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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왕룽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 렌화의 방으로 갔다. 렌화는 왕룽이 자기에게 와서도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애교를 피우며 말했다. "당신은 1년도 안됐는데 나를 봐도 못 본 척하네요. 차라리 찻집에 그대로 있을 걸 그랬어요......" 이렇게 말하고 렌화는 샐쭉하여 왕룽을 쳐다보았다. 왕룽은 빙그레 웃으며 렌화의 손을 자기 얼굴로 끌어다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그야 품안에 매단 보석을 밤낮 생각할 수만은 없지. 그렇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기나 하면 아쉬운 거지. 난 요즈음 큰놈 때문에 애를 먹고 있어. 그 큰놈이 어떻게 장가를 조르는지 며느리를 구하는 중인데 어디 좋은 처녀가 있어야 말이지. 이 마을의 농사꾼 딸을 데려올 수도 없고 같은 성씨들 뿐이거든. 어디 같은 성씨끼리 혼사를 치룰 수 있나. 그리고 또 성안에는 우리집에 딸을 주려고 할 만한 사람도 없고, 장사꾼들에게 중매를 부탁하려 해도 그렇지. 공연히 병신이나 바보를 중매해도 딱한 노릇이니까." 렌화는 왕룽의 장남이 키가 크고 훌륭한 미남자인 것에 호감을 갖던 터였다. 그녀는 왕룽의 이야기를 듣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찻집에 있을 때 자주 오던 사람 이야기인데요. 그분은 곧잘 자기 딸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이의 딸은 아직 어린 모양이지만 나처럼 몸이 가늘고 꼭 나처럼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그분은 줄곧 '네가 맘에 들긴 하지만 딸년을 닮아서 맘이 내키질 않는다......' 고 하면서 늘 석류화란 색시 방에만 갔죠." "어떤 사람이던가?" 왕룽이 물었다. "참, 좋은 분이었어요, 돈도 많이 있는 것 같고, 우리들에게도 준다고 약속만 하면 꼭 주었어요. 흔히들 우리들이 조금만 잘못 해도 아주 속은 것같이 야단을 치는데, 그분은 '자아, 여기에 돈이 있으니 마음껏 놀라구. 사랑의 꽃이 필 때까지' 하면서 귀공자나 학자처럼 부드럽게 말했어요. 음성도 어찌나 고운지......" 렌화는 옛 추억에 잠기는 듯 했다. 왕룽은 그녀가 그렇게 지난날의 생각에 잠기게 하고 싶지 않아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부자라면 뭣하는 사람인데?" "글쎄요. 잘 모르지만 아마 곡물 가게 주인 같아요. 저 뚜챈에게 물어봐요. 뚜챈이 그 사람의 재산에 대해서라면 더 잘 알고 있어요." 렌화가 손뼉을 치니 부엌에 있던 뚜챈에 뛰어들어왔다. 뚜챈을 불을 지피고 있었는지 뺨과 코가 불에 익어 빨갛게 달아 있었다. 렌화가 물었다. "왜, 있잖아. 그때 그 키 크고 점잖은 양반이 누구지? 내 방에 와서 나한테 자기 딸을 닮았더면서, 좋긴 하지만 석류화 방에 가겠다고 하시던 분 말야?" 뚜챈은 대뜸 대답했다. "아, 유(劉)씨예요. 곡물 가게 주인이요. 점잖은 분이구 말구요. 날 보기만 하면 손에 꼭 은전을 쥐어 주시더니." 왕룽은 여자들 말이라 믿을 수 없었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 보았다. "가게는 어딘데?" "돌다리 거리에요.'" 뚜챈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왕룽은 손을 치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곡물을 파는 집이야. 그거 잘 됐는데, 일이 잘될 것 같군." 그는 비로소 그 곡물 가게 주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와 곡물을 거래하는 곡물상의 딸이라면 여러 가지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돈이 생길 일이라면 뚜챈은 고기 냄새를 맡은 쥐처럼 예민했다. 그녀는 얼른 앞치마에 손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럼 그 일은 내가 성사시키겠어요." 왕룽은 그녀의 그 교활한 얼굴이 의심스러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렌화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게 좋아요. 뚜챈은 유씨와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일이 쉽게 성사될 거예요. 더구나 뚜챈은 그런 일에 아주 능숙하니까요. 성사가 잘만 되면 중매료를 뚜챈에게 주기로 하면 되잖아요." "꼭 내가 잘 해 보겠어요." 뚜챈은 아주 열심히 말했다. 사례금을 듬뿍 받을 생각을 하며 좋아서 싱글벙글했다. 그는 앞치마를 벗어 놓고 바쁜듯이 말했다. "곧 다녀오겠어요. 고기는 조금만 손보면 되고 채소도 씻어 두었으니까요." 그러나 왕룽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급히 서두를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나는 아직 아무 결정도 안 했어. 자, 내일 생각해 보고 다시 의논하자." 뚜챈은 돈에 탐이 나고 렌화는 이 새로운 사건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고 싶었다. "맏며느리를 보는 일인데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 이렇게 말을 내뱉은 이후로 왕룽은 며칠을 두고도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장남이 술에 취해서 다리를 휘청거리며 돌아왔다. 술 냄새를 풍기고 걸음을 뒤뚱거렸다. 그가 마당에서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왕룽이 뛰어나가 보니 큰아들이었다. 장남은 왕룽의 앞에서도 도저히 술을 못이기겠는지 그만 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처럼 토해낸 자리에 축 늘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집에서 빚은 순한 술만 마셔 왔기 때문에 독한 술은 못이기는 것 같았다. 왕룽은 깜짝 놀라 황급히 아내를 불렀다. 둘이서 아들을 일으킨 다음 묻은 흙을 씻어주고 오란의 방으로 데려다 눕혔다. 오란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큰아들은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서 왕룽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룽은 아들 형제가 같이 지내는 방으로 갔다. 