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대 와해 직전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시위군중은 늘어만 갔다. 전남대학이 점령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정문 앞에 각 2명의 보초가 잘 다려 입은 얼룩무늬복을 입고 위압감을 주면서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출입시키는 통상적 계엄업무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며, 정문과 샛문에서 심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철제 정문을 밀치고 들어오려는 시위대와의 대치상황이 끈질기게 계속 되었지만, 그러나 어젯밤 광주역 앞에서만큼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문에서 「敵」을 막아서는 어려운 임무가 16대대에서 13대대로 교대되었고, 가장 치열한 접전은 13대대가 수행했다. 나는 틀림없이 다음 임무가 우리 대대에 주어지리라고 판단하고 일찍 점심식사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어제 밥 못 먹어 고생한 일이 생각나서였다.
12시쯤 되어서 몇 번의 소강상태에서 벗어나 시위 군중의 집중적인 공격이 감행되었다. 정문 위주로 돌파하려던 「敵」은 이제는 전남대학 우측 능선의 철조망을 따라 게릴라식 침투를 시도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시위군중이 학교 내로 진입하면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시위 군중 중 한 명이라도 교내에 진입하면, 교문 밖의 시위군중에게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어 의외의 힘으로 진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침투한 敵을 생포하면 그를 구출해야 한다는 폭도의 정의감이 시위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철조망으로 침투한 시위 학생을 한 명 체포했다. 얼굴이 네모진 바지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계엄군에게 붙잡혔다는 당혹감 때문에 도망갈 생각은 못 하고 서 있는 그 여학생에게 나는 얼른 나가라고 타일렀다. 지금 당장 나의 敵이고 상대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대항을 하지 않아 실질적인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시위 군중은 점점 많아지고 수십 차례의 충돌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여단장은 상무대에 헬기로 날아갔다. 부여단장 정동인 대령이 여단을 관장하고 있었다. 부대의 와해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병력은 지치고 敵의 시위는 점점 조직화되어, 정문으로만 돌파를 시도하려던 敵은 게릴라 수법의 침투를 시도했다. 몇 발 안 되는 E-8 발사통은 이제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광주 출신 지역대장이 마이크로 『나도 고향이 광주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고 호소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는 이때의 상황을 교훈으로 그 후 충정훈련 시마다 플래카드를 준비했다. 「여러분 선량한 시민은 피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공격합니다!」는 등의 우리의 계획을 글씨로 적어서 시위 군중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사태의 경험이 없는 나의 상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광주사태가 절대로 「시민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軍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軍에 공격을 감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시위에 참가했을 뿐인데 자신들을 자극해서 흥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목이 터져라 하고 호소했다. 최루탄 한 발을 쏴도 충분한 경고와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발사했다.
시민들은 『나는 못 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軍은 무고한 시민에 공격을 가한 게 아니다. 계엄군 앞에서 집요한 괴로움을 준 폭도에게도 끝까지 설득했다. 경고도 했다. 어찌 보면 극렬한 시위 분자들이 선량한 민주시민과 계엄군을 싸움 붙인 격이다.
전남大에서 철수, 광주교도소로!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는 것도 일부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무고한 시민은 대피하라고 수없이 외쳐댄 후 공격을 감행했다. 이 양자의 주장을 전달해 주지 못한 것은 시위 속에 있는 혼란과 함성이다. 그래서 나는 善과 惡을 구분하여 善은 보호하고, 惡은 척결하기 위해 플래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대대뿐만 아니라 全여단이 피로에 지쳤다. 폭도들이 극렬하게 시위를 해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 여단이 폭도들에게 제압당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여단의 두 번째 행운이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 철수지시가 그것이었다.
상무대로 간 여단장이 전화로 철수지시를 내린 것이다. 엄격히 얘기해서 철수라기보다는 임무전환이었다. 상황이 어려워져서 대학교 확보가 아니라 광주교도소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상급부대의 결정인 듯싶었다. 만약 그 시기에 철수하지 않았다면 우리 여단도 뿔뿔이 흩어져 무등산으로 도망가야 했다. E-8 발사통이 2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광주교도소로의 임무전환으로 인해 여단은 패퇴의 치욕은 면할 수 있었다. 떳떳한 임무전환, 즉 폭도 너희가 무서워 도망가는 게 아니다. 대항하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상급부대에서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오전에 내내 고생한 11, 12, 13, 16대대가 먼저 출발하고, 쉬고 있던 우리 대대가 폭도를 정문에서 차단하는 엄호임무를 맡았다. 군장을 꾸리고 대형을 갖추고 차량을 열지워 전남대학 후문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를 눈치 챈 폭도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E-8 발사통 하나를 냅다 잡아당겼다. 우르르 흩어졌다. 3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나는 정문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는 철수준비를 지시했다. 장비를 챙기고 대형을 갖춰 앞 대대와 연결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E-8 발사통을 정문 후방에 고정시켜 장착했다. 병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 폭도들이 또 한 번 공격을 감행했다. 마지막 E-8 발사통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르르 쾅쾅」 소리와 함께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이제 敵의 再공격까지 약 30분의 여유밖에 없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철수를 시작함으로써 내가 전남대학에 남았던 최후의 계엄군이었다.
대대의 중앙에서 후문을 막 빠져나가는 순간, 철교 부근의 시위 군중 속에서 「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으나 거리가 멀어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맨 뒤에서 철수하던 병사가 『대대장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했다. 진정한 광주사태 시작을 알리는 신호등이었다. 이제 폭도가 총을 가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막느냐 못 막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군용 차량이 있었으나 광주교도소까지의 이동은 도보로 하기로 하고, 차량은 빈 차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계엄군이 차량으로 이동하면 쉽게 敵의 표적이 될 뿐 아니라 차량의 전복 등으로 대량 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