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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3권 제2장 팽후(彭珝)의 자존심 대결
①
꽈꽝―!
청심거가 통째로 박살났다.
구름다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하늘을 뒤덮는 것은 흙먼지가
아니라 물기둥이었다.
쏴아! 하고 솟구친 물기둥 사이에는 각종 관상어들이 한줌 핏덩이
로 변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촤아아!
까마득히 솟구쳐 올랐던 물기둥이 연못에 떨어지면서 천지팔방으
로 물을 퉁겼다.
물이 전신을 적시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하나의 점으로 변해
사라지는 흑무(黑霧)를 보는 신비선옹의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기어코 혼세흑마강(混世黑魔 )을 완성했구나. 허허허, 이걸 축하
한다고 할 수 있을는지……."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입가를 타고 붉은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세상에! 천하에 누가 있어 신비선옹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
가.
그의 말 속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혼세흑마강!
황건적에서 마교로, 마교에서 천마교주로 이어진 개세마공(蓋世魔
功), 현존하는 최고 마공인 칠대마공(七大魔功)조차 무시해도 좋
을…….
"그러나 아가야, 너는 모를 것이다. 조화선공을 깰 수 있는 무공
은 없다는 것을… 만약 단호삼, 그 아이에게… 커억!"
신비선옹의 입이 벌어졌다.
주먹만한 핏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밀려 올라왔다. 핏덩이 속에 잘
게 부서진 내장 조각들이 언뜻 보였다. 극심한 내상(內傷)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치유하기 힘들 정도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선옹은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허공
을 더듬는 눈길도 여전했다.
그때다.
스슷.
낙엽이 뒹구는 듯한 미세한 음향이 들리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신비선옹과 같은 마의를 입은 이십사 세 정도의 청년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유난히 돋보이는 그는 바로 추상은린검 금호였
다.
"어르신……."
부축하기 위해 무심결에 손을 내밀던 금호는 주춤했다.
자신보다 체구는 작다. 허나 겉모양이 그럴 뿐이지 금호로서는 감
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거인(巨人)이었다. 그런 거인이 다쳤다고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 뒤, 신비선옹은 천천히 몸
을 돌렸다.
두 눈이 허공에서 부딪히는 순간 금호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신비선옹의 눈.
언제나 바다 같고, 하늘같았던 그의 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여인이 누구기에?'
이때 문득 신비선옹의 입가에 허허로운 미소가 감돌았다.
"알려고 애쓰지 마라. 알아도 네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터."
"하오나……."
"됐다."
손을 저어 가만히 금호의 말을 제지한 신비선옹은,
"오늘 보고 들은 것을 도연에게 전해 주어라. 그 아이를 부탁한다
는 말과 함께……."
도연이라 함은 장백검유 왕도연을 일컬음이리라.
일전에 먼발치에서 왕도연을 본 적이 있던 금호는 무슨 말인가 하
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긴 한숨을 토하며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②
여명이 천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려운 줄 모
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밤중과 마찬가지였다.
신분이 철저히 대물림되는 계급사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동이 트는 이 무렵에 벌써
몇 마지기의 밭이랑을 매고 힘없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끼 식사를 한 뒤에 이 길을 또 걸어갈 것이
다.
한데 이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뽀얀 황진 속에 몇 마리의 말이 달리
고 있는지, 또 누가 타고 있는지 농부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무식하게 달리는 저 말발굽에 밟히면 내년 오늘이 제삿날이
라는 것만 알 뿐이다.
농부들이 분분히 한옆으로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휭하니 지나갔
다.
그 짧은 촌각에,
"마륭방이 이 시각에 웬일로 서안으로 들어가지?"
황진(黃塵) 속에 펄럭이는 붉은 깃발을 본 한 농부가 자신도 모르
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올해로 열넷이 되는 아들의 눈이 토끼
눈이 되었다.
"강호인들은 정말 멋있어! 하늘도 훨훨 날아다니면서 천하를 유람
할 수 있고. 나처럼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동경으로 가득한 음성이었다. 어느새 눈동자가 꿈을 꾸는 듯 몽롱
하게 변하는 것을 본 농부는 아들의 등짝을 소리나게 철썩 때렸
다.
'아얏!' 하고 올려다보는 아들의 맑은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농부
는 말했다.
"너는 어째서 밝은 면만 보느냐? 강호인들에게는 어두운 면이 더
욱 많단다. 예를 들면, 우리처럼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자지도 못
해.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사람이란 그저 세끼 밥
을 배불리 먹고, 등 따습게 잠을 자는 게 제일이지. 그런 걸 보면
강호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생들이지……."
