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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중요성
2026년 5월 24일 / 대예배 / 이사야 6:1-8
이사야 선지자는 마태복음 7장 21-23에 나오는 외식적인 선지자의 반대가 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간구하는 선지자였다.
마 7:21-23 /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이사야가 소명을 받은 때 그의 나이가 20세쯤 되었다. 이때가 주전 739년이다. 그리고 그가 순교하였을 때는 므낫세 왕 때로 주전 680년이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후에 59년을 선지자로서 소명을 감당했다. 왕이 4번 바뀌고, 공격해 오는 적들이 바뀌고, 시대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일관된 믿음으로 일관된 메시지를 정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 므낫세 왕이 등극한 뒤 악을 저질렀다. 나라도 위기인데 왕마저 악을 저지르자 이사야는 서슴없이 왕을 책망하며 무서운 예언의 말씀을 외쳤다. 므낫세 왕이 이사야 선지자를 회유했다. 전했던 예언의 말씀을 철회하면 존경받는 자리에 앉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잔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때 이사야는 체포됐고, 나무통 속에 갇힌 채 톱으로 켜 순교했다고 한다. 이사야는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다 감당했다.
본문에 나오는 이사야는 마치 3년 동안 예수님에게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으나 하늘로부터 성령의 권능이 임하지 못한 상태인 제자들처럼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이사야 선지자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만남이었다. 습관적 만남, 행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 안일주의에 빠져서 도전도 시도도 없었던 앉은뱅이의 신앙이 힘차게 일어서는 만남, 사데교회(계 3:1)처럼 구태의연한 신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로 달려가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 이사야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통찰하는 경험을 했지만, 이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절망적인 자신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자신이 의롭고 깨끗한 줄로만 알았고, 잘못된 게 많지 않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해서 망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가려졌던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지금까지 숨겨졌던 자신의 신앙적 가식이 햇빛에 투영되는 먼지처럼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뵙다니!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라는 말이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 자신이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피해자인 줄로 생각하며 남에게 섭섭한 마음으로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 앞에 선 자기 모습을 보니까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죄를 범한 당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야는 범죄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죄가 자기를 망하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모두 버렸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을 비로소 던져버리게 되었다.
❚ ‘마르다 우상’이라는 말이 있다. 온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 마르다는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늘 분주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 달력에 단 하루도 비어있는 날이 없는 것을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 열심히 살았구나, 많은 일을 했구나!’라고 한다. 주일까지 빈틈이 없는 달력을 쳐다보면서 자기 능력을 과시해 보지만 정작 내적으로 주님 만나서 깊은 교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삶을 마르다 우상이라고 한다. 1년 52주를 빠짐없이 주일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자랑하지만, 내적으로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아니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변화되기 전의 사울처럼 자기 자랑으로 범벅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나마 사울은 세상적으로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았고(빌 3장) 종교 생활에서도 모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울과 같은 바리새인들의 추태를 힐난하게 지적하시면서 제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나라고 하셨다. 그보다 우리 자신들도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성령을 통해 권면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눅 18:10-12; 마 23:1-6, 23, 25-32)
바울 사도가 순교할 시점이 가까웠을 때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한 권면이다.
딤후 2:20-21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21)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다. 그동안 율법적으로 선지자 역할을 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선지자 사역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선지자에게도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체험들이 있었다. 모세는 시내산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신약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유능한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걸쳐 본격적으로 사도로서의 일을 하게 되었다. 다윗도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십여 년 동안 왕도(王道 - 임금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몸소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유대의 왕이 되었고, 7년 후에야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오늘날도 이처럼 직접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체험들이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기가 하는 행동이 자기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도 이러해야 한다. 직접적인 체험은 없거나 부족하다 할지라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눅 16:31)이 있고, 성령의 감화ㆍ감동이 우리에게 있거니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땅한 권위와 또 두려움을 가지고 전해야 하며 듣는 사람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실천해야 한다. 설령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말씀을 전할지라도 성경 말씀이라면 잘 들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3:2-4 /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밝혔다(사 6:1).
이것은 단순히 체험의 때를 밝히는 말씀이 아니다. 그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남 유다왕국의 10대 왕인 웃시야 왕은 52년을 통치했다. 비록 중도에 문둥병에 걸려 직접 통치할 수 없었지만 매우 강력하고 나름대로 의로웠던 왕이었다.
