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뜬 무지개를 볼 적마다 내 가슴은 뛰누나.”로 시작하는 윌리암 워드워즈의 시는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고 있다.
워드워즈는 분명히 ‘My heart leaps up'이라고 했다. ’내 심장은 뛰누나‘라 하지 않고 ‘내 가슴은 뛰누나’라고 번역한 것은 문학적인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워드워즈가 인체 해부학적인 흉부 (Chest)의 장기를 지적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장이 뛰는 것과 가슴이 뛰는 것은 원천적으로 다르다. 심장이 뛰는 것이 과학적 현상의 설명이라면 가슴이 뛰는 것은 보다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워즈워드는 사람의 생애 전 과정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격과 찬탄의 연속이 되기를 염원하였다. 어렸을 적에도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었고, 성인된 지금도 그러하며 늙어진 다음까지도 그러하여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만일 아름다움 앞에서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생명이 멈춘 것이나 다름없으니, ‘차라리 죽어지고져’ 라고 가슴의 설렘과 생명의 비중을 동일하게 보았다.
정서적 충격이나 감동의 극치를 나타낼 때 가슴을 은유적 매체로 원용하는 건 동서양의 구별이 없나보다. 우리말에도 가슴이 대변하는 감정의 형용들이 많다.
오래 잊히지 않으면 가슴에 맺혔다 하고, 깊이 반성할 때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고 한다. 놀라면 가슴이 섬뜩하고, 초조할 때는 가슴이 탄다.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고, 만족스러울 때는 가슴이 뿌듯하다. 가책을 받으면 가슴이 찔리고, 후회로 고통을 받을 때는 가슴을 짓찧는다.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에 ‘터질 거예요 내 가슴은, 당신이 내 곁을 떠난다면’이란 구절이 있다. 가슴이 터진다함은 모든 생각의 종결, 정신의 죽음을 말함인가. 아니, 그보다 더한 생명의 끝을 말할 것이다.
가슴은 마치 희로애락의 바로메타, 흥분과 신명의 리트마스 시험지인 것 같다.
어렸을 적에는 ‘가슴’이 아픈 적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슴에 손수건을 차고 다녔고, 그 뒤로도 이름표는 으레 가슴에 달았으니까 가슴이 어디인지 알았을 테지만, 가슴보다는 배가 더 친근했었다. 걸핏하면 자주 배탈이 나곤 했었으니까.
가슴에는 피의 순환을 맡은 심장과 호흡을 관장하는 폐장이 있으며, 유방도 있다. 오장육부 중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 있으랴만, 그래도 생명을 직접 관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기들이 가슴에 있는 셈이다.
보통 ‘가슴이 아프다’고 할 때는 심장이나 폐장이나 유방이 아프다는 말이 아니다. ‘가슴’은 육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추상적인 어떤 관념, ‘가슴의 아픔’은 어디라고 지적할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이며 심정적인 것이다.
아무나 언제나 가슴이 아프거나 뛰지는 않는다. 절망이 무엇이며 희망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 비통이란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가, 상처란 어떤 것이며 희열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가슴의 아픔과 충만을 안다.
그러나 횡격막 하나를 격하여 있는 ‘배’는 가슴과 아주 다르다. 배 안에 담겨 있는 위장과 간과 소장과 대장과 신장 췌장 담낭 등. 이들이 분담한 역할이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배가 암시하는 의미들은 세속적 욕망과 인간적인 갈등에 맞물려 있다.
창자가 뒤틀리는 듯이 실제로 배가 아픈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은유적인 표현으로서의 배는 실존을 대변하는 전위적 대명사다.
가슴의 아픔이 형이상학적 아픔이라면 배의 아픔은 형이하학적 아픔이라고 해야 할까.
거만을 떠는 사람을 비꼬아 배가 남산만하다고 한다. 한번 부려보는 용기를 배짱을 내민다고 한다. 어렵게 살다가 살만하게 되면 배에 기름이 끼었다고 한다.
간덩이가 부었다느니 배가 밖으로 나왔다느니 밸이 꼬였다느니. 창자가 뒤틀렸다느니 배가 담고 있는 은유들은 탐욕과 불만, 심술과 질시 등 부정적인 것들이다.
남이 잘되거나 특히 가까운 사촌이 논을 샀다면 배가 아프며, 질투와 욕심으로 밸이 꼴린다. 남의 자식은 잘되는데 내 자식은 그만 못해서 속이 뒤집어 진다.
국어사전에는 ‘가슴’과 ‘배’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게 씌어 있다.
가슴-동물 특히 포유동물의 몸통의 앞쪽 상반부. 배와 목 사이에 있는 부분
배-척추동물의 흉강과 골반과의 사이 부분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횡격막 하나가 상하로 구분하는 두 세계의 차이, 그것이 주는 뉘앙스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나는 횡격막 사이의 어디쯤 있을까. 그러나 둘 중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지는 것 같다.
아침 식사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배도 출출하다. 이러다가 배가 나올까 걱정이다.
(이향아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