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는 위대한 분이 등장하여 위기에 처한 나라들 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전쟁시 가장 위대한 전술은 싸우지않고 이기는 외교술이다. 고려시대 서희는 거란과의 전쟁을 외교술 담판만으로 승리하여 강동6주와 많은 실리를 쟁취하였고, 조선시대 세종때는 이예 외교의 전술가로 불리었고, 현대에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국제무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계시다.
우리한산이씨에도 위대한 위인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 한 위인이 바로 한산이씨 이만직이다. 저자도 이 분이 누구인지 고증을 하기 위해 한산이씨 족보 문서를 찾아서 살펴서, 10분 이내로 줄여보았지만 세부 위인까지 가기에는 시간과 노력에 더 필요할 것 같다. 부산화수회 족보를 일일이 대조하고, 확인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암행어사 이만직은 현재 목은의 후손이고, 한산이씨이며, 고종 7년(1870)에 공조참의(工曹參議), 그 이듬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 고종 12년(1875)에 영광군수, 고종 14년(1877)에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고종 15년(1878)에는 경상좌도 암행어사가 되어 조선의 유일한 해상관문인 동래부 일원을 비롯해 영남지역을 감찰하기 시작했다.
이만직 영세불망비(李萬稷永世不忘碑)는 1878년(고종 15) 암행어사 이만직이 소산역에 와서 민생 복지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베푼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소산역의 감관과 색리가 세웠다. 이만직은 부산포의 실상을 파악한 보고서[1878]에서 관세를 부과하는 해관 설치를 고종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던 통상 정보의 선구자는 확실하다.
이만직 영세불망비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동래 베네스트 골프 클럽 아래의 하정 마을 어귀에 있다. 본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 토기 산포지(土器散布地) 북서쪽 구릉 비탈에 쓰러져 있었는데, 부산대학교 박물관의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조사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 900-3번지이다.
송덕시는 다음과 같다.
“수의상국 이공 만직 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公萬稙永世不忘碑). 아폐주구(我弊疇捄) [우리의 폐단을 구할 이 누구인가!]
/ 파균학철(派均涸轍) [물줄기를 마른데서 고르게 대어 주었네]
/ 대시이혁(待時而革) [때에 맞게 개혁하여]
/ 숙진적맥(宿診的脈) [묵은 병을 진단하고 맥을 집는데 틀림없었네]
/ 유존구규(猶存久規) [오히려 오래갈 규범을 보존케 하여]
/ 명은체덕(銘恩體德) [그 은덕을 새기고 덕을 본받아야 하네]
/ 기유점소(期有漸甦) [백성이 점점 소생하길 기약함에 있어서]
/영시무투(永矢毋渝) [길이길이 변치 말기를 맹세하네]”
암행어사 이만직과 관련된 또 다른 비석이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향교 내에 세워져 있다. 이 두 비석을 통해 암행어사 이만식이 부산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활동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출처: 이만직 영세불망비 [李萬稷 永世不忘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문화 유적 분포 지도 - 부산광역시』(부산광역시·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6)
그러면 왜 우리는 지금껏 이분을 모르고 지냈을까? 사실 이 분이 알려지고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 이다.
바로 그 비석을 찾아 복구하신 최초의 분은 주영택(朱永擇) 원장이다. 약력을 간단소개하면,
1938년 부산 해운대 출생. 60년 부산대 사학과 졸업. 65년 울산 온양초등 첫 부임. 80년 감만중 근무, 부산 이사. 91년 경성대 교육대학원 석사. 2000년 2월 동백중 교장 퇴임,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97~2010년 부산시시사편찬위원. 89~2013년 부산교원연수원 정시강사.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86년 국무총리 표창. 2000년 녹조근정훈장. 2004년 해운대구민 애향대상
아래는 주 원장이 이야기하는 황산도와 관련한 이야기 일부이다.
조선시대 경부고속도로, 황산도를 찾다!
잊혀졌던 부산~밀양 옛길 각고 끝에 복원 마무리
조선시대 사람들은 동래부(부산)에서 한양(서울)으로 갈 때 어떤 길을 이용했을까? 지금이야 비행기로 1시간, KTX를 타도 3시간이면 충분하기에 굳이 걸어서 가겠다는 사람은 없을 터.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다녔던 길은 오랜 세월 묻히고 잊혀져 역사의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조선시대의 ‘경부고속도로’로 각광을 받았던 길 또한 쇠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나 개인이 그렇듯 길 역시 흥망성쇠의 흐름에서 비켜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산의 한 역사연구가가 그 길을 뒤덮은 잡초를 걷어내고 세월의 더깨를 털어내고 있다. 그 집념과 열정이 차라리 무서울 정도다. 그는 일차로 부산과 밀양을 잇던 옛 길을 최근 제대로 복원해 냈다. 바로 ‘황산도(黃山道)’다.
▶황산도는 영남대로와는 다른 길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아홉 개의 국도가 있었다. 이중에서 한양과 동래부를 잇는 도로가 1급 국도로 으뜸 역할을 담당했다. 통행량이 많고 일본과 최단 거리로 통하는 도로였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인 셈이다. 흔히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옛 도로를 ‘영남대로’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충주,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까지 뚫린 길의 명칭이다. 그리고 경남 밀양부터 국토의 최남단 동래부를 잇는 길은 영남대로가 아닌 황산도다. 이러한 이유로 황산도의 발견과 복원은 단순한 길 하나를 찾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를 던진다. 바로 잊혀진 역사를 찾은 것이다.
