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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새남터 순교성지
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성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성당 마당 지하에 건립된 새남터 기념관 내부 모습.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 지 30년 만인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을 얻은 데 이어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 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 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성당 제대와 한국 순교 성인들을 새긴 벽화 모습.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새남터 성지 약사
새남터는 한국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였으며 이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주교 앵베르 성인, ‘기해일기’ 의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9분의 성인유해가 새남터에 모셔져 있다.
‘새남터’의 말뜻은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새나무'는 '풀과 나무'의 뜻이며, ‘새’라는 말은 억새의 의미이다. 다시, ‘새남터’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이곳을 노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노량진과 배로 왕래했던 나루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 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사람(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다.
새남터와 연결된 현 노량진에 있는 ‘아차고개’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이 고개는 조선 세조 때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육신(六臣)을 처형함이 부당하다고 간청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 하고 한탄하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후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특히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너무나도 찬란한 신앙의 꽃을 한반도에 피우게 만들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 없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다. 이에 북경교구는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들어와 교세를 키웠으며 6년 만에 신자수가 6,000여명이나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쫓기는 몸이 되었고, 당신을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되자 스스로 의금부를 찾았으며 결국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일로 새남터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가 흘렀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831년에는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하여 조선 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하여 설립)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들어와 1년 동안 9,000여명의 신자를 늘리는 등 교세를 키웠으며,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을 마카오에 유학을 보내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키웠고,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많을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헌종 5년의 일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을 잃었는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시벽파 싸움에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836년 모방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두 번이나 중국으로 넘나들며, 수업을 하고 상해의 금가항 신학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이 1846년 이곳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세 분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항의로 프랑스 군함 3대가 충청도 외면도에 들어와 조선 조정에 항의문으로 압박을 가하자 9월 16일 김대건 신부를 서둘러 처형하였다. 이것이 병오박해로 헌종 12년이었으며 3일 후 현석문도 처형하였다.
철종이 즉위하자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북돋아 주어 교세가 크게 확장 발전하게 되었다. 새 영세자도 많이 늘어났고,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가 철종의 정사를 뒤에서 맡아보게 되어 청나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이 들어왔다. 이 결과 교우가 1850년에 일만 일천여명, 1855년 일만 사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신학교까지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대원군이 수만 명의 천주교도를 죽이는 대학살의 비극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 프랑스, 영국의 동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물리치자고 한 건의가 시기를 놓치고 오해를 발생시켜 1866년 고종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성인과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등 사제성인, 푸르티에 및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성 정의배 마르코, 성 우세영 알렉시오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조선시대에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돌아가신 영혼들의 피 때문인지 ‘용산 8경’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이 새남터는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던 하늘이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새남터의 북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 천주교회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은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열차 다니는 소리로 요란하지만 묘하게도 새남터성지 안에만 들어서면 이 모든 소리가 고요로 가라앉는 것 같다고들 한다. 한강 둔치와 이어져 있어 차분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바라보는 강도 그럴싸하고 이곳에서 보는 황혼이 왜 유독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 주는 곳이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90년부터 이곳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새남터 성지는 1950년에 순교기념지로 지정되었고, 1956년에 ‘가톨릭 순교성지’ 라는 기념탑이 세워졌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복자학교’라는 교육 시설을 운영하다가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국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다보면 대교 북단 서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 층 기와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명지대 건축학 교수로 계신 박태연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에서 수도회의 자산을 정리해 1987년에 완공한 순교기념성전이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출처 : 새남터 성지 홈페이지]
새남터 성지 : 순교 기념 성당
신유박해(1801년) 200주년이 되는 2001년 1월, 영하 15도의 매서운 날씨를 안고 새남터 성당을 찾았습니다. 온 누리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아름답기는 하였지만 눈물이 나도록 차가운 날씨여서 아름답기보다는 살을 에는 추위로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였습니다. 순교 성지를 찾으려면 이런 날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잘 왔다는 판단이 서니까 갑자기 추위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1. 범 앵베르 라우렌시오 성인님 2. 장 베르뇌 시메온 성인님 3.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신부님 4. 나 모방 베드로 성인님 5. 정 샤스탕 야고보 성인님 6. 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성인님 7.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8.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9.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10.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11.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12. 주문모 야고보 순교 신부님 13.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14.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알렉산델 순교자님.