강호인들을 동경하는 아들과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 부자(父子)간
의 대화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산을 동경하는 사람과 산을 이루고 있는 숲을 보는 사람 중 누구
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요란한 말굽과 울음소리에 만접열화루 후원문의 쪽창을 빼꼼 열고
보던 녹산영웅문도 하나가 놀라 소리쳤다.
"앗! 마륭방이다! 어서 문주님께 알려!"
그때다.
중앙에 있는 오순 가량의 노인에게 뭐라고 지시를 받고 말에서 내
려 걸어오던 붉은 적의(赤衣)에 피풍(皮風)을 걸친 사내가 문으로
다가와 번쩍 손을 드는 것을 보고 그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
다.
"피해! 문을 부술 모양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꽝!
오동나무로 만든 문이 박살나면서 나뭇조각을 사방으로 뿌렸다.
피피피잉!
모양도 사납게 제멋대로 부서진 조각들이 허공을 가르며 파공음을
만들었다. 끝이 날카로워 맞으면 상당한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
다. 허나 미리 피해서인지 아니면 피하기를 기다렸다가 손을 써서
그런지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숨에 문을 부순 적의사내는 한옆으로 물러나며 허리를 굽혔다.
"들어가시지요, 각주님."
머리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한 오순 노인은 말을 몰고 그대로
후원으로 진입했다.
따각따각!
세상에 바쁠 것이 없다는 듯 일정한 말발굽 소리를 내는 말은 눈
처럼 하얀 털을 가진 설총마(雪 馬)였다.
멋진 대비(對比)였다.
새하얀 설총마와 새까만 흑의를 입은 노인은 약간 검은빛이 도는
피부에 긴 눈썹은 귀밑까지 내려와 있었고, 그 아래 자리한 가느
스름한 눈에서는 번쩍이는 안광(眼光)이 서리서리 뻗어 나오고 있
었고, 불쑥 튀어나온 태양혈로 보아 일견에도 내외공을 겸비한 고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
이 좁은 곳에 다 어떻게 있었는지 무려 삼백여 명이 우르르 모여
들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멈춰라! 더 이상 들어오면 살수를 쓰겠다!"
고함을 친 사람은 대감도를 든 용맹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과거
검문 마령당의 무사였다가 지금은 녹산영웅문의 도풍당 소속이 된
단혼도(斷魂刀) 엽하룡(葉 龍)이다. 기실 단혼도라는 멋진 명호도
녹산영웅문도들이 지어 준 것이다.
'쓸만한 놈이군.'
엽하룡의 호기로운 눈빛을 내려다보며 적이 감탄한 흑의노인은 부
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마륭방 귀혈각(鬼血閣)을 맡고 있는 과두성(戈斗星)이라
하네. 가서 팽문주를 뵈러 왔다고 전해주게."
순간 엽하룡은 흠칫 놀라 부지간 경악성을 터뜨렸다.
"화삼객(火森客) 과두성!"
화삼객 과두성이라는 이름은 당금 대남북을 울리고 있었다.
마륭방에는 철마(鐵魂), 벽인(壁忍), 귀혈(鬼血)이라 불리는 세
개의 각(閣)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알려진 곳이 바로 귀혈각이었
다.
다른 철마각, 벽인각보다 강호상에서 많은 활동을 해 귀에 익숙하
기도 하나 그보다는 과두성이라는 이름이 더욱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익힌 삼양전공(三陽電功)은 가히 무림일절이라 칠파일방의
장문인이라 하더라도 쉬이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일반된 견
해였다.
③
엽하룡이 주춤하는 순간,
"본 문주가 바로 팽후요."
담담하면서도 제법 위엄이 담긴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후원의 건
물에서 걸어나왔다.
독심검 팽후였다.
그의 뒤에는 쌍부무적 서황과 구환금도 두진을 비롯해 사왕 지다
생, 이호, 마광수 등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맨 뒤에는 죽을죄
를 지은 죄인 마냥 고개를 푹 숙인 낙일검객 영호초가 뒤따르고
있었다.
삼백여 명의 녹산영웅문도들이 물결처럼 쫘악 갈라지며 일제히 허
리를 굽혔다.
"문주님을 뵈옵니다!!"
마치 한 사람의 입에서 터진 듯 일사불란하였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예전에 비적질을 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 때문인지 과두성의 눈가로 언뜻 놀람이 스쳤다.
'허! 산적 떼라 생각하고 업신여겼는데, 소문보다 훨씬 절도가 있
고 기개(氣槪) 또한 높군!'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하며 걷던 팽후는 십 장 거리를 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깨를 슬쩍 치켜올려 보이며 입을 열었
다.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픈데 일단 하마(下馬)하는 것이 어떻소?"
