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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080905a창세기37장
20080905a 울산강의-창세기 37장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25장 한번 봅시다. 오늘 37장, 38장 하는데 창세기 25장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태가 하나지요. 태는 하난데 여기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A라는 민족과 B, 민족이 나와요. 아들 정도가 아니고 두 민족이 나오기 때문에 이 태에서 두 민족이 나와서 한 민족이 한 민족을 섬기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어디까지 이어져야 돼야 하느냐 하면, 두 민족이니까 민족이 이룰 때까지 계속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계속 가야 되겠지요.
이건 하나의 아들, 너한테 네 운명이야. 그 어린애한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두 민족이 한 태에 포함되어있는데 이게 나누이면서 두 민족이 될 때까지 계속 이 약속은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 민족이 나누일 때까지 절대로 하나님의 계시는 취소되거나, ‘전에 이야기했던 것 없는 걸로 해라’ 이런 식으로 무효 시키고 이런 건 없습니다.
종이로 만든 돛단배가 두 개 있다. A라는 종이배 B라는 종이배 있다면, 이 배는 반드시 물이 있는 곳에 흐르게 돼있지요. 이 태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면, 이 두 돛단배는 어느 정도 같이 흐르다가 뭔가 갈라져서 각기 다른 강물에 흘러가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그 과정을 알아야 어떤 사람이 여기 돛단배 또는 종이배처럼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두 민족이 서로 나누이리라” 하는 이 ‘나눔’, ‘분류’지요. 이 분류작업에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신경을 써야 됩니다. 하아, 하나님께서 사람이 있으면 건지는 것이 아니고, 분류를 통해서 건진다는 것. 자꾸 쪼개고 분류함으로써 ‘너는 가라지야’ ‘너는 알곡이야’ 가라지가 있어야 알곡이 알곡답고, 알곡이 있을 때 저게 가라지인 줄 비로소 들통 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뭔가 생산돼있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만들어졌으면, 우리는 오해하기를 ‘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가 태어났다’ 그걸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상당히 얕잡아 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산되면 그 다음에 거기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그때부터 가라지, 알곡하고 분류되는 ‘너하고 나하고 딴 동네야’라고 분류되는 그것까지 파악을 해줘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우린 형제야.’ 이러시면 그건 너무 성급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것에서 그 다음의 작업이 분류작업을 해야 됩니다. 분류작업을 할 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기준’이 뭐냐? 하나님께서 두 민족을, 택한 민족과 버림받을 민족을, 저주 받을 민족과 복 받을 민족을 나눌 때 그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기준이 뭐냐? 그걸 또 아셔야 돼요.
첫 번째는 하나님에서 하나에서 나온다. 이 ‘하나’라 하는 것은 ‘무’에서죠. 무에서 유가 되고, 유에서 분류가 되고, 세 번째는 그 분류에서 기준점이 나오는. 그 기준점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27장 29절에 보면,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 따라가면 돼요. 신앙생활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흘러가면 돼요. 지가 기도하고 열 내고 계시도 아닌 걸 가지고 붙들고 주여, 주여 하니까 어렵지 하나님의 흘러가는 계시 따라, 흘러가는 약속 따라 같이 흘러가면 그게 종이배처럼 같이 동동동동 떠가면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너는 뭘 믿노’ 하면 내 밑에 떠받치고 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든지 이야기하면 돼요.
‘나의 기도를 믿는다. 나의 믿음을 믿는다.’ 이러면 안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돼있어요. 그 약속이 뭔데? 약속은 바로 제가 아까 한 적어봅시다. 첫 번째, 무에서 유가 생기고, 두 번째는 분류작업을 하고, 세 번째는 뭐라 했습니까? 기준. 기준이 뭔가, 기준이 나옵니다. 그 기준이 창세기 27장 29절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래 돼있지요.
여기 분류작업이 셋입니까, 넷입니까, 다섯입니까? 얼마로 분류되지요? 셋이에요, 넷이에요, 다섯이에요, 분류가? 둘밖에 없는 게 무서운 이야기에요. 한쪽은 복을 받아 축복이고, 한쪽은 저주, 제삼의 지역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제삼의 지역이 없습니다. 축복이냐, 아니면 저주 받을 거냐. 딱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 받을 자냐? 아니다? 넌 저주 받는 거야. ‘난 복도 저주도 다 싫은데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복 없으면 저주고, 저주 없으면 무조건 복 받은 사람이고. 학급에 반이 두 반밖에 없어요. 2학년 1반 아니면 2반이라. 2학년 3반 같은 건 없어요. 딱 두 반밖에 없어요. 반편성이 두 반밖에 없습니다. 이게 나중에 이어지면 여긴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이고. 마지막 우리가 가야 될 반은 두 개밖에 없어요.
