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에리와 아마데우스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살리에리가 모짜르트를 사회적 살인을 했다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위키에 보면 살리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년 8월 18일 – 1825년 5월 7일)는 이탈리아 레가노 태생의 음악가이다.
살리에리는 당시 세간의 찬사를 얻었던 음악가였다. 유년기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766년에는 빈 궁정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그 후 빈에 머무르며, 1788년에는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며, 사망 직전인 1824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빈에서 작곡가로, 특히 오페라, 실내악, 종교음악에서 높은 명성을 쌓는다. 그의 43편의 오페라 중에 가장 성공한 것으론, 《Danaides》(1784)과 《Tarare》(1787)을 꼽을 수 있다.
살리에리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여, 하이든 등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과 교류가 있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는 모두 어렸을 때,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의 열등감으로 가장 잘 알려졌을 것이다. 1790년대 빈에는 살리에리의 도작설, 독살설 등의 소문이 돌았으나, 이들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는 여러 연극, 영화의 소재가 된다. 이들 중 유명한 것이 1984년작 영화 《아마데우스》이며, 이 안에서 살리에리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주변 인물(1인자)로 인하여 2인자로서 열등감과 시기를 보이는 심리적 증상으로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독일어: 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로 잘 알려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과 지휘를 배웠다. 그는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명으로 여겨지며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오늘날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널리 존경받고 있다.)
모차르트는 자기 일생 60년 주기율중 청명-곡우철에 태어난 사람이다. 5세 입하철이라는게 겨울이 지났으니 얼어 죽지는 않지만 세상에 먹을 게 없어서 개고생을 하는 시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60년대 보릿고개에 해당한다. 통상 입하철이 되면 아열대 식물 대추나무가 잎을 삐죽 내밀며 이제 겨울이 완전히 끝났다고 알리지만, 들판에 나가보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시절이기도 하다. 보리는 아직 익지도 않았고 감자도 씨가 여물지 않아서 새알처럼 올망졸망 달려있는 상태라 이것을 캐서 먹었다간 여름에서 가을 수확까지 고생길을 면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시점에 모차르트가 4세부터 연주하고 5세에 작곡을 하고 세상에 활동을 했다는 것은 모차르트가 역사적 신동이었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행로를 분석해 봐도 입하시절에 두각을 나타내거나 큰일을 한 사람은 모차르트가 유일하다.
이런 모차르트가 천재적인 작곡실력을 발휘하며 폭발적으로 소비하던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 시점이 입동이다. 더 이상 열정도 없고 작곡할 소재도 사라진 마당에 삶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삶을 마감했다. 스스로 삶의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세상과 분리한 것이 죽음이다.
이러한 사실(모차르트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세상 사람들이 살리에리를 나쁜놈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미 모차르트는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더 이상 삶을 열어갈 이유가 없어진 상태에서 주변이 그의 삶을 갉아먹으며 죽음으로 내 몰았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사회적 살인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이미 사망상태였고 껍데기 상태였던 것이다. 이 지점을 잘 모르니까 살리에리가 질투로 모차르트를 죽게 만들었다고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를 알고 모르고의 극명한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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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활을 턱밑살대 게발각지로 배우게 되고, 2연몰 할때까지 잘 쏘다가 부상이 와서 활을 쉬면서 책 조선의 궁술을 얻어보고, 지금 쏘고 있는 턱밑살대 게발각지가 정말로 국궁이 맞는지 의심이 들어, 우리활을 탐구하고 나선지 십 수년만에 드디어 우리조상님들께서 쏘시던 조선철전사법 별절궁체를 찾아내어 복원하게 되고, 그것이 射以載道사이재도, 射以觀德사이관덕의 활임을 확연하게 알게 되었지만, 이미 노쇠기에 접어든 한산은 도통의 인연이 물건너 갔으므로, 입구에서 문고리만 잡고 서성이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살리에리를 떠올리며 한산이 도통의 입구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도통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 비좁게 생각하여 억울해 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산은 맹탕 백지에서 문고리까지 잡은 게 어디냐고 빈손으로 와서 이만큼 했으면 횡재했다고 생각한다.
한산이 30대 팔팔하고 기운이 폭장하던 시절에 도통의 입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 아니 억울한게 비정상이겠지만, 이제 인생 한바퀴 살고, 덤으로 살고 있는 시점에서 이만큼 알게 되고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행복한 일이다.
이것은 이제 철이 들어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아서 처신을 유연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스스로 왕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인재를 도와서 왕을 만들 수는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우리활이 射以載道사이재도, 射以觀德사이관덕의 활이니 마음자리 반듯한 청춘을 만나서 그들이 바른 수련을 통해서 활연관통을 할 수 있게 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정도하기까지도 한산 스스로 생각해도 쉽지는 않은 경지지만, 조상님의 가호와 스스로 몸을 낮추어 바른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는데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내가 박태환의 경지까지는 갈 수도 없고 가보지를 못했지만, 어떻게 하면 수영을 잘 할 수 있는지는 제시해 줄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수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똑같이 한산의 인연이 도통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이어지지 못했지만, 저 자리가 도통의 자리라고 가르쳐 줄 수는 있게 되었다고 聲明성명한다.
활터에 가면 도통의 활로 살치기를 하고, 천원빵을 하고, 점심내기를 하는 난장판의 유희의 활로 전락한지 오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어 우리활이 射以載道사이재도, 射以觀德사이관덕을 이루는데 첩경이라고 생각하는 청춘이 있다면, 목마른 이가 우물을 찾듯 우리활을 바르게 쏘아야 한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시공을 초월하여 한산과 인연이 맺어지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