태연한 그의 태도에 껄껄 대소를 터트리며 말에서 내린 과두성은
짐짓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흔들었다.
"허허허! 과연 녹산영웅문주다운 위엄이외다."
"과찬의 말씀."
과두성의 속셈이 뭔지 모르는 팽후는 가볍게 겸양한 후에 말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본 문주를 찾아온 까닭이 무언지 묻고 싶
소."
담담한 음성이었다. 허나 그는 내심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화삼객 과두성이라는 이름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마륭방이라는 어마어마한 집단이 턱 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자식, 떨고 있군.'
과두성은 능구렁이답게 팽후의 내심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의뭉
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허허허! 먼저 변명부터 해야겠구려."
"……."
"사실 본방의 협서분타에 한 사람이 찾아왔소. 그 자가 말하길,
만접열화루에 팽문주가 계신다고 하기에 얼굴이나 뵈려고 이렇게
불원천리 달려왔지요."
순간 팽후의 눈이 반짝 빛났다가 사라졌다.
무언가 생각나는 일이 있지만 지금에 와서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그는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아직 본 문주의 말에 대답이 없는 걸로 아오만."
"이제 말을 할 참이었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과두성은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받아넘긴 후 짐짓 눈알에 힘
을 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본방에 가입하면 친구요, 안 하면 적
으로 간주하겠소!"
"으음!"
팽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며 신음을 흘렸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답지 않게 예의를 지키는 과두성을 보면서 어
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 당장 할말이 없었다.
'허!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인간답게 살
아 보려고 했는데.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기분이 몹시 씁쓸했다.
말이 좋아 가입이지 한 문파가 다른 문파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굴복이다. 살고자 하면 그렇게 하면 살 수는 있다. 허나 그렇게
되면 자신만을 믿고 강호에 뛰어들어 손에 피를 묻힌 단호삼의 마
음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 우직스럽도록 순박했던 마음을…
….
그리고 지금 긴장된 눈으로 자신의 입을 주시하는 저 눈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기 원하는 것일까.
다행히 팽후는 고심을 오래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황이 불쑥 나서
며 하는 말 때문이었다.
"본문의 이름이 바로 녹산영웅문이외다! 영웅은 죽을지언정 꺾이
지 않는 법! 정중히 사양하겠소!!"
순간,
"옳소! 영웅은 비겁하지 않소이다!"
"맞다! 싸우자!"
"영웅이 마졸(魔卒)들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
어느 누구 하나 빠짐없이 녹산영웅문도들은 병기를 흔들며 목청껏
소리쳤다.
산천초목이 부르르 떨고도 남을 함성을 들은 팽후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멋져! 서황, 넌 정말 멋진 놈이야!'
째째째짹!
나무 위에서 저 인간들이 아침부터 무슨 짓을 하나 하고 내려다보
고 있던 참새 떼들이 놀라 일제히 날아오르며 요란하게 울음을 터
뜨렸다.
고막이나 안 터졌는지?
과두성의 얼굴이 음산하게 변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데 글방
선생같이 예의를 차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행위나 마찬
가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중에 문책을 받지 않으려면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다.
그는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온 살기를 꾹꾹 다졌다.
④
"팽문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중요한 것은 팽문주의 생각이 아니겠
소?"
팽후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바보 아냐, 이거. 듣고도 모르다니. 백성이 있어야 황제가 있지.
수하 없는 문주 봤어?"
결론은 났다. 과두성의 전신에서 살기가 뭉클 피어났다.
"흐흐흐, 어리석은 놈! 권하는 술은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겠다?"
그 말을 들은 팽후는 이죽거렸다.
"벌주도 술이다, 너."
순간 과두성은 눈알이 훼까닥 돌아갔다.
"으으! 이놈, 죽여주마!"
"그게 어디 네 마음대……."
자신보다 고수인 과두성을 갖고 노는 재미가 나쁘지 않아 다시 이
죽거리려던 팽후의 눈이 돌연 커짐과 동시에 좀 전보다 더 큰 함
성이 터졌다.
"와아! 단호법님이 오셨다!"
실로 극적인 등장이랄 수밖에 없었다.
그 소리에 놀란 과두성은 벼락같이 빙글 몸을 돌렸다.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적의를 걸친 자신들의 수하와 흑의(黑衣)에 생전 햇빛 한번 보지
못한 듯 창백한 안색을 가진 사내들.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끄
는 사람은 다른 사내들 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커 보이는 봉두난
발의 사내였다.