둘째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서당에 갈 책을 싸고 있었다. "어제 밤에 형은 너와 같이 안 잤니?" "응......" 대답하는 양이 비밀을 감추려는 눈치였다. 왕룽은 그 모양을 보자 거친 소리로 말했다. "그럼 네 형은 어딜 갔었단 말이냐?" 그러나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큰 소리를 질렀다. "바른 대로 말 안 할 테냐? 이놈아." 이 바람에 아이는 질겁을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형이 아버지께 이르면 죽인다고 했어요. 부젓가락으로 지져 죽인다구요. 아무 말 않으면 돈을 준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자 왕룽은 펄쩍 뛰며 외쳤다. "말해! 말하지 않을 테냐?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일 테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다가는 정말 아버지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는지 곧 대답했다. "형은 오늘로 사흘째예요. 아저씨하고 같이 나갔어요. 난 그것밖에 몰라요." 왕룽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대뜸 숙부 방으로 걸어갔다. 숙부의 아들도 술에 취해서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룽의 장남보다 나이 많고 또 술에 익숙해서 말짱해 보였다. 왕룽은 사촌에게 큰 소리로 호통쳤다. "대체, 너는 순진한 우리 애를 어디로 끌고 다녔냐?" 사촌은 왕룽의 얼굴을 비웃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데려가요. 혼자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걸요." 그러나 왕룽은 다시 한번 그 건방진 태도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분해서 큰 소리로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그 애가 지금껏 어디에 있었단 말이냐?" 숙부 아들은 너무나 큰 소리에 질려 비웃던 눈길을 돌리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의 황부잣집 안뜰에 살고 있는 여자 집에 갔었어요." 이 말을 듣자 왕룽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 여자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벌써 나이도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뱅이를 상대로 몇 푼 안되는 돈에도 몸을 파는 매춘부였다. 왕룽은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나가서 밭둑길을 따라 성안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농토를 지나치는 동안 그의 밭 곡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얼마나 여물었는지조차 살펴보지 않았다. 오직 장남인 아들 일에만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성문을 지나 옛날의 황부잣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던 문은 열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그 두꺼운 무쇠 빗장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뜰 안으로 들어가니 뜰에도 방에도 세들어 사는 가난뱅이들로 꽉 차 있었다. 주위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뜰에 섰던 큰 정원수도 없어졌다. 남아있는 나무들은 말라 죽어 있었고 연못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왕룽의 눈엔 주변 환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뜰을 마주 보고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물었다. "양(揚)이란 여자는 어느 방에 있소?" 세 발 달린 걸상에 앉아서 신 바닥을 깁던 여인 고개를 들고 안뜰로 들어가는 어귀를 턱으로 가리키곤 다시 신을 깁기 시작했다. 늘 같은 물음을 받아 오기 때문에 귀찮은 모양이었다. 왕룽은 그쪽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안에서 귀찮은 듯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세요. 장사는 끝났어요. 난 이제 한숨 자야겠어요." 그는 다시 또 문을 두드렸다. "거 누구세요?"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또 문을 세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 볼 작정이었다. 그제야 여인은 문을 열었다. 그리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몹시 피로한 듯 두툼한 입술은 축 쳐져 있었고 이마의 분은 얼룩져 있었다. 뺨이나 입술의 연지도 씻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왕룽을 보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안돼요. 오시려면 밤에 일찍 오세요. 지금부터는 자야 하니까요." 그러나 왕룽은 거친 소리로 여자의 말을 이었다. 자기 아들이 이런 계집과 밤을 지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난 그따위 일로 찾아오지 않았어. 내 아들 일 때문에 온 거야." 왕룽은 아들 일 때문에 분한 생각에 목이 메일 정도였다. 계집이 되물었다. "그래, 당신 아들이 어쨌단 말이에요?" "어젯밤에 여길 왔었어." 왕룽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어젯밤엔 젊은 사람들이 여러 명 왔었어요. 누가 당신 아들인지 내가 알게 뭐에요." "잘 생각해 보우. 후리후리하고 나이보다는 키가 크고 아직 어려. 이런 데 올 줄을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왕룽은 애원조로 조용히 말했다.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아, 둘이서 온 젊은 양반인 모양이군요. 