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켈러는 그녀의 책 '나의 종교'에서 예수님이 검을 사라는 분부에 대해서 베드로가 "여기 검이 두 자루 있나이다" 하고 대답했을 때 응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인 "그것이면 족하다" 라는 말씀의 뜻풀이 가운데 그 검 두 자루의 의미를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이 속에 내재하여 있는 <영적 의미> 이 두 진리를 겸전하면 악과의 싸움에 천하무적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즉 성서를 읽을 때 문자적인 뜻 외에 그 문자적인 뜻이 담고 있는 영적인 진리를 마음에 품고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몇 가지 헬렌켈러의 증거를 들어보자.
"사랑과 불은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천사들은 그들의 눈으로 사랑을 보지 못하고 사랑 대신 사랑과 상응하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천사들도 사람처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어 내적인 것은 사려분별하고 사랑하며 그의 외적인 것은 촉감하고 보며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의 외적인 모든 것은 내적인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영적 상응은 자연적 상응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적 사람들에게 불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말씀 중에 불이라고 쓰여있는 것은 사랑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교회에서 사용한 성화는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하늘의 불 곧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불타게 하여달라고 원하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땅 위에 있는 사물이 저 세상에 있는 모든 실재를 상징하고 그 그림자를 나타내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인간의 전 영적 생활을 대표하는 위대한 상징이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또 들어보자.
"사도 바울도 말씀의 진리를 거의 영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의 서신은 다른 모든 제자들의 서신보다 한층 더한 광채를 띠고 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한 이유는 만일 주의 말씀이 상징적이라는 것을 아무런 모순당착 없이 연관적으로 읽으려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 실로 분명하여야 하며 구름 하나 없는 것처럼 맑아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영적 의의는 영혼의 요구와 시련 그 변천 및 갱신과 같은 순전히 영적인 것만을 취급하고 시간이나 공간이나 어떠한 인물의 특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산과 시내, 양과 비둘기, 우뢰와 번개 또는 금으로 된 성과 보석, 병을 고치는 나무와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이면에 가리워 있는 영적 원리들의 상징적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리고 그 이면에는 반드시 애정과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상징을 무시한 채 성경의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는 것이 현대 과학 문명에 비추어볼 때 얼마나 불완전하고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가 많으며 얼마나 외적 조화가 결여되어 있던가!"
이번에는 말씀에 내재한 신비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증거를 간단히 들어보자.(헬렌켈러의 사상은 모두 스베덴보리의 사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성언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신령하게 영감되었기에 거룩하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성이 말씀의 어디에 내재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성언의 문체는 참된 신령 문체여서 어떤 다른 숭고하고 우월한 문체와도 비교될 수 없다. 성언의 문체는 매 문장, 매 단어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케 하고 또 천계를 열어주도록 거룩하게 만들어진 문체이다. 이로 인해 성언은 사람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그의 지성을 지혜의 진리로 채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성언을 통해 생명을 받는다. 그러나 생활의 적용 때문에 성서에서 신령 진리를 길어낼 목적으로 읽는 사람들만이 성언에서 참 생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은 성서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명예와 부를 차지할 목적으로 읽는다.
성언 안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들어 있는데 이는 마치 영혼이 몸 안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만일 이를 알지 못한다면 성서를 오로지 문자적인 의미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성언은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천사까지도 위해서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언의 그 뜻에 의해서 천국과 교통이 되는 것이다. 성언의 영적인 의미는 순전히 상응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들이나 복음서 기자들, 그리고 묵시록의 문체들처럼 독특한 문체를 갖게되는 이유이다. 성언이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문자처럼 보이겠으나 실제로는 그 안에 신적 지혜와 천사적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다."
(상응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말씀 안에 영적 의미로 나타내어진다. 지상의 교회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깃든 영적 의미로 인해 주님 혹은 하나님 나라와 참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영이요 생명인 것은 이 상응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말씀의 신비이다. 성경이 단순한 글자가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흔히들 이 지상은 천국의 모형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천국과 지상이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노아,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신약으로 이어진다. 이 가운데 나타난 무수한 사람이나 사물들 또 사건들은 사실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이야기들은 선과 진리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으로 인해 갈등을 겪는 우리 영의 상태와 종국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모든 시험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의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사는 이른 바 중생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하여 주님이 의도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며 참된 교회를 세우심이다. 창세기가 보이는 이 세상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중생의 전 과정을 미리 알리는 것이라면 성경 마지막의 요한 계시록은 거듭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영의 상태가 최후에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리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우리 영이 지금 겪는 상태들로서 이미 우리 안에는 천국과 지옥이 건설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성경 말씀의 처음이 중생의 전체 그림을 요약해 보여주고 그 끝이 선과 악으로 굳어져 모든 싸움이 종결된 상태를 나타낸다면 그 중간에 쓰여진 책들은 이런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 말씀 전체가 우리 마음이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의 귀환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에는 영에 관한 이야기보다 육으로 사는 이 세상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겉으로만 보면 보이는 세상에서 벌어진 시간과 공간 안의 사건이나 사물,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의중은 그 속에 담긴 영에 관한 일이요 마음에 건설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에 있다. 이러한 이치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육체의 오관에 의한 감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고 우리 영의 흐름을 알리는 상태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보면 이를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눈, 코, 귀, 입, 손, 발 등 사람의 몸은 모두 감각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 사람의 영이 지닌 마음과 생각이고 이 영이 자신의 상태 변화에 따라 욕구 하는 것을 외부의 몸은 단지 시행할 뿐이다. 입으로 간교한 말을 하여 남을 속이려는 자에게서 우리는 그 영의 상태가 거짓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눈으로 선정적인 그림 보기를 좋아하는 자에게서 우리는 그 영이 음란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을 미워하여 그의 멱살을 잡는 손으로부터 그 영의 악한 의지를 읽을 수 있고 도둑질을 위해 부유한 집을 찾아가는 그의 발로부터 그 영이 탐욕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표현도 이와 같아서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난 저들 육체적 움직임들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영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읽어야 하고 또 이 모두는 우리 자신의 영에 적용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또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이나 그들 삶의 무대가 되는 자연계의 수많은 사물들 그리고 그들의 외적 움직임들이나 주변 환경과 그들의 고정적이거나 변화하는 상태 곧 먹고 입고 자는 것,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는 것, 또 걷고 쉬며 말하고 병을 앓고 싸우는 등... 사람의 어떤 행위나 동작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우리 영혼의 상태가 선과 악에 대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장황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공간적이고 시간 안에 들어온 성경 말씀을 그 제한들로부터 벗어나 상태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나 자연계는 물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시고 또 진리 자체이시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데 우리의 이해성이 지닌 빛은 부족하기 한량없다.