'저놈이 철탑검귀 단호삼인가? 그렇다면 뒤에 있는 놈이 아니었다
는 것.'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과두성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원래 그는 팽후가 나타나자, 팽후보다는 그 뒤편에 있는 사람들에
게 신경을 쏟았다. 왜냐하면 그 속에 단호삼이 있을 거라는 생각
에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덩치가 제일 좋아 보이는 서황을 단호
삼으로 여기고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진짜 단호삼이 나타났고, 그를 보는 순간 과두성은 숨
이 턱 막혔다.
고수가 될수록 그 기세만으로 상대를 저울질할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단호삼에게서는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텅
빈 허공을 보는 느낌이었다.
사룡 중 둘이나 격퇴시키고 검문의 똥줄을 뽑았다는 소문만 아니
라면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범부로 여길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
지지 않았다.
'마후(魔后)에 버금가는 절대고수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렇다고 마냥 떨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과두성은 심호흡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길을 터 줘라."
팽후는 슬쩍 한 발을 내딛었다.
순간 단숨에 이 장 거리를 압축시킴과 동시에 왼팔이 기묘한 각도
로 꺾이며 과두성의 가슴팍을 쳐나갔다.
산과 바다를 가리고 막는다는 염수권의 추산전해(推山塡海)라는
초식이었다.
그 수법이 실로 현묘한 바가 있고 빠르기 또한 남다르는 것에 과
두성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백전노장(百戰老將)인 그
는 팽후의 수법이 속도와 변화에 비해 내공이 심후하지 못함을 깨
닫고,
"흥! 그 정도로 감히 노부를 상대하려 했느냐?"
비웃음을 날리며 자신의 독문기학(獨門奇學)인 삼양전공을 싣지도
않고 두 손을 마주쳐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은한 진동음이 들
려 과두성의 내공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쏘아낸 장풍이 막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한데 돌연 팽후가 왼손을 재빨리 회수한 뒤 허공으로 도약했다 싶
은 순간, 허리춤에서 한 줄기 번갯불 같은 검기가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쌔액!
검기가 정수리를 따갑게 만들자 과두성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
다. 처음 초식이 자신을 유인하기 휘한 허초(虛招)였으며, 이를
위해 팽후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펼친 검의 위력으
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교활한 놈!"
팽후가 교활하던 말았던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터라 과두성
은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나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수십 년이나 몸
에 익힌 유성간월(流星間月)이라는 신법이 대책 없이 펼쳐진 것이
다.
그래서일까.
등줄기로 한 줄기 검기가 스치며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보지 않
아도 알 수 있었다. 쾌속함을 자랑하는 유성간월 신법을 허둥대며
펼친 대가인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몸도 돌리
기 전에 뒤에서 공기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파파파팡!
이 소리는 일단 선기(先期)를 잡은 팽후가 과두성을 따라가며 몸
을 허공에 띄운 채로 이기선풍각을 시전하는 파공음이었다.
욕이 입 밖으로 밀려나왔지만 할 겨를이 없는 과두성은 어금니를
빠드득! 갈아붙였다. 몸을 돌릴 기회를 줘야 무슨 대책이 있을 것
이 아닌가.
허나 순간적인 방심이 낳은 결과였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
"이기는 자가 장땡이다!!"
아마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전부 들을 수 있게 커다랗게 고함을 지른 과두성은 게으른 당나귀
가 땅을 뒹군다는 뇌려타곤(牢驢墮坤)이라는, 신법도 아닌 신법으
로 데구르르 구른 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귓속으로 야유와 함성이 동시에 들려왔다.
'우우' 하는 야유는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와아! 최고다!'
하는 함성은 팽후에게 보내는 것이리라.
일순간 목숨을 부지했고, 몸을 돌릴 촌각의 여유도 찾았다. 허나
그것이 무인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뇌려타곤으로 구함을 받
았으니.
⑤
일시간 수치심으로 홍당무처럼 벌겋게 물든 그는,
"이놈!"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득달같이 팽후에게 달려들었다. 단숨에 발
기발기 찢어 죽일 기세였다. 그러나 기세만 그렇다 뿐이지 마음대
로 되지 않았다.
선기를 빼앗긴 터였고, 팽후의 무공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
문이었다. 게다가 손인가 싶으면 발이고, 발인가 하고 틀어막으면
어느새 검이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대결은 눈 깜짝할 사이 수십 초를
주고받았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장내에는 검풍과 장풍만이 뒤흔들릴 뿐
이들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초수(招數)가 거듭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녹산영웅문도들은
팽후의 놀라운 무위(武威)에 입을 쩍쩍 벌리는 반면 마륭방의 귀
혈각 무사들의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들의 각주인 과두성이 한 사람
을 맞이하여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
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한곁에서 예리한 눈으로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대결을 보고 있던 환사가 단호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군, 저대로 두실 겁니까?"
