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영화를 봐야할지 어떻게 적어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과제를 보면서 막막했다.
어쨌든 차근 차근히 열가지의 작품중 그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그 영화에 대한 과제를 풀어야만했다. 열가지 작품중 모두가 작품성이 뛰어난 것 이기에 나로써는 어느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연기성이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하는 조재현이 나오는 영화를 집어 들었다. 알고 보니 나쁜남자 영화가 또한 베를린영화제 본선 경쟁작으로 선정돼 3년 연속 세계 3대 국제영화제 진출이란 대기록을 안겨준 영화였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순수하지만 그래도 무엇인가가 어색한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체적으로 한 여자가 한남자의 계획에 의에 계획적으로 비참해져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처음모습과는 달리 중반부를 거치면서 역시 그녀처럼 자신도 마찬가지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쁜남자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깡패 두목인 한기(조재현)은 어두운 세계의 사창가 두목이다. 한기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대생 선화(서원)을 선망의 시선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선화는 한기를 인간이 인간으로 볼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러자 한기는 홧김에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를한다. 선화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 한기는 계략을 꾸며 그녀를 창녀촌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계략에 말려들어 창녀가 된 선화의 방 거울은 밀실의 유리와 연결되어, 선화에게는 거울로 한기에게는 유리로 보여서 한기는 밀실을 통해서 매일 밤 차츰차츰 그의 계획처럼
창녀로 변해가는 선화를 지켜본다. 선화는 치욕과 공포에 찌들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면서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자괴감을 느낀다. 절망과 치욕에 길들여지는 그녀를 볼 때마다 한기 역시 지독한 괴로움에 빠져들지만 그둘은 점차적으로 사랑과 증오, 연민과 절망 속에서 둘은 기묘하게 하나가 되어간다.
한기의 부화중 선화를 좋아하는 명수라는 부하고 있다. 명수는 선화에게 한기의 계략에 대해 말해주게된다, 명수를 이용해서 창녀촌을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그러나 그녀는 집 앞에서 한기에게 잡혀 창녀촌으로 끌려온다.
어쩔수없이 하루하루 나날이 창녀촌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린 선화는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한기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한기는 적인 달수파의 공격을 받는다. 한기 부하인 정태는 이에 대한 복수로 달수를 죽이지만 한기가 정태를 대신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뜻밖에도 선화는 한기에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절규하고, 어느덧 선화는 그녀를 철저히 망가뜨린 한기를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를 망가뜨린 당사자가 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쨌든 이것을 본 정태가 자수를 하는 바람에 한기는 감옥에서 풀려난다.
나중엔 한기는 선화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보내지만 둘은 다시 바닷가에서 재회한다.
한기는 여전히 나쁜남자의 역을 충실히하며 트럭을 타고 다니며 자기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판다. 두 사람이 탄 빨간 트럭이 바닷가 마을을 벗어나 또 다른 운명의 공간을 찾는다.
한기와 선화의 모든내용들을 보면은 그들은 결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더욱더 그 현실속에서 생각할수 없는 일들을 저지른다.
사회의 그늘에서 그의 생존법칙은 야만성과폭력성이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매력적인 여대생 선화(서원)에게 모욕을 당한 한기는 복수심으로 그녀를 매춘부로 만든다. 그리고 한 면은 거울, 다른 한 면은 유리인 벽을 통해 그녀가 매일 밤 망가지는 것을 지켜본다.
처음에 반항하고 저항하지만 결국 사창가의 삶을 받아들이고 . 특히 사랑이 이루어진 뒤 한기를 위해 기꺼이 몸을 파는 마지막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한기의 파괴심리는 다분히 전복적이다. 그것은 여대생과 창녀라는 계급에 대한 전복이며,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전복이다. 그 전복을 통해 영화는 동질성을 찾고자 한다.
어찌보면 이것들이 가장 일상적이 될 수 있는 감정들이다. 이를테면 사랑, 진정한 소통 같은 것. 기존의 시각이나 가치관으로 보면 그것들은 끔찍한 이탈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존에 갖고있는 상식적인 도덕적 틀 속에서의 한 걸음만 나아가 그의 영화를 본다면 야만성과폭력성에서 자기연민을, 절대 고독한 자의 상처, 그의 생존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선화가 자신을 타락시킨 한기를 받아들이고는 매춘부로 몸을 팔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도 그들만의 생존 법칙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단기 그들이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고 그들의 자기사랑방식을 지켜가는 방법이 우리들과 달랐을뿐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처음에는 한기가 선화를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애초부터 그녀를 타락시키고 싶은 건지, 아닌지...한기는 선화를 사랑하고 또 타락시키려 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깡패라 해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그녀를 일부러 타락시키는 것은 함께 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 이 '나쁜 남자'는 그렇게 행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모순적 욕망이 이영화가 다른영화와의 보는관점에서 중요한 주제가 들어있는 것 같다. 한기는 이 투명한 거울 속에서 자신이 아닌 선화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그의 내면적 자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선화가 놓여 있는 것이다. 선화는 바로 한기의 또 다른 자아, 즉 내면적 자아다. 한기가 선화를 처음 본 순간 어떤 종류의 이성적 끌림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상 그녀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다놓은 후에는 그녀에게서 점점 자신의 잃어버린 내적 자아, 순진하고 고결한 자신의 상상적 자아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처녀를 잃는 것을 막아보려 하고, 또 그녀가 결국 처녀를 잃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기의 모순적인 행동을 해석한다면은 한기에게는 처녀성을 잃는 것이 곧 타락함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예 타락이라는 말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기는 자신의 내적 자아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것 또한 고통스러워하면서 왜 유리창 너머의 선화 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는지 어쩌면 그는 자신의 순수한 내적 자아가 삶의 바닥으로 내려오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아니, 기다리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내적 자아의 몸과 마음이 고통의 진흙으로 완전히 더럽혀지고 나서야 다시 세상에 돌려보낸다. 그는 이렇게 해서 고통의 완전한 체화를 시도하며, 마침내 자신의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 모두가 고통의 세례를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전인적 고통의 수용 의식이 끝나는 순간, 정체된 삶의 틀을 버리고 매 순간이 일탈이자 탈주인 유목민의 삶을 택해 길을 떠난다. 그러면서 밑바닥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겪어내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누구나 바르게 태어나 바르게 살다 바르게 죽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마치 복병처럼 나타난 타인에 의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만나게 되고 피할 수 없이 그런 삶에 길들여진다.총체적으로 나는 이영화를 보면서 느끼게되고 말할수 있는것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그것이 타인이봐서 나쁘던 좋던간에 모든게 자기만족이다. 우린 하나의 형식을 세우고 그 형식에서만 맴돌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와 다른방식의 사람들을 이해햐지 못한다. 나쁜남자 그를
나쁜남자라고 할수없다. 그도 그 나름대로의 진정한 그의 방식이었기에
그를 나쁜남자라고 볼수없고 나쁜남자라고 바라보는 이사회의 잣대를
꼭 이것으로 빗대어 말하는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형식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