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감각에 치우쳐 있기에 자꾸 육신을 입고 오신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인격만을 인식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님은 지금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어디서 그분을 만날 것인가. 그분은 오늘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재 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이시고 진리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라볼 때는 그분은 역사 속 저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항상 현재로 우리에게 머물러 계신다. 말씀에 어찌 공간이나 시간적인 것의 한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과거 유대 땅에 오셨던 그 주님을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점에 말씀이며 진리로써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도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신다는 감각적 개념보다 신적 진리로써의 말씀이 그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이해해보면 그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현재로 항상 다가와 계실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가 주님께 행한 저 악들은 바로 신성이신 말씀에 폭거를 가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완악한 유대 땅에 오시어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후 다시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의 나 자신과 관계가 있으려면 그분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왜냐하면 저 유대인들은 주님의 모습을 실제로 보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말씀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이나 우리나 각 형편에 맞는 현재로 임하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속 이스라엘의 움직임은 일반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의 움직임들을 예표하기에 역사적으로 저들과 오늘의 교회가 가진 시간적 공간적 차이가 성경 속에서는 극복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오셨을 때 저들 중 어떤 이들은 주님을 환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무리들은 배척하기도 하는 것을 보는데 결국에는 소수의 무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과거라는 역사적 시점에 있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거부한 이러한 무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선과 진리를 반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악하고 거짓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지나간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표현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현재에 벌어지는 일을 적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과거요 미래의 시점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이지만 그 속은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적혀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을 이천 년 전 과거의 일로만 바라보면 그분의 현재성은 없고 다만 그분의 업적만이 남아 우리에게 그 공로를 전하게 된다. 또 성경이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만 바라본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그들이 행한 일들을 통하여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자는 식의 교훈을 주는 책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으니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성경을 읽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거의 일이 오늘이라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책으로밖에 읽히지 않아서 여느 책과 똑 같고 시간을 초월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울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적어도 일반 책이 아닌 말씀이 분명하다면 그 말씀으로 기록된 과거의 모든 일들이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 우리 안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읽힐 때에만 그 속에서 과거에 역사 하시던 말씀 역시 지금 우리 가슴에 능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역사 하시던 말씀이 현재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지나간 일들 역시 현재의 일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과거에 그대로 둔 채 그 속에서 교훈적인 말씀만 현재로 맞아들인다면 성경 전체가 어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울 수 있겠는가.
만일 사랑하던 아내가 죽으면 그 형체가 없어지고 그가 살던 삶도 이미 지나간 흔적에 불과하기에 아직 생존해 있는 남편이 죽은 아내를 애타게 그리워한들 이미 지나간 자의 체취를 생생히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기억으로부터 불러오는 아내의 체취는 이미 그 여인이 죽었기 때문에 생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도 이와 같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볼 때는 거기서 아무리 교훈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살아 계셔 내 영혼 가까이 임하시는 주님을 뵙기가 힘들 것이며 그분의 가르침도 살아있는 듯 생동적일 수 없다.
이천 년 전 과거에 오신 주님을 지금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 또 성경에 나타난 저 수많은 과거의 일들을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생생히 느낄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쓰여진 것으로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와 미래의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시공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개념으로 볼 때의 천국은 사람이 육신의 옷을 벗은 후 들어갈 장래의 일이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 천국은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건설되고 있다고 하셨다. 이 말씀의 참 의미는 미래의 일을 앞당겨 현재로 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미래가 이미 현재 안에 생생히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지나간 과거의 일도 현재로 생생히 만지고 느낄 수 있도록 성경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성경은 현재라는 시점에 있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로 읽혀지는 것이 주님의 의중이시다. 물론 우리가 시공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는 우리가 육신을 벗고 영으로 살 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육으로 살면서도 동시에 영으로 사는 존재이다. 육으로 사는 삶은 시공간의 세계에서 나타나지만 영으로 사는 삶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시공간적인 요소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의 영이 살고 겪는 일들로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 말씀은 우리 영이 어떠한 상태의 흐름 속에 있는지를 지각하게 하여 선과 진리이신 주님께로 나아가 중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대는 보이는 이 세상도 아니고 저 과거의 일들도 또 미래의 일들도 아닌 현재 선과 악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아래에서는 상응에 의한 성경의 영적 의미를 부분적이나마 증거 삼아 곁들여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삼가 간청 하옵기는 어찌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해석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지시기 전에 먼저 이 내용과 성경 전반에 걸친 각 부분의 비교를 통해 또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립해온 해석과 이러한 해석과의 대조를 통해 과연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을 밝혀냄이 없이 단지 선입견 때문에 진리가 거부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 때문입니다. 그러니 심사숙고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성경 속 주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성경에서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일정한 함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표현은 우리가 질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을 표의한다. 이러한 해석이 나오게 된 원인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모든 움직임의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와 지상에서의 올바른 삶의 원리들을 계시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움직임이나 그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그의 영적 상태나 그가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질을 알 수 있고 또 주님의 움직임이나 주님께 벌어지는 상황 속에도 역시 인간의 영적 상태나 인간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질이 표현되어 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만큼 하나님은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는 윈리 때문인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은 교호적, 상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것들이 인간에게 입류하는 것을 나타낸다. 성경은 이러한 면으로 읽어할 부분들이 많다.
