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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二十三 章 용도폐기 스산한 달빛이 온 누리를 내리비추고 있는 시각, 나뭇가지와 수풀 속에서 흑영 하나가 솟아올랐다. 휙휙휙! 흑영은 멋진 자세로 공중회전을 하면서 담장을 넘어와 지면에 내려선 곳은 바로 비봉당 터. 흑영은 바로 위지강, 그였다. 흑립을 쓴 위지강의 눈빛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제멋대로 무너지고 부서져 있는 전각에 머물렀다. 위지강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연해월!' 그는 잔해가 널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에 탄 대들보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내부로 들어섰다. 위지강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순간 위지강의 신형이 흠칫했다. 이리저리 뒤엉킨 대들보들 사이 저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지강의 얼굴에 놀랍고도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연해월?" 그는 다급히 기둥을 헤치고 성큼 그곳으로 다가갔다. "연해월!" 잔뜩 기대를 하고 다가갔던 위지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으로 보이는 곳, 어두컴컴한 구석에 촛불을 밝혀놓고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여인, 염서시가 보였던 것이다. 염서시는 위지강을 쳐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위지강의 얼굴에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염서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천천히 위지강에게 다가섰다. "지금쯤이면 강주(江州)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어야 할 사람이 이곳에 불쑥 나타난 것도 뜻밖이지만 볼모로 잡아둔 계집을 그런 식으로 다정하게 부르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 거죠?" 염서시는 굳어 있는 위지강의 바로 코앞에 다가섰다. 그녀는 가슴으로 흘러내린 위지강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짐짓 딱하다는 투로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으면 머리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네." 염서시는 야릇한 눈빛으로 위지강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연의 관계 그런 거 아니었나요?" 위지강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네 짓이구나." 염서시는 일순 흠칫했다. "……!" 그녀는 얼굴 가득 냉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짝!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위지강의 손이 날아가 염서시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는 저만큼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위지강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염서시를 차갑게 쏘았다. 그의 눈에서는 살광이 번뜩였다. "어떻게 죽고 싶으냐?" 염서시는 주저앉은 채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난 오직 당신만 원할 뿐이에요."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날 데리고 가줘요. 당신만 좋다면 모든 걸 다 버리겠어요." 염서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위지강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연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연해월을 어떻게 했느냐?" 염서시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그녀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음성으로 위지강을 협박했다. "더 늦기 전에 마음 돌려. 아니면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 쉬이익! 위지강은 검을 뽑는 자세 그대로 염서시를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다. "요망한 계집!" 염서시는 재빨리 뒤쪽으로 교구를 날리며 열 손가락을 퉁겼다. 파파파팟! "넌 끝내 벌주를 선택하고 말았어!" 퍼펑! 펑펑! 사방에서 폭음이 울리며 자욱한 연기가 뿜어져 나와 위지강을 덮쳤다. 연기를 쳐다본 위지강이 놀라 흠칫했다. '이건!' 자욱한 연기 속에서 염서시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십밀시음분(十密屍淫紛)이 뭔지 안다면 쓸데없는 짓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위지강의 눈빛에 놀라운 기색이 가득 찼다. "코끝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황소를 쓰러뜨린다는 천하삼대절독 중의 미혼독(迷魂毒)……?" 염서시는 자욱한 연기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허공에는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이 맴돌고 있었다. "넌 좀더 일찍 알았어야 했어. 가지지 못할 바엔 아예 없애버리는 여자가 나라는 것을……." 위지강은 살벌한 기세로 검을 종횡무진 휘둘렀다. "목숨을 남겨두고 가라, 계집!" 콰콰콰쾅! 위지강이 발출한 검기에 격중된 지붕은 통째로 부서지며 솟구쳐 올랐고, 담벼락 등은 종잇장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장내는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와 낙진 속에 휘말렸다. 