한 분은 거만스럽고 잘 아는 척하고 모자를 갸우뚱하게 쓰고...... 한 분은 당신이 말한 후리후리한 청년이고......" "그놈이오, 그놈이 바로 내 자식놈이란 말이오." "그런데 아드님이 어쨌단 말이에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부터 그 애가 오거들랑 내쫓아 줘요. 아이들은 안 받는다고 핑계를 대서라도 타일러 보내 줘요. 그 대신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갑절씩 낼 테니." 여자는 이상한 듯 빙그레 웃으며 왕룽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좋구 말구요. 일하지 않고 돈을 준다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어요. 사실 나도 그런 애송이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어른이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음탕한 눈으로 왕룽을 쏘아보았다. 왕룽은 그런 추한 꼴이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럼 잘 부탁하오."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꾸하곤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도 그 여자를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침을 뱉었다. 그날 왕룽은 뚜챈에게 말했다. "이전에 자네가 말한 대로 그 곡물상 유씨에게 말해 봐 주게. 지참금은 많을수록 좋지만 신부만 좋다면 그리 많지 않아도 좋네. 아무튼 주선해 보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란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늠름한 아들의 젊은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젊음이 넘치는 매끄러운 살결과 조용히 잠자는 얼굴을 보았다. 그 귀신같이 분칠한 갈보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오란이 들어왔다. 선 채로 아들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끓인 물에 초를 넣어 정성껏 닦아 주었다. 그녀는 황부잣집에 있을 적에 젊은 서방님네들이 술에 취해 떨어지면 이렇게 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가련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왕룽은 갑자기 삼촌에 대한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삼촌 방으로 갔다. 그는 삼촌이 자기 아버지의 동생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큰아들을 유혹해 낸 부랑자의 아비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화가 치미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배은망덕한 뱀집을 치고 있소. 그 뱀이 내게 덤벼들어 나를 물었소." 삼촌은 아침 식사 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할 일이 없는지라 한낮까지 방 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삼촌은 왕룽을 잠깐 거들떠보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러는 거지?" 왕룽은 숨을 헐떡여 가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삼촌은 웃어버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막을 수야 있나? 암내를 맡은 수캐를 암캐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거든." 왕룽은 이 삼촌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해 온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흉년이 들었을 때 얼마나 그에게 땅을 팔라고 졸라 댔던가.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들 세 식구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그의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또 숙모는 매일같이 뚜챈이 렌화를 위해서 장만하는 값비싼 음식을 같이 먹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왕룽이 애지중지하는 큰아들을 유혹까지 해서 그런 갈보년에게 끌고 갔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그는 혀를 깨물 듯이 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주시오. 지금부턴 쌀 한톨도 못 주겠소. 그따위 은혜 모르는 게으름뱅일 집안에 둬? ...... 차라리 이 방에다 불을 질러 버리지." 그러나 삼촌은 태연히 앉아서 식사를 계속했다. 왕룽은 전신의 혈관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삼촌이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자 왕룽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가섰다. "내쫓을 수만 있다면 내쫓아 보지 그래." "뭣이, 뭣이 어째!" 왕룽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 채 말을 더듬으며 대들자 삼촌은 조용히 저고리 안섶을 내보이며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슬그머니 보여 주었다. 왕룽은 말도 못하고 몸이 굳은 채 장승처럼 우뚝 섰다. 그는 그 옷 속의 붉은 수염과 붉은 천 조각을 보았기 때문이다. 왕룽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그 칼날 같은 분기가 그만 스스로 녹아 버리고 기운이 쭉 빠지는 바람에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 붉은 수염과 천 조각은 그때 중국 서북부 일대를 약탈하고 다니던 비적단의 표적이었다. 그 비적단은 도시를 습격하고 농촌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빼앗아 갔다. 그들은 흔히 농민들을 대문 앞에 결박해 놓고 가버렸다. 