역시 환사였다.
다른 사람과 달리 그도 자신처럼 두 사람의 대결을 볼 수 있었고,
팽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팽후는 초식의 현란함과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과두성을 몰아붙이고는 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초
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반면에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미와 정순한 내공을 지닌 과두성은
여유를 찾아 가끔씩 날카로운 반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
호일절(江湖一絶)이라는 삼양전공을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것이
다.
얼굴을 찌푸리고 장내를 응시하고 있던 단호삼의 얼굴이 돌려졌
다.
"무슨 방법이 있소?"
"격공수력(隔空授力)을 쓰면 될 것 같습니다만……."
격공수력은 허공을 격하고 본신(本身)의 진원진기를 다른 사람에
게 전달하는 상승내공부의 일종으로, 진원진기를 전달받은 사람은
일시적으로 내공이 높아지는 수법이다.
단호삼은 문득 씁쓸한 미소를 입가를 매단 채 고개를 저었다.
"난 격공수력을 시전 하는 방법을 모르오."
"!"
환사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출렁거렸다.
어려운 일이었다. 소위 주군이라 불리는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덕(德)이라기보다 어쩌면 무능력자로 오인 받기 딱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환사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단호삼의 일신 무공
도 무공이지만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수하와 아무런 격의 없이, 어쩌면 친한 친구나 부모형제를 대하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환사를 비롯해 흑매나 단호삼을 따르기
로 결심한 팔십여 살객들에게는―나머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떠났음―메마른 감정에 정(情)이라는 물을 뿌린 듯 달콤했다.
환사가 말이 없자 단호삼은 흐릿하게 웃으면 물었다.
"내가 무능력하게 보이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환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속하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만한 일로 무슨 죽을죄씩이나… 그보다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허락하신다면 속하가 해보겠습니다만."모모
"허락은 무슨… 오히려 내가 부탁할 일이지요. 그런데 그 격공수
력을 시전하면 진원진기가 손상을 입지는 않소?"
순간 환사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가 언제 이런 따뜻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도 할 수가 있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한두 시진 운공하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제아무리 운공을 해도 내공 일 성 정도는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말을 흐린 환사는 걱정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팽문주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기실 단호삼은 후원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옆으로 비켜섰었다. 이것
은 과두성더러 그만 철수하라는 무언의 암시였고, 남아 보았자 결
코 좋은 일이 없다고 판단한 과두성은 내심 '다음에 만나면 모두
죽여주마.' 하고 이를 갈면서 물러나려 하였다.
그때, 돌연 팽후가 나섰다.
화삼객 과두성의 무공이 얼마인지 알고 싶다고.
그렇게 한 팽후의 속마음은 그토록 오만하게 행동하던 과두성이
단호삼이 나타나자마자 상갓집 개처럼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고
명색이 녹산영웅문주라는 사람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올시다였기
때문에 싸움을 청한 것이리라.
당시 자신의 허리에 걸린 백혼검을 보고 흠칫 놀라다가 그런 말을
한 팽후의 눈빛을 기억하는 단호삼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왼손이 아니라 허리에 백혼검을 두를 정도도 단호삼이 발도술에
자신이 생겼음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말은 곧 팽후가
단호삼에게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하
는 것!
그는 장내로 시선을 돌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정도의 무위를 보였으니 괜찮겠지요. 그리고 지금 상황은 이
를 마다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아닌게 아니라, 말 몇 마디 나누는 사이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
가고 있었다.
팽후의 손발이 어지러워졌으며, 거친 호흡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왔다. 저런 식이면 앞으로 단 십 초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한발 뒤늦게 이를 깨달은 환사는 전신 내공을 끌어올린 뒤 격공수
력의 진결(眞訣)을 암송하면서 말했다.
"속하 쪽으로 등을 돌리라고 전해 주십시오."
격공수력을 전개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알아듣는 단호삼이다.
그는 재빨리 팽후에게 전음을 보냈다.
(격공수력을 쓸 테니 이쪽으로 명문혈이 보이도록 하시오!)
전음을 들은 팽후는 내심 뛸 듯이 기뻤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
만 이 나이 되도록 뭐했나 싶어 과두성에게 도전한 것이다.
그리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감
도 들었다. 약간의 속임수를 썼지만 단 이 초만에 과두성의 등을
찢었고, 삼 초에는 뇌려타곤을 펼치게 만들었으니 무리도 아니었
다.
한데 지금은,
슈웅!
불끈 쥐어진 주먹이 바로 코앞에 닥치자 '이크크!' 하고 놀란 팽
후는 머리를 옆으로 제치며 다급히 유운보(流雲步)를 전개해 빙글
반선회했다.