역대기서에 보면 웃시야가 블레셋 지역과 암몬 지역을 정복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수리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농사의 개혁에 힘썼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때는 북쪽에 강력한 제국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였다. 웃시야 왕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앗수르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왕국과 아람이 동맹을 맺었다. 이 두 나라는 남쪽 유다에게 자신들의 동맹에 동참할 것을 거부하자 유다를 쳐들어왔다. 유다는 앗수르에 원조를 청했고 결국 이를 계기로 북왕국이 망하게 되고, 남쪽 유다 또한 앗수르에게 땅 대부분을 빼앗겼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강력했던 웃시야 왕이 죽은 것이다. 이사야가 성전을 찾았던 이유도 풍전등화와 같은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근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의 희망이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에 관여하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
2. 거룩하신 하나님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었다(사 6:1). 이사야는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권위에 기겁하며 두려워했다. 옛날 백성들도 세상의 임금님 얼굴도 감히 못 보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려야 했었는데, 어찌 감히 하나님의 얼굴을 들고 볼 수 있겠는가?
모세도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숨기시고 그의 눈을 가려 정면에서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지나가실 때 그 뒷모습만 뵈었다고 하였다(출 33:17-3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천사(스랍)들의 행동에서도 볼 수 있다. 스랍들에게 6개의 날개가 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날았다.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수 없기 때문이요, 발을 가리는 이유는 가장 더럽고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스랍(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는 네 생물이 ‘ … 그리고 그 네 생물들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구나!’(계 4:8)하며 찬양하였다. 이렇게 스랍들이 찬양하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며 집에 영광의 빛으로 가득하였다.
3. 이런 모습을 본 이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 6:5 / 그때에 내가 외쳤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뵙다니!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자 자기 입술을 가리며 죽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이사야는 제사장 출신으로 선지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상담도 하는 등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을 뵙고 보니 자기가 했던 말들이 부끄러워졌다. 설교자들도 하나님 앞에 서면 먼저 입을 가리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이 부족한 자신들이 하나님을 전했는지, 이 입술로 얼마나 많은 거짓을 행했는지도 부끄러워할 것이다.
40년 동안 장인 이드로의 집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모세도 이러한 체험을 하였다.
출 3:1-6 /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빈들 서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산인 호렙에 다다랐다. 2) 그때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다. 그가 바라보니 불꽃은 활활 타오르나 나무가 불타 없어지지는 않았다. 3) 모세는 하도 이상해서 ‘내가 가까이 가서 이 엄청난 광경을 자세히 보아야겠다. 어째서 나무가 타지 않을까?’하고 중얼거렸다. 4) 여호와께서 그가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예, 주님!’라고 대답하자 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발을 벗어라. 6)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다.
이사야 선지자에 비하면 약하지만, 베드로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해변에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보고 있었는데, 이 예수님이 갑자기 자신에게 오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들이 잡혔다. 이런 일을 겪은 후의 베드로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눅 5:8 /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이다.’ 하고 말하였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니 추한 모습이 드러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에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삶이 방만(放漫 - 일이나 생각 따위가 야무지지 못하고 엉성)해지고 나태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탐욕스러운 삶을 살며 자기 이기적으로 쾌락을 좇고 방탕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죄악과 폭력으로 가득하며 죄를 짓고도 뻔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을 만나 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느꼈던 위기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이 왕래하고 예물은 많이 드리는데,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로 그칠 뿐 자기들 기뻐하는 대로 드리는 그런 예배였다(사 1:11-15).
사람들은 거룩하기를 종용하시는 하나님을 싫다고 한다. 자기들 마음을 만족케 하기 위한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다. 그래서 뒤로는 온갖 악을 행하고 자신의 탐욕에 빠져 살았다(사 1:16-17). 이처럼 악을 행하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적인 위기는 가인처럼 예배의 거룩함,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한 데 있다. 사람들이 교회나 예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여긴다. 그것은 자초한 바가 크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 교회에 오히려 탐욕과 거짓과 인간적 술수로 가득하다. 잘못을 범하고는 돌이키기보다는 묵살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만 연연한다. 사회의 폭력과 불의를 탓하기 전에 우리 교회가 먼저 거룩함을 상실한 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외치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은 거룩하냐?’에 대한 질문에 이사야 자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이사야의 대답을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으로 대처하고 싶다.
♬ 1.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2.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을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하여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 6:5 / 그때에 내가 외쳤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뵙다니!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
이사야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이사야가 부정한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살아갔던 사람이다. 늘 성전 안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자기 삶을 지켜가면서 살았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별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자백하였다. 자기 자신의 겉모습보다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암 덩어리와 같은 죄를 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우리가 이렇게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해 준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나을 것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도 이런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였는데, 이 세상에서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롬 3:9-12 /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저들처럼 자기 모습을 보게 하신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그리고 부정함을 보게 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들을 절망하게 만들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신다.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라는 마음을 갖게도 하시고 때로는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을 포기하게끔 만들기도 하신다.