지난 수요일 날 제가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사람이 나이 팔십, 구십 가까이 되면 자꾸 말년 행사하려고 하는데 그게 큰 오산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경계선을 철폐해버리면 이게 범위가 스케일이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저 천국 어린양의 보좌까지 쫙 확대가 돼요.
우리가 천국까지 생각 안 하고 태어났다, 젊었다, 늙었다, 죽는다. 이것만 딱 잘라내면 이제 나이 한 팔십 쯤 되면 슬슬 한번 놀까?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그 경계선을 철폐해버리면 이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저 하늘나라 끝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놀기는 뭘 놀아요? 죽을 때까지 내가 어떤 사명을 해야 됩니까? 그걸 생각을 해야지 제대말년 행사하면 안 되거든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을 자꾸 태어났다, 죽었다. 이걸로 끝나버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 주신 약속은 죽음이란 문턱을 쓸어버리고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천국까지 범위를 확 넓혀버려요. 넓혀버린다면 천국 가서 해야 될 일을 앞당겨서 우리가 지금 미리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주일날 수레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수레바퀴이야기. 과거에서 나를 밀고가면 이 수레 안에는 내 과거의 것이 자꾸 담기게 돼요. 내 어릴 때 어떻게 했고, 어릴 때 꿈이 뭐였고? 하지만 이것은 바로 불신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고, 신자 같으면 여기에 밀고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잡아당기기 때문에 미래의 것이 앞당겨서 여기 실리게 되는 겁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자꾸 내 안에 낯선 것이 아주 낯선 그러한 속성이 담겨서 나한테 낯선 것을 준 거기에 기쁨으로 끌리게 돼있지요. 끌어당기는 거예요. 미래가 나를 끌어당기는 겁니다. 우리 김대식 성도님이 잘 표현했지요. ‘미래가 현재를 삼켜야 된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자꾸 사람은 뒤돌아봐서 자꾸 추억이나 계산하게 되면 나중에 이게 지쳐요. ‘아이고, 이만큼 육십 살았는데 또 뭐 할 것 뭐 있노?’ 이래 된다고.
그런데 미래에서 뭐가 담기느냐 하면, 사명이 담겨요. 지금 이 나이에 뭘 하리. 이 나이에 뭘 해야 됩니까? 사명이 담겨서 그 사명이 주는 쪽으로 이렇게 뭔가 음성이, 지시가 오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돼있어요. 마음도 몸도 가게 돼있다고. 지금 내 업적이 어느 정도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쓰시느냐? 그렇게 살아야 우리의 마음이 편합니다. 사람이 힘들게 살다보면 언젠가 스스로 기운이 빠져서 기진맥진해서 주저앉는 수가 있어요.
교사생활, 여자들은 모르는데 남자들은 이상하게 처음에 이삼 년 진짜 좀 무리한다 싶게 열 내요. 처음에 초임 와서 몽둥이 들고 학교 완전히 개혁한다고 하다가 한 이삼 년 하고나면 제 풀에 지가 쳐져서 이제는 아무것도 안 맡을 랍니다. 특히 남자 선생님들. 이 아이들 인간 만든다고 그렇게 설치다가, 초임 때 위험해요. 고소 들어오고 난리입니다. 하다가 십 년 하면 난 그냥 월급이나 타 먹고 왔다리갔다리 하면 끝나지 뭐. 나 하나 된다고 학교가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고. 제 풀에 지가 지친다고.
이거는 교사뿐만 아니고 직장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애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재 만들겠다고 뭐 피아노, 태권도, 무용, 웅변 다 다니다가 ‘안 되겠다. 니는 싹이 안 된다. 뭘 해도 안 된다. 그저 건강하게 밥만 잘 먹고 잘 커라’ 아예 포기해버리죠.
그게 과거에서 수레에 무거운 짐을 내가 밀어서 가려고 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이게 매끈한 레일은 미래가 싹싹 당기면 쫙쫙 빠른 속도로 미래 쪽으로 가게 돼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당신은 뭘 믿느냐, 당신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느냐?’ 할 때 여러분 속에 레일을 이야기해요. 여러분 속에 인생의 밑에 깔린 미래로 통하는 미래와 연결돼있는 레일을 이야기해주세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죠. 없는데서 있게 하고, 분류작업을 하시고, 누구한테? 지금 나한테. 하나님의 기준을 나에게 적용시킵니다. 그 기준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그 기준은 보통 기준이 아니고, 축복 받을 거냐 아니면 저주 받을 거냐? 둘 중에 하나, 제삼의 영역은 없어요.