⑥
단호삼에게 명문혈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순간 스치듯 지나간 과두성의 팔이 멈칫하다가 팔이 기이
한 각도를 형성하며 다시 면상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유운보가 아니라, 유운보 할아비라도 피할 수 없었다.
너무나 근접한 거리였고, 격공수력을 받기 위해 정신을 잠시 팔았
기 때문이었다.
"헉!"
마파람을 들이킨 팽후는 황급히 손바닥을 펴 틀어막았다.
펑!
주먹과 손바닥이 부딪히며 마치 가죽 북을 두드린 듯한 소리가 들
렸다.
'윽!'
내심 비명을 지르는 팽후는 왼팔이 전류에 감전(感電)된 것처럼
찌르르 마비가 되면서 가슴에 둔중한 충격을 받고 울컥! 한 모금
의 피를 토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뒤로 주르르 밀려나던 그는 다
급히 단호삼에게 전음을 보냈다.
(뭐하고 있어! 죽고 나서 격공수력을 보낼 거야!)
'놈! 이제 끝이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과두성은 이제 끝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하
며 불쑥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두 팔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가
벼락같이 내밀었다.
꽈릉!
그의 장심에서 거대한 붉은 기둥이 솟아났다. 강철마저 녹일 열기
가 담긴 장공(掌功) 속에서 번갯불 같은 것이 빠지찍 소리를 내고
있었다.
드디어 삼양전공이 펼쳐진 것이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팽후의 전신 피부는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
럼 뜨거웠다.
절대절명의 순간, 자신의 명문혈로 들어오는 한 줄기 기운을 느낀
팽후는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검을 휘둘렀다.
"육합개천(六合開天)!!"
피하지 않고 도리어 마주쳐오니 좋아라 해야 할 과두성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버렸다.
파츠츠츠!
검기의 물결!
이제와는 영 딴판이 아닌가. 저놈이 지금까지 자신과 싸웠던 그놈
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완연히 달랐다.
속았던 것이다. 놈은 진짜 실력을 감추고 짐짓 허둥대다가 피를
토하는 고육지계(苦肉之計)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완전히 당했어.'
과두성은 자신의 미간으로 쏘아지는 검을 보며 속은 것이 너무 억
울해 입을 있는 대로 벌렸다.
"아아악!"
과두성의 시체를 수습하는 귀혈각의 무사들을 보며 모두들 한소리
씩 했다.
"야! 빨랑 데리고 꺼져!"
"자식들이 말야. 어디 와서 개 폼을 잡고 있어?"
한 사내가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등에 대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질렀다.
"어이! 다음에는 우리 문주님과 니네 방주 놈하고 한판 붙자고
해!"
"맞다! 그 말을 꼭 전해!"
순간 늠름한 기세로 서 있던 팽후의 얼굴이 떫은감을 씹은 듯 구
겨졌다.
'저 미친놈. 누구 죽는 꼴을 보려고 저따위 말을 해!'
그때 문득 한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고 다가오는 것을 본 팽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낙일검객 영호초였다.
팽후의 턱이 하늘로 치켜세워졌고 눈은 한없이 아래로 향해졌다.
"너, 본 문주에게 할말이 있을 텐데."
영호초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는 기어 들어가
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그게 팽후, 자네 이름을 혼
자서……."
팽후의 입에서 짤막한 말이 튀어나왔다.
"문주님!!"
화들짝 놀란 영호초는 잽싸게 말을 바꾸었다.
"그, 그래. 문주님 이름을 혼자서 중얼거렸는데… 너무 반가운 마
음에서… 그때 글마가 듣지 않았나 싶네. 새끼, 귀도 밝지……."
횡설수설이었다.
그 순간,
"싶네요!!"
팽후는 또 말을 수정해 주었고, 영호초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던 단호삼은 피식 웃었다.
"능청스럽기는……."
그 말에 환사도 덩달아 가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후후후, 그런데 팽문주의 무공이 저렇게 뛰어날 줄은 정말 몰랐
습니다. 속하가 격공수력으로 내공을 좀 보탰지만 과두성을 일검
에 죽이다니."
혀를 내두르던 환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특히 마지막에 펼친 육합개천이라는 초식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육합검법 냄새가 좀 나는 것도 같았는데."
단호삼이 그 의혹을 풀어 주었다.
"육합검법의 연환식이오."
"예에?"
들었지만 너무 놀라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환사를 보
며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오."
가볍게 대답한 단호삼은 대견스런 눈으로 팽후를 보며 중얼거렸
다.
"그 동안 열심히 육합검법을 익히더니, 상당한 진전이 있었군."