이때 검을 휘두르던 위지강이 전면을 응시하며 자세를 바로 굳혔다. 사방을 물샐틈없이 에워싼 궁수대와 남극벌의 무사들 중앙에, 고수들을 거느린 채 염서시와 나란히 서 있는 개벽신수 철륭을 보았던 것이다. 검을 늘어뜨린 채 위지강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의 주위를 빙 돌아가며 담장과 나무 위, 지붕 등지에는 궁수대와 남극벌의 무사들이 위압적으로 포진해 있었다. 철륭은 여유로운 미소를 안면 가득 머금었다. "과연 마도수이군! 십밀시음분에 중독되고도 버티는 괴물은 자네가 처음일세." 위지강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철륭을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용도폐긴가?" 철륭은 자신의 옆에서 조소를 머금고 있는 염서시를 슬쩍 쳐다본 뒤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셈이지. 예정보다 좀 빠르긴 하지만……. 거기다 지금이야말로 그토록 꿈에 그리던 천마비록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아서 말이야." 위지강은 차갑게 냉소했다. "자신 있으면 직접 와서 가져가 보지 그래!" 철륭은 껄껄거리며 대소를 터트렸다. "닭 잡는데 굳이 소 잡는 칼을 쓴 데서야……." 그는 탐욕의 눈길을 번들거리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넌지시 불을 지폈다. "그럼 어디 누가 천하제일검을 꺾고 무림최고의 영웅이 되는지 두고 볼까?" 철륭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득달같이 신형을 솟구치는 여덟 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파파파팍! "상문팔귀(喪門八鬼)가 맡겠소!" 그러나 그들과 동시에 몸을 날리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양손에 비발을 움켜쥔 채 담장을 박차고 쏘아져오는 여덟 명의 고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 일에 팔마륜(八魔輪)이 빠진 데서야!"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푸화화확! 갑자기 땅속에서 다섯 사람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쇠사슬로 연결된 닻 모양의 쇠갈고리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지옥오잔(地獄五殘)도 간다!" 콰콰콰콰콰! 잔재 위에 서 있는 위지강을 향해 이들은 무섭게 쇄도해 들었다. 위지강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모조리 밟아주마, 하룻강아지들!" 그는 검을 쥔 손에 꾹 힘을 가했다. 그때였다. 뒷덜미가 띵해지며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억!" 위지강은 몸의 중심을 잃고 쿵쿵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슈아아아악! 제일 먼저 상문팔귀의 무지막지한 칼날이 위지강을 내리쳐왔다. "끝장이다, 놈!" 싸삭! 싸악! 위지강의 가슴과 어깨가 베어지면서 피가 튀었다. 패애애애앵! 팔마륜도 비발을 휘돌리며 쏘아져왔다. "걸렸다." "없애버려!" 파악! 또다시 등줄기와 허벅지에서 핏물이 확 튀어 올랐다. 슈와왁! 지옥오잔 중 하나가 밑에서 위로 쇠갈고리를 비스듬히 훑어 올렸다. "아예 숨통을 끊어주마!" 카캉! 위지강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쇠갈고리를 막았다. 그러나 이미 내력이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한 그는 제자리에 서 있질 못하고 뒤쪽으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촤촤촤촤촥! 지옥오잔은 살벌한 기세로 쇠사슬에 연결된 쇠갈고리를 내던졌다. "천하의 마도수도 별거 아니구나!" "계속 간다!" 위지강은 이를 악물고 뼈를 저미는 고통을 참았다. 그의 전신은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십밀시음분의 약효가 급속히 체내로 확산되고 있다.' 위지강은 강렬한 안광을 폭사시켰다. '시간을 끌면 당한다! 속전속결!' 위지강이 다급하게 허리를 틀어 피하자 목표물을 잃은 쇠갈고리들은 뒤쪽의 나무에 박혔다. 츄아악! 위지강이 천룡신검을 내뻗으며 일성사자후를 터트렸다. "천마검법 제일초 용형뢰!" 쿠쿠쿠쿠쿠! 검 끝에서 파생된 수많은 검영들을 쳐다보며 지옥오잔 등, 위지강을 덮쳐들고 있던 무리들이 기겁을 했다. "맙소사!" "뭐야, 아직도 저런 검세를 펼쳐낼 기운이 남아 있다는 건가?" 콰콰콰콰쾅! "으악!" "크아악!" 상문팔귀가 전신이 벌집처럼 터지며 뒤쪽으로 퉁겨나갔다. 후아아아앙! 위지강이 재차 무섭게 검을 휘돌렸다. "천마검법 제이초 겁륜풍!" 콰콰쾅! 퍼퍼퍼퍽! 이번에는 팔마륜과 지옥오잔이 처참하게 작살나며 퉁겨져 나갔다. 파아아앗! 위지강은 풍차처럼 휘돌면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때 궁수대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뭘 하느냐? 어서 쏴라!" 지붕과 담장 등지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궁수대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투투투투퉁! 허공에서 허리를 꺾는 위지강을 향해 사방에서 무서운 기세로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위지강은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듯한 자세로 검을 들어 허공에다 커다랗게 원을 그렸다. "천마검법 제삼초 초영비!" 콰콰콰콰콰! 화살들을 모조리 부수거나 퉁겨내면서 수백 개의 검영이 바람개비처럼 휘돌며 확산되었다. 콰콰콰쾅! 폭발하는 지붕과 함께 그곳에 있던 궁수대도 함께 시체가 되어 날아갔다. 종잇장처럼 터져 나가는 담장에 휩쓸려 분시가 된 궁수대들의 육편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위지강은 공중에서 머리를 축으로 해 빙글 한바퀴 돈 뒤 지면에 척 내려섰다. 그는 남극벌의 무리에게 둘러싸인 채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신광이 번쩍이는 눈빛을 뿜어내었다. "또 어떤 놈이 제사상에 오를 테냐?" 