될 형 편이었다. 그는 속을 감춘 채 수하처럼 처신했다. "어디 가보시지요, 원주님." 비등원 지하는 작은 광장을 연상할 정도로 넓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아름드리 돌기둥이 무려 오십여 개나 되었다. 그 기둥과 기둥의 간격 또한 십 장 정도였으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련달은 등인탁이 묻기 전에 작업 계획을 밝혔다. "여기서 마검각까지는 대략 이백 장쯤 되겠군요. 아마 육십 명이 삼 교대로 계속 작업하면 한 달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검과 검대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오?" "오륙십 관은 그리 문제가 되는 하중이 아닙니다." "그 동안 똑같은 검대와 장검을 준비해야겠구려." "그렇습니다. 대각선으로 상방으로 굴착하여 진짜를 내려놓은 다음 가짜를 그 위치에 옮깁니다. 그리고 나서 파낸 자리를 다시 흙으로 메우면 감쪽 같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기술자인 혁련달이야 간단할지 몰라도 등인탁은 일 목요연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그는 굳은 안색으로 물었다. "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겠소?" "내일 저녁 때까지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문득 등인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의향을 물었다. "장비를 구입하려면 외출해야 되지 않겠소?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 품도 있을 터인데......?" 일순 혁련달은 공포에 찬 표정을 지으며 으스스 떨었다. "아, 안되오. 절대 나갈 수가 없소이다. 은신처가 노출되면....... " 그는 혀가 굳어져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등인탁은 암암리에 끌어 올렸던 전신진기를 슬며시 풀었다. '사실이군.’ 만일 혁련달이 위장귀순을 했다면 외출을 즉각 수락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등인탁은 가차없이 그를 격살시킬 참이었다. 한데 겁을 집어먹은 채 거부하는 것은 진실로 항복했다는 증거였다 . 등인탁은 강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알았소. 내가 은밀히 준비하리다." 혁련달은 목발을 옆구리에 바짝 붙여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아, 예... 고맙습니다, 원주님."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