기실 팽후뿐만 아니라, 녹산영웅문의 모든 무사들이 육합검법으로
착실히 기초를 다지는 도중에 그 동안 그들이 익혔던 무공들의 허
점이 저절로 보완돼 이제는 어디 내놓아도 자신의 밥그릇은 챙길
정도였다.
더욱이 팽후는 육합검법의 연환식을 자신 나름대로 소화시켜 육합
개천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물론 그 위력이야 조화선공을
바탕으로 한 단호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단호삼보다 살기(殺
氣)가 많아 굉장한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⑦
단호삼과 긴한 이야기를 마치고 서황을 비롯한 녹산영웅문의 중요
인사(人士)들이 기다리는 실내로 의기양양하게 들어와 자리에 앉
던 팽후는 갑자기 코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윽! 이게 무슨 냄새?"
"!"
느닷없는 말에 단호삼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코를 벌
름거리자, 팽후가 눈을 하얗게 치켜 뜨고 휘휘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아, 자네 몸에서 나는 냄샌데 맡기는 왜 맡아! 어서 썩
떨어져 앉게."
단호삼은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여태까지 아무 말 없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엉뚱한 소리
요."
"그거야 좀 전에는 기분이 좀 그래서 못 맡았던 게지."
말하던 중 좀 쑥스러워진 팽후는 고함을 빽 질렀다.
"아, 가라면 가! 계집도 아닌 내가 뭐가 좋다고 옆에 앉으려고 기
를 쓰는 거야!"
단호삼이 쌍심지를 켜고 한마디하려는 순간,
"아닌게 아니라 냄새가 좀 심하군그래."
서황에 이어 사왕 지다생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한술 거들
었다.
"대체 그 동안 어디 처박혀 있었기에 꼴이 거지꼴이오?"
'말을 해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버틸 재간이 단호삼에게는 없었다. 그는
덩칫값도 못하게 얼굴을 조금 붉히며 의자를 들고 아예 벽 쪽에
자리를 잡아 털퍼덕 앉으며 소리치듯 물었다.
"됐소?"
"이제 좀 낫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팽후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스르르 감으며 다 들을 수 있는 말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혈전을 벌였더니 좀 피로하구만.
하니 단호법이 좀 수고해 주시오."
화삼객 과두성과의 대결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들 그럴 거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하는 것을 보고
단호삼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젠장! 직접하기로 해놓고 막상 말하려니 뒤처리가 겁났던 거야.'
그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목!' 하고 이목을 집중시킨
후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문은 여타 방파와 달리 세 가지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확실한 거처가 없음이오! 둘째는 흑백(黑白)으로 완전히 갈라진
현 강호에서 본문은 어떤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이를
달리 말하면 마륭방과 무림맹, 둘 다 본문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
는 것이오!"
"음!"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강호에서 녹산영웅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방파가 정도
와 사도무림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겁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이런 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단호삼은 격려의 말 대신 더
욱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위협에도 굴해서는 아니 되오! 그리고 그들
은 지금 우리에게 눈을 돌릴 여유도 없는 상태외다! 설사 그때가
오더라도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오.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단호삼은 일부러 '우리'라는 말을 썼다.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라
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효과가 있었던지 굳어졌던 얼굴들이 조금씩 풀어졌고, 서로의 눈
을 찾으며 억지 웃음이라도 지으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었다.
"셋째!"
모두의 눈이 단호삼에게로 쏠렸다.
"세 번째는 이제 명령 계통을 확실하게 할 때라는 것이오. 이는
어떠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우왕좌왕하는 일없이 일사불란하게 움
직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오! 그래서 차제에 인사 이동을
실행코자 하니 모두들 그대로 따라주시길 바라오!"
환사와 흑매, 그리고 살청막―단호삼이 없는 사이 이미 수인사를
나눈 터였다―의 살객들이 새로이 가입했으니 올 것이 왔다는 심
정이었다.
누가 강등(降等)될 것이며, 누가 승진 내지는 그 자리에 남을 것
인가?
모두들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단호삼의 말은 일사천리(一瀉千
里)로 이어졌다.
"시간관계상 호칭 및 존칭을 생략하겠소. 양지하길 바라며… 먼저
광풍당주에는 영호초. 천풍당주에는 흑매. 질풍당주에는 옥마자
(玉魔子). 환사는 본문의 호법이오. 그리고 현재의 당주들은 부당
주로 임명하겠소!"
옥마자는 살청막에서 남은 여섯 일급 살객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삼십 초반의 사내였다.
순간 장내에 희비의 쌍곡선이 그어졌다.
'자식들! 그러게 평소에 나처럼 열심히 덕을 쌓을 것이지.'