이사야가 그랬다. 그는 절망 속에서 외쳤다. ‘나는 죽게 되었다.’ 과연 죄인인 우리, 부정한 우리, 능력이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도대체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4.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다
해결의 실마리는 이사야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 6:6-7 / 그러자 여러 스랍들 가운데서 한 스랍이 불집게로 제단에서 숯불을 하나 들고 내게로 날아와 7) 내 입술에 숯불을 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죄가 씻어졌고 네 허물이 깨끗해졌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 부정한 사람이었던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수도(修道)를 통하여, 정신훈련을 통하여 혹은 혹독한 육체적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해 주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사야가 죄인으로서,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맡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제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새롭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신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되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이 너무 앞서지 말아야 한다. 이제 너무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내 뜻대로 그리고 내 힘으로만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시간을 드리자. 그렇게 하면 의외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닌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또 그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과 힘을 더해 주실 것이다.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환경을 또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이다.
5.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하게 해 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이제는 네 죄가 씻어졌고 네 허물이 깨끗해졌다.’(7절). 그가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다시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하나님은 지금 죄악에 물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걱정하신다. 내 백성이 이렇게 죄악에 빠져 있는데 아무도 내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선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계신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백성이 걱정되면 직접 하시면 될 텐데, 하나님을 대신해서 갈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신 경우는 성경에 별로 없다. 천지 창조하실 때나 직접 하셨지만, 그 외에는 모두 당신께 속한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시키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금도 똑같은 방법으로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해서 일할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일할 사람이 없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이사야는 그 자리에서 ‘주님, 제가 가겠다. 저를 보내 주소서(8절)’라고 대답하였다. 주저주저하다가 마지못해서 ‘정 갈 사람이 없으면 제가 가지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선뜻 대답하였다.
❚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는 H. S. Mason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다. 3절 가사에 보면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용감한 자 옛날처럼 선뜻 대답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다. 아마 Mason이 이 가사를 썼을 때도 이사야를 생각했던 것 같다.
▶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데,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손에 떠밀려서 하는 사람도 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끝까지 사양하는 사람을 ‘모세 타입’이라고 한다. 예레미야도 모세 타입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모세에게 맡기셨다. 이것은 모세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 떠밀렸던 모세지만 자기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그러나 모세나 기드온 등 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 느꼈기에 주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진 것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이사야 타입’도 있다. 이 타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주님, 가겠다!’ 하고 선뜻 대답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의 순교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지만, 이사야가 순교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가는 일이 순교의 길인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알고서야 어찌 선뜻 가겠다고 대답할 수가 있겠는지?
이사야가 그렇게 선뜻 대답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배웠는데 그는 죽지 않고 살았다. ‘어차피 죽었다가 산 목숨인데,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까짓것, 내 생명의 은인이신 하나님께서 저렇게 나를 대신해서 갈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시는데 내가 가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 언더우드 목사님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는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는 인도로 가기로 결심하고 선교를 준비하다가 1883년 코네티컷에서 열린 캠퍼스 부흥 집회에서 앨버트 목사를 통해 조선의 소식을 듣고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꾼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구에 첫발을 내어 디뎠다. 그때 기도한 기도문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의 내용이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받고 있사오나 저희가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오늘 우리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고백하며 화답하여야 하겠다.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최덕신 선생이 작곡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라는 성가곡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옵소서. 가진 것 모두 다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나를 받으옵소서. 나를 받으옵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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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이 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야망에 찬 제목의 책이다. 재계 순위 수위를 다투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전 회장이 회장 당시 어려웠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쓴 자서전이다. 그룹이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꽤 많이 팔린 책이다. 물론 작품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계적인 기업가로 인정받았던 저자의 유명세 때문에 덩달아 유명해진 책이다.
이 책에서 김우중 씨는 자신의 현재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3사람을 이야기하였다.
❶ 자신의 어머니를 꼽았다. 자기의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김우중 씨는 경영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희생정신>은 바로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어머니께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네 차례씩 기도하고 찬송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회상해 놓았다.
❷ 그는 좋은 친구를 소개하였다. 고등학교 때 만난 ‘이우복’이란 친구의 도움이 컸다고 회고하면서 그때의 우정이 지금까지 계속된다고 했다. 실제로 대우그룹 부회장까지 지냈다.
❸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게 자기 인생의 성공이라고 했다. 학교 때 형편없이 문제아였던 자신을 믿고 부반장에 규율부장까지 임명해 주면서 인정해 주신 선생님과의 만남을 ‘결정적 사건’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선생님의 인정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행실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중앙대학교 총장을 거쳐 대우의 이사장을 지냈던 ‘이석희’이다. 물론 지금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대우그룹 또한 거의 몰락했지만 한때 우리나라 경제계를 이끌었던 주요한 인물인 김우중 씨에겐 이런 인생의 좋은 만남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 20세의 귀족 청년이었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정치의 뜻을 버리고 철학도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낱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즉 사람을 만나고자 하신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 노아처럼 죄악된 세상에서 방주에 태울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찾긴 하지만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 이 모두는 비참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문제가 있는 것은 만나야 할 분 즉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