<내가 목마르다> : 주님께서 교회의 악과 거짓들을 보고 선과 진리가 없음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시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분 안에서는 생명수가 끝없이 흘러나오는데 영원한 생수이신 주님께서 오히려 목마르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주님은 언제라도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풍성히 베풀어주시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지닌 악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유입이 악에 의해 가로막힐 때 주님 스스로는 원치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물 없는 샘이 되어 목마르지 않으실 수 없다. 신적 진리이신 주님께 폭거를 가하는 유대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악한지 주님의 생명수가 그들 안에 흐를 수 없음을 성경은 주님이 목마르다 라고 표의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다> : 진리가 사람 안에 잘 배열되기 전까지 선은 그 사람에게 귀속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 집은 주님을 모시는 사람의 영혼이나 마음을 표의하고 무리는 영적 생명의 양식이 되는 선과 진리를 얻기 원하는 마음 속의 애정들을 표현하는데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부어지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유입이 주님의 식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주님은 항시 선과 사랑 자체이시므로 자신의 것을 인생들에게 베풀어주심으로 오히려 배부르심을 느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무리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 즉 그들은 유대 땅에 거하는 사람들 중 그때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로서 영혼에 갈증을 느끼고 주님에게서 무엇인가 생명의 양식 얻기를 갈급해 하고 있다. 유대라는 나라와 그 곳에 주님께서 구원자로 오셔서 활약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악에 물든 인간의 마음과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의 빛으로 오신 주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거기 일단의 무리들이 주님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주님께 실망하여 배반하기도 하는 모습들은 우리 마음 속에 거하는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들의 갈등을 묘사해준다. 사실 우리 마음 속에는 수많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 주님께 순종하려는 열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께 반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참 진리의 빛 속에 있을 때는 주님께서 식사를 하실 수 있으나 진리와 거짓이 어우러져 있을 때는 주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 빛으로 인도하시기에 바쁘셔서 식사할 겨를도 없으시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하는 성만찬> : 주님으로부터 교회에(주님을 따르는 각 영혼) 유입되는 선과 진리의 풍성함을 뜻한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교회를 뜻하거나 교회의 영적 원리들을 뜻하는데 그들은 주님에 의해 점차 질 좋고 순수한 사랑과 믿음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저희가 먹을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이를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니라> :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며 그것의 수용으로 인해 주님과의 결합이 일어난다. 떡(빵, 고기)은 주님의 몸으로 이를 떼어주는 것은 영혼을 선으로 풍성케 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잔(포도주)은 주님의 피로 이를 마시는 것은 영혼을 진리로 풍성케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은 모두 주님과의 결합 곧 선과 진리에 결합된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찾기를 염원하시고 계신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욕정이 들끓는 상태에 있는 영혼은 주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의심을 갖게 되어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수께서 주무신다는 표현은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가 주님의 존재를 잃어버릴 정도로 옅어진 것을 나타내기에 이어 제자들은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고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 교회가 자연적 상태 안에서 아직 영적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어떤 미세하고 작은 움직임이나 가르침조차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자비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아직 예수님의 어떤 움직임도 없으므로(배에 계신 그대로) 교회가 힘찬 교리에 의지하지 못하고 자연적 상태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기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 사는 것은 사람들의 탐욕의 대상이 된 옛 진리가 버려져야 참된 진리가 영혼에 살아난다는 뜻이고 이때가 이르기까지 본 것을 이르지 말라하신 이유는 자기 속에 있는 악으로 인해 여전히 진리를 죽이는 자는 그 진리를 오히려 모독하여 영혼이 더 추악해지기 때문이다.
* 음식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 속에 애정의 선한 빛이 어떠한 가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교훈 하신다. 떡은 영혼의 양식인 선을 나타낸다.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교회 밖에 있는 까닭에 초기에는 구원의 요청이 무시당하는 듯 보이지만 인애에서 비롯된 믿음의 기초가 서있기에 구원이 거절되지 않는다. 여기 상은 진리에서 나온 교리를 뜻하는데 상 아래에 있다는 말은 교회의 진리에 대해 무지한 이방인의 상태를 나타내기에 이어 이방인을 의미하는 개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아이들이라는 말은 교회에 주어진 순진무구를 뜻하는데 이 순진무구는 영혼에 심겨진 '남은 그루터기'라는 의미로 이는 각 영혼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순진무구의 소멸은 곧 영혼의 파괴를 의미하기에 주님은 어린아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으나 신랑을 빼앗길 때는 금식한다> : 금식은 선(사랑)과 진리(믿음)가 부족하거나 변질되는 것을 애통하는 것이다. 영혼에 있어서 그의 믿음이 사랑과 결합되어있을 때는 주님 안에 있는 상태이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 안에 있을 때는 불행하다. 신랑과 함께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 곧 사랑과 믿음 모두 올바른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하기에 금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 곧 사랑과 믿음이 서로 반목하여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무시하고 저 혼자만 영혼을 지배하려 할 때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거나 참 믿음이 아니기에 이럴 때는 금식해야 한다. 영혼의 참 생명은 믿음(진리)이 아닌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반드시 믿음(진리)을 수단으로 그 영혼에 내재한다. 반대로 믿음(진리)은 그 홀로 영혼의 주체가 아님을 깨닫고 반드시 그 목적이 되는 사랑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진리)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요 또 사랑 없는 믿음(진리)도 참 믿음(진리)이 아니기에 사랑과 믿음(진리) 사이에는 반드시 결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영혼의 생명은 사랑에 있고 믿음은 단지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일 뿐인데 성경에서 이를 거꾸로 해석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
해설)성경에 쓰인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공급받아 영혼에 채운다는 의미가 있으며(다른 구절들도 그러하듯 이 구절 역시 반대적인 의미도 있다. 즉 먹고 마신다는 것이 악과 거짓을 영혼에 채운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 결과 삶으로까지 선과 진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한 유월절 만찬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충만해진 상태를 뜻하고 제물로 드려진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짐승 중 양이 선과 대응하기에 주님은 어린 양으로 불리셨다.
물과 포도주 등은 진리를 나타내는데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갈증을 느끼며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것은 교회의 악과 거짓을 보고 선과 진리가 없음을 마음 아파하신 것이고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진리와 섞어진 채 드려지는 예배는 주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을 나타내며 묵은 포도주가 유대 교회의 역용된 율례를 나타낸다면 새 포도주는 주님이 오사 유대에 의해 변질된 구약의 말씀을 새롭게 가르치신 것을 말한다. 피는 생명을 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신적 진리가 모독을 당하는 것을 나타내며 포도주 역시 피와 같은 의미로 성경에 사용되어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라는 말씀은 사람의 이해가 진리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떡에 대해 살펴보면 떡은 주님 자신이나 사랑에서 연유하는 선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각자 자기 속에 있는 천계적 원리들과 그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고 '다섯 덩이의 떡으로 온 무리가 먹은 것'은 아무리 작은 선일지라도 영적 양식이 되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뜻하며 '열 두 광주리에 남은 떡 조각'은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이 지식으로 남아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또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은 외적 정결만으로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뜻한다. 빵 역시 떡과 같은 의미로 주님이나 선에 대응한다.
누룩은 악과 거짓을 뜻하고 소금은 선과 대응으로 쓰여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것이나 짠맛을 잃은 소금' 이라는 말씀에 사용된 소금의 의미는 선한 삶에 갈급한 것을 나타내는데 이는 소금의 짠 맛 때문으로 이 짠맛은 선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대응이 그러하듯 소금에도 반대의 의미가 있어서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선에서 이탈한 삶을 지칭한다.