그를 에워싸고 있는 무리들은 모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하게 위지강을 응시하고 있는 철륭의 뒤에서 거물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맙소사! 십밀시음분에 중독된 상태에서 펼치는 무예가 저 정도라니!" "저건 도대체가 괴물이라고 표현할 수밖에는……." 흠칫하는 거물들과는 달리 철륭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허장성세. 놈은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다." 철륭의 말에 거물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공(功)을 아랫것들에게 돌리거나 입으로 영웅이 될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 것 같소만." 철륭의 부추김은 주효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물들은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놈은 지칠 대로 지쳤다!" "한꺼번에 쳐라!" 쿠쿠쿠쿠쿠! 각자의 독특한 무기를 꼬나 쥔 채 거물들은 엄청난 기세로 위지강을 향해 덮쳐갔다. 위지강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무리들을 오연한 자세로 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초점은 사라졌고 얼굴에는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빌어먹을……. 이젠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군그래!' 쿠쿠쿠쿠쿠! 지척지간을 쇄도해 오는 거물들의 공격 속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이 없는 위지강은 체념한 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틀렸어. 더 이상은 도저히…….' 콰콰콰콰쾅! 굉음과 더불어 사방으로 핏물이 확 번져 올랐다. 철륭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옆에 서 있는 염서시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위지강은 전신이 난도질당해 눈의 초점이 완전히 사라진 채 기우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무기를 꼬나 쥔 거물들이 굳어진 자세로 위지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강의 신형이 천천히 앞쪽으로 기울었다. '꿈을 꾸었는데…….' 위지강의 얼굴이 지면과 점점 가까워졌다. '너랑… 칼 대신 쟁기를 들고 농부로 살아가는 꿈을…….' 퍼억! 마침내 얼굴이 바닥에 떨어지며 위지강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버렸다. '안녕… 해월… 꽃 같은 내 사랑이여.'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위지강의 등줄기를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훑고 지났다. *** 잠송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막사 안, 술상이 차려진 탁자에는 놀란 모습의 잠송 등 칠 인이 둘러앉아 있었다. 막사 입구에는 뒷짐을 쥔 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지마옹이 서 있었고 잠송 등의 주위에는 추낙평과 곤강 등 남극벌의 고수들이 에워싼 형태로 포진했다. 그러나 잠송은 그들의 행동에는 개의치 않은 채 경악과 불신이 가득 찬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해보시오. 지금… 뭐라고 하셨소?" 구지마옹은 비웃음을 날리며 짧게 말했다. "죽었어." 잠송의 두 눈은 더할 수 없이 흡떠져 있었다. "대형이……?" "노천주의 암살을 기도했다가 도리어 본전도 못 찾았다고 하더군!." 주청산이 탁자를 주먹으로 쾅 치고 일어나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는 손을 들어 구지마옹을 가리키며 눈알을 있는 대로 부라렸다. "너 나잇살 깨나 처먹은 놈이 말 똑바로 못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헛소리야?" 호랑평도 살기 띤 음성을 토해내었다. "씨팔 새끼, 대갈통을 확 부숴 버릴까 부다!" 그러나 구지마옹은 역시 노마두다웠다. 이들이 길길이 날뛰며 자신을 모욕하는 데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무시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잠송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잠송이라고 했던가?" 잠송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구지마옹은 잠송의 어깨를 쓱 잡았다. "어차피 돌고 도는 게 인생이야." 그는 입술 가에 느물거리는 미소를 배어 물었다. "자네라고 언제까지 이등만 하란 법이 어디 있나? 더구나 내가 보기에 자네 같은 인물은 남을 다스릴지언정 남 밑에 있을 재목은 결코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주청산과 축악 등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송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구지마옹은 한껏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때, 이번 기회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그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웅지를 마음껏 펼쳐보지 않겠나? 이건 노천주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전하라는 말이네만……!" 잠송이 뒤틀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식이구려." 주청산 등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래졌다. "둘째형!"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오?" 