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오래된 집
동학난도 대동여지도도, 그런 것들도 지나쳐 간 집 습기없는 이엉에는 이제 구렁이도 참새 떼도 들지 않는다. 삭고 삭아 저절로 부서져 내리는 흙담 돌아서면 키 낮춘 뒷간, 항아리 엎어 놓은 굴뚝 허리 굽히고 살았던 작은 방 두칸 양철 깡통을 주워 만든 화로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 밑에 피골이 상접한 노파가 오래된 풍경으로 어울려 있다
보이는 것 없는 눈에 진물이 흘러 다섯걸음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리는 할멈 물기 한 방울 없어 오뉴월 땡볕을 잘도 견뎠다 싶은, 그래서 훅 불면 할멈이나 옹기 모두 묻혀 흙이 될 그런, 한내 북쪽 작은 집 한 채
국밥
돼지 내장, 순대 두어개 잘게 썬 파 뻘건 다대기 깔그럽게 갈라진 보리밥 한덩이 사과궤짝을 엎어 술상과 밥상을 겸한 목로 꾸룩거리며 물이 빠지는 녹슨 펌푸 옆에 김을 피워 올리며 끓는 숭늉
화롯불은 끊임없이 톱밥 나무를 집어 삼킨다 날이 섦고 바람 거세도 장은 선다 어느 좌판이든 곤고한 삶의 그림자는 있다 뜨거운 국밥이나마 한 그릇, 더하여 탁배기 두어잔이면 어두운 삶도 잠시 잊기 마련 속 가라 앉히는 국물, 내 한기를 덮는다 잔 비우고 돌아서면 취기는 없고 허기만 남아 가도 가도 길은 멀다, 지치고 지쳐도 내 희망으로 남을 아, 따뜻한 국밥
3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김 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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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태우며 집안 가득한 먼지를 싸들고 둑 너머 냇가에서 불을 붙인다 등에 업은 찬 기운이 불꽃속에서 이글거리며 타고 있다 꿈틀거리는 짙은 어둠을 본다 명퇴한 아버지도 처진 어깨도 어쩔수 없는지....... 우려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진다 밀폐된 공간에서 소리를 지른다 남 부끄러워 사방을 본다 이지메를 당한 기분이다 당당하게 얘기하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설익는 감자의 서걱거림이 빠진 어금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작아지는 눈동자 속으로 불꽃이 톡톡 튀어 들어오고 있다 검은 망또 두른 사내가 가끔씩 경적만이 방황하는 가로등 앞에서 취한 듯 비틀거리며 길을 찾고 있다 사과상자 하나가 모습을 잃어가는데 안스럽기만 하다 별똥별 하나가 동쪽으로 길게 고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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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최 금진 |
가래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내고 있다 안녕 아내여 잘자라 내일은 일요일 동네 약국도 문을 닫는 날이다
제5회 지용신인문학상: 김남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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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방에서의 마지막 밤
행낭으로 건너왔다 군고구마 냄새가 자욱하다 아버지가 군불을 때시나보다
"춥지야? 기다리그라"
구들을 등지고 있으려니 참나무숯 같은 졸음이 밀려온다 방바닥은 황토빛깔로 달아오르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운 나는 마당에 서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새벽별을 센다
밤새 사령리를 품은 안개가 무지개빛을 띠기 전 나는 행랑을 비우고 약속처럼 더나야 한다
머지않아 아버지는 이백년 묵은 구들을 들어내리라
"이제 니들도 다 컸은께 입식 해야제"
내년 고향길 구들방에 살 익을 걱정은 비오는 날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처럼 한가롭기만 하다 |
제6회 지용신인문학상:장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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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
아무 때나 오지 마세요. 찬바람으로 성급히 다가서지 마세요. 당신이 좀 한가로워진다면 부드러운 바람으로 푸르른 보리 물결치는 밭둑을 타고 오세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휘파람을 부세요. 언덕바지 황금빛 나는 누런 황소를 보셨나요. 그런 몸짓으로 그런 눈빛으로 곤륜산을 바라보듯 천천히 세상이 밝은 날 큰 빛으로 오세요. 당신이 정하신 날 꼭 오세요. 활짝 핀 노란 꽃잎으로 아무도 모르게 곤룡포 한 벌 펼쳐 놓지요.
제7회 지용신인문학상:박옥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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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농
한낮이 기울도록 트럭은 오지 않았습니다. 벌써 몇 시간 째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 서 있습니다. 하르르, 하르르 몸 눕히는 복사꽃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떠나도 될까요? 아프게 버린 세월이 묵정발 숙대궁처럼 흔들립니다. 견디지 못한 세월 너머 바람은 다시 흙먼지를 뿌리고 춘양, 꼬치비재, 새발, 복상터, .... 버려야 할 이름들이 마음을 붙듭니다.
그러나, 이젠 떠나야겠지요. 내 가야할 그 곳에도 느티나무는 큰 숲을 이루고 저녁이면 성냥감 만한 집들이 환히 불 켜고 있을 테니까요 |
제8회 지용신인문학상:김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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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있는육교2
그 육교 위에는 손수건만한 사막 하나 있다 하모니카 부는 늙은 낙타와 눈먼 여자 혼자 온종일 노래 부르는 사막이 있다 다 낡은 스피커 한대와 동전 담긴 찌그러진 양은 냄비 하나와 냄새 나는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검은 선글라스 낀 여자와 등 굽은 낙타 한마리 있다 이미지의 <열풍>이 휘몰아 치는 그 사막을 온종일 걸어가는 카라반 행렬들은 이따금 우그러진 냄비에 어린 빗물을 오아시스처럼 들여다 보고 지나간다 높은 빌딩들 선인장처럼 우거진 육교 위, 공중 높이 매달린 전광판 사막 속으로 벤츠 한대 사라지는 오후 즈음이면 온종일 사막을 걸어온 지친 두사람을 황사바람 날리는 육교에서 사라지고
길 건너편 타클라마칸 노래방 속으로 비틀거리는 두 사내가 등굽은 낙타처럼 어두운 지하 階段(계단)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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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지용신인문학상:김은정
생의 철학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 . 오늘 갑자기 이 시가 계속 되뇌어졌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서......그리고 인생의 반토막 쯤 되는 곳에서 시를 쓴다. 살고 죽고, 싸우고 웃고 하는 것들이 다 남의 일만 같고, 나는 영악하지도 무르지도 못한 채 세상을 애초에 던져진 모습 그대로 살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따스한 날이거나, 구름 그득 끼어 흐린 날이거나, 비나 눈이 마른 뜰 앞으로 훵 지나가는 날이면은 이대로 살아주자, 그냥 이대로 살아주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별도 쨍하게 차가운 날 저녁이나 밤, 따뜻한 이불을 펴고 누워 말없는 천장을 보며 ‘나는 나의 주인인가’하고 묻는 때도 있다. 그런가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쯤, 묵묵히 벽을 지나가던 무늬들이 "아니야"라고 진실같은 소리를 내곤 하는데 그만 나는 울컥해져서 혼자 울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겸연쩍어져서는 그냥 잠을 청한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검은 밤의 한가운데서.......그리고 내 생의 마지막 날 같이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잃은 두 눈을 껌뻑거린다. 지나간 날들은 다 용서하고 잊어주고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예예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시큰둥한 마음인데, 조그만 방 안 나만 홀로 누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울기도 그렇고 하여 맥없이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새벽은 길고도 멀리 있고, 나는 아무 할 말 없이, 밤이 외로운 신발을 신고 떠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제10회 지용신인문학상:김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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