* 인체
<열병으로 앓다> : 자아애, 악한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이다. 사랑의 성격은 그 뜨거움에 있는데 천국적 사랑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뜨거움이고 지옥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뜨거움이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나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다> : 시험에 들었을 때는 지옥의 악한 정욕이(귀신)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온다. 이때 진리의 말씀을 의지하여 싸우는 영혼은(내가 싸우는 것은 겉보기 현상이고 사실은 내 속에 주님께서 악과 싸워 물리치신다)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데 그럴지라도 악한 정욕의 유혹이 얼마나 컸던지 이 싸움 막바지에 영혼은 마치 믿음의 남은 그루터기마저 꺼져버린 듯 한없이 위축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외적 느낌일 뿐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영의 세계에서는 기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불씨는 여전히 보호되어 시험 전보다 훨씬 강한 모습으로 새 생명을 받게 된다. 자비하신 주님이 죽은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듯 시들어가던 영혼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여기 예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것은 주님과 그 영혼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 선한 애정이 그에게 흘러드는 것을 의미한다.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인간의 보잘 것 없는 능력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양 행세하는 자들에 의해 주님은 배척을 받는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선과 진리를 담는 그릇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이해와 의지에서 나온다고 여기는 자들은 불행하다.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을 먹다> : 악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속은 그대로인 채 마음의 겉만 깨끗이 하는 외적 정결일 뿐 진실에서 우러나온 내적 예배는 아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 : 진리가 없어 순종치 못하고 이 때문에 주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 귀는 의지에 속한 순종을 뜻하고 말은 이해에서 나온 사상을 뜻한다. 성경에서 '주님의 말씀을 (귀로)듣는다' 라는 말의 의미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순종하는 것까지를 뜻한다.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끌고 가라> : 주님을 판 유다는 형식적인 교회 형태만 남은 유대 교회를 표의하는데 주님은 외적으로만 유대와 관계되었을 뿐 내적 결합은 없으셨다. 입술은 외적 고백을 뜻하고 입을 맞춘다는 뜻은 외적 결합을 뜻한다.
<피로 씻다> : 영혼의 정화를 가리키는 말로 이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교훈 받아 죄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말한다. 피는 주님에게서 온 진리나 생명을 가리키는데 때로는 진리의 반대적 의미인 거짓(비 진리)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경 안에는 이렇게 같은 낱말이 내용에 따라서는 전혀 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주님으로부터 온 선한 것이 인간의 마음에 조명될 때 그 속에 거하는 악으로 인해 선한 것이 오히려 악한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의 검은 신적 진리를 뜻하지만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든 검은 그들의 악에서 비롯된 거짓들을 뜻한다. 그들은 진리 대신 거짓을 마음에 굳히고 이로써 신적 진리이신 주님을 거부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돌, 물, 피, 검, 옷, 은 등... 진리를 표의하는 많은 낱말들이 있으나 각 사물의 특성에 따라 진리의 여러 가지 성격도 다르게 나타난다.
<피 뿌려진 그의 옷> : 여기 나오는 피는 정화의 피가 아니라 악과 결합한 거짓에 의해 말씀 안의 진리를 더럽히고 멸시하는 불결한 피이다. 이 피의 의미 역시 성경의 다른 낱말이 그러하듯 선한 의미와 악한 의미 두 갈래로 쓰여진다. 원래 영혼을 정화시키는 선용의 목적을 지닌 진리의 피였으나 이 진리가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거짓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말씀의 거룩과 신성을 공격하고 배척한다.
<피를 마신다> :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적 의미로 쓰이면 악으로 인해 거룩하신 말씀을 위화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피를 흘린다> : 말씀의 진리가 위화되다.
<얼굴을 들다> : 인애를 소유하다. 그 사람의 선한 애정은 얼굴에 표정 등으로 나타난다. <얼굴을 떨구다> 라는 의미는 인애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을 지칭한다.
* 옷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변형되사 옷이 희어지다> : 이 장면은 제자들의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진정한 주님의 모습 곧 말씀의 실체를 보고있는 것이다. 거기서 주님은 선으로부터 발출되시는 진리이시다. 성경에서 높고 낮다는 의미가 공간적 세계의 척도이지만 영적 개념으로는 깊은 내적 세계와 외부 가시의 세계를 뜻한다. 깊을수록 선악간 더욱 본질적이 되고 순도가 높아지고 짙어지기에 산들 중에도 높은 산은 보다 순수한 선의 세계를 뜻한다. 물론 반대적인 악한 개념도 산이라는 낱말에 들어있다. 옷은 선을 감싸는 진리라는 의미가 있는데 율법에 억지로 순종하던 유대 교회의 열등한 선을 상징하기 위해 선지자 세례 요한은 가죽옷을 입고 다녔다. 어린 주님을 감쌌던 강보는 진리의 천진성을 표의하고 겉옷은 외적 진리를 속옷은 진리의 영적인 의미를 뜻한다.