구지마옹은 잠송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알고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과연 노천주께선 사람을 잘못보시지 않았군! 껄껄껄!"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대소를 터트렸다. "암, 자고로 사내는 때를 잘 탈 줄 알아야 출세……." 푸욱! 갑자기 섬뜩한 파육지음과 함께 대소를 터트리던 구지마옹의 눈이 확 불거졌다. 잠송은 구지마옹의 목에 비수를 깊숙이 쑤셔 박아 버렸다. 주청산 등과 추낙평 등 남극벌의 고수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진 채 순식간에 벌어진 참변에 아연실색했다. 비수의 손잡이를 콱 움켜쥔 잠송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가뜩이나 열불 터지는 판에 별 개떡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개새끼!" 구지마옹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는 경련했다. "이, 이런 미친……." 잠송은 비수를 뽑는 것과 동시에 구지마옹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차 버렸다. "저승 가면 구린내 풍기지 말고 이빨이나 잘 닦으라고, 늙은이!" 쾅! 구지마옹이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그는 한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추낙평을 위시한 남극벌 고수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들은 다급하게 무기를 뽑아들었다. 챙! 채챙! "감히 육장로를 살해하다니!" 추낙평이 대갈했다. "마도수도 죽은 마당에 남극벌과 적이 되겠다는……." 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청산의 무지막지한 주먹이 그의 복부를 관통해 버렸다. "남극벌 아니라 남극벌 할애비면 이 형님들이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 주청산이 두 주먹을 내뻗은 자세로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추낙평은 막사 쪽으로 퉁겨져 나가더니 결국은 기둥을 부러뜨리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우지직! 우르르르! 막사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는 막사를 올려다보며 잠송이 흠칫했다. "빨리 밖으로!" 파파파팟! 잠송의 다급한 외침에 주청산 등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팡! 팡팡팡! 칠 인은 막사를 꿰뚫고 허공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들은 허공에서 몸을 휘돌려 자세를 잡은 뒤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내려선 곳은 이미 남극벌의 무사들이 빙 에워싸고 있었다. 잠송과 주청산 등은 어디 하나 빈틈없이 꽉 메워진 고수들을 쳐다보며 흠칫했다. 단엽이 그들을 휘둘러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렵쇼? 이 새끼들이 어디서 이렇게 벌떼같이 몰려온 거야?" 축악도 호두알 크기의 뇌화탄이 끼워진 열 손가락을 치켜들며 반갑다는 투로 대꾸했다. "난 많을수록 좋던데 뭘 그래?" 호랑평도 빠지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씨팔, 오늘도 피바가지 꽤나 뒤집어쓰게 생겼군." 잠송은 냉철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수들을 훑어보았다. "길을 트지 않으면 모조리 죽인다." 그의 위협에 곤강이 검을 치켜들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선장 잃은 난파선이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곤강은 검을 앞으로 쭉 뻗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쳐랏!" "와아아아아!" 남극벌의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잠송 등을 향해 몰려들었다. 주청산 등은 잠송을 중심으로 각각 독특한 자세를 취하며 비장한 모습으로 투지를 불태웠다. "젠장, 몰려드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래도 내일 아침식사는 염라대왕과 즐기게 될 것 같군그래!" "어차피 유황굴에 처박혀 종칠 뻔한 인생들이었어! 깨질 땐 깨지더라도 화끈하게 붙어보자고, 씨팔!" 잠송은 제일 나이가 어린 석옥성을 쳐다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두려우냐?" 석옥성도 잠송을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농담 마십쇼, 형님!" 석옥성이 자신감을 보이자 잠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그는 살벌한 기세로 몰려드는 남극벌의 무리들을 쳐다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목숨이야 없어지면 그만이지만 명예는 한번 더럽혀지면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것!" 그는 송곳처럼 날카롭고 태양처럼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었다. "천하제일검 마도수의 아우들답게 장렬한 최후를!" 쿠쿠쿠쿠쿠! 이때였다. 갑자기 밤하늘에서 수천 개의 각종암기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퍼퍼퍽! 퍼퍼퍼퍽! "크억! "아아악! 컥!" 한꺼번에 떼거지로 몰려들던 남극벌의 무리 중 선두의 무사들이 벌집이 되며 쓰러져갔다. 곤강은 쏟아져 내리는 암기들을 올려다보며 경악성을 토했다. "뭐야, 어디서 이런 암기들이……." 그러다 그는 말을 채 다 맺지도 못하고 눈을 확 부릅떴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연들이 새까맣게 떠 있었고 연마다 백의무사들이 매달려 있었다. 주청산은 잠송 등과 백의무사들을 올려다보며 궁금증을 발했다. "저 친구들은 또 뭐야?" 이윽고 연에 매달려 있던 백의무사들이 사나운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피에는 피!" "한 놈도 남김없이 추살하라!" 