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명평(鳴坪), 매헌(梅軒) 겸익(謙益, 1575~1645)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중대마을에서 거주하였다.
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다. 효종 10년(1659) 2월 9일 울산향교 석전(釋奠)에서 향중 사림(士林) 10명과 더불어 구강 서원(書院) 창건을 발의하고, 숙종 29년(1693) 구강서원장에 선임되어 향내 학풍을 크게 일으키고 유집(遺集)_1冊을 남겼다. 묘소는 울주군 웅촌면 관동리 남월(南越) 중분中憤) 간좌(艮坐)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피난한 원적산(천성산) 미타굴을 바라보고 있어 죽어서도 그 효심을 잃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삼강록(三綱錄)>과 <영남읍지(1894)>, <울산읍지(1899, 1902)> 등에 전한다. 묘소는 옛날부터 지관(地官)들 사이에서는 길지로 알려져 풍수 연구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諱 廷義 碑文
좌측면
府君諱廷義字公輔號鳴坪姓李氏貫鶴城考諱謙益仕奉事以軍功贈嘉喜大
夫漢城府右尹祖證遇春尚瑞院直長曾祖諱變林訓鍊院正高祖譯植忠順衛
五代祖諱直剛奉事六代祖諱送實水蓮節度使奉命討馬鳥凡三度及還遇風
渰海朝廷命禮官招魂以葬弋代祖諱藝號鶴波謚忠書官中樞院使世子在賓
客奉使于倭于琉球凡十三刷還本國俘六百餘人世宗朝命討馬島有珠勳賜
후면
功牌索還上國俘蒙明天子褒籠載國乘享鄉社為上祖也妣江城文氏天日女
妣一直孫氏格齋諱肇瑞之後進士顥之子諟復女以仁廟辛未十二月十二日
舉府君于周南里第府君姿性純粹才分聰敏薰襲庭訓博經史多著述孝父每
友兄第衛宗族以敦睦處鄉里以恭謹踐履篤實為儒林宗剏鳴江院崇先賢興
後學一鄉多士無不被其澤誨子益篤成大儒登司馬鄉人美其學行載州誌肅
廟戊寅正月初三日終葵于熊村面冠洞山良坐原配達城徐氏望潮堂仁忠之
子同知安之女仁廟辛未生孝廟丁酉二月初一日終祔府君兆右民坐配客城
朴氏東信女仁廚癸未五月十二日生甫廟甲成正月二十六日終祔府君兆左
丑坐生四男六女男文考成均生員文翁文壽文燾女柳起瑞李商尹郭有恒金
彦粹朴文一朴來亀文耈男時坦時濟時潤女李孝初文翁男時平時復時增女
李若初辛壽鎰金光鍊名善與文壽男時潛時校時温女李孟白文燾男時權時
建女郭來德朴龍行金養普柳起瑞瑞山人男宜健有文行薦參奉號花溪李商
尹德山人男斗元斗文郭有恒玄風人男後儀金彥粹男聲遠朴文一男彭齢朴
來亀男德邦守郵孝邦嗚呼府君之德行學業可謂有來而以梅軒公為父以睡
우측면
窩公為子則其家庭授受旨訣必多可傳者而世遠無徵兄疏節數條如右而
已可慨也已銘曰 旣賦其厚加以學力基先牖後棟樑是卓欲識其得請觀子
姓雲集墓庭貞珉是成 甲辰晚秋 七世孫 奎現 謹撰
檀紀 四千三百二十年 丁卯十月初九日
十代孫 東煥 謹竪 並書
묘갈명(墓碣銘)은 7세손 옥산서원장(玉山書院長) 소헌(小軒) 규현(奎現)이 근찬(謹撰)하고, 10세손 동환(東煥)이 근서(謹書)하여 1987년 10월 초 9일에 세웠다. 자(子)에 문구(文耈), 손(孫) 시탄(時坦), 증손(曾孫) 의정(宜貞), 현손(玄孫) 명오(命吾), 내손(來孫) 종록(種祿), 곤손(晜孫) 술찬(述燦), 잉손(仍孫) 규수 운손(雲孫)에 진택(鎭澤)이 있다.
배 달성서씨는 증참판(贈參判) 인충후(仁忠后)이시고, 동지사안(同知事安)의 딸로 1631년생이고, 1657.2.1.이고 묘은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 있다. 배 밀양박씨는 동신(東信)의 딸로 1643.5.12.일 생하고, 1694.1.26.졸하였다. 묘는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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