황산도에는 16개의 역이 구간마다 있었다. 종착역인 휴산(休山)역(현 부산동래경찰서 부근)에서 지경고개(부산 동래구와 경남 양산시 경계)에 이르는길은 현재의 경부고속도로와 거의 흡사할 정도로 나란히 뚫려 있다. 수백년 전 우리 선조들의 측량 토목 및 지리 과학 기술의 탁월함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대목이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황산도의 증거, 버려진 비석들
5년째 황산도 복원에 매달리고 있는 부산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70)원장의 조사 결과 황산도의 폭은 4~5m. 16개의 역을 속역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휴산역에서 20리(약 8km)떨어진 소산역(부산 금정구 하정마을)을 거쳐 지경고개를 지나면 황산역이 있다. 종 6품 찰방이 황산도의 본부 격인 이 곳 황산역에 근무했기에 이 길을 황산도라 이름붙였다.
주 원장은 먼저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소산역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역촌이라 불리는 하정마을 일대를 뒤지던 중 마침내 황산도의 실마리를 찾았다.
지난 2005년 수의상국이만직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萬稙永世不忘碑)와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를 발견한 것이다. 이 비석 2기를 탁본하고 해독한 끝에 소산역의 역사성과 현장성을 입증했다.
수의상국이만직영세불망비(1878년)는 암행어사 이만직의 민생복지를 위해 기금을 조성한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워졌다. 이만직은 부산포를 드나드는 외국선박으로부터 관세를 거둬들여야 한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을 설치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 비에서 500여m 떨어진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1697년)는 소산역에 근무했던 이방 최연수가 역졸을 아끼고 보살핀 인격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이다.
이 외에도 부산민영훈거사비(1838년), 김해김씨열녀비(1789년), 동래부사정이검선정불망비(1754년), 동래부사조재민선정불망비(1751년), 경주김씨 김준영신도비, 양유하이혜불망비(1735년) 도 찾았다. 잡초와 흙더미에 묻혀 잊혀졌던, 황산도 구비구비 얽힌 애환의 산 증인인 이들 비석 8기가 마침내 생명을 되찾은 것이다.
주 원장은 “역사를 알아야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며 “역사는 이야기다. 자기의 향토, 부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역사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 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 동안 많은 분들이 이곳을 지나갔지만, 사실 다시 비석을 세우고 연구를 하기는 쉽지않은 이야기이다. 통도사근처에도 이분의 이야기가 있고, 고종실록에도 행적이 나오지만 지문상 실지 않았다.
한산이씨 각 문중에서 시간을 내어 한번더 족보를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저자의 가계보에도 동명인이 있어 찾아보았지만 20~30세에 암행어사 및 행적과 연관이 없을 듯 보였다.
문양공중 단봉공파에도 있고, 인재공에도 있으며, 양경공에도 있다. 그 중 저자는 양경공 쪽에 무게를 두어 보았지만 차후 한번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고, 그당시 비슷한 시기에 관직을 지내셨던 분이 몇 분 더 있어 차후 시간을 내어 한번더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산공파 대은 이수영 후손 한산이씨 암행어사 휘 만직을 기리며, 삼가 글을 게시하다.
첨부> <2011년도 퇴계학부산연구원 시민문화강좌 10>
주 영 택 가마골 향토역사 연구원장의 이야기이다.
이만직.hwp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히 역사학자 이십니다.
대원씨의 노력에 감사 드립니다,,,,^^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연구도 못하고 급하게 옮겨 실었습니다 황산도 이야기길 이야기가 너무 좋은데요 소실적 이길로도 자주 다녔지요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곳 선동가까이 두구동 소류지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연꽃을 볼 수 있는 곳이며 물론 최근에는 절도 지어지고 두구동에서 월평가는 중간지점에 있는 법기수원지는 시민들에게 개방된지 몇년이 안됩니다 일본 국왕이 몇십년전 부산왔을때 추천 코스였다고 합니다 혹시 법기수원지 못가보셨다면 당일코스로 3~4시간 보낼 수 있는 짧은 휴식처입니다 어디외국에 있는 이국적 나무가 여름을 날려버립니다. 또한 기찰지나 황산도 말고 덕계로 가면 전두환대통령부부가 다녀간
절도 나옵니다 동굴속에 부처님이 계시지요 다음에 부산 화수회 사무실갈때 시간되면 족보에 연도 꼼꼼히 찾아서 한번더 연구해 보아야할 분 입니다 가마골연구소는 사직동에 있으며 퇴계부산연구소는 시민강좌도 한다고 하는데 강의는 한번도 못들어보았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꾸벅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암행어사 이야기 나오니 어릴적 박문수에 관련된 드라마 보던 기억이 나네요. "암행어사 출두요!!" 하며 외치고 혼비백산해 도망줄 치려던 탐관오리들을 통쾌하게 혼내주던 박문수가 그립습니다. 요즘에 국회에서 "암행어사 출두요!" 할순 없습니까?
저도 그런제도가 그립습니다 ㅎㅎ
사실 암행어사 박문수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 한산이문 인재공 광목공파 후손 휘 만직선조님입니다 칭송이 엄청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