그들은 땅에 떨어져 내린 즉시 다짜고짜 남극벌의 무사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슈카카칵! "으악!" "컥! 크악!" 갑자기 나타나 떨쳐내는 백의무사들의 손속에 남극벌의 무사들은 무참히 작살나기 시작했다. 곤강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어디서 저런 놈들이……." 두두두두두! 문득 지축을 뒤흔들며 들려오는 소리에 곤강과 수하들은 흠칫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곤강과 수하들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채 전방을 주시했다. 쿠두두두두! 저쪽에서 깃발을 펄럭이며 새까맣게 몰려오는 수백 기의 인마들이 보였다. 잠송과 주청산 등도 이 돌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콰두두두두!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말 위에는 백의무사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을 거느린 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치달려오는 인물은 바로 좌수경과 수홍장이었다. 그들을 알아본 남극벌의 무사들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무형도 좌수경과 태양도검 수홍장!" "도검쌍패다." 콰차차창! 쿠콰콰쾅! 미친 듯이 치달려온 도검쌍패와 백의무사들은 후미의 남극벌 무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전세는 이들의 출현으로 갑자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남극벌 쪽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죽어나가는 부하들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곤강은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악다구니를 썼다. "우왕좌왕 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하라!" 선두를 달려온 좌수경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슈칵! 십여 명의 수급이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았다. 수홍장이 검을 휘두르자 서너 명이 허리가 양분되며 내장을 쏟아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왕좌왕하며 전열이 흐트러진 남극벌의 무사들은 폭풍처럼 질주해온 말발굽에 사지가 짓밟혀 어육처럼 변해버렸다. 주청산은 갑자기 돌변해버린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잠송을 쳐다보았다. "형님, 이럴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 거요?" 호랑평이 대신 그 말을 받아넘겼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놈이 그놈인데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는 거지!" 축악이 맞장구를 쳤다. "말된다!" 잠송이 섭선을 촤악 펼쳤다.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형의 복수다!" 파앗!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가자, 형제들이여……!" 잠송이 선두에 나서자 주청산 등이 기합성을 터트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이야아아!" "야아압!" 그들은 혼전을 벌이고 있는 아수라장 속으로 덮쳐들었다. 마치 양떼 속을 누비는 늑대들처럼 잠송과 주청산 등은 닥치는 대로 양쪽의 무사들을 도륙했다. 휘황찬란한 만월이 내리비추는 장내는 수많은 인영들이 한데 뒤엉켜 혼전을 벌이며 피가 튀고 육편이 날아다니는 지옥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지난 이십여 년 간 지속돼온 무림평화 시대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일대사건이었으며, 향후 대륙의 패권을 놓고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삼웅쟁패(三雄爭覇)의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피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또한 전설적인 검업(劍業)을 쌓아올리며 중원 전역을 뒤흔들던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마도수의 죽음이 알려진 것도 바로 그 날이었으며, 그가 바로 강호일협 검존무적 위지백의 아들인 위지강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도 그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날 뒤늦게 쏟아진 폭우는 피처럼 붉은 혈우(血雨)였다고 무림야사(武林野史)는 기록하고 있었다. *** 콰콰쾅! 꽈꽝! 집채만한 거대한 바윗덩이가 폭파되며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쾅! 서너 명이 손을 맞잡고서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거목도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으아아아아!" 남궁사는 두 발로 굳건히 대지를 밟은 채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전신이 부르르 떨리고 두 주먹을 피가 나도록 움켜쥔 것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었다. 콰쿠쿠쿠쿠! 마치 태양이 폭발하듯 남궁사의 전신에서는 어마어마한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콰콰쾅! 콰쾅! 크고 작은 바윗덩이들이 강기에 부딪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수십 그루의 거목들도 무더기로 작살나며 허리가 꺾어져 버렸다. 우지지지직!