<초막 셋을 짓겠다> : 베드로는 성언을 모세(율법)와 엘리야(예언서)와 주님을 증거하는 말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려하지만 이어 구름이 걷힌 뒤 주님 홀로 계신 것은 성경의 세 부분 모두가 진리이신 주님만을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다> : 성경에는 예언서(엘리야)와 역사서(모세)가 예수의 말씀과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갖고 속옷을 제비뽑아 취하며> : 주님의 겉옷은 신적 진리의 일반적인 의미를 가리키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사건이 있은 후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말씀의 영적 의미가 주님의 섭리에 의해 열려지게 될 것을 표의한다. 주님의 겉옷은 진리의 일반적 의미를 또 속옷은 진리의 영적 의미를 뜻한다. 제비 뽑는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해설)일반적으로 옷은 선을 감싸는 진리의 의미가 있는데 '흰옷이나 밝고 빛난 세마포'는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의 순수성이나 성도들의 의를 의미하고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행실을 바로 하는 자를 뜻하며 생베 조각은 새 포도주와 같이 옛 유대교회의 거짓이 제거된 새로운 기독교의 진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혼인 잔치에 입어야 하는 예복은 성언으로부터 얻어낸 신령한 진리 즉 선과 지혜가 결합된 진리의 의미가 있고 혈루병 앓는 여인이 '이는 내가 그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진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결합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주님을 조롱하던 병사들이 '옷을 나누어 가지고 제비를 뽑아 속옷을 취한 것'은 그들의 악으로 인해 성언의 모든 진리들을 흩어버렸으나 주님의 자비에 의해 영적 진리가 이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수난
해설)성경에서 주님의 수난 부분을 읽을 때 우리의 시선이 반드시 놓쳐서는 안될 관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주님께 대한 그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들은 모두 인격으로서의 주님께 대한 악행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신적 진리에 폭거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주님의 움직임 하나 하나마다에 두어지는 의미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유대 교회는 전적으로 황폐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들이 주님을 거부한 것은 바로 신적 진리를 함께 거부한 것을 뜻한다.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로부터 당한 주님의 수난은 사랑과 진리는 없이 형식뿐인 유대 교회의 실상을 그대로 밝혀주고 또 성서와 교회 그리고 예배에 대한 유대인들의 상태가 얼마나 경건치 못했는가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악에 이끌려 성서의 모든 교훈들을 역용 시킨 결과 그들에게는 어떠한 진리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들의 교회가 주님의 수난을 야기 시킨 원인이 된다. 그들은 주님 오시기전 예언자들을 외면한 것처럼 주님 곧 진리의 말씀을 멸시한 것이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 극심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 인성을 입고 오신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에 의존하고 계신 것을 나타낸다. 주님 가까이 있던 세 제자들은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원리를 표의하는데 그들 중 베드로는 믿음을, 요한은 주님께 있는 순수 사랑을, 그리고 야고보는 이웃 사랑을 표의하고 깨어있다는 의미는 악을 버리고 선 안에 드는 상태를 뜻한다.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의 길에는 믿음과 선용의 삶과 사랑만이 필요하기에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는 따라옴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악의 유혹이 극심할 때 사랑과 믿음은 그 힘을 잃기 쉬운데 주님은 특히 믿음(베드로)이 인애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엄히 경계하신다.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갈대로 맞으시며> : 형식 뿐으로 전락한 유대 교회에 있어서 그들의 성서와 교회, 그리고 예배에 관한 질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진리인 성언을 거부하고 폭행을 가하고 있다. 침을 뱉는 것은 성언이 더럽힘을 받는 것을 뜻하고 얼굴이 가려지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며 주님의 머리는 신적 지혜를 나타내기에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은 수많은 비 진리로 인해 신적 지혜가 모독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검과 몽치를 가지고> :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원리(검)와 선을 파괴하는 악(몽치)으로 거룩한 말씀을 모독하고 있다. 성경에는 전쟁이야기가 흔히 나오는데 거기 쓰이는 병기 중 검과 칼과 활은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진리를 나타낸다. 또 병거는 말씀 속 교리를 표징한다. 전쟁(싸움)은 비 진리가 진리에 대항하고 진리가 비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다> : 악하고 거짓된 원리들과 싸우다.
<십자가에 못박다> : 못은 범람하는 비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로 인해 전 성언을 파괴하고 모독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의 저주는 성언이 파괴되고 위화되는 것이다. 못의 영적 의미로는 범람하는 비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 해를 가하는 경우이고 천적 의미로는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나 말씀에 해를 가하는 경우이다.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 위화된 진리로 거짓된 예배를 주님께 드리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그들이 제공하는 신 포도주를 거절하셨다. 포도는 진리 혹은 진리의 영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가 나의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는다> : 이 뜻은 인애의 삶으로 기초를 마련한 자라도 그들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지배욕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받으신 잔 곧 주님 스스로 모든 시험과 악을 극복하셨듯이 그들도 시험의 극복에 의한 중생 과정을 통하여 주님을 좇을 수 있다는 뜻이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교회의 말기에 진리이신 주님이 모독되고 선한 삶이 없는 자들은 모두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뜻인데 목자를 치는 것은 신적 진리께서 사람들의 악과 거짓에 의해 모독되어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나타내고 양들이 흩어지는 것은 우리 속에 선한 요소가 말살되는 것을 의미한다.
* 시간과 공간의 상태의 변화
성경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영적 의미로 사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그 본질에 있어서 상태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때가 저물어 빈들에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 때가 저문 것이나 빈들, 배가 고픈 것 등은 교회의 선과 진리의 황폐 상태를 표의한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교회의 말기에는 인애가 없으므로 주님을 믿는 믿음도 없다는 주님의 가르치심이다. 새벽이 오기 전은 밤중에서도 가장 깜깜한데 이 때는 교회(영혼)의 가장 어두운 상태이다. 믿음을 표의하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은 유대 교회에 믿음이 소멸된 것을 나타낸다.
<밤이 맞도록 수고해도 얻은 것이 없다> : 영적인 암흑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밤은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뜻하고 수고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돌이켜보려고 애쓴다는 의미이다.
<그 도망하는 날이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하라> : 외적 거룩의 상태가 내적 거룩의 상태를 빙자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의미이다. 도망한다는 것은 영혼이 그 파멸을 피해 악과 거짓을 버리고 거룩한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뜻하는데 유대 교회와 같이 외식하는 자들은 겉만을 씻고 그것이 마치 내면까지 정화된 것처럼 여기며 안식의 상태를 누리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은 오히려 영혼의 파멸을 방조하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주님은 이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안식 상태는 더 이상 악과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상태 곧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복종하는 상태이다. 나아가 안식의 상태는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여서 더 이상 사랑의 선과 믿음의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아직 안식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관계로 우리 마음 속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사랑을 도외시한 믿음과 진리는 참이 될 수 없고 또 믿음과 진리를 도외시한 사랑 역시 진실할 수 없다. 지성으로는 주님을 시인하며 말씀에 대한 지식 역시 많이 지니고 있지만 이를 따르는 선한 삶이 없다면 그의 믿음은 참이 아닌 사랑에서 분리된 믿음이요 이러한 믿음 하에 지니고 있던 지식들마저 훗날에는 빼앗겨진다. 분리된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서로 결합시키는 것이 성경에서는 혼인으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결합은 교회 내에 진리와 선의 결합 곧 진리를 알고 이에 따른 선한 생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다> : 선과 진리가 결합된 안식 상태에서는 교회가 자연적 선과 진리들을 마음껏 취하며 즐길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선과 진리들은 영적 인 것들에 비해 그 속에 불순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자칫 사람을 낮은 등차의 원리들에 빠지게 하기에 항상 경계되어야 하지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난 안식의 상태에서는 그들을 이길 힘이 있어 기쁨 속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밀과 이삭은 선과 진리의 자연적인 면을 나타낸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다> :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 안식의 상태가 바로 모든 악한 정욕이 물러간 상태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그런 주님이 영혼을 깨끗이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나이까> : 주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 당연하심에도 말씀의 외적 의미에만 사로잡힌 이들은 인간 고유의 총명에서 나온 전통으로 주님의 진리를 위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참 자유 안에서 행하는 것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진리의 질서에 반대된다고 비난한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과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의 의미는 선에서 진리를 분리하거나 악과 거짓을 행하여 거룩을 파괴하는 것을 뜻한다.