그래서 이 기준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 기준이 창세기 27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당신이 기준이라고 장담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29절 마지막에 뭐라 돼있어요? 축복과 저주가 나오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이에게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까 ‘너’가 누구냐 하면, 빨간 걸로 쓸게요. 이겁니다. ‘주’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간단하죠. 평범한 인간 가운데 뭘 뽑아낸다, 뭘 다듬어내다? 주의 주 되심을 조각가가 조각품 하듯이 주 되심의 속성을 다듬어내면 그 주 되신 분께 고개 숙이고, 존경하고, 경배하면 그 사람이 바로 복 받은 사람이고, 그 주 되신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고, 거부하고, 부정해버리면 그 사람은 저주 받은 거예요. 저한테 따지지 마세요. 하나님의 계획이 그래요. 하나님의 청사진이 그겁니다. 이것 외에 하나님의 계획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이야 주지요. 그때 나오는 말은 주인데 그 주라는 안에 담기는 내용은 창세기 25장, 27장 구약부터 줄줄이 주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계속 끌려가고 있고, 그 수레에 계속 주의 내용이 담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창세기 37장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37장에 있어서 이 원칙을 여기다 적용시키면 방정식이 다 맞게 돼있어요. 창세기 37장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분류작업이에요. 어떤 분류작업이냐 하면, 창세기 25장에서는 한 태에서 두 민족이 나누이리라. 창세기 27장에서는 한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주가 되고 다른 사람은 섬기는. 이게 바로 창세기 27장인데 그 두 개가 어디에 모아지느냐 하면, 난데없이 요셉에게 모아집니다.
이게 굉장히 신기해요. 왜 그러냐 하면, 분명히 창세기 25장, 27장에 계시는 누구한테 주는 거냐 하면, 그때 요셉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야곱에게 주는 거예요. 창세기 37장에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해놓고 갑자기 야곱이야기가 쑥 들어가 버리고, 2절에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 소년으로서” 요셉이야기가 나온다고.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일번 원칙, 무에서 유죠. 주가 없는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게 되면, 야곱이죠. 야곱 세계,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게 되면 없는데서 유가 나와요. 무슨 유? 주가 되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여기서 야곱은 무슨 역할 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안 된다’ 이 역할 해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는 받았지만 이 약속은 내가 이룰 게 하나도 없다. 그걸 누가 해야 되느냐? 야곱이 해야 됩니다. 약속을 받았다고 해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약속을 받은 본인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주신 분이 약속 받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이게 레일을 깔듯이 깔려서 미래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말씀을 봤습니다. 그 다음에 할 것 뭡니까? ‘난 못합니다.’ 이게 우리의 할 일이에요. 참, 가만 생각하니 기쁜 소식이네. ‘하나님의 성경 한 구절, 어느 문장도 난 못합니다.’ 이래 돼요. 그게 바로 로마서에 보면, “모든 것이 주께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리라.”
누가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보상으로 받아 갚음이 있겠느냐? 아무 드린 것도 없는데 드린 것도 없이 그냥 줬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의 수레로 사용하고 레일을 까는 하나의 토지로 사용해 몸 위에다 레일이 그냥 지나가버려요. 약속이 지나가버려요. 따라서 우리는 남한테 증거할 때 레일이 이런 약속이 있다 그것만 증거하면 되지, 내가 뭘 했다 이렇게 나오시면 이 원칙에 방정식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하나 제가 미리 이야기할게요. 그 레일 까는 것, 아파요. 그게 문제에요. 레일 까는 게 아픕니다. 왜 아픈지 앞으로 나올 겁니다. 그게 대단히 아파요. 왜 아프냐 하면, 우리가 무로 있으면 괜찮은데 우리가 무로 있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뭐냐? 유가 되기를 원하거든요. 유로 하는 것은 있음, 한자로 써야 되겠습니까? 내가 아는 한자 별로 없어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데 우리는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 하나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대단한 존재로 유로 자처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7장 3절에 나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는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이 아버지에게 뭐가 있습니까? 아들 정도가 아니죠. 진짜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 이상은, 이 아버지는 자진해서 무로 돌아갈 의향은 없습니다. 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내가 너를 위해서 뭐든 못 해줄까.
어떤 연예인들이 장래에 결혼할 여자친구한테 방송하며 이런 장담을 해요. ‘내가 너를 공주처럼 만들어줄게.’ 거기다 심한 말을 했어요. 니는 나한테 하나의 못난 아들이라 여기고, 못난 아들 인간 만들어 줘. 자기 아내 될 사람에게 아주 겸손하게 ‘나는 널 공주로 만들어줄게.’ 누구냐 하면 김건모. 혼자 살아 외로웠던 모양이죠.