모두 열 한 분의 성인과 시성되지 않으신 세 분이 이곳에서 순교하셨으니, 추위 따위는 아랑곳 할 여지도 없이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몇 차례 이곳을 다녀갔고 한 번은 하루 종일 이곳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봉사한 적도 있었기에 친근감마저 드는 곳이었으나, 나도 이 여러 분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단호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기념물 하나하나가 실감 있게 다가오며 호통을 쳤고, 성인 순교자님께서 따뜻하게 맞으며 잘 왔다고 너그러이 저를 받아주시는 듯한데도 제 마음은 쥐구멍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으며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이었습니다. 새남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처형되시면서, 그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주교님과 신부님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앵베르 범 주교님과 모방 나 신부님, 샤스탕 정 신부님 등 세 분 성직자가 순교하였습니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주님과 현석문 회장이 순교했으며,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님과 브르트니에르 신부님, 볼리외 신부님, 도리 신부님, 푸르티에 신부님, 프티니콜라 신부님 등 다섯 분의 신부님과 평신도인 정의배 마르코와 우세영 알렉시오 등 두 분의 평신도가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 성당은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용산구 서부 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매입하고 서울대교구에서 1950년 순교기념지로 지정하였습니다. 공사 착공 4년 만에 완공되어 지하 1층, 지상 3층의 주 건물과 종탑은 목조 3층탑 형식으로 1987년 9월 12일 축성식을 가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남터 성당은 한국식으로 지어졌으며, 건축 재료 역시 국내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십자고상을 받치고 있는 문양은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그 아래 사방팔방으로 뻗은 선은 온 세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했으며, 십자가 아래 받치고 있는 백합꽃은 순결을 뜻합니다. 돔 아래에 있는 비둘기와 어린 양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지구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감실은 통돌(한몸돌)에다 무궁화 꽃을 부조로 조각했고, 감실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제대는 경전을 읽을 때 쓰는 경상을 역시 통돌(한몸돌)에 조각했으며, 오른쪽의 성수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기 모양을 본뜬 것이고, 왼쪽의 강론대는 장구모양으로 장구소리처럼 복음이 널리 울려 퍼져나가라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면의 부조는 103위 성인 성녀상입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나라의 임금님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기도령의 모습인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님도 우리 왕후의 옷을 입으셨고,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주교님과 신부님과 평신도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세 분 프랑스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림 아래의 출렁이는 바다는 이 세상의 세파를 표현했고 성전 양쪽 벽면에 있는 14처의 예수님과 로마병사들도 우리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종탑은 목조 3층 탑 형식으로 종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순교자 후손들이 보내 주신 헌금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도 부유촌 가운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사목이 어려운 곳이어서 이렇게 추운 날이면 신자들을 더 걱정할 사목자들을 생각하면서 순교자님께 전구기도를 드리며 떠났습니다. [출처 : 강수길 그레고리오, 순교자 현양, 제60호, 2001년 2월 7일]
마.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인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장경일 베르뇌 시뫼온 성인님.(프랑스. 새남터. 1866. 3. 7. 52세. 주교)
○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님. (솔뫼. 새남터. 1846. 9.16. 25세. 신부)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백 브르트니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7세. 신부)
○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46. 9.19. 49세. 회장)
○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66. 3.11. 71세. 회장)
○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서흥. 새남터. 1866. 3.11. 21세. )
○ 주문모 야고버 순교자님. (중국. 새남터. 1801. 5.31. 49세. )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김면호 토마스 (안동. 새남터. 1866. 9.10. -- 세. )
○ 김문원 바오로 ( 새남터. 1866. 9.10 .--세. )
○ 이연식 이서방 (대원군하인.새남터.1866. 3.11. -- 세. )
○ 이유일 안토니오 (연풍. 새남터. 1866. 7.20. -- 세. )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엑스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1814-1866년)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그림출처 : 새남터 성지 홈페이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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