<어릴 때부터니이다> : 중생의 초기부터 악한 정욕들의 지배를 당해왔다.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 선과 진리로 기틀이 잡혀있는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물러나 자아애의 어둠에 처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주님을 알고 진리를 따라 살다가 이전의 악과 거짓들로 돌아가면 그때는 신성모독 죄에 걸려 다시는 영혼의 돌이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취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되다> : 이런 표현을 접할 때 우리는 심판의 때에 주님에 의해 육체가 공간적으로 들려 올라가거나 그냥 자리에 남아 있는 외적, 가시적 현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영혼의 내적 상태가 선과 악 어느 한 쪽으로 굳어지는 상태를 이러한 표현으로 알리고 계신 것이다. 성경이 겉으로 표현한 외적 움직임들은 사실 그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에도 감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시각은 자꾸 보이는 세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한 자리에 누워있다는 뜻은 같은 교리를 배워 알고 있다는 뜻으로 진리에 대한 이해는 같을지라도 그의 삶이 선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에 따라 하나는 악으로 굳어지고 다른 하나는 선한 영혼의 상태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또 데려가시는 분은 주님으로 주님이 그를 데려가신다는 뜻은 그 마음이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그에 따른 선한 삶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한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주님과 동행한다는 의미와 같고 버려 두는 것은 그 본래의 악 그대로 굳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환난이요 심판 때의 인간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성경이 말하는 환난, 재난, 재앙, 고난 등은 그 영혼이 악으로 굳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보이는 세상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즉 그것들은 사람이 육체적, 감각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그 영혼이 악의 범람으로 피해를 입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하여 육체적,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리고 있는 이유는 육체와 감각으로 사는 우리의 이해의 수준이 그러한 관념에 친근하기에 주님이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는 자비 때문이다.
또 우연히 악을 범한 자들을 위해 도피성을 마련하신 것과 유황불을 피하여 롯이 산으로 도망하는 것 등에 나타난 도피한다는 의미 역시 육체적 움직임이 아닌 그 영혼이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뿐이다. 그것은 주님 품안 곧 악을 피하여 선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을 그리 표현하고 있다. 주께서 완악한 유대 무리들을 떠나셨다는 말씀은 유대 교회로 상징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의 영혼이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께서 풍랑이 이는 배 안에서 주무시는 것은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진리로 견고해지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선한 요소들이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이 겉으로는 주님께서 악한 자들을 떠나시고 숨으시며 얼굴을 돌리시고 또 주무신다고 말하지만 이 모든 표현은 주님이 우리로부터 멀리 달아나시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한 우리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그리 말한 것이다.
* 식물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으리라> : 유대 교회가 지닌 것은 참이 아닌 거짓에서 나온 변질된 예배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이 드리는 그러한 예배를 지금 받으실 수 없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따른 선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교회를 하나로 이어주기 위해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주셨는데 이 진리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안전판이 되고 천계적 선들의 확보와 내면적 지성의 승화를 위해 쓰인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 주님이 교회에 선한 삶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여정 가운데 주님 스스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 타국에 갔다는 의미이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 주님이 말씀으로부터 가르치시기를 원하는 교훈은 사람은 각자의 마음속에 사랑과 인애의 선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과 이 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시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로 아들을 보내니 저 농부들이 말하되 이는 상속자라 그를 죽이면 그 유업이 우리의 것이 되리라 하고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지다> : 인간 고유의 총명에 빠져 자기들의 전통과 유전에 의해서 진리의 교훈을 역용하며 거부하다가 마침내 육체로 나타내어진 주님의 가르침에까지 폭거를 가하여 모든 선과 진리를 자기들에게 귀속시키다.
<포도원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이에게 주리라> : 심판 날에 그들이 지닌 진리의 지식들은 빼앗겨져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진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안수하시매 주목하여 보더니 만물을 밝히 보다> : 지성적 광명은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복구된다는 뜻이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진리의 표상으로 길이 나타난다. 진리는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길이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만물을 밝히 보는 것은 확 트인 이해성을 따라 선한 애정으로 만사를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먼저 깨달은 보잘 것 없던 진리들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에는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 후 만물을 밝히 보게 된다고 적고 있다.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적 인격을 갖추기 위해 진리에 따른 선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고 안수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유입되는 것을 뜻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무화과나무에 의한 대응을 배우라. 무화과나무가 뜻하는 것은 자연적 수준의 낮은 선인데 이는 주님이나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순종하겠다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높고 순수한 선은 이런 낮고 보잘 것 없이 여겨지는 선을 발판으로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머지않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 여름은 우리 이해성과 애정의 상태가 최고조에 달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 교회가 선과 악 사이 또는 진리와 비 진리 사이 여러 가지 갈등들을 겪으며 나아가는 중에 자신은 정작 자기 내면의 상태 변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중생은 성취되어 간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 심겨진 순진무구의 선이 진리의 말씀을 수단 삼아 선한 인격을 갖추어 가는 과정은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는 하나님만의 독자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에 사는 우리의 이해성으로는 그것을 지각하는데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출생과 번식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 성경에서 복으로 다루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식을 낳는 것이다. 자손의 수가 번창하는 복은 다만 인구수의 증가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아담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후손을 낳았는데 그들이 후손 낳기를 간절히 원한 이야기들이 성경에는 숱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괴로움과 자식을 낳음으로 기뻐하는 것, 서로 제 자식을 낳아 대를 이으려고 애를 쓰는 것 등은 예사로 쓰인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후손을 보는 것을 복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는 자식을 낳는 것이 속 사람에게 있던 선한 생명에 양식을 잘 공급하여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영적 진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이 겉으로는 이 세상의 외적인 소유의 번창을 의미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영혼이 선과 진리의 충만한 삶을 사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의미로 교회가 악에서 돌이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려 애를 쓰는 것을 성경은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표현하였다. 주님의 계명을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잘 낳아진 자식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잘못 낳아진 자식은 교회나 개인의 삶이 악으로 굳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날 곧 믿음도 없고 사랑도 식어 신앙이 황폐될 때 수태하지 못한 사람과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 영혼의 상태가 악으로 굳어지는 것을 주님이 이런 상징적 말씀으로 그들 가슴에 깊이 새기도록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악과 거짓의 혼인으로부터 생산될 어린 피 덩어리는 선한 생명이 없는 사생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리라> :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도상에 자칭 '내 것만이 진정한 진리이다' 라고 하며 거짓으로 교회를 범람시키다.