누가 사랑하는 사람 있다는 것, 굉장히 기쁘지요. 근데 그 기쁨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장애가 될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교회 교인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는데 하나님의 레일을 까는데 나로 하여금 더욱더 아프게 만드는 그런 아픔의 원인이 될 줄이야. 야곱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심지어 37장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7장 35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아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약속이고 은혜고 축복이고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직 뭐냐 하면, 모든 걸 잃어버렸어요. 어찌 이럴 수가! 그게 하나님의 지금 구원의 방정식 속에 자기가 포함됐다는 조차도 생각 못했어요. 야곱이 알 리가 없지요. 그저 그냥 야곱은 순수한 인간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 드러내요. 열한 아들 가운데서 예쁜 아들 있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 있어요. 이건 아파요. 그 예쁜 아들한테 채색 옷을 유난히 예뻐. 걔가, 요셉이. 왜 예쁘냐 따지지 마세요. 본인이 예쁘겠다는데 누구한테 따져요.
그래서 얼마나 예뻐했는지 아들 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야곱이 ‘나 죽을란다’ 안 합니까? ‘나는 내 아들한테 갈란다.’ 아들이 막 말리죠. ‘아버지 이러면 안 됩니다. 자살하면 안 됩니다.’ ‘나 죽을란다. 나, 아들 없이 못 살겠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레일을 깔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깔린 레일 위에서만 우리의 구원이 이뤄지는데 막상 그 레일이 우리 배 위에 몸체 위에 지나가버리면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정작 이런 일이. 아니 도저히 내가 이건 생각지도 못한 황당무계한 낭패를 당하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요. ‘이제는 뭐 하고 살꼬? 나 이제 무슨 낙으로 살꼬?’ 아무 낙이 없어요. 그래서 자살하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야곱 말고 또 있어요. 요나도 선지자 노릇하다가 자기가 선지자 예언이 안 맞아떨어져서 하나님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하나님, 날 죽여 버리이소.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또 있어요. 엘리야. 엘리야가 현상수배 당해서 나무 밑에 앉아서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하나님이여, 그만 됐습니다. 이젠 내 몸을 거두어 주이소.’ 그리고 또 있어요. 욥. 또 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예레미야 20장 그 대목을 제가 읽어볼게요. 이 대목은 말로 그냥 읽을 것이 아니고, 20장 17절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다면”(15절) 야. “태에서 왜 죽지 않았는고” 내가 엄마 태에서 왜 안 죽었는고.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지 아니하셨으며” 내 엄마가 나의 무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이런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18절) 하고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하다가 하다하다 더러워서 못해서. 앞에 왜 더러우냐 하면, 사람들이 종일토록 자기를 씹으니까 그러니까 안 하려고 했잖아요. 경상도 말로, 안한다 했잖아요.
사모님들 잘 들어 놓이소. 설교도 남보다 잘 해.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아. 돈도 안 밝혀. 헌금하란 소리 안 해. 울산에 제일교회 저 정도도 아니고 벌써 수천 명 모이는 교회될 건데. 교회인지 아닌지 분간 안 될 때 사모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사모가 실망하면 그 사모님을 사랑하는 목사님의 마음은, 말은 안 해도 천 갈래 만 갈래 더 찢어집니다. 정말 부채도사 있으면 만나서 ‘목회 할까요? 말까요?’ 할 정도로 이 짓 더러워서 못할 정도로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바로 아직도 뭐가 있느냐? 유가 있어요. 아직도 나름대로의 내가 사랑하는 뭐가 있어.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몰라. 자기는 다 버렸다고 해요. 아직도 뭔가 사랑하는 게 있어서 주님께서 그걸 눈치 채서 푹푹 쑤시니까 쑤실 때마다 예레미야의 이 탄식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왜 태어났던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주여, 빨리 제대시켜 주이소. 의가사 제대하든지 사고 쳐서 제대하든지 제대할 랍니다. 도저히 내가 이렇게 복음 전하고 욕 얻어먹고 이 짓은 돈도 안 되고 이런 짓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반박하죠. 아직도 유, 뭔가 있음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예레미야나 엘리야나 욥이나 요나나 야곱 같은 그러한 신음소리, 탄식소리 들어도 주님은 끔쩍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애가 엄마 배에서 나올 때 엄마가 아프다고, ‘엄마, 그러면 나 나오지 말까’ 이러지 않잖아요. 엄마 아프든 말든 지가 나온다고.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다운증후군 알지요. 다운증후군 애 날 때 엄마가, ‘니는 좋겠다. 군에 안 가서’ 그런 엄마 봤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목회자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국의 생명, 기적 아닙니까? 기적이거든 사실은. 누가 천당에 가요? 이 죄 많은 인간이. 천국에 가는 천국의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니, 그래.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큰 교회하고, 술 먹고 담배피고 온갖 짓하고 세상에 천국은 안 가도 이걸로 족하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운증후군 애 낳고 ‘야야. 니는 되게 좋겠네.’ 왜? 군에 안 가니까. 그게 기쁨이 되겠어요? 차라리 군에 가는 게 낫지. 세상에 술 먹고 세상 친구 다 사귀고. ‘아이고, 나 천당 안 갈란다. 이게 더 좋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에요.