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듯 무참하게 초토화된 숲 속 한복판에서 남궁사는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헉헉헉!" 그는 세상을 모두 태울 것만 같은 강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위지강이 죽고… 연해월도 불에 타 죽었다고?" 그의 동공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병신새끼!" 남궁사는 발작적으로 절규하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신경질적으로 확 빼들었다. "왜 좀더 오래 살지 못했냔 말이다, 병신새끼야!" 그가 후려친 일검에 거목이 양단되었다. 쩌억! 남궁사는 미친 듯이 계속 검을 휘둘러댔다. "넌 내 손에 죽어야 돼!" 콰콰쾅! 주위의 나무들이 마구 박살이 났다. "그렇게 쉽게 죽을 거면 뭣하러 악착같이 살아서 돌아온 거냐!" 마침내 남궁사는 눈물을 뿌리며 미친 듯이 검을 내던졌다. "왜 살아와서 그녀까지 죽음으로 끌어넣었느냐 말이다." 쾅! 내던진 검이 나무둥지에 손잡이까지 깊숙이 쑤셔 박혀 버렸다. 남궁사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이따위가 네놈의 사랑이더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전신을 경련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도대체 네놈은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거냐!" 털썩! 남궁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허물어졌다. "그만큼 뺏어갔으면 됐지. 더 이상 날더러 뭘 어떡하라고……." 잔뜩 몸을 웅크린 남궁사는 끝내 오열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우우욱!" 후두둑! 후두두둑……! 웅크린 남궁사의 등짝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하게 떨어지던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더니 마침내 소나기로 변했다. 쏴아아아아!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초토화된 숲 속 한복판에 남궁사는 무릎을 꿇은 채 마냥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 쪼르르륵! 무거운 분위기의 막사 안, 누군가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사 안 탁자에는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난 만신창이의 잠송 등 칠 인이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술병을 내려놓고 있는 좌수경이 앉아 있었다. 좌수경의 뒤에는 수홍장이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었다. 좌수경은 잠송 등을 향해 술잔을 들어 보였다. "자, 듭시다." 그러나 좌수경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칠 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좌수경은 자신의 제안이 무시당했는데도 전혀 무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술잔을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 전에 마도수에게도 한잔 술을 권하다 무안만 당한 적이 있는데 당신들은 그런 것조차 마도수를 닮은 모양이구려." 잠송이 담담하게 웃었다. "도검쌍패는 제법 멋을 아는 무인이라고 들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소문과는 영 딴판이군그래!" 좌수경은 여전히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 내가 당신들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즐기는 중이거나." 좌수경은 미소를 거두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당신은 내가 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당신들을 생포하려고 애썼는지 그 이유를 아시오?" 잠송은 느긋한 자세로 대답했다. "도검쌍패의 명성을 한껏 띄우자면 죽은 시체보단 살아 있는 전리품이 더욱 제격이었을 테지." "그렇지 않소." 좌수경은 잠송 등을 휘둘러보았다. "난 단지 상관을 잃은 최악의 조건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가면서까지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멋진 사내들과 한잔 술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오." 단엽이 피식 실소를 날렸다. "젠장, 꽤나 감동적인 얘기군그래!" 주청산이 맞장구쳤다. "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는 거 있지?" 좌수경은 이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당신들은 혹시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당신들의 대형을 만나고 싶지 않소?" 좌수경이 한 뜻밖의 말에 잠송 등 칠 인은 흠칫했다. 그들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좌수경은 보기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마도수는 아직 살아 있소." 잠송 등 칠 인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래졌다. "천마비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개벽신수 철륭이 목숨만은 살려 놓았다는 거요." 좌수경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느낀 잠송 등은 격정에 휩싸였다. "대형이 살아 계시다고……?" "그게 정말이오?" 좌수경은 이들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술잔을 들어올렸다. "일단 술잔부터 비운 뒤에 그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 내 제안이오만!" 