<가이사에게 세를 받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위선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성서를 겉 표현으로만 다루기 때문에 성서의 교훈을 도덕과 시민 생활에 속한 것들에 관한 겉 사람이 지킬 외적 규범(가이사)으로만 생각하고 영적으로는 대하지 않는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 성서가 비록 표의적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겉 사람이 사는 세상의 형상으로 나타나 도덕과 시민 생활의 법칙들로 구성되고 이에 순종해야함을 가르치지만 그것 뿐 아니라 그 속에 천계의 형상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천계적 생명에 통제되고 순응해야 한다.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어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오라> :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성이 너무 외적이고 자연적인 것에만 얽매어 있다면 사리판단의 능력이 떨어져 영적 생명을 얻지 못하기에 저를 거기서 분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의 입류를 받도록 해야 한다. 여기 마을은 진리의 세계를 표현하고(동네는 선의 세계를 표현)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는 아직 합리성이 계발되지 않은 자연적 상태의 생각과 판단력들을 말한다.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 쉽다> : 자연적 원리 안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인애는 없이 진리의 지식만 풍성히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교회의 교만한 자들보다 훨씬 변화되기 쉽다. 성경의 부자는 재물과 더불어 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 사랑의 삶은 없이 진리의 지식만 풍성히 지니고 있는 자들을 지칭한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 주님과 하나님 나라의 선과 진리들은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를 지닌 영혼들에게 흘러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 자아애와 세간애는 주님보다 앞서서는 안되기에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애정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 사실 자아애와 세간애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인간의 마음 속에 주님과 이웃 사랑보다 더 높은 곳에 모셔진다면 이는 악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을 제일로 모시고 그 아래 이웃을 돌보는 마음을 위치시키며 그 다음으로 자기와 세상을 생각하면 이는 천국의 질서에 알맞게 배열되어 신적 질서에 어긋나지 않으나 이 순서가 거꾸로 되면 그 마음에는 지옥이 열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진리가 알려지면 악한 이들은 오히려 이를 모독하여 자기 영혼을 불행에 빠뜨리게 될 것을 막아주시려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낸다.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 인간의 참 생명은 그 외적인데 있지 아니하고 그 내면에 있다. 따라서 영혼의 본질적 불결은 외적인 것이 더럽힘을 입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내적인 부분이 더럽힘을 입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영혼의 두 기능 중 이해성에 속하는 생각이나 기억의 지식들이 잘못되는 것은 영혼을 불결에 이르게 하는 중간 수단은 될지언정 그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는 바 이는 영혼의 본질적 생명을 이루는 의지에 속하는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애정이 더럽힘을 입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한 기억의 창고에 저장해둔 지식이나 생각들 그 자체가 사람을 직접적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주변 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나 외부에서 사람 안에 끼치는 영향은(밖에서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 처음 그의 외적인 지식에 모아진 후에 이를 바탕으로 영혼의 주체가 되는 내면에 흘러드는 반면 역으로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 영혼의 본질적 생명을 이루는 애정의 어떠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밖과 외적인 것은 생명을 구성하지 못하는 보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고 반대로 안과 내적인 것은 생명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이기에 외적인 것을 정화시킨들 혹은 외적인 것이 조금 잘못된들 그런 것은 그 사람에 속한 생명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내적 생명보다는 외적 정결에 더한 관심을 보여 주님께 책망을 들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바라보는 수준은 그 말씀의 외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그친 바 이에서 여러 가지 위선과 외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대의 의식법에서 손을 씻는 행위는 외적 정화일 뿐 이는 내면을 깨끗이 하는 것의 표징에 불과하기에 주님은 오셔서 성경 말씀의 내적(영적) 의미를 풀어 그릇의 안과 밖을 모두 정결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종합해보면 영혼의 변화는 기억의 창고에서 일어나는 지식의 일이 아니라 그 영혼의 의지에서 나오는 애정이 어떠한가에 좌우되는 일이기에 말씀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수단 삼아 의지에 선한 애정을 키워야 하겠다. 기억에서 공급받거나 세상으로부터 얻는 것은 우리의 이해 안에 들어오지만 아직 의지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에 속한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다> :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룩한 진리나 선을 역용 또는 악용해 이득을 구하는 자들은 저들 스스로의 악에 의해 주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함이고 아내도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 시집가면 간음함이다> : 성경의 혼인이 진리와 선의 결합 곧 진리를 알고 아는 진리에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키지만 성경의 간음이란 진리를 선에서 분리시키는 것 곧 진리의 지식만 있고 그에 따른 사랑의 삶이 없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아무도 지상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나 스승, 주인이라고 일컫지 말라> :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할 자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기에 우리는 그분께만 결합되어야 한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 진리의 빛은 사람의 자연적 의지에 종속되어서는 안되고 지성적인 마음 안에서 선을 갈망하는 욕구에 의해 고양되어야 한다. 등불을 말이나 평상 아래 두는 것은 진리의 빛을 세상적이고 자연적인 삶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 그것을 등경 위에 두는 것은 진리의 빛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 크냐 변론하다> : 자아애로 인해 자신을 높이려 열중하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 세상에서의 이웃을 향한 인애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천계의 삶도 주어진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 : 진리의 범람으로 의견 대립이 생기는 상태를 뜻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다> : 여기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도성인데 이곳으로 올라간다는 뜻은 진리에 따른 삶을 사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곧 중생 도상에 있다는 뜻이다. 그 길에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닥칠 시험의 두려움에 대해서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뜻한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가시다> : 이 뜻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악함으로 주님이 그 영혼과 결합하시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성전을 둘러보시다가 떠나는 것은 영혼의 상태가 악하여 진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고 때가 저문 것은 영혼의 상태가 밝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 이 뜻은 영혼의 황폐된 상태가 극에 달하여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환난은 영혼이 악으로 인해 해를 받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시다> : 이 뜻은 주님이 사람들의 예배의 질 곧 예배의 동기를 살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사함을 받았다와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악을 버리는 것이고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은 진리의 교리를 따라 새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집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 곧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님이 이 둘을 다 행하신 것은 악의 제거(죄사함)가 곧 바로 선한 삶(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다> : 이 의미는 주님께서 인간 속에서 그들이 지닌 지옥의 악과 싸워 그것을 정복하시고 중생 시키시는 것을 뜻한다.