일반 평신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귀한 약속을 전하는 사람부터 뭐냐 하면, 현재 네가 인도함을 받는 고귀함은 네 속에 담겨 있는 유, ‘있음’을 노리고 있는 이 모든 것보다 고귀함을 주님께선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수술해버려요. 고함질러도 ‘그래 더 질러봐.’ 우리는 고함지르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수술대에 올려서 수술해버려요.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겁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없음이 될 때 이제부터 구원하는 것은 전부 다 예수님의 공로로 돌아가요.
민수기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몇 장이냐? 민수기 11장에 보면, 어떤 분이 이런 설교해서 아직도 기억나요. 이렇게 했어요. 어떤 분이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설교를 참 잘했어요. 무슨 대목이냐 하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5,6절) 이 대목을 그 목사님 설교하면서 이게 바로 교인들의 사고방식이라 했어요.
자기가 지금 미래가 잡아당기는 그 미래의 영생, 천국, 여러분 한번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세상 고생했던 것 다 잊어버려요. 영원한 천국 아닙니까? 한번 천국 아니에요. 영원한 천국이고, 지옥은 영원한 지옥이거든요. 그냥 순간순간 파 먹고, 양파 먹고, 애굽에 있을 때 잠시 즐거웠던 것, 그게 그리워서 원망하기 시작한 거예요. 정력이 쇄하더라. 아예 만나에다 비아그라를 섞어 넣어버리지.
하나님께서 광야에 집어넣은 이유가, 소위 애굽에 있음이 하늘나라의 약속과는 아무 소용이 없는 그냥 방해가 될 것을 빼는 작업이, 그것 빼고 만나 집어넣는데 그 만나가 바로 미래에서 주어지는 양식이 만나입니다. 과거는 빠지고 미래는 채워지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거는 기적을 받은 사람이 받지요. 기적이 없는 사람은 지가 만들어낸 믿음, 지가 만들어낸 소망, 지가 만든 사랑 그거 며칠 하다가 나중에 다 기진맥진 ‘에이, 난 더 이상 신앙생활 못하겠다’ 던져버려요. 헛것이에요.
진짜 주님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은, ‘주여, 나는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하고 그걸 분명히 알 때 이건 말로가 아니라 진짜 나는 믿음, 소망, 사랑 아무것도 없다. 알 때 그때 주님의 공짜로 집어넣어주는 그 수레에 미래에 것이 담겨 그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너무 딴 데로 샜습니다. 창세기 37장 해봅시다. 첫 번째 공식이 뭐냐? 야곱은 요셉을 무척 사랑했었다. 채색 옷을 입혔다. 입혔는데 나중에 창세기 37장 끝에 보니까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남은 열 아들 그런 건 죽어도 괜찮아요. 딴 아들 다 죽어도 그 애가 죽으면 안 되는데 걔가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무로 돌렸어요.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지가 좋아는 것 잃어버렸으니까.
야곱은 어떤 상태냐? 삐짐. 이거 우리 모습이에요. 이거=우리교회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삐져있을 때는 하나님 혼자라고. ‘나, 하나님 하고 안 논다. 기도 안 한다. 성경 안 본다. 나, 삐졌다.’ 아,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알겠어요. 그렇게 신앙 좋다, 잘났다. 목사가 설교 잘한다. 해도 나중에 무슨 하나 톡 건드리니까 삐져서 ‘나, 이제 하나님하고 안 논다. 아이고, 나 안 논다. 하나님이고 다 귀찮다.’ 그때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열심 낼 때 며칠 못 갈 것 알아봤어. 주님도 아십니다. 못 갑니다. 그래서 갑자기 목사한테 잘해줄 때는 안 믿습니다. 픽 삐져서
그 다음에 어려워요. 분류작업을 하는데 이게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도 열일곱 살 먹은 애가 무슨 철이 있습니까? 요새 열일곱 살이면 고등학교 이학년입니다. 그저 남한테 예쁨 보이고 허풍이나 떨고. 꼭 고등학교 일, 이학년 때의 특징이 뭐냐? 남한테 허풍을 잘 떨어요. 자랑할 것 있으면 풀고, 못난 것 있으면 다 감춰버려요. 성적표 다 고치고 또 자랑할 것 있으면 다하고 그럴 때에요. 근데 문제는 십대 후반, 이십 때까지 가는 게 문제에요. 이십대까지 안 가야 되는데.
