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곶이
부모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사랑한 두 남녀가 만들어 놓은 수선화 천국! 공곶이~~~^&^
강명식과 지상악 부부의 꿈의 낙원 공곶이.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예구 마을에서 남쪽 능선을 넘어가면 내도 섬을 마주 보는 공곶이가 있다. 예구마을 해안에서 가파른 시멘트 포장 산길을 걸어 30분쯤의 걸어 오르면 언덕 위에 천주교인들의 무덤이 나오고 다시 그곳에서 산으로 오르다 우측으로 꺾어 나가다 수직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가면 강명식(83) 형제님과 지상악(79) 자매님 부부가 평생 동안 가꿔 온 수선화의 천국을 만날 수 있다. 산길을 돌다 보면 이 일대 경관이 정말 아름답다. 멀리 구조라와 내도 외도 섬을 비롯해 구조라 만과 멀리 보이는 거제 해금강의 경치와 맞물려 예구 포구와 와현해수욕장이 한 폭 그림으로 다가와 마음을 서정 속으로 끌어 앉게 만든다.
천주교 묘원이 있는 산등성에서 해안을 바라보면 거제도 천주교 전래의 산 역사가 바로 이 자락임을 알 것 같다. 마산교구에서는 이 산맥을 이어서 천주교 순례길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노란 수선화가 봄이면 장관을 이룬다. 형제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동백나무 터널을 따라 내려 가보면 막돌로 쌓은 333개 폭 1m쯤 되는 돌계단이 약 200m 정도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수목원의 중간에 있는 두 분의 계단형 꽃밭에서 일하는 두 분을 만날 수 있는데 만나면 창조적인 질서를 느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333계단의 특별한 종교적 의미와 하루 8시간 이상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실천하시는 두 분의 삶에서 자신이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곳이 바로 공곶이다. 특전 미사 때 뵙고 악수를 나누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바닥과 몸에서 수선화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공곶이 수목원 역사는 1957년 진주 청년이던 형제님과 23살 예구마을 처녀의 자매님 사이 결혼이 그 첫걸음이다. 당시만 해도 육지 총각이 섬으로 장가를 오면 마치 유배 온 느낌이 강한 시절이었지만 천주교 신앙심이 강했던 부모님이 맺어준 인연에 감사했단다. 결혼식을 마치고 산책차 나온 공곶이 산봉우리에서 때 묻지 않은 수평선과 아름다운 자연에 형제님은 내가 살아야 할 '이상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한 청년이 인근 서이말 등대에 숨어들었다가 처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의 사위가 되었고 그들이 떠난 뒤 이 토지를 구입했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 바로 공곶이다.
공곶이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샛노란 꽃잎이 달린 수선화다. 충분히 자신을 사랑할 만큼 아름다운 꽃이라고 자매님이 설명한다. 공곶이에는 종려나무( 종려나무 숲 영화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수선화, 조팝나무, 동백, 팔손이 등나무 등과 꽃만 해도 500여종 4만평이 넘는 천상의 수목원이다. 봄이 되면 이곳은 꽃의 바다가 된다. 수선화와 동백, 새하얀 조팝나무가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펼치고 설유화도 함께 몸매를 자랑한다. 오지였던 탓에 거제시민들 조차도 별로 발길이 잦지 않았으나 종려나무숲 영화와 수선화가 알려지면서 이곳은 거제도에서도 크게 알려지지않은 명소 중의 명소가 됐다
예구(曳龜) 마을은 고종 26년(1889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일본어 선인 예인선이 들어와 정박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이름은 왜구, 왜구 미, 왜 기미, 예금 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공곶이는 는 땅이 바다로 툭 튀어나온 곳을 곶(串)이라는데 공은 거룻배 공(鞏)을 써서 공곶이라 했다. 즉 지형이 궁둥이와 같이 뚝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공곶이는 1970년경 마제석검과 돌도끼가 발견되고 내도에서는 패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지형적 특성으로 물고기와 해조류가 많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탄압 때 피난한 천주교 관계자들이 숨어들어 살면서 이 지역 토착주민들과 혼인해 정착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