이튿날 사람들이 그 농민을 발견했을 때는 미쳐서 발광하는 일도 있고 죽었으면 불고기처럼 불에 타 있었다. 왕룽은 눈이 침침해질 만큼 삼촌의 옷 속을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나왔다. 그는 삼촌이 다시 젓가락을 들면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왕룽은 자기가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함정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삼촌은 여전히 그 긴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싱글싱글 웃으면서 남루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드나들었다. 왕룽은 그런 모양의 삼촌을 보기만 하면 진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 어떤 앙갚음을 할지 뒷일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왕룽이 풍성한 추수를 했을 때도, 또 홍수라든가 그 밖의 다른 일로 흉년이 들어서 굶는 일이 있어도 왕룽의 집엔 비적이 들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왕룽은 언제나 비적이 겁나서 밤이면 대문을 꼭꼭 잠그고 지냈다. 렌화를 데려오던 여름까지만 해도 옷차림을 허름하게 하고 돈이 있는 티를 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비적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그는 겁이 나서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그는 깜짝 놀라 귀를 치켜 세우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엔 비적이 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에게서는 차츰 비적에 대한 공포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하늘이 그의 행운을 도와 준다고 믿게끔 되었다. 그래서 사당의 지신님에 대한 믿음도 자연 없어져서 향불을 올린다거나 정성을 드리는 일도 잊어버린 채 다만 집안일과 논밭에 대한 생각에 전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비적을 모면하고 있는 까닭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삼촌네 식구를 부양하기만 하면 그의 집은 안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진땀이 흐르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삼촌의 속옷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 이제 삼촌에게 나가라니 어쩌니 하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숙모에게도 은근한 말로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렌화한테 가서 무얼 잡수시구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용돈에 보태 쓰시구요." 사촌에 대한 불쾌한 감정도 이따금 가슴을 내치쳤지만 그는 꾹 참았다. "얼마 안 되지만 이 돈을 받아 둬. 젊을 때는 마음껏 놀고 싶은 법이지......" 하고 사촌에게 은전을 꺼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큰아들은 엄중히 감시를 했다. 해가 지면 결코 문 밖에 내보내질 않았다. 화가 난 장남이 온갖 트집을 잡고 성을 내든, 또 제 동생에게 화풀이를 하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밖엔 내보내지 않았다. 처음 왕룽은 이러한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을 처리해야 할 걱정거리로 심난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시원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삼촌을 내쫓아 버리고 성안으로 가서 살면 밤마다 성문을 닫기 때문에 비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매일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을 하면 들판에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 흉년이 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부자가 당했듯이 비적 떼는 그런 성문도 소용 없이 습격해 올 것이고, 이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성안 관청에 가서 호소할 수도 있었다. "제 삼촌은 붉은 떼와 한패거리입니다." 그러나 밀고한들 그의 조카가 하는 말을 누가 곧이 들을 것인가? 오히려 자기는 불측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고 그의 삼촌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게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적단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비적에게 무서운 복수를 당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루도 마음놓고 지낼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다 뚜챈이 주선하는 혼사 이야기도 그를 당황하게 했다. 혼담은 잘 되었지만 그 딸이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되었으니 3년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서로 약혼만 해 두자는 것이었다. 왕룽은 3년 동안이나 견디어 나가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장남은 날마다 짜증을 내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 서당에도 열흘에 이틀은 빠졌다. 그날 밤 식사 때에 그는 오란에게 말했다. "여보, 다른 애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미리 약혼해 두어야겠어. 그랬다가 철이 들면 혼사를 치릅시다. 또 이런 일을 세 번이나 당한다면 견딜 재간이 없어." 