이 분류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일곱 살 먹은 진짜 철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요셉에게 뭐가 난데없이 오느냐 하면,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가 덮칩니다. 이 계시는 뭐냐? 주로 다듬어지는 계시에요. 하나님의 계시가 꿈으로 나타나는데 그 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소용돌이에요. 소용돌이의 특징이 뭡니까?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어디에 모인다? 중앙에 중심에 모여요.
중심만 중심이고 나머지는 다 무가치한 거예요. 변두리에 있는 것들이 만약에 단독으로 ‘나는 가치 있다’고 외치면 중심한테 얻어맞아요. 저주 받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여, 제가 하겠습니다’ 이게 구원이 아니에요. 뭔가 잡아당겨. 주님께서 뭔가 흔들어버리면 소용돌이가 타 넘고 파도를 쳐서 저 멀리 있는 것도 딸려 와서 소용돌이 중앙에서
그 변두리에 있던 그것들이 변두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뭔가 당기는 기라. 쫙 당겨서 중심되시는 어떤 분을 만나서 ‘주여!’라고 하는 것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에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구원받는 것은 뭡니까? 지가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핍박하는 인간도 매가지 틀어서 소용돌이 속에 잡아당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걸 알리 없지요. 그냥 자기 자랑하기 바쁘죠. 요셉이 얼마나 철이 없느냐 하면, 채색 옷을 입히고 사랑을 받으니까 사람이 듬직하니 ‘아이고, 형님이여. 내가 잘나서 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이랬습니다’ 이래 겸손하면 되는데 이게 철이 없으니까 누굴 고자질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 2절에 보면,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단, 납달리, 갓, 아셀-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그러니 밉상을 받을 만 해요.
여러분 형제간에 집에 큰 싸움은 안 합니다. 저희들도 클 때 열세 식구였어요. 제일 미운 게 뭐냐 하면, 동생한테 뇌물 줘서 ‘애야. 절대로 엄마한테 가지 마라. 내가 맛있는 것 사줄게’ 백날 해줘도 애가 이중첩자라. 마타하리라. 여기서 얻어먹고 엄마한테 얻어먹고 양쪽 다 얻어먹는 거예요. 미워 죽는 거예요. 때리면 또 고자질 할 거니까.
그러니 요셉이 밉상 받는데다가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해서 요셉 말은 듣고 자기 말은 안 들으니까 문제가 컸어요. 큰데다가 여기에다가 또 덥석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데 그 계시가 뭐냐?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인다는 계시에요. 이거 참, 엄청난 계시에요. 이거는 바로 야곱의 입장에서는 창세기 27장의 이야기죠. 27장에 뭡니까? “네가 어미들의 주가 되고 형제들의 주가 되고”
그래서 요셉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고, 나를 주의 자리에 앉힌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함께 있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것으로 아예 자기는 자부를 했지요. 장담을 한 겁니다. 여기 첫 번째 꿈이 무슨 꿈이냐? 단이 몇 개입니까? 열두 개 입니까? 단이 열 개 단입니까? 여기 보면 열 개 맞네요. 열 개의 단이 내 단에 둘러서서 절을 하더이다.
그러니까 이걸 보면, 여러분 신앙생활할 때 성경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하, 신앙이란 것은 내가 혼자서 기도 열두 시간하고, 전도 백 명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이라 하는 건 그냥 약속대로만 되는구나.’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하세요. 약속대로만 돼요. 열 낸다고 하나님께서 더 봐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열내봤자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아하, 너한테 남아있는 여유가 있구나.’ 그러니 이걸 키우려고 열 내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 거예요. 주가 누구냐를 찾으면 끝나는 거예요. 신앙생활, 구원은 끝나는 거예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주’가 없어서 문제에요. 왜 주가 없느냐 하면, 꼭 요셉의 형제들 같아. 누가 주 되면 그걸 못 끄집어내서 난리라. ‘예수, 지가 뭔데.’ 불신자들이 만날 하는 소리가 ‘예수 지가 뭔데’ 이거 아닙니까?