주청산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훌쩍거리며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씨팔, 내 이럴 줄 알았다고!" 그는 잠송을 쳐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후딱 잔 안 비우고 뭘 멍청히 구경만 하는 거요?" 주청산의 고함소리에 퍼뜩 제정신이 든 그들은 일제히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술을 마시는 그들의 얼굴 위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좌수경은 술로 입술을 적시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살[肉]을 주고 뼈[骨]를 취한다……. 이것이 바로 사소취대(捨小取大)의 오묘한 도리!' *** 칠흑같이 어두운 지하대전. 구불구불 이어진 지하계단의 윤곽만이 겨우 희미하게 보였다. 저벅저벅! 이때 계단을 내려오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수하들을 거느린 채 계단을 내려오는 인물은 바로 만검산장의 장주인 상관청이었다. 그는 계단을 다 내려와 두 명의 수하가 지키는 철문 쪽으로 다가갔다. 상관청을 알아본 수하들이 황급히 허리를 꺾었다. 상관청은 철문 앞에 멈춰선 채 수하들에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수하 하나가 진저리를 치며 송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요지부동입니다. 온갖 고문이란 고문은 다 가해봤지만 한마디 비명조차 없으니 이젠 저희들이 질릴 지경이라서……." 상관청이 보고를 올리는 수하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열어라." 그의 명을 받은 수하는 황급히 철문에 채워진 커다란 자물통에 열쇠를 꽂아 철문을 열었다. 그그그그긍! 굉음을 토하며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실내는 무척 어두웠다. 그 죽음 같은 어둠 속 저쪽 구석진 곳에 큰 대(大)자로 기대 서 있는 인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상관청이 짧게 명했다. "불을 밝혀라." 명을 받은 수하가 벽에 걸린 유등(油燈)에 불을 붙였다. 순간 실내가 확 밝아지며 온갖 고문기구가 즐비한 실내의 한쪽 벽면에 만신창이의 참혹한 몰골로 쇠사슬에 사지가 결박되어 있는 위지강의 모습이 보였다. 좌수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위지강은 죽지 않았고 비참한 모습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상관청은 뚜벅뚜벅 위지강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선 그는 늘어진 위지강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극도로 지치고 초췌해진 위지강의 얼굴이 불빛 아래 드러났다. 상관청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위지강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나를 알아보겠나?" 위지강의 초췌해진 얼굴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났다. "일천검후 상관청인가?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군그래……." 퍽! 위지강의 안면에 상관청의 주먹이 정통으로 작렬했다. 위지강의 코에서는 단박에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그러나 위지강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씨익 웃었다. "좋아. 그 정도면 밥숟갈 드는 데는 지장이 없겠군!" 위지강의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상관청은 수하가 가져다 놓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객기 부리면 너만 피곤해진다."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위지강을 달랬다. "어때, 지금이라도 천마비록이 있는 곳을 털어놓고 편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호의는 고맙지만 지금도 편안한 상태라서……." 상관청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별수없이 그 녀석을 잡아다 족치는 수밖에……." 위지강이 일순 흠칫했다. '그 녀석……?' 상관청은 여유로운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우연히 네놈과 판에 박은 듯이 닮은 녀석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거든." 위지강의 얼굴에 극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 "알아본 바로는 남궁사의 자식놈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그쪽보단 네놈 쪽과 가까워 보이더란 말이야." 상관청은 철문 밖으로 사라지며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상봉시켜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도록!" 쾅! 마침내 철문이 굳게 닫히고 말았다. 그러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위지강에게는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남궁진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안돼!' 위지강의 동공이 터져 나올 듯 크게 확대되었다. '아직 마음껏 사랑도 해주지 못한 내 아들인데…….' 핏발이 곤두선 동공 위로 험악한 사내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남궁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위지강은 전신을 덜덜덜 떨면서 경련했다. '안돼! 절대로 안돼!' 그는 쇠줄이 끊어져라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통한의 목소리로 절규했다. "안돼!"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