하며 히죽거리는 서황이 있는가 하면,
'제기랄! 설마 했는데 역시였어.'
하며 속이 쓰라린 사람들은 당연히 강등된 세 사람이었다. 그들
중 가장 입이 많이 튀어나온 천가진을 향해 단호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천부당주, 무슨 불만이 있소?"
천가진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불만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있으면 지금 말하시오. 앞으로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니 말이
오."
"그러시다면……."
부드러운 단호삼의 말에 용기를 얻은 천가진은 돌연 침을 퉁기며
빠르게 말했다.
"사실 속하의 능력으로는 천풍당주라는 직분이 가당치 않다는 것
을 잘 압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계집 밑에… 아, 그 정도도 참을
수 있다 이겁니다. 한데 문제는!"
돌연 힘차게 말을 끊은 천가진은 서황에게로 눈을 돌렸다. 흑매가
도끼눈을 뜨고 '너, 앞으로 편하게 생활하기 글렀다!' 하고 내심
이를 뽀드득 갈아붙이는 것도 모르고 그는 기세 좋게 손가락을 척
들어올리며,
"사실로 따지자면 저 서호법이 제일 무공이 약하고, 제일 무식합
니다. 그런데 어째서 계속 호법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까?"
뜨악한 서황은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제일 무공이 약해?"
천가진은 대뜸 받았다.
"그럼, 아니오?"
"아니지!"
"좋아! 그렇다면 나와 한판 붙어보자! 날 이기면 인정해 주지!"
팔소매를 둥둥 걷어붙이는 천가진을 보자 겁이 더럭 난 서황은 구
원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단호삼을 불렀다.
"단호법니임……."
"문주님께 물어보시오."
단호삼이 모른 척하며 외면하자 서운한 눈빛으로 잠시 응시하던
그는,
"문주님께서 좀 어떻게……."
마지못해 눈을 뜬 팽후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뭘 어떡하라는 거야?"
"천당주… 아니 부당주에게 설명을 좀……."
"설명할 것도 없어."
냉정히 자른 팽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을 이었다.
"내, 자네에게 꼭 맞는 직책을 하나 마련해 두었네."
순간 서황의 얼굴이 썩은 돼지간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생각하나
마나 지금보다 좋은 자리는 아닌 것이다.
⑧
그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속하는 지금 자리로 만족합니다
요."
팽후는 개구쟁이처럼 히죽 웃었다.
"앞으로 자네 팔자는 활짝 폈네."
뜬금없는 말에 서황의 눈이 동그래졌고, 팽후의 야릇한 미소는 더
욱 짙어졌다.
"편히 놀고먹을 테니 팔자가 펴진 것 아니겠나? 다른 사람처럼 손
에 피를 안 묻혀도 되고 말이야."
서황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평생을 벼르고 벼른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얼마나 기뻤던지 말조차 떨려나왔다.
팽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주는 대로 먹고 자면서, 때리는 대로 맞게. 앞으로 자
네는 제일 쫄다구니까."
꼬르르.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지는 서황을 보며 팽후는 하얗게 웃었다.
"내가 이 재미로 산다니까."
기실 서황은 무공이 약하나 의학(醫學)에는 제법 조예가 있어 활
의전주(活醫殿主)로 내정된 터였다. 이 사실을 아는 단호삼은 좀
전에 서황의 말버릇이 너무 고약해 모른 척했고, 팽후는 삶의 보
람을 만끽하기 위해 놀렸던 것이다.
돌연 팽후는 웃음을 싹 거두고 자리에서 쓱 몸을 일으킨 후에 엄
숙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자리를 빌어 공포하나니, 단호법을 태상호법(太上護法)으로
모시겠노라!"
<* * *>
"군자금(軍資金)으로 쓰게 황금 이백 냥만 빌려주시오."
만접열화루주인 피노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없소!"
"정말 없소?"
"팽문주도 아시다시피 그 동안 돈이 얼마나 들어갔소. 그 많은 사
람들이 먹은 것도 만만치 않은데, 얼마 전에는 옷을 산다고 또 빌
려가지 않았소? 그러니 무슨 돈이……."
"딱 잘라 말하시오! 없다는 거요?"
"그렇소. 방금 말씀 드렸다시피……."
"좋소! 없다는데 본 문주가 무슨 말을 더하겠소."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던 팽후는 멈칫거렸다. 그는 등을 보인 채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사람이 더 늘어났는데, 갈 데도 없고 하니 여기서 한 일
년, 아니 평생 살지, 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피노인의 손에는 누런 황금이 들려 있었
다. 정확히 이백 냥이었다.
이 날 정오 무렵.
녹산영웅문의 무사들은 만접열화루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