제가 오늘 낮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 글 올렸는데 봤습니까? 거기에 보면 왜 요새 조계종 중심의 불교 중들이 왜 데모하고 이명박 못 잡아먹어서 하느냐 하면, 지금 이명박 대통령 되고 난 뒤에 서울에서 뭐가 유행이냐 하면, 서울시 전체를 기독교화 시키겠다, 이게 유행인데 그들 구호가 뭐냐?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졸지에 조계종은 도만 닦고 있는데 불신 지옥이라. 분류 돼버렸어요. 불교에서는 분류라는 게 없어요. 모든 게 부처에요. 모든 자가 다 부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평화고, 자비고, 부처고. 기독교하고 불교신자하고 대화가 안 돼.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이카고 있는데 이쪽에는 ‘에라, 지옥 갈 놈’
우리는 분류를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우리는 분류합니다.’ 분류를 해보니까 자기는 가만있는데 나쁜 놈 돼버렸어. 예수 믿고 싶어도 자존심 상해서 못 믿어. 왜? 나쁜 놈이 믿게 되면 항복하고 들어오는 셈이 되잖아요. 참, 예수 믿느니 항복을 안 하면 안 했지, 예수 안 믿는다 이 말이죠.
참, 그런데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게 기적 아닙니까? 중이나 우리나 같이 자존심 센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때려죽여도 나는 주님한테 고개 안 숙인다’ 하고 우리는 죽어 있으면 즐겁고, 다행스럽고, 안심이 되고. ‘아, 살았다.’ 안도감을 느끼고. 신앙이 별겁니까? 이게 신앙이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왜 그렇습니까? 날 믿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약속대로 왔고. 약속대로 왔어요. 우리 오라 해서 온 게 아니고 약속대로 왔고, 약속대로 오셔서 주의 일 다 했기 때문에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느니라. 제가 믿나이다. 끝난 이야기죠. 얼마나 그게 간단한 이야기입니까? 복잡하게 무슨 천주교의 규칙 같은 것 세우지 말고, 그냥 매일같이 매일 아침부터 눈 뜨면서부터 주만 믿으면 돼요. ‘주만 믿습니데이.’ ‘믿습니다’는 뜻이 뭡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주만 믿습니다’ 이 뜻이라.
주를 믿는데 열 단이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요셉이 뭘 모르느냐 하면, 고개를 숙이는 이 작업을 본인이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몰랐어요.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또 하나 꿈을 꿨지요. 곱빼기 꿈이라. 또 무슨 꿈입니까? 해와 달과 열한 별. 해는 아버지, 달은 엄마, 그 다음에 열한 별은 자기 빼놓고 형제. 형제가 누구에게? “내게 절하더이다” 할 때 아버지 야곱이 나무랬어요. 오죽 했으면. ‘야야, 그런 말은 속에 가만있는기다. 니 그것 발설해서 좋은 것 뭐 있노?’
10절에 보면,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은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그래. 아이고. 꿈도 개꿈 같은 것 꿔놓고 이거는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파고들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돛대라 돛대. 제임스 리라는 분이 돛대가 뭔 뜻인지 몰라서 설명했는데
예쁘다, 예쁘다 하니 타고 올라서 지가 최고로 돼버렸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마음에 두었지요. 하지만 형들은 요셉을 더욱더 미워했습니다. 이 상황이 바로 뭐냐? 현재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느냐 하면, 공식 적용시켜 봅시다. 첫 번째 일 번할 때 일 번 다시 봅시다. 일 번에 무에서 유로 할 때 야곱이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유지요. 나중에 아들 죽고 난 뒤에 무로 바뀌지만. 무가 뭡니까? ‘난 하나님 약속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나보고 하라 하지 마. 아무것도 못합니다.’
두 번째, 유가 있을 때는 그래도 자식 있고 이 말입니다. 유의 확장, 유의 영역, 유의 세계, 유가 인정받는 세상에서 두 번째 분류작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밉상 받지요. 무의 차원에서 분류작업 같으면 하나님의 예정론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나한테 메일을 열 번 더 보냈는데 그 사람이 제일 걸리는 게 뭐냐? 예정론에 대해서 걸린다고. 왜 하나님은 자비로운데 아예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처음부터 한 인간을 천당 보내버리고, 하나는 지옥 보내고 갈라놓고 우리는 애쓰나마나 그건 소용없게 만들고 왜 그렇게 했는지 그게 무슨 자비냐 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그 사람에게 뭐가 있습니까? 무의 세계가 아니고, 아직도 유에 있는데 그 사람 유가 뭡니까? ‘나 있음’ 아닙니까. 자기가 죄인 아니라. 하나님, ‘나 잊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구원해야 됩니다.’ 예정론? ‘그건 잘 안 믿어지는데. 하지만 저는 구원해야 됩니다. 우리 엄마 예정 안 되면 지옥 간다고? 우리 엄마 지옥 가면 안 되지. 나는 천당 가고, 우리 엄마 지옥 가면 슬프지.’ 이거 어디 나오는 이야기냐? 불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에 그런 게 있어요.