그날 밤 왕룽은 이런저런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이 되자 두루마기와 신을 모두 내동댕이치곤 괭이를 들고 들로 나갔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집안 일이 걱정이 되면 들로 나가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었다. 바깥 마당을 지나려니까 천치 딸이 여느때와 같이 헝겊 조각을 가지고 놀며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저 계집애는 다른 애들보다 제일 내 맘을 위로해 준다니까." 그 후 왕룽은 여러 날 동안 계속 들에 나가 열심히 일했다. 흙은 다시금 그의 아픈 마음을 치료해 주었다. 내리 쬐는 강한 햇볕은 그의 가슴속에 맺친 모든 울화를 한순간에 녹게 했으며 뜨거운 실바람은 그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괴로운 심사를 뿌리째 뽑아 줄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어느 날 남쪽 하늘에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려 있더니 이윽고 부채같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서로 수근대며 공포에 싸였다. 그들은 모두들 남쪽 하늘에서 무서운 메뚜기떼가 날아 들어 그들의 농작물을 바닥낼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바람에 밀리어 그들의 발밑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한 사람이 황급히 주워 보니 그것은 죽은 메뚜기였다. 그것은 그 뒤로 밀어닥칠, 살아 있는 메뚜기 무리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 순간 왕룽은 지금까지 자기를 괴롭혀 오던 생각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렌화의 일도 아들의 일도 삼촌의 일도 순식간에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놀라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뛰어 다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아, 우리들의 밭을 위해서 이 메뚜기들과 싸웁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절망한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아니, 소용 없어. 피할 수 없는 일이야. 금년은 흉년이 들게 되어 있어. 어차피 굶주리게 되어 있는 것을 싸워 보았자 무얼 하겠소." 마을 아낙네들은 울며불며 성안으로 가서 향을 사다 사당 지신님께 정성스레 피워 올리며 지성을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성안에 있는 큰 사당에 가서 빌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천지의 신에게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메뚜기떼는 온 천하에 가득 퍼지면서 삽시간에 들판을 뒤덮었다. 왕룽은 머슴들을 불러 모았다. 칭 서방은 묵묵히 그의 곁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젊은 일꾼들과 함께 곡식이 거의 다 익은 밭에 불을 질러 밀을 태우고 넓게 고랑을 파고 샘의 물을 퍼넣었다. 그들은 모두 밤을 새우며 일했다. 오란을 비롯해 아낙네들은 밤참을 날랐다. 남자들은 무서운 짐승처럼 부랴부랴 밤참을 퍼먹고는 밤낮 없이 일했다. 이윽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대기는 메뚜기떼의 날개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밭으로 소낙비처럼 떨어져 오는 것이다. 그냥 날아 지나간 밭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일단 내려앉은 밭은 마치 겨울 밭처럼 잎사귀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라고 단념해 버렸으나 왕룽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메뚜기떼를 닥치는 대로 때려 죽였다. 그의 머슴들도 도리깨를 휘둘러 수없이 많은 메뚜기떼를 때려 잡았다. 불에 떨어져 타 죽은 메뚜기도 있고 고랑물에 떨어져 죽은 놈들도 있었다. 이렇게 몇백 번이나 헤아릴 수없이 죽였으나 구름떼같이 엄청난 메뚜기떼인 만큼 거의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왕룽에겐 그렇게 싸운 보람이 있었다. 상당한 피해를 모면했던 것이다. 메뚜기떼가 지나간 뒤에 겨우 한숨 쉬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그의 밭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상당히 수확할 양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못자리에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마을 사람들은 메뚜기를 볶아서 맛있게 먹었으나 왕룽은 그렇게 몸서리치던 생각에 나서 먹지 않았다. 오란은 기름에 튀겨서 머슴들과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도 메뚜기의 눈알이 무서워서 날렵하게 뜯어 먹었으나 왕룽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메뚜기떼는 왕룽의 번거롭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1주일 동안이나 밭에서 메뚜기떼와 싸우는 동안 집안의 걱정스러운 일도 마음의 공포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는 침착하게 자기를 타일렀다. "사람은 누구나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거야. 나도 공연히 이것저것 근심할 게 아니라 마음 편히 지내 보자. 삼촌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먼저 죽겠지. 큰놈도 어떻게 한 3년만 지나면 장가를 들 게고. 아무튼 걱정 때문에 자살할 정도는 아니니까.' 밀을 거두어 들이자 비가 내렸다.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었다. 그리고 또 여름이 되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