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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관리공단자료제공,백양사 설경, 박규영 |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년내내 변화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대웅전, 극락보전,사천왕문은 지방문화재로 소요대사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숲길을 지나 백양사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쌍계루가 눈에 띈다.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 뒤로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어 연못물에 어른거리는 쌍계루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쌍계루를 지나면 대웅전과 극락보전, 부도탑이 나온다. 백양사는 창건 당시 백암사였다가 고려 때 정토사로 바뀌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조사가 불경을 읽을 때마다 흰양이 설법을 들었다해서 백양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고승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때 2대 교정(종정)을 지낸 환응, 조계종 초대 종정 만암, 태고종 초대 종정 묵담 등 근래에 와서 서옹당 종정 등 고승만도 5명이나 된다.
등산로 쪽으로 올라가면 암자가 많다. 약사암과 운문암, 천진암 등은 경관도 뛰어나다.
절 입구에서 20분 거리인 약사암은 전망대 격으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백양사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절 경내와 맞은 편에는 난대성의 늘푸른나무인 비자나무 5,000그루가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0.5km 구간에 우거진 수백년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 3,000여 그루의 고로쇠나무와 비자림은 산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다.
백양사소요대사부도
(白羊寺逍遙大師浮屠)
이 부도는 백양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있으며, 백양사 주지를 역임한 소요대사(1562∼1649)의 묘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56cm 규모의 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8각형으로, 각 면에는 초화무늬가 조각되었는데, 1면에만 거북 동물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는 각형 1단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종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범종의 모습과 같이 하대·유곽·상대·용뉴를 표현하고 있다. 하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는 게를 비롯한 8마리의 동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유곽은 4면에 배치되었는데, 그 안에는 9개의 유두가 돌출되었다. 상대에는 2줄의 돌출된 선이 있고,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상면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가 조각되었고, 하대와 유곽 사이에는 모두 4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액자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소요당(逍遙堂)’이라 새겨서 소요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상륜부는 4마리의 용두(龍頭)가 석종을 움켜 물은 상태인데, 그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보주를 올려놓았다.
소요대사의 부도는 백양사 이외에도 담양 용추사와 지리산 연곡사에도 있다. 이 중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는 탑신부에 새겨진 글에 의해서, 조선 효종 원년(165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 역시 소요대사가 입적한 시기와 연곡사서부도의 건립연대 등으로 보아 1650년을 건립의 하한으로 볼 수 있다.
소요대사는 13세에 백양사에서 불도에 입문하였고 부림(浮林)에게 대장(大藏)을 배운 후 서산대사에게 신지(神旨)를 깨우쳤으며 백양사 조실(祖室)로 있었다.
백양사 소요대사 부도는 범종의 세부양식이 부도에 표현된 드문 사례이며 주인공이 확실하고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부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양사비자나무분포북한지대
(白羊寺비자나무分布北限地帶)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 주변에 8∼10m에 달하는 비자나무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숲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에는 비자나무가 자라는 가장 북쪽에 있는 숲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현재는 이 지역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내장산에서도 비자나무 숲이 발견되었다.
이 숲이 형성된 유래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 때 각진국사(覺眞國師)가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던 비자나무 열매로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절 주변에 심었다고 하며,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스님들은 열매를 거두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는 우리 선조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의약재료로 사용한 생활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비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숲이므로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