<주님이 객실을 얻을 곳이 없어 마굿간을 얻다> : 이는 뜻은 주님이 교훈을 베풀만한 마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유대 국민들의 내적 상태를 말한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 이 뜻은 악한 삶으로 인해 영의 양식이 유입되는 길목이 막혀있는 것을 뜻하는데 목은 머리와 몸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목에 연자 맷돌이 달려있다는 뜻은 영혼이 죄로 가로막혀 이해가 의지로 발전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 때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이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입류에 의해 사람의 속과 겉이 거듭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천사들을 보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유입되는 것을 뜻하고 땅 끝과(겉 사람) 하늘 끝(속 사람)까지 모은다는 뜻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중생을 의미한다.
<잠자다> : 이 말씀이 영적 삶을 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깨어있다>는 표현은 영적인 삶을 사는 상태를 나타내고 <주님을 찾는다>는 의미는 주님을 경배하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다>는 의미는 믿음에 관한 교리에 따라서 가르침을 받으며 사는 것을 말한다.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 이 말씀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연유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생각을 경계하시는 의미인데 여행은 영혼이 순례의 길을 가는 과정을 뜻하고 그 외 자기 소유의 물건들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는 영혼이 중생하는데 필요한 능력은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귀신들린 자를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다> : 이 말씀은 지옥에서 뻗쳐오는 욕망을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고 다만 주님만이 그들을 물리치시기에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 세상 삶의 결과에 따라 천계의 삶도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땅에 살 때 형성된 인격의 본질이 어떠한가에 따라 저곳에서는 심판이 내려지는데 이 심판의 의미는 이러하다. 즉 이 땅에서는 영혼의 겉과 속이 다르게 보일 만큼 선과 악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때에는 서로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들은 그 영혼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다시 말해 그 영혼이 본질적으로 선하면 그의 겉 사람에 있던 악과 거짓이 떨어져 나가고 반대로 그 영혼이 본질적 애정이 악을 더 사랑하면 그에게 위장으로 덮여있던 선과 진리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선과 악 또 진리와 거짓들이 서로 분리되어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명확히 드러나 선은 선이 있는 곳으로 악은 악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바로 심판의 의미이다.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리라> : 사실 이 말씀은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일이 있고 나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은 백부장과 주님의 고난을 지켜보던 자들이라고 성경이 밝히지만 이 말씀의 외적 의미만 가지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작 그들이 그런 고백을 하게된 동기는 일어나는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7 : 54)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지진이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이 지진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도한다고 하여 그로 인해 갑자기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신앙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지진의 일반적 개념은 외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지진의 의미는 그들 속에 일어나는 내적 현상으로 여기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자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된 것은 지진이라는 외적 현상을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영혼의 깨달음을 그리 표현한 것이다.
해설)인자가 들린다는 표현 역시 겉으로는 외적 현상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내적 의미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인자가 들린다는 표현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 매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라는 의미는 그들의 이해가 열려지는 것을 뜻하고 주님이 땅에서 높이 들린다는 의미 중 땅의 의미는 진리를 거부하는 우리의 악한 마음을 뜻한다. 거기서 인자가 들리는 것은 악한 욕망을 지닌 우리 눈에 의해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더럽혀진 진리가 악한 마음 땅에서 뽑혀 우리의 이해가 확연히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정체가 폭로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의 극악함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의미는 그 극악한 우리의 악을 버릴 것을 보여주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진리를 모독한 것은 우리의 악한 마음이지만 그런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또 제물 삼아진 모습으로 되기를 원하신 것은 주님 스스로의 뜻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악한 마음속에서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그 동안 선한 빛인 양 줄곧 섬기며 따라왔던 주님 곧 진리의 말씀은 바야흐로 우리의 세상적 관심사를 충족케 하던 욕망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것이 판명되고 나면 그러한 자각을 가진 자마다 이제 그 거짓된 진리를 벗어 던지고 참 진리를 맞아들이는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 부활의 전조가 '땅이 진동하며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는 것과 주님을 바라본 무리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땅에서 들리는 뜻이 외적인 것을 말하지 않듯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다(행 1 : 9)는 의미 역시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의미는 그들의 이해가 열려 참된 진리를 순수하게 가슴에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여기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하나님 나라이며 동시에 그것은 우리 마음에 건설되는 나라이기에 오늘날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우리 마음에 좌정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내적인 의미로 이해하여보면 그 동안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진리로서의 주님은 탐욕의 대상밖에 아니었으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인 줄을 알게되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던 거짓된 진리의 정체가 드러나 그것이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버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참된 진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부활은 우리 마음속 새 진리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이해는 자신의 악한 마음 땅에서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진 주님을, 아니 주님께 실린 우리의 악을 그 땅에서 들어올려야 한다. 즉 우리가 여지껏 욕망의 대상으로 좇아온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버려야 우리의 영혼이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제서야 참된 진리로서의 주님을 우리는 맞아들이게 되고 우리의 삶은 새로운 진리에 따라 선한 의지가 주어지게 된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이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물질과 공간, 시간 등을 떠나서 우리 영혼에 일어나는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반응을 기록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이 땅에서 들리고자 스스로 원하시는 이유가 '땅이 진동하며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일어나는 것과 주님을 바라본 무리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 곧 우리 영혼이 이러한 부활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를 해석해보면 땅이 진동하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악한 탐욕에서 돌이켜 이제 진리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이 순수한 진리에 따라 살려는 자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허망한 생각들이 부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바위는 이 부분에서 거짓된 진리를 뜻하는데 순수하게 쓰일 때는 진리를 뜻하지만 성경의 모든 의미가 그러하듯 여기서는 반대의 악한 의미로 쓰였다. 성경에 사용된 낱말에 선한 뜻과는 달리 악한 뜻이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이 그 말씀을 선하게 보거나 아니면 탐욕으로 보거나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바위가 터지는 것은 그 동안 진리를 역용시켜 바라본 우리의 악이 물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은 인간이 자신의 악한 경향성으로 인해 죽어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제 이전에 바라보던 탐욕의 대상이 된 거짓된 진리는 제거되고 참되고 순수한 진리가 마음에 살아나는 부활로 인해 그 무덤이 터지고 성도들은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깨이게 된다. 그 영혼이 이렇게 변화되는 상태가 바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의 의미인 것이다. 참된 진리가 우리 마음에 새 생명을 잉태케 하기 위하여 주님은 땅에서 들리셔야 했고 이는 주님의 자의에 의한 스스로 몸을 버리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