전부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구원도 못 받을뿐더러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유에서 무의 자리에 갈 수가 없어요. 유만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분류작업 약속이 들어올 때 이게 밉상 받고, 얻어터지고,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지 어디 거기다가 천기누설해요. 근데 하고 싶어. 요셉도 유가 되서 까불락거리면서 하는 거예요. ‘나 꿈꿨다. 형들 완전히 조져놨어. 아빠도 나한테 절해’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도 유의 세계에요.
하지만 야곱이 유이든, 요셉이 유이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거침없이 하이킥이라. 아무 지장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지장 없이 그저 계획대로 실천에 밀어붙입니다. 누가 죽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한 거예요. 분류작업, 아까 창세기 25장, 한 태에서 두 민족이 나누이리라 저주 받을 민족과 축복 받을 민족으로 나누리라. 이것은 바로 지금 주가 될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그 분류작업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꿈꾸는 이유가 바로 전부다 야곱 같은 무가 아니고, 유의 세계기 때문에 그저 튀는 것마다 다 얻어터지고 죽고 미워하고 인간세상에서 개판되는 겁니다. 그 특별히 요 경우에 여기서 이 유가 무로 바뀌는 하나의 큰 예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데 그게 뭐냐? 요셉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유다 이야기가 나와요. 이거 오분하고 십분 쉬겠습니다.
이 유다 집안에 유다가 이게 유 아닙니까? 유다는 자기 집안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상하게 요셉한테는 계시가 꿈을 꿨고, 절을 하고 계시가 오는데 유다 집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설 때는 뭐냐 하면, 애를 하나 둘씩 죽이는기라. 큰 애 이름이 뭐냐 하면, 엘.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봅시다. 큰 애 이름이 엘인데 걔가 왜 죽어요? 죽는 이유가 뭡니까? 7절에 보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아버지 입장에서는 유, 자기 가문이 있어요. 이 새끼, 내 새끼라. 이 가족들이 있는데 이 가족 유가 점차 뭐로 바뀝니까? 무로 바뀌네요. 하나님께서 뜻이 개입해서 큰 애 죽었지요. 두 번째 아이 이름이 뭡니까? ‘오난’인데 오난 이 아이도 어떻게 되느냐 하면, 10절에 보니까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죽여 버리지요. 애 셋 중에서 두 명 죽어버렸어. 이제 누가 남았느냐 하면, ‘셀라’ 하나만 남은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유다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극히 인간적이죠. 이거 하나님 계시고 뭐고 신경 안 써요. 애 둘 죽었으니까. ‘아,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조지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난 지켜야 되겠다.’ 그래서 유다는 뭐냐? 안 죽이려고 이 애를 며느리한테 자기 형수한테 장가를 안 보내요. 오직 이유는 뭡니까? ‘내 유는, 나의 있음은 내가 지킨다.’ 버텨보는 거예요.
‘내 가정은 내가 지켜서 더 이상 내 아들 세 명 다 죽일 수는 없다’ 하는 것 때문에 누가 고난 받느냐 하면, 정작 그 집안에 들어가서 약속의 집안의 며느리가 돼야 될 다말의 신앙의 입장에서는 이게 유다의 이기주의적 자기 지킴 때문에 애를 못 낳는 기라. 아버지가, ‘야야 더 크거든 보자. 좀 더 크거든 보자’ 만날 이 소리 하니까 들어가질 못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유가 있는 세계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계시 무시당하고, 천시 받고, 배격 받고, 배척받는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결국은 다말은 뭐가 됩니까? 창녀가 되어서 시아버지하고 관계했다는 그것을 그럴 줄 알면서도 시아버지와 관계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일을 저질러버리지요.
그러면 유다의 유는 하나님의 들어온 계시에 의해서 깨어집니다. 쉽게 말해서 유다가 자기 유를 지키려는 이것 때문에 뭐가 생겼어요? 희생자가 발생했어요. 그 원리하고 바로 꿈 꿨다는 것 때문에 형들에게 희생되어야 될 요셉의 운명하고 똑같이 ‘이퀄입니다’를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37장, 38장입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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